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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종교의 충돌

LNCK 2023. 6. 15. 20:50

복음과 종교의 충돌 [마가복음18] -  - YouTube 

◈복음과 종교의 충돌         막7:1~23, 요일4:1         마가1~10장 설교모음

◑도입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또 기적을 행하시는 등 이런 많은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본문 막7장을 보면,
예수님과 충돌했던 사람들도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이죠.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충돌했고 
그래서 결국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를 죽이기까지 미워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의 본질은 뭘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죽기까지 충돌했던 이 종교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위 말씀은 정확하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모든 종교가..  특별히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다 하나님을 섬기는 거였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믿음,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의식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분별하라' 요한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많은 영들도 역사하고 있다'는 거에요. 

근데 그 영들이 어떤 사람들 뒤에서 역사하느냐면 
'거짓 선지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일4:1

그러니까 종교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뭔가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뒤에서 역사하는 영이, 다 하나님의 영이 아닐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하나님께 속하였나 
그 영들을 잘 분별하라' 이렇게 요한이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다 그런 영들이라'는 거에요. 요일4:3

정확히 이게 누구에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선지자적인 사역들을 감당하는 듯이 보였어요.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고, 율법도 열심히 지켰고, 
또 말씀도 열심히 전하고 그랬던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잘 분별해보라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진짜로 하나님의 영으로 이야기하고, 
영으로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그 뒤에, 배후에 있는 영의 세력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라는 거에요.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많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실제로 뒤에서 역사하는 영은.. 전혀 다른 영, 그런 형들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요일4:1에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있다'는 거에요. 

선지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뒤에서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다른 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영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잘 분별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정확히 해당하는 말씀이죠. 

그리고 그 다음 요일4:3절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바로 그런 영이라'는 거에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굉장히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 있는 것 같았고 
굉장히 헌신되어 있는 사람 같았는데, 문제가 딱 있었어요. 
뭐냐면,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정확히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 무슨 얘기를 제가 드리고 싶은 거냐 하면 
예수와 충돌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었던 이들의 본질이 뭐냐? 
'영'이라는 거에요. '종교의 영'이라는 거에요. 

'종교의 영'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요한일서 에서 얘기하는 바, 
'영을 다 믿지 말라,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도 있다. 
거짓 선지자들 뒤에서 역사하는 영이 있다' 
이걸 우리가 쉽게 그냥 '종교의 영'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종교적인 모양은 있어요. 뭐 선지자역할을 할 수도 있고 
또 열심으로 율법을 지킬 수도 있고, 종교적인 뭔가를 하는 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 .. 이런 영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특별히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 예수와 충돌하는 영'이 있다는 거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을 그렇게 행동하게 했던, 
그 사람들을 결국 예수와 충돌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뒤에 있는 '영'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와 충돌했던 이들의 본질은 
단순히 어떤 다른 사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 뒤에.. 역사하고 있던 '다른 영'에 대한 것입니다. 
이걸 '종교의 영'이라고 부르는 거죠.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은, 많은 부분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종교의 영'과의 싸움이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종교의 영과 치열하게 충돌하셨습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충돌하셨냐면, 결국 죽기까지 충돌하셨어요.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의 이 '종교의 영'과의 싸움은 
예수님 당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게까지 쭉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바울이 사역 내내, 율법을 주장했던 유대인들과 치열하게 충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신학도 그렇고, 사도바울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도 그렇고 
끊임없이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사도바울이 충돌하는 얘기죠. 

사도 바울이 '아니야, 그게 아니야, 복음은 그런 내용이 아니야, 
복음은 율법이 아니야, 복음은 종교가 아니야' 하는 것을 변증하면서 
로마서도 나오고 갈라디에서도 나온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삶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종교, 또는 율법과 치열한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이, 사도 바울때는, 또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인데 
'율법'이라는 모양으로 역사하고 있었던 거죠

▲자 그렇다면 질문은, 과연 현대에는 이 문제가 없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사역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이 싸움이, 
또 사도들의 시대에도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성경이 쓰여지는 중요한 배경이 됐던 이 사건이  *종교의 영과의 충돌
오늘날 현대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그런 일이 전혀 안 일어난다... 
그럴 일은 없죠. 마귀가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이 문제, 이 충돌은, 성경에 아주 지엽적으로 기록한 것도 아니고 
큰 부분을 차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와 서신서에, 아주 큰 배경이나 주제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래서 현대에는 이 충돌이 전혀 없다.. 그럴 리가 전혀 없죠.
마귀가 살아서 역사하는 동안, 이 충돌은 계속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또 사도들의 시대에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던 이 싸움이 
2천 년 전 이스라엘 또는 중동에만 있었던 로컬한 문제일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인간의 종교성을 통해서 역사하는 종교의 영은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중 하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 안에서, 또는 내 뒤에서 역사하는 
이 '종교의 영'과의 전쟁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복음의 본질 중 하나는 
(복음의 본질의 전체는 아닐 수 있어요. 복음에는 여러 다른 면들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중에 중요한 본질 중에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내 안에 
끊임없이 역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뒤에서 역사했던 그 영', 
즉 '그 힘, 그 생각, 그 마음들' 과 충돌이고, 싸움이라는 거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이 싸움에서 다 승리하셔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율법이 아니라 은혜가 역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싸움을 보시면, 
예수님의 싸움도 그러셨고, 바울의 싸움도 그랬고, 결국 핵심은 뭐에요?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는 거에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은혜로 자유케 된다는 거에요. 

종교는.. 우리를 점점 더 얽어매요. 구속하고, 얽어매고, 두렵게 합니다.
아니요. 그게 복음이 아니라는 거에요. 

치열하게 예수님께서 싸우셔서, 자기 생명을 주기까지 싸우셨어요. 
바울이 그 고생을 하면서 평생을 돌아다녔던 이유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 종교가 주는 구속, 
종교가 주는 그 얽매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죠.

그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복음 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참된 은혜를 누리게 하고 싶으셨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이 복음 안에 있는 자유와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 <종교의 영의 특징>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막7장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또 서기관들과 부딪혔던 충돌의 사건을 통해서 

<내 안에 존재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도대체 어떤 것들인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 복음의 본질적인 싸움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규명되고 
그래서 그 싸움에서 다 싸워 이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첫번째 특징은, 기독교에 <관심이 많아요!>

막7:1~2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예수께서 수도 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까지 그 소문이 나서, 6장에 예수님이 고향에 계셨지요. 
갈릴리 지역에 계셨습니다. 
근데 멀리 있는 예루살렘까지 소문이 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거에요. 7:1

이들이 여러분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이 '종교' 또는 '종교의 영'의 특징은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요. 종교적인 일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요. 

관심이 아예 없는 건 불신자고요.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니 관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보다 더 열정이 있고, 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야기로 하면, 교회에도 열심히 나온다.는 거예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더 깊이 들어와 있고, 
모임과 봉사에도 아주 열정이 있고, 
심지어는 성경도 많이 알고요. 기도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를 아주 헷갈리게 합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그 당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죠.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토를 달 수가 없었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 사람들은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야! 
정말 하나님을 생명 걸고 섬기는 사람들이야' 다 이렇게 인정할 정도로 
대단히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과 충돌했다는 거잖아요. 

오늘날에도 이 종교의 영의 특징은 아주 비슷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열심히 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뭐 다 열심히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또 성경도 많이 알아요. 

그래서 성경 알려고 여기저기 찾아서 좇아다니기도 하고 
신학교에도 다니고 막 그래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대놓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복음과 충돌해요. 

분명히 말씀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왠지 그가 내 옆에 있으면 무서워요. 그런 경험 여러분 있지 않으세요?

굉장히 성경도 많이 알고, 굉장히 열심도 있고, 신앙도 아주 좋은 것 같은데 
그 사람하고 개인적으로 알아서 옆에 가 있으면... 어쩐지 무서워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2천년 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옆에 가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으세요? 분명히 무서웠을 거에요. 
성경만 읽어봐도 그 뉘앙스가 보이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옆에 있다가 
잘못해서 손 한번 안 씻고 밥 먹었다 그러면..  큰 일 나는 거죠. 
막 불호령이 떨어지는 거예요. 

안식일을 한번 잘못해서 어겼다 그러면.. 거의 반 죽는 거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옆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는.. 안 봐도 비디오 아닙니까. 
굉장히 무서웠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존경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게 여러분 '종교의 영'이 가진 대표적인 특징이에요.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굉장히 열심이 있어 보이고...  다 좋아요. 
그런데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싫어요. 무서워요... 

여러분,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이냐면 
옆에 가기가 좋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 옆에 가면, 사랑과, 긍휼과, 배려와, 자비와... 
그래서 뭔가 힘들면 하여튼 그 사람 찾아가고 싶고, 
그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의 어떤 캐릭터인데 

종교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이 있고, 성경도 많이 알고, 
그래서 직분도 가질 수 있어요. 목사, 전도사, 선교사, 장로, 집사...
그런데 옆에는 별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
이게 여러분, 종교의 영의 특징입니다. 

자 어찌되었던 간에, 이 영은 
사람들을 교회에 헌신하게 하고 봉사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들은 "보는 게 다르다"는 거에요. 

▲2. 종교의 영에 두번째 특징은 뭐냐하면 보는게 달라요. 
본질적인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을 보는> 거예요. 

예수께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병자들도 고치시고, 기적도 행하시고, 먹이시고, 치유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셨는데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손 닦느냐/ 안 닦느냐?'만 보였을까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니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온 것도 왜 온 것일까요?
6장까지 행하셨던 그 어마어마한 일들을, 소문으로 들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 선하신 행적들,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행하신 
본질적인 것은 보지 않고, 
그들의 눈에 처음으로 딱 들어오는 게 뭐에요?
'왜 손을 안 닦고 먹지?' (왜 정결규례를 지키지 않지?)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그 많은 치유와 그 많은 가르침과 그 많은 긍휼 베푸심은 
그들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고,
왜 비본질적인 것, 음식 먹기 전에 손닦지 않는 것 하나만 부각되어 보였을까요? 

이게 종교의 영의 특징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게 하고, 
꼭 지엽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다른 영들, 음란의 영, 거짓의 영.. 이런 거는요. 
아예 교회로부터 그냥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복음에 대한 내용을 볼 기회도 없어요. 

그런데 종교의 영은, 진리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거든요. 
교회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게 종교의 영이기 때문에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게 하지 않으면 
잘못하면 어느 순간 본질을 받아들이게 돼요.

그럼 마귀 입장에서는.. 그걸 허용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종교의 영은 특징 자체가 
지엽적인 것에 계속 집착하게 해요. 

자꾸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오게 하고, 자꾸 그런 것만 마음이 쓰이게 하고 
거기서 생각이 떠나지 않도록 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성가대가 오른쪽에 있나, 왼쪽에 있나?' 
여러분 오래된 교회들 같은 경우에는, 이게 굉장히 큰 문제인 거 아십니까? 

교회 본당을 리모델링하면서, 성가대 위치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겼어요. 
'우리 목사님이 좌파가 됐나봐요...'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목사님이 양복을 입나, 안 입나?'
'넥타이를 매었나, 안 매었나?'

아니 그게 복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데 종교의 영에 사로잡히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뭐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게 복음이라 그러셨죠.

도대체 이들은 무슨 군기반장 입니까?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에요?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크리스천이 맞습니까? 

이게 바로 '종교의 영'의 특징이라는 거에요. 
마땅히 집중해야 할 본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게 하고 
비본질적인 것에만 집착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오늘 무엇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계속 보십니까? 

특별히 교회나 셀에서는 어떠십니까? 
교회나 셀에서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 게 보이십니까? 
정말 본질적인 것이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이상한 게 걸리십니까? 

만약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그게 없어지지 않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계속 생각하게 되고, 파고 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그 지엽적인 생각뒤에 역사하는 이상한 영이 있을 수 있다는 거에요. 

어떤 분은, 셀 모임에서
'기도를 먼저 하고, 나눔을 해야 되는데 
왜 나눔을 먼저 하고 기도를 나중에 하느냐?' 
뭘 먼저 하던, 그게 복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뭐 가끔 그런 게 보일 수 있어요. 
그냥 자기 습관도 있고, 늘 해 오던 관습대로 안 하면 불편하니까... 

그런데 계속 그런 것만 눈에 보인다 그러면, 
여러분 그 뒤에 역사하는 영이 있는 겁니다. 

이게 예수께서 충돌하셨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그 뒤에서 역사했던 
본질이라는 거에요. 

여러분의 마음을 성령님께 복종시키십시오 마음을 겸손하게 하십시오.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성령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영은요, 영으로 대적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께 도움을 구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그 뒤에 영에게 계속 휩쓸리는 거에요. 
 
겸손하게 기도하시고 겸손하게 무릎을 끓으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계속 이 종교의 영에게 마음을 열고 허락하면 
언젠가 여러분들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처럼 될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로, 종교의 영의 특징은,
<입술로는 공경하되 마음은 먼> 거예요.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들을 '외식하는 자' 라고 얘기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거죠. 
겉으로 행위는 하는데, 마음은 그 행위하고 다른 거죠.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인들의 특징 이었고 
또 종교의 영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1) 종교의 형은, 보여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 행위에 집중하게 해요. 
반면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감찰하세요. 이게 달라요. 

그냥 올바른 마음이 있으면,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관심도, 역시 마음에 집중되어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드러나는 행위에 집중하게 되면 
첫째는 자기 자신의 자유가 없어집니다. 계속 거기(외모)에 얽매이게 돼요. 

2) 그걸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게 돼요. 
그래서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정죄하게 돼요. 
분노를 일으키고 정죄를 일으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했어요. 
그러면 그 일에 대한 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은 뭐였나?' 이걸 보셔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살전2:4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거예요. 

△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컨트롤하려 하고 
그래서 그렇게 안 되면 정죄하지만 

복음은.. 마음의 변화를 격려합니다. 

종교의 영은.. 행동을 컨트롤 하려 해요. 그게 안 되면 정죄해요.
그래서 종교의 핵심은, 컨트롤 하려고 하고, 정죄하려고 해요.

복음은..  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고, 격려하는 거에요. 
하되 부드럽게 합니다. 딱딱하거나 모질지 않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사람의 행동을 컨트롤하는데 
어떻게 컨트롤합니까? 두려움으로 컨트롤 해요. 

그래서 종교의 영은 도대체 어떤 마음에서부터 나오는가? 깊이 들어가 보면,
뿌리에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두려움! 
두려움에서부터 종교의 영이 쫙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의 영의 대표적인 현상이 뭐냐면 이슬람 이거든요. 
이슬람은 '종교의 영'이 만들어 놓은 가장 '견고한 진'인데 
이슬람의 뿌리가 뭐에요? 두려움이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 
-지옥갈 것에 대한 두려움 
철저하게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거거든요. 

이게 종교의 영의 핵심이에요.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거에요. 

△자 반면 복음은 어떻습니까? 복음이 역사 할때 보면 
감사하는 마음, 기쁨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따뜻함, 
은혜, 사랑, 감동, 용서, 자원... 이렇게 마음이 풍성해요. 

어떤 한 가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안에 창조에 넣으신 그 다양한 마음들이
함께 작동을 하면서 복음이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또 '종교의 영'이 그 안에서/ 뒤에서 역사하게 되면 
대표적으로 뭐라고 성경이 묘사하냐면 
'그 마음이 굳어진다. 그 마음이 강퍅해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간이나 폐가 굳어지고 딱딱해지는 걸, 경화증이라 그러죠.
피부나 조직이 부드러워야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딱딱해 졌어요. 그럼 뭐에요. 제 기능을 못한다는 거죠. 

근데 마음도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도 종교의 영이 역사하면, 마음이 딱딱해져요. 
딱딱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할 수 있는 제 기능들을 거의 못한다는 거죠. 

그리고 마음이 우리 삶을 파괴하고 독을 만들어내는 것만 계속 하는데 
그게 뭐냐면 두려움이에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두려움만을 일으키게 해서 
여러 가지 현상들을 나타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람을 정죄하기도 하고,
사람을 컨트롤하려고 하고... 그런 율법주의가 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요. 사람을 컨트롤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을 컨트롤 안 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돼도 상관 없어요.
어쨌거나 하나님이 베스트를 주실 거라는 걸 믿거든요.

그래서 진짜 복음안에 있는 사람은요. 다른 사람을 컨트롤할 필요가 없어요. 
권면할 수는 있어요. 왜? 사랑 때문에. 

'이 사람이 정말 잘돼야 되는데..' 하는 그 사랑의 동기때문에 
권면을 할 수는 있어도 
정죄를 하거나, 컨트롤할 이유는 없어요. 
왜? 복음 안에 있거든요. 

이단들이 하는 대표적인 게 뭐예요?
사람을 세뇌시켜서 딱 붙잡고, 컨트롤하고, 세뇌하는 거잖아요. 

△바울이 사역할 때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어야 되느냐,
또 먹으면 안 되느냐?' 하는 이슈가 있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먹었고, 어떤 사람은 안 먹었고 그랬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롬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먹든지 안 먹든지 알아서 하라는 거잖아요. 
먹어야 되는지 / 안 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부드럽고 유연하죠.

바울의 대답은 무엇을 했냐/하지 않았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마음이 중요하다는 거죠.

어떤 마음에서부터 움직인 거냐?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 
그런데 동기가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움'이라면, 그건 잘못이라는 거죠.

'그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근데 그 이유가,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라면.. 잘못된 거라는거에요. 

먹든지/ 먹지 않든지 간에 
마음의 중심에서 뭐가 돌아가느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한다면, 
사람들은 뭐라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거 아닙니까. 

기억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자기도 모르게 율법화 되어가요. 

그 사람의 마음 중심에 있는 건 보지 못하고 
했느냐/ 안했느냐 .. 그거 가지고 사람을 자꾸 판단하는 성향이 있죠.
아니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이에요. 

△영은 마음과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기억하십시오. 영은 마음과 깊게 연결돼 있어요. 
영은 마음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영이 역사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음란의 영이 역사하면, 음란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거짓의 영이 역사하면, 계속 거짓말하는 마음이 생겨요. 
영은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영은 마음을 일으켜요. 

자 그런데 영은, 그냥 내가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그런 마음들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엔 내가 선택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요. 그리고 그 마음을 반복해요. 
또는 그런 마음이 든 것을 방치해요. 

예를 들어서, 분노가 올라왔어요. 
그럼 처음엔 그냥 내가 분노한 거에요. 무슨 영 때문이 아니라. 

그런데 내가 계속 분노를 해요. 그리고 분노하는 마음을 방치하는 거예요.
용서하지 않고 계속 분노를 방치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영이 그 주위에 꼬이기 시작해요. 

여러분 여름에, 음식물 찌꺼기가 있는데, 
빨리 처리하지 않고 그냥 계속 방치해두면.. 초파리들이 꼬이죠. 

더러운 영들이 그래요. 내 안에 처리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마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맞는 영들이 꼬여요.

분노를 처리하지 않고 계속 방치해두면 
분노를 일으키는 영들이 꼬여요.(달려들어서 자리를 잡아요)

거짓말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반복하면 
거짓말 하는 영이 꼬여요. 모여들어요. 

그래서 마음을, 여러분 방치하면 안 돼요. 방치하면 안 돼요. 
계속 어떤 것을 반복하고 우리 마음에서 반복해서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결국 그 영에게 문을 열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점점점 거기에 매이게 돼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분노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그냥 내가 어느 정도 컨트롤하고 선택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영이 점점점 역사해 가면, 점점점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져요. 
점점점 컨트롤이 힘들어져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사로잡혀요. 
딱 사로잡혀서, 내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냥 싫어도 막 그런 감정들이 올라오는 거죠.  
그런 게 사로잡힌 거에요. 

그러니까 요즘 여러분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n번방 사건' 같은 것도
영의 역사입니다.
처음에 한두 번은 그런 음란한 것에다 자기 마음을 방치했겠죠. 
근데 계속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영이 역사하는 거에요. 
이게 영이 아니고, 여러분 설명이 됩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가요?
이것이 음란의 영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들의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종교의 영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내가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뭔가를 해요.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율법적인 행위를 해요. 

또는 두려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려고 해요. 

근데 이것이 반복되고 방치되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종교의 영이 점점 그 사람 뒤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 그랬어요.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종교의 영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
종교의 영에게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 길은 뭐냐면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오는 평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오는 은혜,

그래서 여러분 '종교' 와 '복음'은
정면으로 서로 대척점에 있어요.

두려움을 가지고 '종교'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은혜와 평강가운데 '복음'안에 살 것이냐? 대척점에 있는 거에요. 

두려움과 불안함을 계속 방치해 두면 
결국 종교적인 삶이 돼요.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보십시오. 여러분 모든 종교와, 모든 우상이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두려움과 불안에서부터 나오는 거잖아요. 

불교도 그렇고, 이슬람도 그렇고.. 
다  불안함과 두려움에서부터 종교가 나오는 거거든요. 

복음 빼고 모든 종교의 뿌리는 두려움과 불안함이에요.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살다가 이렇게 악을 행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죄를 짓고 안전할 수 있을까, 보호받을 수 있을까? 
이런 불안함과 두려움이 종교를 만들어 내요.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모양은 우리가 기독교인일 수 있고, 
모양은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두려움의 마음을 계속 방치해 두면 
결국 결론은 여러분 안에, 혹은 여러분 뒤에 '종교'가 역사하게 될 겁니다. 
(참 은혜와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또한 이 두려움은, 자기 중심성 하고도 깊게 연결돼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은 뭐냐면, 
-나를 보호하려는 생각
-내가 원하는 것들을 그대로 이루어내려고 하는 생각
이게 자기 중심성 이거든요. 

이게 강해지면 두려움이 커져요. 
왜냐면, 나를 보호해야 되니까. 
나를 보호해야 되는 욕구가 강하니까, 그만큼 더 두려운 거에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으니까 
그만큼 더 사람들을 컨트롤하고,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하게 될까봐 두렵고... 
뭐 이런 것이 다 자기 중심성이 강한 거죠. 

그래서 '두려움'과 '자기 중심성'은 정비례해요. 
그래서 이 두려움은, 결국 자기 중심성인데, 이것이 교만이고 죄지요. 

그러니까 다 이것이 연결돼 있는 어떤 마음들이라는 거에요. 

△자 이 두려움은, 타인을 향한 배타적 분노, 시기, 정죄 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정죄, 그 다음에 조종, 시기, 분노.. 이렇게 나타나고요.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나타나냐면 
이 두려움이, 벌을 피하기 위한 율법주의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뿌리가 같은 거에요. 

자 이것이 정확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방치해두면 안 되는.. 
다른 영들을 꼬이게 하는 마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적어도 천 번 이상 '마음'에 대해 얘기하는 거 아세요?
성경은 마음에 대한 책이에요. 
방치하면 안 되는 마음들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만한 마음 
-두려움과 분노 
-의심하는 마음 
-근심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정죄하난 마음
-완악한 마음, 굳은 마음 
-둔하여진 마음 
-미련한 마음
-어두운 마음 

자 이런 마음들이 다 뭐에요?
종교의 영과 연결된 마음들이라는 거에요. 

이 마음들을 여러분들이 처리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의심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계속 방치해두면 
시기하는 마음을 방치해두면, 정죄하는 마음을 방치해두면 

진짜 감사하고 진짜 감격적인 순간인데도 아무 마음을 울림이 없고,
언젠가 여러분들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된다는 거에요. 
그 안에 종교의 영이 역사하는 거예요. 

▲마치는 말 

△종교의 영이 강한 사람 옆에 가면, 정죄받는 마음이 듭니다. 

△종교에 영이 강한 사람은 '내가 옳다' 라는 '자기 의'가 아주 충만합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해요. 
그러나 복음은, 내가 죄인인 걸 알기 때문에, 남을 긍휼히 여겨요. 

그리고 '옳다/그르다'를 늘 따집니다. 가릅니다.
그래서 정죄하고, 분열을 야기합니다.

물론 거룩함을 지켜야죠.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동기가 뭐냐는 거죠.
진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인지, 아니면 종교의 영인 거죠.

(*이 종교의 영은, 예수님의 은혜, 성령의 체험, 진정한 회심, 
온전한 거듭남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인 거죠.
그냥 혼적으로, 종교로 하나님을 믿는 거죠.)

그런데 진정 거듭난 사람이라도, 자기 안에 진정한 신앙과 종교가
혼재되어 있을 수 있죠.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더욱 힘써, '종교'를 버리고,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적 싸움이, 우리 죽을 때까지 있는 거죠.

'종교'와 반대로 
예수님의 완전한 용서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평강이 임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내가 용서받았구나, 와 내가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가 다 사해졌구나, 
나는 자유케 되었구나!' 이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적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나오는 거죠. 

이 싸움이 여러분, 2천년 전 유대땅 에서만 있었던 싸움이 아니죠.
예수께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셨던 싸움이고 
사도 바울도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싸움이라면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가장 치열한 싸움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변에 보면, 교회와 기독교를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죠.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종교'일 수 있어요.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를, 치떨리게 하는 거죠.

실제로 지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종교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지요?
어마어마한 종교의 영들이 역사하고 있어요. 
또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종교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자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종교의 영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독선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들은 
다 이 마음에서부터 나왔다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혹시 마음이 딱딱하진 않으십니까?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들만 계속 내 눈에 들어오진 않으십니까? 

혹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마음이 병들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은 부드러워야 됩니다. 마음은 딱딱하면 안 되고요. 
날카로워서도 안 돼요. 비판적인 것보다는, 감사한 게 먼저 보여야 돼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종교의 영'과의 싸움을, 참 치열하게 싸웁니다. 
제 안에도 당연히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잘 알죠. 

제가 이제껏 목사로 한 20년 이상 있었잖아요. 
그러면 종교의 영이 당연히 저를 공격합니다. 어떻게 안 하겠어요?
마음과 행위와 형식이 굳어져 버리는 거죠.

마음, 진정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룰과 문화와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대로 교회가 갔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지요. 
그것에 어긋나거나 위배되면..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그래서 저는 "마음을 부드럽게 유지하기 위해서" 참 많이 노력합니다. 
마음을 딱딱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참 많이 노력해요. 

그래서 제 마음이 거칠어졌다고 느껴지거나 
실제로 마음이 거칠어지는 때가 있어요. 
뭔가 상황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데 부드럽게 나가는 것이 아니고 
거칠게 나가는 거죠. '왜 이렇게 하지?' 하며 불만 섞인 어조로 말하죠.

이거 어떻게 보면 정의감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많은 경우 보면 아니더라고요. 
불의한 것에 대해서 막 분노가 올라올 때 보면,
제가 영적으로 뭔가가 좀 허술하고 느슨해진 상태에 있는 거예요. 
그런 징후가 보이면, 바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여러분도, 마음이 거칠어지면
바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참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저는 여러번 개인적으로 체험했습니다.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비판적인 마음이 긍휼로 바뀌고 
감격과 은혜가 우리 마음을 촉촉히 적십니다. 

그래서 종교가 주는 마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종교가 주는 구속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가운데 
그런 삶을 누리시는 그런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