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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깨우라

LNCK 2023. 6. 11. 04:32

예수를 깨우라 [마가복음13] - YouTube

◈예수를 깨우라                     막4:35~41

인생을 항해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업에 위기를 맞기도 하고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뭐 그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멀쩡하던 허리가 안 펴지기도 하고 
또 분명히 괜찮다고 했는데 은행 대출이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어제까지 아무 일 없어보이던 아들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합니다. 

더 황당한 얘기 계속 해볼까요? 
아침에 출근했더니 내 책상이 없어져 있기도 하고.. 
이렇게 앞이 캄캄하고 숨이 탁 막히는... 

인생을 항해하다 보면, 이렇게 예기치 못한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중에, 큰 광풍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38절에 '죽게 되었다'고 말하는 거 보니까 
정말 심각한 광풍이었던 것 같습니다. 

웬만한 광풍에는 이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거기서 고기 잡고 배 타던 사람들이었는데요. 
아마 크고 무서운 광풍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구름 한 점이 나타났습니다. 
'저 정도쯤이야 뭐..' 그런데 빗방울로 바뀝니다. 

바다에서 빗방울은 이게 좋지 않은 싸인인데 
그래도 '뭐 괜찮을 거야, 이러다가 지나가겠지..' 

조금씩 바람이 거세지기는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이 여정은 누가 가자고 그러신 거예요? 
예수께서 가자고 그러신 거예요. 

예수께서 '배타고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러셨거든요. 
'예수께서 하신 건데 다 알아서 하시겠지, 이 정도 비야 조금 있다가 그치겠지' 
돛도 만져보고.. 배 안에 물이 들어오면 퍼내기도 하고.. 
노도 열심히 저어보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점점점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배에 물이 가득 차서, 배가 가라앉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이런 광풍을 맞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41절에서 마가는 갈릴리 호수를 의도적으로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게 크긴 하지만 바다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12 X 21 Km

반대쪽 땅도 다 보이고요. 호수인 게 명백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호수'라고 사용할 때도 있고 
어떨 땐 '바다'라고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표현인데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혼돈'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보통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혼돈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을 상징할 때 주로 '바다'란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마가가 본문에서, 이 갈릴리 호수를 
의도적으로 '바다'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상징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에 이런.. 컨트롤할 수 없는 커다란 광풍을 맞이할 때가 있다.. 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생에도 그렇죠. 저기서 작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위기감이 들긴 하겠지만 '아이 뭐 그러다 괜찮아지겠지' 

그런데 점점 그것이 빗방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집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 어' 하는 순간에, 어느 순간에 광풍으로 바뀌어 있어요. 
커다란 광풍으로 바뀌어서, 내 인생의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합니다. 
물이 가득 차서 곧 가라앉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인생이 항해하는 바다는 위험하고 날씨는 변덕스럽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항해는, 생각보다 잔인하고 위험합니다. 
언제 이런 광풍이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제자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바람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38~39절에 가보면, 아주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배를 움직일 수도, 컨트롤할 수도 
또 광풍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어 보입니다. 

이제 경험이고 뭐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38절에 보면 '우리가 죽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죽게 되었다' 라고 얘기하는 그때 
고개를 돌려보니까, 광풍이랑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배 한쪽 구석에 예수께서 계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 안에 누가 계세요? 예수께서 계신 거예요. 

광풍이랑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이 물 퍼내고, 돛 컨트롤하고, 노 젓고.. 
그러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한쪽을 딱 돌아보니까 거기에 누가 계세요? 예수께서 계신 거예요. 

그런데 배를 탈 때부터 쭉 같이 계셨어요. 
갑자기 들어오신 것도 아니고, 배를 탈 때부터 쭉 같이 계셨어요. 

자, 그런데 여기서 질문은, 
왜 제자들이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예수가 보이기 시작했을까요? 

그 전에 예수님을 깨우면 되잖아요. 
그 전에 예수님한테 '큰일 났습니다. 
저기 구름 오는 거 보니까 심상치 않습니다' 뭐 그러든지 

아니면 빗방울이 치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 큰일 났습니다. 빗방울이 치기 시작합니다' 하고 깨우면 됐을 텐데 
꼭 사람은 말이에요. 죽게 되어서야 그 다음에 예수님이 보여요. 

여기 여러분, 불변의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뭐냐면, 
사람은 죽을 만큼 궁지에 몰려야, 비로소 예수를 찾는다는 거예요.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죽을 만큼 몰려야..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분명히 처음부터 배 안에 계셨는데 
분명히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 가운데 쭉 계셨는데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아니, 보이더라도 깨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배 안에는 나 혼자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광풍은 꼭 내가 싸워서 이겨야 될 것 같아!' 그렇게 인식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웁니다. 싸우고 또 싸웁니다. 
독기를 가지고 싸웁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싸웁니다. 

그렇죠. 내가 어부인데 자존심이 있잖아요. 
내가 어부인데, 평생을 여기서 내가 그물질 하며 먹고 살았는데.. 
이렇게 자존심을 가지고 싸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독기가 있고 '내가 어부인데' 하는 자존심이 있을 때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분명히 예수가 거기 계시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이 광풍으로 인해서 다 죽게 됐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인간의 모든 시도가, 한계에 부딪혀 버렸어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봤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독기가 떨림으로 바뀌고, 자존심이 절박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포인트가 참 중요한 포인트에요. 
이 포인트가 여러분, 혼에서 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포인트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여러분 독기가 있고, 자존심이 있고.. 이건 뭐냐면 
내 혼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에요. 다 자아의 작용들이라는 거에요. 

자존심이라고 하는 게 대표적으로 자아 Ego 지요. 
이건 다 혼으로 움직이고 있는, 혼이 역사하고 있다고 하는.. 
그 혼이 주도하는 삶의 특징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노력과 자존심과 독기와 이 모든 것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와요. 

'어, 여기서 이제 더 이상 해볼 게 없는데? 
여기서 더 이상 뭘 한다고 해봐야, 도저히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데..' 
그때 비로소 뭐가 일어나냐면 
혼이 손을 들기 시작합니다. 혼이 항복하기 시작해요. 
(*혼 : 지 정 의로 구성된 자연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어 라고 하는 자신감이 무너지고 대신 절박함이 생겨요. 누구라도, 뭐라도 '나를 좀 도와줄 사람은 없나?' 

독기가 떨림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이쿠 이러다 죽겠구나' 
'어이쿠 이러다가 내 인생이 망하겠구나' 

눈에 보이는 모든 방법들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여러분,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세요. 영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안에, 내 영 깊은 곳에 처음부터 계셨던 분, 
처음부터 내 영 깊은 곳에 함께 하셨던 그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 이때가 되야 보이냐면, 혼이 손을 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도 보면 영, 혼, 육으로 나누기도 하고 
또는 인간을 육과 영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하여간 '보이는 세계에 속한 존재'를 얘기합니다. 

인간은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하도록 지음을 받았죠. 
보이는 이 세상 속에도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속에도 살아가도록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는 '영'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영은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세계를 감지할 수 있고 
또 영적인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또한 인간은, 자연 세계의 일부분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있고, 우리의 생각이 있죠. 
이 생각을  '혼'이라고 하는데, 지정의로 구성되어 있죠.
 
어쨌거나 다 육체의 한 부분이죠. 
그런데 하여간 그것을 혼 또는 육이라고 얘기합니다. 혼과 육. 

그래서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에 혼과 육이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혼과 육이 삶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사용하고, 
눈에 보이는 싸움을 싸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혼과 육이에요.  

여러분들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들이 뭔가 보세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선택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행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그러는 
사람은 없어요.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 하냐면 눈에 보이는 해결책이 있으면 
얼른 그 해결책을 먼저 씁니다. 이게 우리의 혼과 육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혼과 육의 특징은, 보이는 세계만을 인식하고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혼과 육은,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이 혼과 육이 우리 삶을 쭉 주도해 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영안 깊은 곳에 계신 그분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혼과 육의 기능만을 사용하고 
혼과 육의 기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광풍 앞에서, 혼과 육의 모든 노력이 무기력해지는 이 광풍을 만났을 때 
혼과 육이 비로소 삶의 주도권을 놓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부러 놓는 건 아니죠. 죽게 생겼으니까 놓기 시작합니다. 
혼과 육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뭐가 움직여요? 
우리 안에 영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심스럽고 천천히 영이 삶을 주도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혼과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 거예요. 

내 안 깊은 곳에서, 내가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나와 쭉 함께해 오셨던 분, 내 인생에 언제나 계셨던 분, 
그분이 비로소 내 인생 가운데 계시다고 하는 것이 보여지고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 내 영 깊은 곳에 계신 예수! 

맞아요, 여러분! 사람은 혼과 육의 모든 노력과 시도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우리 영의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광풍 속에서 모두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 치는 
이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대단한 분이시죠. 
이 당시 배가 타이타닉 호처럼 엄청나게 큰 배도 아니거든요. 
조그만 한 열댓 명 타는 배.. 이런 거 타고 다니는 건데 
아니 그 안에서 어떻게 주무실 수가 있으세요? 

죽게 됐으면 배가 거의 뒤집어질 정도가 된 건데.. 하여간 주무세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인생 속에 예수님도 혹시 주무시고 계시진 않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뭐냐 하면 "예수를 깨우라" 예요. 
혹시 여러분 인생 속에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요. 영접하는 순간 분명히 들어오셨어요. 
그런데 내 인생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아무리 큰 일이 생기고,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고 계속 주무시는 것 같아 보여요. 

배가 가라앉게 생겼어요.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절체절명의 광풍 속에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혹시 이런 예수님은 아니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예수를 깨우셔야 됩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내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내 안에 들어와 계셔'
라는 신학적 진리로 들어와 계신 분이 아니세요. 

우리 삶의 광풍 가운데 직접 명령하시고, 그 광풍을 잠재우시고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위기들을 싸워나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깨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지 

우리 인생 한구석에서, 계신지 안 계신지 인식되지도 않는.. 
이 광풍 가운데도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은, 그런 예수가 아니시라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의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신다면 
오늘 여러분이 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주무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워야 하는 거예요. 
그분이 깨어나셔서, 여러분 인생의 싸움을 싸워주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혼과 육의 싸움으로는, 이 세상의 광풍들을 다 헤치고 나갈 능력이 없어요. 
사람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에요.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시는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시고, 우리의 보호자이세요.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거예요. 
만약 여러분 안에, 분명히 내가 예수를 영접했는데 

분명히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신데 
여전히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이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것 같이 그렇게 느껴진다면.. 
오늘 여러분이 반드시 행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를 깨웁니까? 
25절 '그 제자들이 나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를 깨우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부르짖으라"는 거예요. 
부르짖어서 예수를 깨웠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부르짖어서 예수께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렇게 비로소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사람은 꼭 죽게 되어서야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인간입니다. 
왜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께 부르짖어서, 잠자는 예수를 깨우지 않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죄인이라서 그래요. 죄인의 정의가 뭐냐면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이 죄의 정의지요. 

선악과가 그거잖아요. 
하나님의 모든 다스리심과 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떠나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고 살아가겠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 

제자들이 왜 예수를 깨우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어부라는 자존심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내가 이 호수에서 일한 경력이 얼마인데... 
이 정도 광풍은 내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이 착각, 이 자아, 이 혼의 생각이, 계속 예수님을 주무시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사람은 이 자아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예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있잖아요. 
그럼 그거 먼저 붙잡지, 예수께 부르짖지 않아요. 예수님을 찾지 않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타락한 인간은 여러분 철저히 육적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에 먼저 의존하고, 보이는 것을 먼저 붙잡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이에요. 

▲그런데 이런 베테랑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로소 예수를 찾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왜요? 
이 어마무시한 광풍 앞에 '혼이 나간' 거예요. 

옛말에 '산에서 호랑이 만나면 혼이 나간다'는 말이 있죠.
지금 제자들이, 광풍 앞에서 '혼이 나간' 거예요. 

사람은 여러분,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닥뜨리고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사건을 맞닥뜨리면.. 혼이 나가요. 넋이 나가죠.

이 제자들이, 광풍이 들이닥쳐서 도저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됐어요. 
가라앉아서 죽게 생겼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된 거에요? 혼이 나간 거에요. 

혼이 나가니까, 혼이 완전히 손을 놔버린 거예요. 
자존심도 다 버리게 됐고, 
독기, 체면, 그딴 것도 다 버리게 되었어요.
손을 들었습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모든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뭐가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 안에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예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 내 안 깊은 곳에 처음부터 함께 하셨던 분이 계셨지? 
내 영 깊은 곳에 처음부터 함께 계셨던 예수가 계셨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빨리 항복하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여러분, 자존심 가지고, 독기 가지고 세상 파도와 싸우는 사람...

이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꼭 맞아 죽기 직전이 돼야 예수를 찾거든요. 

네, 그렇게 여러분은 미련한 사람 되지 마십시오.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세요. 

영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내 혼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내 육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아, 내 삶에는 예수께서 계셔야 돼, 내 삶에는 예수가 없으면 안 돼!' 
이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여러분 '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포텐셜(잠재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계속 자기 삶에, 스스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난 이렇게 살면 될 거야, 이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이죠. 

사람은, 계속 자기 혼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결국 배가 가라앉아서 죽고 말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영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혼과 육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걸 인식하는 사람이 하게 되는 첫 번째 반응이 뭐냐면 
'내 인생 항해에는 예수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광풍이 심해져서 배가 가라앉아서 죽게 됐을 때까지 
제자들이 뭐를 인식하지 못한 거예요? 

'자기들에게 예수가 필요하다'고 하는 걸, 인식하지 못한 거잖아요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그때까지 '내 인생에 예수가 필요해!' 이걸 인식하지 못한 거예요

이게 여러분,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십니까? 
예수가 필요하십니까? 절대적으로 예수가 필요하십니까? 
이게 여러분, 영으로 살아가는 포텐셜(잠재력)인 줄 믿습니다. 

맞아요., 우리 인생엔 예수가 없으면 안 돼요. 우리의 혼과 육은 한계가 있어요. 
우리 인생 항해에는 예수가 필요해요.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를 흔들어 깨우십시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그때부터 이미 여러분 안에 함께하시는 분,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또 여러분을 위해 싸우기를 기뻐하시는 그 (주무시는 것 같은) 예수를 흔들어 깨우세요! 

자,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예수께서 깨어나십니다. 
4:39절 '예수께서 깨어'

할렐루야! 우리가 부르짖을 때, 비로소 예수께서 깨어나신다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를 깨우냐고요? 부르짖어서 깨우는 겁니다.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나눴던 '예수가 필요하다'고 하는 고백이에요. 

우리 안에 '나는 정말 예수가 필요합니다. 내 인생에는 정말 예수가 있어야 됩니다' 
이 간절함, 거기서 나오는 부르짖음을.. 성경은 부르짖음이라고 해요. 
이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깨우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잠자시고 계신 예수가 있다면, 그 예수를 깨우십시오. 
부르짖어서 깨우십시오. 

(예수님이, 이신론처럼 지금 천국에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게 아니라,
주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지만, 
내 영혼이 졸고 있어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상황을 부르짖어 탈피하라는 뜻)

'주여, 나는 오늘 당신이 필요합니다. 
주여, 나는 오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구원하여 주소서, 주여! 이 인생의 광풍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가 한계에 부딪혔나이다. 내 힘으로는 이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여 일어나서 나를 도우십시오!' 이렇게 부르짖으세요. 

광풍을 만나셨습니까? 부르짖으세요. 
위기를 만나셨습니까? 부르짖으세요. 

우리가 부르짖으면.. 성경에 약속이 있습니다. 
부르짖으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돌보시겠다고 하는.. 성경에 약속이 있어요. 

이 부르짖음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는 약속이 있습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시5:1~3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40: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제 예수께서 깨어나십니다. 
깨어나셔서는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께서 깨어나시면, 이제 바람과 바다는 나의 싸움이 아니에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싸우세요. 

이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시면요. 바람과 바다는 나의 싸움이 아니에요. 
예수께서 싸우세요. 나를 대신해서 싸우세요. 할렐루야! 

▲자,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꾸짖으시자 
놀랍게도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혹시 요즘 풍랑 이는 바다 한가운데 계신 분 계십니까? 
인생의 광풍을 만나신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믿으십시오. 믿으셔야 됩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실 때, 그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가 깨어나실 때 
여러분 인생의 풍랑이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광풍? 멈출 수 있다는 거예요. 
폭풍? 잠잠해 질 수 있다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거예요. 

우리가 여러분 예수를 깨우지 않는 이유는 
사실 이 믿음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잠잠하게 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폭풍이 일자마자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겠어요? 

제자들한테는 뭐가 있었어요? 
'아휴, 저분은 목수신데.. 아니 목수가 무슨 바다에서 배 모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배 다루는 거야 우리가 해야 될 일이지...' 

예수께 대한 믿음이 없었어요. 이 믿음이 없었을 때 
예수가 그들과 처음부터 쭉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계속 주무시도록 내버려 뒀다는 거예요. 

믿음이 있어야 돼요. 예수께서는 우리 풍랑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풍랑을 만나면, 우리 생각에는
차라리 은행 통장이 낫고, 
차라리 내 경험이 낫고, 
차라리 눈에 보이는 지푸라기가 낫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는,
'종교의 기능인 마음의 평안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 실제적인 재정의 위기 앞에서 무슨 능력이 있을까?' 

'이 실제적인 질병의 위기 앞에서, 예수는 무슨 능력이 있을까?' 
혹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도, 이런 예수는 아니십니까? 

참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를 믿고 있어요. 
'아, 예수는 그냥 종교의 대상이야.. 
예수는 그냥 종교란에다 쓸 때 기독교 란에 사인하는 정도,

또 우리가 힘들 때 마음에 위로를 주고 
마음이 좀 불안할 때 평안을 주고... 이게 종교의 기능이잖아. 
이 종교의 기능을 행하시는 분이시지 
예수가 실제적인 뭐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기대가 별로 없어.. 
실질적인 뭔가를 일으키실 거라고 하는 기대가 없어..' 

그냥 단순히 종교의 기능만을 감당하는 예수!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가 그 예수라면 
여러분은 예수를 그냥 잠자도록 내버려둔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제자들에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 좋은 분이지.. 
예수,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시지.. 
예수, 우리의 불안함을 달래주실 메시아시지.. 

그렇지만 배를 타고 가는 이 상황에서 예수가 무슨 필요? 
아니, 저 사람은 그냥 선생이고 랍비인데, 
선생과 랍비가, 배를 타고 가다가 우리가 광풍을 만났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이 생각 때문에 예수가 주무시도록 그냥 버려뒀던 거잖아요. 
우리도 여러분 동일하지 않습니까? 

'예수'라는 분의 역할을 딱 한정시켜 놔요. 
'예수는 요런 조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이야' 
'예수는 종교의 대상이고,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고, 
불안할 때 위로를 주고, 격려해 주는 분이야' 예수의 역할을 딱 제한시켜놔요. 

광풍을 맞았을 때.. '이거하고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어?' 
'바다에서 배를 몰고 가는데, 이거랑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지금 세상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이것과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병원에서 질병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이거랑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어?'

실제로 삶에서 만나는 모든 광풍들과, 삶에서 만나는 모든 폭풍에 대해서는 
예수가 무슨 일을 하실 거라고 하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에 있어서는, 내가 내 힘으로(혼으로) 열심히 싸웁니다. 
열심히 노를 젓고, 열심히 돛을 만지고, 열심히 물을 퍼내고 합니다. 
왜요? 내가 전문가니까, 내가 어부니까! 

아니요. 여러분 믿으셔야 돼요. 믿으셔야 돼요. 
예수께서는 만물의 주관자세요. 
예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부분을 통치하시는 분이세요. 

예수께서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바람을 꾸짖으시는 분이세요. 
이 믿음! 
내가 최선을 다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이 바다의 광풍조차도 예수께서는 꾸짖으셔서 잠잠케 하시는 분이세요. 

예수가 누구십니까? 여러분 인생에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 믿음!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깨우는 참된 힘인 줄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 아직도 예수가 잠자시고 계시다면, 그분을 오늘 깨우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으세요. 
'예수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여, 나의 부르짐을 들으소서, 
예수여, 이 광풍 가운데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으세요. 
그럴 때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여러분 인생의 바다를 꾸짖으셔서 잠잠케 하시고, 바람을 잠재우실 줄 믿습니다. 
그 예수가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이세요. 아멘! 

▲이 경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41절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지?' 
'지금까지 알았던 예수가 아닌데?' 

그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좋은 선생님, 랍비,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분, 
어쩌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는 분, 정도로 생각했죠.

설마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이렇게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그런데 이 사건 앞에서, 새롭게 예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분은 도대체 누구시지?' 
'누구시기에 바다와 바람도 잠잠하게 하시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고 
훨씬 더 능력 있으신 분이세요. 
여러분 인생에 어떠한 광풍도, 여러분 인생에 어떠한 폭풍도 
꾸짖으셔서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이 예수를 깨우십시오! 2020년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부르짖어 예수를 깨우시는 한 해가 되도록 하세요. 
그래서 여러분 안에 진짜 예수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