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도를 매우 적게 하고서도,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했는데 굉장한 능력으로 말씀을 전할 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제가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날은, 제가 마치 베이비처럼 설교하는 것입니다. 제 입에서는 돌덩이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전혀 능력이 없는 말씀을 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강단을 내려오면서, 제 스스로 면목이 없어지고 부끄러워지죠.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저는 주님을 송축, 찬양합니다. 제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로 인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형편 없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제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그분의 은혜없이는, 그분의 자비 없이는 저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요.
제 약함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셔서, 저는 설교를 망치고도, 여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왜 TV 를 안 보는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 보다 더 영적이어서, 믿음이 좋아서 TV를 안 보는 게 아닙니다. 제가 더 두려워해서 입니다.
저는 TV가 저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를 사로잡아 버릴 것입니다.
저는, TV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처럼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TV를 안 보는 것입니다.
저는 TV를 조금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본다면, TV가 저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릴 것입니다. 저를 완전히 빨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야외활동을 매우 좋아 합니다. 제 아들도, 저처럼 야외활동을 너무 좋아합니다.
아들은, 저와 함께 뒷산 숲속을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럴 때면 아들은, 혼자서 자꾸 멀리 가려고 합니다.
(미국의 숲속은 인적이 드물고, 길이 없는 곳이 많아서, 길을 잃기 매우 쉽죠. 그래서 아이들 혼자서 절대 숲속에 못 들어가게 합니다.)
저는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점점 더 멀리 갑니다. 그러면 어떤 날은, 아이를 그냥 가게 놔두고, 저는 나무 뒤에 숨어버립니다. 숨어서 아이를 계속 지켜봅니다. 코요테가 와서 물지 않도록 계속 확인합니다.
오래지 않아서 아들은, 아빠가 없고 자기 혼자 숲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워서 '아빠, 아빠!'를 소리쳐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쉽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자기 혼자인 상황을 매우 매우 두려워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아빠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선한 아버지입니다. 저는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게 '침묵의 밤 nights of silence'을 통해 가르치셨던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담대해져서, 아버지에게서 조금 더 멀어지려 합니다. 좀 더 나가버립니다. 조금 더 멀어져 혼자 가 보려고 합니다. 숲속의 우리 아들처럼요.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벧전5:8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사자는, 양을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목자 Jesus 를 무서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한참 '아빠!'를 불렀을 때, 제가 마침내 숨었던 나무 뒤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아들은 달려와서 제 바지를 꽉 붙잡습니다. 얼마나 꽉 붙잡는지, 여러분이 아이를 쇠지렛대로 떼내어 들어올리려 해도, 아들은 제 바지춤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싶은 방법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입니다.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떠나서, 제 혼자 멀리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처럼 '좀 더 멀리'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혼줄 나게 됩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할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갑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어!' 할 때마다 내가 높아집니다. 자만해집니다. 아버지를 떠나 독립적이 됩니다. 그래서 위험한 장소를 홀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시나요? 더 중요하게,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되는데, 그보다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세미나에 가면, 이런 원칙들을 곧 잘 얘기하죠. -무엇을 보면 안 되는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 가야 하는지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즐겁기까지 합니다. 흥미롭습니다. (세미나에 가면, 소그룹 토론 시간도 있잖아요. 거기서 사람들은 즐겁게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나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법칙들, 원칙, 지혜는 law, principles, widsom 우리를 율법주의 로 이끌고, legalism 율법주의는 항상 '부도덕 이나 호색' 으로 결론 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폐기처분 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법, 원칙, 지혜를 사용하라는 거죠)
왜냐하면 은혜의 역사 없이 율법을 가르친다면 죄를 짓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니까요)
모든 율법적 원칙과 이론들을 갖고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한 이해는 확실하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냥 자기 힘으로, 스스로 원칙과 법을 지키려 하죠.
(그게 먹히지 않죠)
우리는 율법과 아울러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계명과 아울어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거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도록 창조되었고, 또한 그렇게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도록 그분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도록 그분의 무한한 경이로움을 찾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은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스스로 율법 준수의) 기쁨만 추구하면, 우리는 곧 망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테서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외식적으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저는 하루에 몇 시간씩 성경 교리를 공부합니다. doctrine 저는 성경 교리를 설교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적 교리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교리를 공부하는 것, 아는 것..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도구입니다.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친밀하게, 깊이 알지 못한다면.. 교리 공부는 자체로는 아무 소용없죠.
▲제가 컨퍼런스에서 나누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간증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저에 대해 실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젊은 목사 였을 때, 많은 곳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연세가 있으신 경건한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은, 어디선가 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남의 얘기를) 인용하지 않으셨죠. 그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겪었던 하나님의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텍사스 오스틴 에서 거리로 나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거리에서 설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담대하지도 못했습니다. 능력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분들의 말씀을 항상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결정했습니다.
'지금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만! 내가 죽기까지 하나님을 찾겠다. 벽장으로 가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이 벽장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15분 후에 벽장속에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제 룸메이트가 집에 와서 벽장에서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람시계를 갖고 벽장 속으로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알람시계가 매 15분 마다 올리게 했습니다.
5분이나 10분 정도 기도하다가 나는 또 잠이 들었고 알람소리에 깨면, 또 다시 알람을 맞췄습니다.
그때 제가 무엇을 위해 기도했었나요? 그때 저는 중국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제 사역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딱 한 가지만 구했습니다.
렘29:13절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주님, 당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으면 찾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마7:7
그렇게 매일 밤마다, 4개월 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씩 주님을 찾았습니다.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4개월 5일이 지났습니다. 아직 주님은 제게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여기서 3시간 있었는데, 제게 찾아오지 않으셨네요' 매일 낮, 매일 밤마다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대학생들이 봄방학 때 성경공부 및 스키캠프로 콜로라도로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텍사스 서부의 황무지 산간지방 으로 제가 가기를 원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3일 동안, 저는 야인처럼 언덕 꼭대기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만약 저를 봤다면, 아마도 정신병원에 저를 가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덕 꼭대기에서, 저는 돌을 집어서, 하늘을 향해 던졌습니다. 악을 썼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알아야만 합니다. 저한테 와 주셔야 합니다.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냥 성경을 책처럼 읽으면서, 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만 하면서, 당신을 아는 누군가의,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또 몇 주가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저를 마침내 찾아오셨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닥에 쓰러져서 제 머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에, 처음에는 이런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임하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내 죄보다 훨씬 크신, 내 필요보다 훨씬 중요한, 그 분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처음 느꼈던 죽을 것같은 두려움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제 입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성경 구절들이 계속해서 시편 부터 제가 읽었던 구절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씀들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저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보다 더 현실적입니다. (리얼합니다)
오늘 정말 안타까운 것은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는 알고 있지만 기도 생활은, 그저 잠깐 기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잠시만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기도하다 일어나서 나가버립니다. 하나님의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건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일 뿐인 기도인 거죠. 여러분의 삶에 거룩을 원하시면, 그분께로 뛰어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임재 속에) 머무십시오.
제 아이는 제가 가방을 싸서 들고 신발을 신을 때면, 제게 와서 말합니다. '아빠, 저와 함께 있어요. 저와 함께 지내요. 아니면 제가 아빠랑 같이 갈래요'
저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는 아빠에게 기도합니다. '아빠,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풀 워셔와 함께 있어 주세요. 혹은 저는 아빠와 같이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