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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행하신 일 2

LNCK 2023. 6. 13. 21:12

고향에서 행하신 일 2 [마가복음17] - - YouTube

◈고향에서 행하신 일 2           막6:32~56           마가1~10장설교모음

◑도입

막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로 따르니라' 

막6장은, 예수께서 주로 고향에서 하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6장 기록의 전체는 아닌데, 대부분은 고향에서 행하셨던 일이고 
아니면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셨던 그런 일들입니다. 

'고향'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는 
'가장 소중하고 애정이 많이 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막6장에서 '고향에서 행하셨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꼭 하시고 싶었던 일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죠.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과연 어떤 일을 하시고 싶었고, 
과연 어떤 일을 행하셨나? 예수님의 그 애정어린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이 6장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은 
'오늘 예수께서 우리 인생에 오신다면 
과연 무슨 일을 행하실까?' 그 일하고도 같은 일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찾아 오신다면 
아마 분명히 이런 일들을 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하여튼 막6장을 통해서, 예수께서 고향에서 행하신 일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우리 인생에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것들을 돌아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지난주 막16강에서, 그 중에 두 가지를 살펴봤죠. 

1) 예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은 '가르치시는' 것이었어요.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이십니다. 
창조주께서 이 땅을 어떤 질서로 만드셨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또 어떻게 죄 가운데 있는지... 

또 이 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되는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되는 구원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거예요. 

2) 두 번째는, 단순히 가르쳐 주시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송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그런 존재로 부르셨어요. 

(파송 받아가서) 축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파송하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위 두 가지 16강에서 살펴봤고요. 
오늘 17강에서는, 이어서 세 가지를 더 살펴보면서 
고향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세 가지는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고치신 거예요. 

막6장 말씀을 쭉 읽어보시면,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치유하셨어요.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자, 하나씩 살펴봅시다. 

◑3. 세 번째 하신 일은 먹이시고 공급하신 일이었습니다. 6:32~44절
이 내용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고향에서 행하신 세 번째 일은
'먹이시고 공급하신' 일이었어요. 

우리의 필요들이 있는데, 그 필요를 공급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맞아요. 예수님은 공급자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기를 원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5절에 보면 이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또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빈들에서 날이 저물어갈 때가 있습니다. 

'빈들'이라는 단어와 '날이 저물어간다'고 하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가 있죠. 

'빈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이 '빈들'이라고 불리는 광야에 가보면.. 정말 빈들입니다. 
뭐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높아서, 텅 빈 땅이라는 걸 찾기가 어렵죠. 
어디 가도 뭔가는 있어요. 어디 가도 하다 못해 전봇대라도 하나 서 있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그 '빈들, 광야'에 가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고요. 
나무도 한 그루 없고, 살아있는 짐승도 하나 안 보이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 빈들, 광야입니다. 

그래서 빈들이 상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때... 인생을 살다 보면, '빈들'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날이 저물어간다'고 얘기하는데 
이 말은 '기회가 점점 없어져간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든지 해결하고 뚫고 나가야 되는데 
그 기회도 서서히 없어져갑니다. 

뭘 하려면 조금 더 일찍 했어야 되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친  것입니다. 날이 서서히 저물어갑니다. 
아쉽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하고, 후회도 되고 그렇습니다. 
'아, 그때 할 걸!' 
기회도 없고 소망도 점점 없어 보입니다. 

일의 타이밍을 놓쳤을 때일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이런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아이고 이제는 못하겠구나, 아이고 이제는 늦었구나' 
이런 생각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들기도 합니다. 

이게 예수를 따랐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맞이했던 상황에 대해서 묘사하는 기록이에요. 
'빈들에서 날이 저물어간다'는 거예요. :35 

▲우리 인생에도 이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빈들에서 날이 저물어가는 데,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구하러 가기에는 날이 저물어가요. 
당장 필요는 있는데, 채워질 방법은 못 찾는 거죠. 

이때 제자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36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주위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빨리 빨리.. 그럼 은행에라도 좀 가봐!' 
'아니면 아는 사람한테 도움이라도 구해봐!' 

'이거 해봐, 저거 해봐!' 
내 주변 사람들도, 빈들에서 날이 저물어가자 
나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조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더 급해져요. 
마음은 더 두려워지고,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얘기가 그랬어요. 

지금 먹을 게 없는데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소서'
아니, 날이 저물어 가는데 인근 촌에 가서 무엇을 사 먹겠어요?
오늘날처럼 무슨 편의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였다고 기록돼 있죠? 
남자만 5천 명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여자들도 왔을 것이고, 또 애들도 데려왔을 것이고 
적어도 만명이 넘어가는 수만 명인데 
3만 명의 사람이 갑자기 어느 마을에 가서 밥을 사먹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빈들에, 날이 저물어갈 때' 보면 
항상 이런 얘기만 들려요.
'이거 해봐, 저거 해봐' .. 그런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얘기들입니다.
듣고 있으면 답답해지고, 어떨 땐 분노도 올라옵니다. 

'5천 명이 지금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데, 어디 가서 밥을 사 먹냐?'
그리고 그 당시 서민들은 절대 빈곤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뭘 사 먹을만한 돈도 한 푼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따르던 자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거예요. 
무려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께서 고향에서 행하셨던 세 번째 일은 '배불리 먹이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나를 찾아오시면, 무엇을 하실까요? 
이 일을 저는 하신다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배고픔을 향해서, 예수께서 배불리 먹이신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의 모든 필요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공급하시고 채우신다는 거예요. 
맞아요,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좋으신 공급자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항상 언제나 배불리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33절에,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던 그 빈들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봤던 
'내가 알아, 내가 저 사람 예수를 내가 아는데 
요셉의 아들 목수잖아, 내가 알아!' 이러면서 예수님을 무시했죠.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께 달려나왔던 사람들은요. 

자기 모든 배고픔과, 모든 필요들이 배부르도록, 
먹고 남도록 채워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데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무런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랬어요. :5
여러분은 어느 쪽 사람입니까? 

예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와오는 자들은 항상 그 필요를 채움받는 
은혜와 특권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도 지난 35년 동안  '주의 채우시는 은혜' 안에 살면서 
이 고백을 정말 수도 없이 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본문 오병이어 사건을 읽어보면, 참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재미있는 게 뭐냐면 
예수께서 이 사람들을 '푸른 풀밭 위에 앉히셨다'고 나와요.  :39

39절의 '푸른 풀밭 위에 앉히셨다'는 시23편이 연상되는 장면 아닙니까!  
배고픈 사람들을 푸른 풀밭 위에 앉히시고, 배불리 먹이셨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우리 하나님께서 배불리 채우셔서 
부족함이 없는 인생들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언제? 예수 앞에 나올 때! 
예수 앞에 나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2절에 보면 '이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하는데 
무려 남자만 5천 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수만 명이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 중에 하나는 뭐냐면 '인색하지 않으시다'는 거예요. 
부족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넉넉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다 배불리 먹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들어갔을 때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거나, 경쟁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어요. 
넉넉하게 주신다니까요.
넉넉하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는 거예요. 

다 배불리 먹게 했다는 거예요. 
하늘의 역사는 이런 것입니다. 

남자만 5천 명, 다 합치면 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도 부족함이 없이 다 배불리 먹었다는 거예요. 

하늘의 역사는, 숫자라고 하는 것은 그냥 숫자일 뿐이에요.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수만 명 되는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채워지기 시작하는데 
다 배불리 먹고요, 오히려 12바구니가 남았다는 거예요. 

'혹시 더 먹고 싶으면 더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들에겐, 그래서 이 믿음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인색하지 말아야 돼요. 

아니 인색하지 말아야 되는 게 아니라, 인색할 필요가 없어요. 
하늘의 것에 있어서는,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숫자는 뭐냐면 '열두 바구니 남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숫자'예요. 

사람이 몇 명이 모이든, 5천 명이 모이든, 5만 명이 모이든, 50만 명이 모이든,
항상 하나님의 숫자는 뭐냐면 '12바구니가 남는' 것입니다.

사람의 숫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사람의 숫자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숫자는 전혀 달라요.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떡 다섯 개인지 아무 상관없어요. 
몇 명이 모였는지, 그 숫자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하늘의 일이 행해질 때 보면, 항상 숫자는 뭐냐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는' 이게 하나님의 숫자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땐 이 믿음이 있어야 돼요. 
주의 일을 경험할 때는, 이 믿음이 있어야 돼요. 

제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면서  *2020년 설교
경제적으로 우리도 어렵고 또 힘들고, 그런 위기 가운데 있지만 
'손을 움켜쥐지 말자,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펴서 흘려보내자' 
그랬어요.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행되면서, 성도들도 다 어려워졌어요.
특히 자영업자들은 경제적으로 다들 어려워지고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마음에 사로잡히면 안 돼요. 

그 마음에 사로잡혀 버리게 되면, 하늘의 일을 경험하지 못해요. 
계속 매이게 돼요. 땅의 숫자에 매여버리게 돼요. 

여러분, 땅의 숫자들에 매이지 않는 훈련들을 하셔야 돼요. 
땅의 숫자들에 매이지 않는 훈련들을 하셔야 돼요. 

'내 손에 보니까 물고기 두 마리 있고, 떡 다섯 개가 있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오천 명이야 어떡하지?' 
이거에 매이면 안 돼요. 이거에 매이기 시작하면 
하늘의 것들을 경험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오병이어가 어떻게 경험됐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작은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오병이어를 드린 거예요. 

근데 언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나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숫자에 매이지 않았을 때, 경험한 거잖아요. 

산술적 (이성적) 숫자에 매이지 않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산술적 숫자에 매여버리면, 하늘의 숫자를 경험할 수 없어요. 

그래서 비록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사람의(이성적, 산술적) 숫자에 매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계산 방식
대신에 '하늘의 숫자'를 믿음으로 취하셔야 돼요. *하늘의 계산 방식

하늘의 숫자는, 모인 사람이 몇 명인지 그건 다 무의미하고 
하늘의 숫자는, 항상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 남게 거두는 게, 하늘의 숫자예요. 

이 일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행하실 거예요. 
언제? 사람의 숫자를 초월해서, 우리 손에 있는 오병이어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여러분, 이런 마음과 이 태도가 있을 때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늘의 숫자들이 계속 풀어지기 시작할 줄 믿습니다.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 남게 거두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거고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넉넉하게 일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4. 고향에서 네 번째로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보호하신" 것이었습니다. 

6:47~52절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이제 바다를 건너서 건너편으로 가시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여기서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센 바람이 풍랑이 불기 시작한 거예요. 
힘겹게 노를 젓지만 쉽지 않습니다. 

근데 이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탄 배에 올라타십니다. 
그러자 곧 바람이 그칩니다. 

예수께서 "고향에서 네 번째로 행하셨던 일"은 
위기에 처한 사람, 폭풍 가운데 처한 사람들을 보호하신 일이었어요.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일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를 받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산성이시고, 방패이십니다. 할렐루야! 
시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렐루야!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 이분이 여호와 이신 줄 믿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배고픔, 그 필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도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이 풍랑을 만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제자들이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니까요,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열심히 노를 젖게 됩니다. 
왜요? 빠져나가야 되니까 열심히 노를 젓게 됩니다. 살아야 되니까요. 

근데 열심히 노를 져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참 감사하고 다행이겠지만 
그런 폭풍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인생에서 만나는 폭풍은,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소용없는 폭풍들도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폭풍들이 있다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폭풍 가운데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열심히 노를 젓고 있진 않습니까? 
열심히 노를 저으셔서 폭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참 감사하겠죠. 

근데 혹시 제자들처럼, 열심히 노를 젓고 있지만 
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벗어날 수 없는 폭풍 속에서, 더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실 수 있어요.                                              

벗어날 수 없는 폭풍 가운데서, 
그걸 벗어나고 싶어서 더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한 것일 수 있어요. 

이 제자들의 폭풍이, 위기가 언제 끝납니까? 
예수께서 바다를 밟고 오셔서, 그 배에 올라오셨을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맞고 있는 폭풍이 언제 끝날 것 같습니까? 
예수께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 인생에 올라오실 때 
그때 끝나는 줄로 믿습니다. 

▲6:51절에서 그 얘기를 합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폭풍 속에 있는 우리 인생의 배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젓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바다를 맞서서 열심히 노를 졌지만 
예수님은 바다를 밟고 오시는 분이세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거에요. 

여러분, 사람은 폭풍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뭐냐면, 거기서 도망가고 벗어나는 거예요. 
왜요? 폭풍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분이세요.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폭풍을 피해 도망가거나 하실 필요가 없어요. 
열심히 노를 저을 필요가 없어요. 폭풍을 밟고 오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 피할 수 없는 폭풍을 만났다면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분이 필요해요. 

예수 그리스도, 바다를 밟고 오시는 분!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분,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을, 말씀으로 다 잠잠케 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이세요. 

혹시라도 여러분 인생 가운데,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폭풍 가운데 있다면 
더 열심히 노 젓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여러분 인생 가운데 누가 문을 두드리시는지를 한번 둘러보지 않으시겠어요? 

예수께서 오늘 그 바다를 밟고, 여러분의 배로 오고 계세요. 
그 예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오실 때 
예수께서 여러분 인생에 승선하실 때 
그때 비로소 폭풍이 잠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심에 있어서 실패가 없으신 분이세요. 할렐루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 바다를 밟고 오시는 분,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배에 올라오실 때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호하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데 
있어서 실패하신 적이 있으세요? 없어요. 한 번도 없어요. 

-적들이 둘러싼 한가운데서도,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 있을 때도 
-사울이 추격대를 보내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도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도 
-압살롬의 배신 속에서도 

-폭풍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물을 뽐어내는 대홍수 속에서도 
-또 하나님의 백성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의 계획 속에서도 
-굶주린 사자들이 득실대는 사자굴에서도 
-강한 쇠조차 다 녹여버리는 풀무불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심에 있어서 
한 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으세요.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신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신다는 거예요. 

어떤 폭풍 가운데 계십니까? 여러 가지 폭풍 가운데 있을 겁니다. 
정말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분도 있으시고 
정말 풀무불 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하만의 악한 계획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다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수많은 위기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데 있어서 
한 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으신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시23: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할렐루야! 

이게 우리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본문 마가복음 6장은
시편 23편을, 쭈욱 실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시23편의 하나님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이고 능력있게 임하신다는 거예요. 
경험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제자들이 탄 배에 예수께서 오셨어요. 
그러자 51절에, 폭풍이 바로 멈췄습니다. 

여러분, 이게 예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예수께서 일하시는 방식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건 뭐냐면 
순식간에 반전을 일으키신다는 거예요.                     

뭐 그렇지 않을 때도 간혹 있기는 해요.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일하실 때가 아주 없다는 건 아닌데 
그것보다.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순식간에 일하시더라고요. 

한 번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시면, 홀연히 반전이 일어납니다.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도 홀연히 반전이 일어났어요.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도, 홀연히 반전이 일어났고 
하만의 위협 속에서도, 바로 직전까지도 하만은 자기가 이긴 줄 알았어요. 
자기가 이긴 줄 알고 왕 앞에 들어갔다가, 자기가 세운 나무에 달렸잖아요. 

정말 순식간에, 홀연히 반전이 일어나요. 
절망적으로 보였고, 소망도 없는, 징조도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반전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우리 삶 가운데 보면, 많은 위기들이 있고, 불안함, 두려움, 걱정들이 있습니다. 

뭐 나라를 위해서 걱정하기도 하고, 교회를 위해서 걱정하기도 하고, 
또 현재 코로나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그런데 여러분 믿읍시다. 믿으셔야 돼요. 
홀연히 반전이 있을 거라는 거에요. 반전의 하나님, 할렐루야! 

51~52절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보게 되는데 
이게 처음 읽는 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앞서 살펴봤지만 4장에 보면 똑같은 일이 있었어요. 
4장에서도 폭풍 가운데 있었는데 
그땐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아예 처음부터 함께 계셨지요.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자 
바로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어요. 처음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또 바로 직전에 뭐가 있었어요? 
'오히려 떡 떼던 일을 잊어버렸다'고 그러잖아요. :52
'마음이 둔해졌다'는 거예요.  :52

여러분,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지나온 길들을 쭉 한번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고 구원하셨습니까?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시고 구원하셨어요? 

우리를 보호하심에 있어서 실패하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항상 배불리 먹이셨고, 항상 필요한 것을 주셨고, 
항상 안전하게 보호하셨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요, 너무 쉽게 잊어버려요. 
너무 쉽게 둔감해져 버려요. 그게 여러분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다음에 폭풍이 오면, 또 두려워서 호들갑 떨지도 몰라요. 
다음에 폭풍을 만나면, 또 우리는 열심히 노를 저을지 몰라요. 

근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2 
마음이 둔하여지지 말란 뜻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이다음에 폭풍이 올 때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폭풍이 올 때는, 더 열심히 노를 저으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무슨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가를 기억하십시오. 
내 삶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5. 예수께서 고향에서 행하신 마지막 다섯 번째 일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치유하신 일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이건 고향은 아니에요. 건너가서 하신 거니까. 
그렇지만 고향 근처죠.

55~56절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예수께서 고향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행하셨던 일은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늘 병자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거기에 예수께서 계셨어요. 
인간의 절망이 누운 곳, 거기에 예수가 계셨어요. 

예수께서는 의인들이 모인 곳에 계시지 않으셨어요. 
긍휼이 필요한 곳, 자비가 필요한 곳, 인간의 절망과 고통이 있는 곳, 
거기에 예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병든 몸과 마음도 고치시기 위해서 
함께 계세요.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도 고치시기 위해서 함께 계세요. 할렐루야!

여기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본문 막6장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살펴 보면, 
치유하실 때도 그렇고 
오병이어로 먹이실 때도 그렇고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그렇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이원화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투 트랙으로 일하세요. 

1번 트랙은.. 죄인들, 병든 자들, 보호가 필요하고, 먹을 것이 필요하고, 
소외된 자들.. 그 사람들을 돌보시고 고치시고 치유하신 거예요. 
이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2번 트랙이 있으셨어요. 
뭐냐면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그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도록 파송하신 거였어요. 

그래서 1번 트랙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참 귀합니다.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내 병을 고쳐주시고, 
나를 회복시키시고... 감사하죠. 너무 귀하죠.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2번 트랙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요. 
또한 1번 트랙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중 일부는 
결국 2번 트랙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거죠.

단순히 나를 먹이시고,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그 예수님과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예수님과 더 깊은 동행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가 되고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가 돼서 걸어가는 이 의미 있는 일! 즉 제자가 되는 거죠.

여러분은, 1번 트랙을 뛰어넘어서 
2번트랙으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