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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라 가려면

LNCK 2023. 6. 16. 10:27

故 옥한흠 목사 - 예수를 따라 가려면 - YouTube

◈예수를 따라 가려면          막8:34~37       1986.03.23.

막8:34~37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도입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마음속에 깊이 두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해야 될 주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가신길에 대해서 
-둘째는 우리 자신의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를 먼저 생각해야 되겠고 
-다음에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이 두 가지가 다 동시에 중요하다는 것을 
본문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읽지 아니한 앞부분은, 
지난 주일에 우리 함께 읽고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나섰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할 예수님 자신이 걸어가는 길인데 
도중에 주님이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와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동시에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따로 떼어 놓고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일반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을 하고 
또 많이 배웁니다만 
내가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소홀히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24절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내가 남겨놓고 가는 발자국을 따라서, 너도 걸어 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세상에 계실 동안 가장 자주 말씀하신 진리중의 하나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여섯 번 내지 일곱번을 
주님께서 이 본문들을 반복해서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가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만큼 중요하냐면, 우선 꼭 같은 복음을 이야기한 누가 복음을 살펴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만약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우선 이 본문이 중요한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결정하는 본문이기 때문이죠. 

또 왜 이 본문이 중요하냐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막8:36

그러면 우리가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사는 구원을 얻는 문제와도 직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편하게 살지 모르지만 
잘못하면 영원한 생명을 놓쳐버릴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 잊어버리고, 이 현세에서 잠깐 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구원받고 싶느냐?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또 이 본문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장차 재림하셔서, 우리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때에 
주님이 따라오라는 그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 사람에게는 
주님이 칭찬하실 것이고, 상급을 주실 것이지만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한 자는, 그 행한 대로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이 얼마만큼 중요하냐, 
-주님의 제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이요.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사실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씀이고 
-또 마지막 주님 앞에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본문은 대단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의미가 어렵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깨닫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목사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없는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씀이죠. 

성경을 읽다가도, 이런 본문이 나오면, 그저 적당히 읽고 넘어갑니다. 
아니면 그저 '이것은 아마 목사라든지 뭐 선교사라든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지...' 하고는 그대로 넘어가버립니다. 

그리고 교회 강단에서도 이런 말씀은 잘 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요. 
좋아하지 않으니까, 자연히 안 전하죠. 

그런데 꼭 기억하세요. 
예수님이 세상에 사실 동안, 제일 많이 말씀한 내용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자주 많이 말씀하신 내용을 
오늘 강단을 지키는 목사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잘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삯꾼입니다. 
쓰다고 마시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마시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 본문이 아마 좀 받아들이기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에요. 너무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오늘 서론이 깁니다. 
한번 여러분 마음을 좀 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본문말씀을 놓고 여러분이 아마 두 그룹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을 참 전심으로 이해하고 
'정말 내가 내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자기 마음속에 가지는 사람이면, 참 그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부담감이 생긴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작은 믿음입니다. 

이거는 좋게 말하는 입장에서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나쁘게 말하면, 
이 본문가지고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나누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함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요. 
-이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면, 제가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거짓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눅14:25절에, 주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허다한 무리와 함께 길을 가십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이 뒤를 돌아서시더니,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예수님을 그야말로 사랑하면서, 
주님의 그 이적, 기사를 보기를 원하고 
주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금 주님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절정에 도달해 있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라 오는 무리들을 보시고는, 갑자기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어요.
찬물을 확 끼얹는 말씀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온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것도 아니요, 
많은 무리가 주님을 추종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겉으로는 굉장히 사랑하는 것 같이 보여도 
모든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걸 아셨어요. 

그러므로 이 말씀가지고 '너희들이 나를 정말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이게 되면, 나를 바로 믿는 사람이요. 
이게 안 되면, 너희들은 중도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역시 나중에 보세요. 도대체 몇 사람이 남았습니까? 
다 떠나버렸습니다. 다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걸어가실 때에 
주님이 이제는 인기가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빈축거리며 그를 비판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높아집니다. 
이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손해만 있지, 이득은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마지막 끝까지 따라간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제자들 외에는 없어요. 부인들 외에는 없어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놓고 
'참 내가,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내 십자가 지고 따라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은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그것이 안되고 계속 마음에 어떤 비판의식이 생기면 
여러분 철저하게 회개하셔야 됩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에다가 나를 저울질해볼 때, 나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칼빈이 이런 말을 했어요. 
바로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체득하기 위한 일정한 수련기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이제 결정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을 한번 확인해보는 수련과정이다.. 
참 멋있는 말씀입니다. 

또 한마디 참 의미 깊은 말을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한몸에 온통 다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계실 동안 그가 안일하게 세상을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분께 십자가를 메어두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셨거늘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그 조건에서 면제받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담당한 그 십자가를, 우리가 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또 이해가 잘 안 가더라도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조용히 한번 들어보세요.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 <자기 부인>을 한번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죠. 

'자기를 부인한다' 이 말을 한마디로 우리가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No 라고 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Yes 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릴까요? 
나의 뜻에 대해서는 언제나 No,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언제나 Yes!
이렇게 말하는 자세를 일컬어서 '자기를 부인한다' 그럽니다. 

그러면 성경을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 마음에 이런 의아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기' 라는 것은 전적으로 무시해야 되느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나, 자아'라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인가? 
전적으로 전적으로 무시해 버려야 되는 '자신'인가?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속에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자아는 단순 개체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하면 전적으로 100% 다 선하고, 
악하면 100% 다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선하다' 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처럼 높여야 될 자.. 라는 말이 아니요,

'내가 악하다'고 하면 
완전히 마귀처럼 차버려야 될 그런 존재.. 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합적인 개체입니다. 
선과 악이 동시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티븐슨의 작품을 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있죠.
무슨 약을 자기가 만들어서 먹은 다음에는, 이중인격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낮에는 선한 사람으로, 저녁에는 악마로 변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안에 지킬이 있고, 한사람안에 하이드가 있죠. 

성경에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아를 놓고 
창조의 결과로 나타난 자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특별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 '너희들은 공중에 나는 새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저 들에 있는 백합파와 모든 꽃들 보다도, 너희는 귀하지 않느냐?' 

또 주님은 말씀합니다. '어린 소자 하나라도 너희들이 등한히 대우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니라' 
얼마나 한 인격을 중히 여겼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천대하던 여자에 대해서도 
우리 주님은 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평등한 존재로 
평등한 가치를 가진 인격자로 우리 주님은 얼마나 존중해 주셨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창조의 결과로 얻은 우리 자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많이 훼손되었지만 
예수 믿은 다음에 우리에게는, 이 형상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옛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자아는 하나님의 모습을 담아점점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자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십니다. 

▲이런 자아가 있는가 하면, 
타락의 결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아가 있어요. 
이것을 '육의 사람'이 라고도 하고, '옛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도구입니다. 
정과 욕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죄악의 근성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이 나의 옛 자아를 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믿고 나면, 일단 하나님께서는 
나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바울이 말했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했습니다.  갈2:20

'내가 살지 않았다'는 말은,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렇게 완전히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마는, 

머리가 깨어진 뱀이, 마지막까지 살아서 꼬리를 흔들며 몸을 비틀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상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틀림 없는 내 본성, 옛 자아가 
그대로 아직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할 때의 '자기'는 
어떤 자기냐 하면,
타락의 결과로 나에게 남아 있는 '자기'입니다. 
이걸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된 내 자아를 부인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귀한 내 인격을, 
무조건 송두리째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 자아의 뜻과, 옛 자아의 욕심을 부인하라' 하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부인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듯이, 부인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참 가슴 아프게 나중에 배신했는데 
여종 하나가 와서 '야, 너를 보니까 분명히 나사렛 사람이구나, 
너 예수 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했을 때?  
그는 '아니야, 나는 아무 관계가 없어!' 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계속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점점 더 심하게 부인했겠지요.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철저하게 세 번 부인하던 것과 같은 그 방법을 
우리의 옛 자아를 부인하는 데다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배워야 됩니다. 예를 들까요?
여러분이 예수 믿으시면, 분명히 내 안에 두 자아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성령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 
'새로운 자아'와 '옛 자아'
만약에 이 둘을 아직도 여러분이 구별을 못하면, 아직도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은 좀 더 열심을 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 믿은 지가 얼마 안 돼도
벌써 예수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내 안에 성령이 임하여 계시기 때문에 
내 안에는 두 자아가 분명히 구별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럼 예를 들어서, 용서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형제를 용서해야 될 문제를 놓고 고심합니다. 

내 안에 새로운 자아는 뭐라고 말합니까? 
'용서해야지! 아무리 네가 괴로워도 용서해야 돼!'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옛 자아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용서를 해도 한두번이지, 어떻게 자꾸 용서해주냐?' 어떻게 하면서 거부합니다. 
벌써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옛날에는 참 돈을 사랑했잖아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까,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새로운 자아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면서 둘이 부딪쳐요. 

자 가만히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세요. 
'어떤 큰 돈이 들어올 자리에 가서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서류 하나 적당히 바꾸면 
금방 몇천 만원이 굴러들어올 수 있는데...'

분명히 내 속에 새로운 자아의 음성이 들립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돼!'

그러나 옛 자아는 뭐라고 합니까?
'한번만 눈 감으면 되잖아? 교회 가면 참회 시간이 있는데 또 회개하면 돼지'

이럴 때에 나의 옛 자아를 부인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듯이 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적당히 부인하다가
두 번째는 더 세게, 노려보며 부인하다가
세 번째는 더 강하게.. 완전히 부인해야 되는 거죠.

사실 내가 목사지만 내 속에 옛 자를 보면요. 
'빌어먹을 놈' 이라는 말만 들어서는 안 돼요. 
이거는 뭐 들을 욕은 다 들어야 돼요. 얼마나 독한지요. 얼마나 더러운지요. 
얼마나 악한지요.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고 마땅해요. 

그러니 이런 자아를 우리가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아부인이 잘 되고 있나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 자연적으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희생을 한다는 말입니다. 헌신한다는 말이에요.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내 뜻은 철저하게 이기주의 아닙니까? 
이기주의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나는 No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입니다. Yes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부터 너는 사랑으로 봉사하라.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라.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네 삶을 바로 다시 정리하라. 의롭게 살아라'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Yes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헌신의 십자가가 내 어깨 위에 짊어지워 집니다.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죄를 범할 때는,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돈 벌고, 
함부로 그저 남 괴롭히면서 자기 잘 살 궁리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짓을 못하니까 
수입도 적어지고, 나중에는 옛날보다 훨씬 못한 생활여건 속에서 
살아야 되는 사람들도 봅니다.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 십자가 져야 합니다. 안 지면 큰일 납니다. 

우리 장로님들이나, 우리 남녀 순장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성가대원들, 또 여러 부서에서 일하시는 분들 가만히 보면 

한번 주를 위해서 내가 살려고 하면, 
이제는 정말 시간을 내어야 하고, 
시간을 투자해야만이 주님을 위해서 뭔가 헌신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주말을 이제는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구나' 
주말 나들이도 취소하고, 여가도 생략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이 지금까지 즐겨오던 것을, 거의 다 포기하고 
다른 형제를 위해서 헌신하는 일에, 시간 투자하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밤에 퇴근해서 돌아와서도, 조용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가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화가 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난 형제가 전화를 해서 상담을 요청합니다.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거 수화기 붙들고 이야기 듣다가 보면 20분이 지나갑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30 분이 지나갑니다. 

몸도 피곤하고 가족들하고 이야기할 틈도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 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는 Yes 라고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몹시 피곤한 주말 입니다만은 
다락방에 있는 순원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같이 두 시간 세 시간 나누는 거.. 십자가 지는 거예요. 

누가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Yes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희생 안 하면 안 돼요. 

여러분이 이웃 사람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도와줄까?' 하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가난한 자를 놓고, 여러분이 어떻게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굶고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밥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감사기도를, 맘 편히 드릴 수가 있습니까? 
못하는 거에요. 왜요? 
하나님의 뜻을 Yes 하면, 그대로 살아야 되니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뜻은 '헌신하라' 입니다. 십자가 지라는 말이에요. 
내가 부족해도, 나누어 줘야 되고.. 
내가 못 먹어도, 같이 먹어야 되는 겁니다.

병으로 고통하는 자를 보고도, 내가 어떻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도와줘야 됩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면, 재미있는 모든 오락 다 치우고 
무릎 꿇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헌신을 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그게 십자가 지는 거지요.

내가 알고 있는 여러 젊은이들,
세상에서 좋은 직장, 좋은 여건, 좋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가도 

이상하게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뭔가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서 초라하게 떠나는 모습을 봅니다. 벌써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왜 집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Yes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이 굉장히 부담스럽죠? 
굉장히 우울하게 들리죠? 당연히 그래요. 특히 현대교인들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주님, 저를 제자 만들어 주세요.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을 만큼 너무 가난하다. 그래도 너는 나를 따라오겠니?'

'아이고 맙소사!' 그 청년은 어디를 갔는지도 몰라요.
성경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자, 보세요. 주님이 우리 보고도 말씀합니다. 
'너 참 예수 믿으니까 좋지?' 

'예 좋습니다. 죄 용서 받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고,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머리털까지도 다 헤아리고 인도해주시고.. 
얼마나 우리 주님이 좋은지 몰라요.' 

'그래, 그런데 내가 한 마디 할 말이 있어!
이제 네가 예수 믿고 받은 모든 축복,
그것을 남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주님이 그렇게 이 자리에서 말씀하신다면 
여러분 중에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래서 도망갈까요?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축복을 가지고 희생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너무나 크게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 하나만 가지고, 나하나만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라고 합니다. 

이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여러분이 생각합니까? 

어린 아이의 상식으로도 안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를 그렇게 값싸게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를 이왕 나오시면, 내가 예수 믿고 받은 축복도 중요하지만,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사명도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문제도 
여러분이 중요하게 다루셔야 합니다. 
그 둘을 동시에 놓고 다루지 못하면, 아직도 어린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무겁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요. 하나님은 가끔 장난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진짜 좋은 것, 진짜 복된 것은, 
전부 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속에다가 감춰두시는 경향이 좀 있어요.

예를 들면, 기쁨을 눈물단지 속에 숨겨두신다든지.. 하나님이 그런 일 잘하세요. 
그래서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추수하는 기쁨을 몰라요. 

진정한 만족을, 가난한 오막살이  집 속에 숨겨놓으신다든지.. 
하나님의 참다운 위로를, 환난의 현장 속에 감추어두신다든지.. 

승리의 환희와 기쁨을, 골고다 십자가 뒤에 묻어두신다든지.. 
주님께서는 자주 자주 감춰놓으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것을 캐내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캐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쉽게 적당히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벌써 나중에는 탈락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기독교입니다. 

자기를 희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만이 
나중에 얻을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이 따로 준비하고 계세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능력이에요. 
내가 십자가 지기 전에, 
날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그 십자가는 나에게 무한한 능력을 제공해주는 원천이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그 능력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들어가게 하시는 능력으로서 끝나지 않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가, 날마다 날마다 
무엇인가 공급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고난속에서, 가난속에서, 질병속에서, 핍박속에서, 실패속에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내가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위로와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를 하나 들까요.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작가입니다. 
소련 공산당에 반체제 인사로서, 강제수용소에서의 중노동 형을 받고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가, 서방세계로 추방당한 작가입니다. 

그분의 간증 글을 보니까, 그가 수용소에서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하는데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고 배는 고프지요. 너무 노동은 심하죠. 
그래서 몸에 병까지 났습니다. 

의사가 진단해보고는 '며칠 못 살겠구나' 했습니다. 
그럼에도 매일 끌려 나가서 중노동을 12 시간 합니다. 

하루는 뙤약볕 밑에서 삽으로 모래를 퍼내는 일을 하고 있는데 
퍼다가 퍼다가 지쳐서 '이제는 나는 못하겠다, 이제는 끝이다'

'내가 삽자루를 놓으면 감시하는 사람이 사정없이 때릴 텐데 
나는 이제는 매 맞고 이 자리에서 죽을 거야' 하고는 삽을 놓았습니다. 
몽둥이가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일을 하던 크리스천 수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모래 위에다가 자기 삽으로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솔제니친이 그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싹 지워버리고는 자기 위치에 갔습니다. 

그런데 솔제니친의 말을 들으면 
그 모래 위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 
어디서 힘이 솟는지... 자기도 모르는 놀라운 힘이, 
마음에서 솟구치는 것을 신비하게 체험했다고 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삽자루를 다시 쥐고,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여러 달 동안 그 중노동을, 그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감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이렇게 보는 사람도, 이렇게 능력을 얻고 힘을 얻는데 
그 십자가를 내가 실제로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겠느냐?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옛날에 십자가를 많이 진 우리 선배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고요. 

'십자가가 나중에는 나를 지고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를 지다가 보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능력 주시고, 기쁨주시고, 힘주시고, 위로주시고, 
그래서 십자가 열 개라도 거뜬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다가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이걸 모르면 신자의 생활의 맛을 모르는 분이요, 
아직도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라'고 하니까 
'예수는 참 지긋지긋해, 어떤 면은 아니네 
기독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은 너무 몰라요. 
좀 더 깊이 들어오라고요. 좀 더 깊이 들어와 보세요. 

여러분이 다이버 하는 사람들, 바다 밑에서 찬란한 물밑 세계를 구경하고 나온 
사람들이 바다 들어가는 거 무서워합니까? 

그러나 빠져 죽을까 싶어서 날마다 뱃전에서 갈까 말까 하는 사람들은 
생전 바다 구경 못 합니다. 

마찬가지예요. 예수 믿고서도 십자가 지기 싫어서 
날마다 변두리에서 오락가락 하면.. 참 편한 것 같죠. 
그러나 큰 것을 놓쳐요. 

십자가 지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 기쁨, 능력, 신비스러운 행복!
이거 여러분 모릅니다. 그러면 불쌍하잖아요. 

▲재미있는 글이 하나 있어요. 
로이드 라는 32 살된 캐나다 청년이 
1981년도에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무슨 음성을 주셨나봐요. 
'너는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 짊어지고 캐나다 전역을 행진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주셨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가끔 그럴 수도 있나 봐요. 
그래서 그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이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음성일까?' 생각하다가 
너무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니까 그 떠밀림을 거절못하고 
그는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길이 5미터, 무게는 43키로, 얼마나 큽니까? 
짊어지면 뭐 묵직하죠. 

그래서 땅에 닿는 부분에는 바퀴를 만들어가지고 
그 다음에 캐나다를 여행하는데 4,300마일을 다녔어요.

돈도 안 가지고, 단지 슬리핑 백하고 옷가지만 몇 개만 가지고는 여행을 했는데 
그 사람의 글을 제가 읽으면서, 참 여러가지를 느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그 시간부터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데
먹을 때가 되면, 끼니가 항상 생기고 
마실 때가 되면, 항상 생기고.. 그것 뿐인가요? 

마약으로 못쓰게 된 사람들이 십자가 지고 가니까 
막 몰려와서 구경하다가 그 앞에서 변화받아서 
마약 다 끊어버리고... 

자동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지고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 가지고는 
같이 점심식사 나누면서, 복음을 듣고는 변화받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나중에는 교통위반 했다고 뛰어와서, 티켓 떼려던 교통순경이 변화받아서 새 사람이 되고 
동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가지고 
거기에서 함께 복음을 듣고 은혜받고 변화되는 역사들이 계속 일어난 것을 
제가 기록으로 보았습니다. 

자 여러분,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지고 가도, 그렇게 큰 역사가 일어나는데 
보이지 않는 진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라고 할 때는 
엄청난 위로와 축복을 준비해 놓고 지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자꾸 마다 하면, 평생 어린 신자를 면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어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 교회 성도들은 백프로 다, 
이 주님이 오라고 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