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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

LNCK 2023. 6. 16. 18:23

수로보니게 여인 - YouTube

◈수로보니게 여인        막7:24~30

◑도입

저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7장 전반부를 살펴봤습니다. 
전반부 내용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충돌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종교'와 충돌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생명은, 종교 안에 있는 율법과는 같이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개가 있으면 항상 충돌하게 돼 있습니다. 

복음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조종하고 컨트롤하려고 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익숙해져 버린 신앙행위, 
또 왜 하는지 모르고 하는 종교, 이런 것들이 반복될 때 
그것은 '종교의 영'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종교가 역사하는 곳에는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리새인들, 즉 종교와 충돌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막7:24절 '예수께서 일어나서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께서는 종교화된 사람들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종교화된 사람들이 나타나서 시비를 걸면, 그곳을 떠나서 몸을 숨기십니다. 

맞아요. 이때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우리 개인의 삶속에, 또 공동체 안에도, 종교화 되기 시작하면 
예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으세요. 

우리 개인의 삶에도, 공동체에도, 사회에도 
'종교화'되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예수는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없다는 거예요.              

개인도 공동체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종교화되기 시작하는 것이 나타나면 
그 가운데 계신 예수께서는 몸을 숨기십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항상 은혜가 넘치고 웃음과 기쁨과 눈물과 감동이 파도쳤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역사하는 곳에는, 
딱딱한 율법과 정죄와 비난과 시기와 분열과 분노가 난무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는 그 가운데 더 이상 거하시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셔서 몸을 숨기십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도, 교회도 심각하게 돌아봐야 될 문제인 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종교가 역사하기 시작할 때, 
또 우리 공동체 안에 종교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예수께서는 숨으시는 거예요. 

교회인데, 예수가 안 계셔요. 
크리스천인데 그 안에 예수가 안 계셔요. 

열심히 뭔가 종교적인 일은 하는데, 예수께서는 숨으세요. 
이것이 여러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특징이었습니다. 

혹시 "내 안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없는지... 
혹시 "내 안에" 종교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돌아보고, 
복음안에서 새롭게 되는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서 향하신 곳은 두로였습니다. 
두로라고 하는 곳은 페니키아인들이 살던 땅인데요. 오늘날 레바논 땅입니다. 
레바논에는 아직도 이 도시가 있죠. 
두로와 시돈이 레바논 남쪽 해변 도시로 아직 존재합니다. 

두로는 레바논 땅인데, 이제 고대 페니키아 인들이 살았던 땅인데 
참 흥미로운 것은, 뭐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오잖아요. 
수로보니게란, 영어로 시리안-페니키안이 에요. 

그러니까 시리아 사람입니다. 페니키아에 살던 시리아(수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녀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와요. 
오늘날 상황이랑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레바논에 살고 있는 시리아 난민이 자녀들을 살려달라고 예수께 나오고 있죠... 
이걸 보면서 '참 예언적이다'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요

하여간 그곳에서 수로보니게 여인, 한 이방여인을 만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죠. 

마가는 이 이방여인을, 7장 전반부에서 살펴봤던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대조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이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막7장 전반부에 종교화된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그들을 떠나가서 예수께서 만나신,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이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대비시킵니다. 
-한쪽은 굉장히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이었고,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고, 종교 지도자였는데 
그 안에 예수께서 거하시기는 별로 기뻐하지 않는 종교화된 사람들! 

-반대편에 있는 이 이 여인은, 전혀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방인인데 하나님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겠어요?
이방인이었고, 전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지위가 있던 것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도 아니고, 
이름도 기록돼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 안에는 뭔가 예수께서 주목하여 보실 만한 것이 있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을 대비시키면서 

무엇이 진짜 진리고, 예수께서 진짜 주목하여 보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도, 이 두 종류의 영이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 안에도 
-한쪽에서는 종교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마치 바리세인과 서기관처럼, 익숙해져 가고, 뭔가 능숙해져 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를 잘 알아요. 
그래서 지혜롭게 그 일을 잘해 나가요. 그런데 뭔가 딱딱해져 가는...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기를 별로 즐거워하지 않으시죠.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반면 

-또 한편에서는 별로 세련되지도 않고, 별로 정제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 안에 뭔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뭔가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뭔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련되지 않은 뭔가인데 진짜인 거예요!

예수께서 무엇을 진짜 주목하여 보시는지를 
우리에게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방 여인과 - 종교인 대조)

이 이방 여인에게는 '종교적 치장' 그런 거 전혀 없었습니다. 
뭐 이방인인데 뭐가 있겠어요? 

내세울 직분도 없고, 간증도 없고, 경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서 뭔가를 보신 거예요. 
그래서 그의 딸을 고쳐주시지요. 

이 여인은, 종교지도자, 바리새인 뭐 이런 직분도 없었고요. 
병 치유나 기적을 경험했다는 내용의 그런 간증도 없고 
또 서기관들처럼 높은 지위나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심지어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눈에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사람들 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유대인이며, 종교 지도자며, 높은 지위의 사람들.. 
무엇을 가지고 비교해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일반 사람들 눈에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곳을 주목하신다는 거예요. 
사람들 눈에는 너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목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지위도 없고, 이름도 없는 이 여인에게서, 뭔가를 보시고 그것을 주목하십니다. 

오늘은 이 여인에 대한 말씀을 
특별히 지난주에 살펴봤던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비교하면서, 대조하면서 
살펴보면서, 과연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뭔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이것들을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그것들이 충만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어도 그것은 종교적인 익숙함이나, 종교적인 세련됨은 아니에요. 
지난주에 살펴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는 
그 세련됨이 아주 충만했고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전혀 주목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그들 가운데 있기를 불편해 하셨어요. 

▲반면 오늘 살펴볼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그런 종교적인 세련됨도, 종교적인 익숙함도, 지위도, 경험도, 타이틀도, 
집사 타이틀, 무슨 타이틀, 목사, 선교사...  이런 타이틀이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이방인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 여인을 주목하여 보시면서 
그건 마가복음에 나와 있지 않지만 평행구절인 마태복음에 보면 
'여인아, 네가 믿음이 있다' 이렇고 말씀하시거든요. 마15:28

그 여인에게서 뭔가 '믿음'이라고 불릴만한 걸 보셨다는 거에요.
그것이 예수께서 보시는 본질이고, 우리 안에도 충만해야 될 줄 믿습니다.
자, 그럼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25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바리새인들과 대조되는 것이 보이십니까? 
바리새인들도 동일하게 예수를 찾아왔어요. 
예수 앞에 나왔는데, 그들은 논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따졌어요. 

그런데 이 이방 여인도 동일하게 예수 앞에 나오는데 
찾아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립니다. 

예수 앞에 나오는 두 가지 대조적인 방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앞에 나왔을 때, 따지고 논쟁했습니다. 
'왜 손을 닦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까?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습니까?' 
따지고 논쟁했어요. 

그러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달랐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 앞에 나왔을 때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 앞에 나아가십니까? 

이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예수 앞에 나올 때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믿어야 돼!' 
그런 맹신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 영생을 얻어드리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인마, 묻지 말고 무릎 꿇어!' 뭐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오히려 예수께서는 아주 친절하고 따뜻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해라' 
따뜻하게 가르쳐 주시고, 또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물어보고 따지고 하는 것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들이 뭔가를 물어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싫어하시고 그들을 떠나신 것은, 적어도 아니라는 거예요. 
문제는 그들의 마음, 태도에 있는 것이었죠. 

오히려 이 부자청년은, 진짜 궁금함을 가지고, 진짜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을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사랑하셨더라. 
성경에 그렇게 얘기하고 있잖아요. 
물론 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떠나가긴 하지만요. 

바리새인들과 이방 여인, 이 두 부류의 대조는, 
이들의 마음과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드러나는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 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1. 예수님께 <영적인 문제>를 들고 나왔던 수로보니게 여인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예수 앞에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왔느냐가 달랐어요. 

뭐냐면 왜 나왔냐?, 어떤 것을 원해서 나왔냐? 
무슨 문제를 가지고 나왔냐? 이게 달랐다는 거예요. 

본문 말씀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은 '손을 닦을 것인가, 말 것인가?' 
즉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어요. 

행위의 문제, 보이는 문제, 육의 문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의 문제, 
즉 '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다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귀신의 문제는 
'손을 닦느냐, 안 닦느냐', 이런 논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귀신의 문제는 여러분, 논쟁이나 설명을 해서 
귀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이 여인이 귀신의 문제를 가져와서 
예수님께 신학적인 걸 물어봤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만지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율법에서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런 걸 물어본다든지, 

아니면 '사람이 귀신 들릴 수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맞습니까?' 
이런 걸 물어본다고 합시다. 

이런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아, 율법적으로는 그게 맞구나. 아, 귀신 들릴 수 있구나'
뭐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이해가 된다고 해서 
여러분, 이 딸의 귀신 들린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안 되지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거죠.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켜주는 해법은
땅에 속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될 때가 많다는 거예요. 

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걸 알았어요. 
'아, 내 딸의 귀신 들린 문제는 논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구나. 율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구나. 
왜? 이 땅에 속한 문제가 아니거든, 영에 속한 문제거든!' 

그의 딸의 문제는, 영에 속한 문제였다는 거예요. 
율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거예요. 

이 여인이 이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께 나와서 엎드립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엎드립니다. 
율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거든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가는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보이는 세상의 종교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의 문제,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은, 바로 나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 땅의 문제로 예수를 찾아가는 자는, 예수와 논쟁하게 됩니다. 
이성으로 뭔가 해결하려고 그런다는 거예요. 

예수 앞에 나가도, 땅의 문제를 가져 나가는 자는 
이성으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율법의 문제, 무엇을 해야 되는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가?
이렇게 땅의 문제로 예수께 나아가는 자는, 끊임없이 이것을 논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논쟁을 통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키든지 
아니면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이해가 되든 
그것을 내가 요구합니다. 

그러나 영의 문제로 예수를 찾는 자는, 그저 엎드립니다. 
왜요? 논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종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왜 지엽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 자꾸 매이게 되는 줄 아십니까? 
영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옆에 나가지 않아서 그래요. 

영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내 영은 안녕한 건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이 죄와 저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내 영혼은 구원을 받았는가? 
이런 영의 문제들이 있잖아요. 

율법으로는, 이 땅의 지혜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이 영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가 예수 앞에 나아가게 되면,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 앞에 꿇을 수밖에 없죠. 왜요? 

지엽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영의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성가대가 가운을 입을 건지/ 안 입을 건지... 
그런다고 내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런다고 내 영혼의 문제가 해결이 되냐고요? 

그런다고 지옥 갈 저주가 천국 갈 축복으로 바뀝니까? 
그런다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이 자유함을 얻습니까? 
아무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또 우리 개인이 종교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면 
'땅의 것을 자꾸 바라보는 거에요.' 
'땅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아가는 거에요.'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아니요. 여러분, 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아갑시다. 
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아갑시다. 

나의 영은 안녕한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는가? 
지옥의 저주를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천국은 어떻게 갈 것인가? 

논쟁하고 이해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영의 원리는, 자연과학의 원리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원리의 가장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권위가 있어요. 

영은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영적 세계는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빛이 있으라!' 그럼 빛이 있는 거에요. 
'하늘과 땅이 나뉘라!' 그럼 나뉘는 거에요. 
왜요? 권위 있는 자가 말씀했거든요. 

영의 원리는 여러분 자연과학의 원리랑 달라요. 
자연과학의 원리는 권위 있는 자가 얘기했다고 해서 
'비가 내려라' 그런다고 비가 오는 게 아니지요. 

그런데 영의 원리는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영의 원리는, 권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원리예요.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가 '빛이 있으라' 그러면 있는 것이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가 '귀신아 떠나가라', 그러면 떠나는 것이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가 '질병아 고쳐져라' 그러면 고쳐지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영의 원리입니다. 
영의 원리는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권위 있는 자가 영을 움직이는 거예요. 

자 그래서 영의 문제는, 논쟁하고 이해하고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영의 문제는 권위 있는 자 앞에 무릎 꿇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이것이 영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깊은 곳에는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영의 문제예요.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가 <부부의 세계> 라면서요. 
그런 거 보지 마세요. 여러분, 너무 세속적이에요.
그게 요즘 히트를 치며, 하여간 우리나라 막장이라고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는 부부의 문제가 있잖아요? 
그 깊숙한 곳에 가보면 여러분 뭐가 있는 줄 아세요? 
영이 있어요! 

'내가 옳다'라고 하는 영이 있고, 
영은 뭐냐면 믿음이거든요. 

'남자는 이래야 돼!', '여자는 저래야 돼!'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냥 자기 믿음이에요.
그게 견고한 사람은, 그 안에 보면 '영'이 있어요. 

그래서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것 같은 부부의 문제부터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 
이거 다 밑바닥에 가 보면 영이 있거든요. 

자본주의의 영은 뭐에요? 돈이죠. 맘몬신이죠. 
공산주의의 영은 뭐예요? 물질이죠. 유물론이죠.
영이 결국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은 문제들을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이런 문제들은 여러분, 논쟁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 논쟁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벌써 다 해결되었을 거예요.

부부싸움 이게 다 논쟁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논쟁을 했겠어요? 
그런데 해결이 안 되잖아요.. 영적인 문제라서 그런 거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은, 권위 있는 분 앞에 나가서 
엎드릴 때만 해결돼요. 

그래서 목회하면서 이거 참 많이 경험합니다. 
제가 부부 문제 상담을 참 많이 했습니다. 
미국 유학생 때부터 젊은이들 사역을 주로 했으니까요. 
결혼한 신혼부부들의 부부 상담을 참 많이 했는데요. 

결국 어떤 상담을 해줘도 다 미봉책이고 
결국 해결책은 무엇 밖에 없는지 아세요? 
예수 앞에 나가서 무릎 꿇는 것, 그것밖에 해결책이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수많은 상담을 해주고 '이것 좀 해봐, 저것 좀 해봐, 
이렇게 하면 좀 나을 거야, 저렇게 하면 나을 거야' 
그건 그냥 증상을 완화시키는 미봉책이고요. 

진짜 근본적인 해결책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부부 각 사람이 예수 앞에 나가서 무릎 꿇어!' 

권위자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영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아무리 머리 굴려 궁리하고,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지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해를 해도.. 영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육의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될 수 있을지 몰라요,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해결에 진전을 보일 수 있을 지 몰라요.

그러나 영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의 문제는 예수 앞에, 그 권위 있으신 분 앞에 
겸손히 나아가 무릎을 꿇을 때 
그제야 비로소 영의 문제가 풀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주목하신 건, 바로 이 포인트였어요. 
'어? 이 사람은 뭐야?' (대단한 믿음인데?) 
여인이 '영의 문제'를 들고 나온 거에요.

그리고 여인은, 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를 아는 거에요.
영적인 권위 앞에 나와서 해결할 줄 알았던 거죠.

예수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것은 
종교적인 세련됨이 아니었어요. 
'무엇을 들고 나오느냐? 
영의 원리를 알고 있느냐? 
권위자 앞에 나와서 무릎 꿇을 수 있느냐?' 

성경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눅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뭐예요? 나는 육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낸 받은 자가 아니야! 
이런 뜻이잖아요. 

이 사람도 나름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우리 집안의 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지금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 주십시오!' 나름 뭔가 이슈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 본질에 가보면, 결국 돈 문제라는 거예요. 이 땅의 문제라는 거죠.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뭔가 종교적으로 포장은 해가지고 나가는데, 
그 본질에 들어가 보면 땅의 문제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결국 뭐라고 그러실까요? 
물론 뭐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도와주시기도 하시지만 
궁극적으로 뭐라 그러실까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의 사명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예수께서는 더 본질적인 영의 문제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잖아요. 
영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뭐예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는 거잖아요. 요일3:8
영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가십니까? 
어떤 문제를 들고 예수 앞에 나가십니까? 

그 이야기는, 진짜 여러분 안에 중요한 건 뭡니까? 
땅의 문제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문제입니까? 
그거를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거에요. 

예수님께 주목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7:26~28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참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다. 뭐예요? '너는 개다' 이런 뜻이잖아요. 
'나는 사람을 위해서 왔지, 개를 위해 오지 않았어!' 

면상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요, 감정 컨트롤하기가 참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 이거 뭐야? 아니, 내가 와서 무슨 험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아니, 보자마자 초면에 나를 개 취급 하다니..'

와, 여러분 이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침 뱉고 돌아갔을 거예요.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만 이렇게 대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막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하시매'
강도라고 하셨고요, 

마12:34에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하여간 센 말들을 하셨어요. 
그것도 면전에 대고, 센 말씀을 하셨어요. 

자 그랬더니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게 대부분의 반응이죠. 
막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게 뭐 자연스러운 반응 아니겠습니까. 
뭐 실제로 죽이든 아니면 '이 수모를 어떻게 갚나?'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전혀 달랐어요. 
여인은 예수님의 무시하는 말씀 앞에, 예수를 죽일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자아를 죽였습니다. 반응이 달라요. 

이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예수 앞에서 겸손이라는 건 뭐예요? 예수께서 옳으시다는 거예요. 
그걸 동의하는 거예요. '예, 당신이 오르십니다!'

반면 예수 앞에서 교만은 뭐예요? 
'내가 옳습니다!' 이거예요. 
이게 수로보니게 여인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입니다. 

예수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게 뭐예요? 
이 태도를 보신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것은, 이 태도라는 거예요. 
예수께서는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십니다. 

그냥 단순히 보시는 게 아니라 확인하십니다. 
그래서 어떨 때 보면,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좀 이렇게 도발적인 말씀들을 하시잖아요. 
'진짜로 그 안에 믿음이 있는가?' 확인하시는 거죠.

▲나사로가 병으로 죽어갈 때, 일부러 삼일을 지체하십니다. 
제자들이 아우성입니다. 
'스승님 지금 뭐하십니까? 지금 빨리 가셔야 됩니다. 
잘못하면 나사로가 죽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꼼짝도 하지 않으십니다. 
물으시는 거죠. 
'지금 가야 된다고? 아니, 나는 지금 안 갈 건데?' 
이거는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물어보시는 거예요.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댑니다. '다. 끝났어, 죽었어!'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끝나지 않았어!' 
뭐예요? 물으시는 거예요.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그리고 지금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개야'
'아니 저 사람인데요?' 

'아니 너는 개야,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우리에게도 여러분 동일하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동일하게 물어보시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 앞에 나아가면요. 
영적인 역사를 경험하기 전에 반드시 주님은 체크하십니다. 
반드시 주님은 물어보세요.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네 안에 겸손함은 있느냐? 

내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네가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겸손함은 갖춰져 있느냐? 

아니면 너의 그 알량한 경험과, 너의 그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아니요. 예수님, 그건 옳지 않은데요? 
아니요. 예수님, 그건 이렇게 해야 되는데요?
아니요. 예수님, 나사로한테는 빨리 가봐야 되는데요?
아니요. 예수님, 얘는 죽어서 다 끝난 건데요?'

오늘 어쩌면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바리새인처럼 예수를 죽일 겁니까? 
아니면 여러분 안에 있는 '내가 옳다' 라고 하는 그 자아를 죽일 겁니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거에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것이 영의 원리예요. 

영은 여러분, 교만 또는 타락한 자아 하고는 상극점에 있습니다. 
절대로 같이 공존하지 못해요. 

이 영은 마치 물 같은 속성이 있어서, 계속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돼 있어요. 
그러다가 교만이라고 하는 장벽이 있으면 딱 막혀서 
더 이상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의 원리는, 권위이기 때문에 그래요. 
권위자가 '이렇게 되라!' 그러면 그렇게 되는 건데, 
교만은 권위자의 말에 동의를 안 해요. 

'아니요, 내가 옳습니다'
그럼 뭐예요, 여러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영도 안 움직이는 거에요. 이게 영의 원리예요. 

잘 기억하십시오. 영의 원리는 권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건데 
타락한 자아, '내가 옳다'라고 하는 그 생각, 

이게 여러분 선악과 아니었습니까?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거야' 이게 교만이거든요. 

권위자가 '이게 옳은 거야, 이게 틀린 거야' 하셔도
'아니요, 나는 그거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내가 결정할 거예요'
이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태도였어요.
 
'어찌하여 손을 닦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권위자거든!' 

안식일 문제도 마찬가지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권위자거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빡빡 우깁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내 경험, 내 알량한 지식, 내가 옳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내가 옳습니다.'
하는 교만이거든요. 
거기에는 여러분, 어떤 영적인 역사도 흘러가지 않아요. 

그래서 영의 역사를 경험하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여러분이 하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옳으십니다' 하는 이 고백이에요. 

무엇이라고 말씀하신지 간에 
'당신이 옳으십니다. 나는 당신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셔도 나는 당신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이렇게 자아를 죽여야 돼요. 어떻게? 

'예, 나는 개입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옳으십니다. 
설령 나를 개라 하셔도 예, 당신이 옳으십니다. 

설령 나로 이해할 수 없도록 삼일을 지체하게 하셔도 
예, 당신이 옳으십니다. 

설령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지라도 
예, 여전히 당신이 옳으십니다.' 
이 겸손을 예수께서 보기 원하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권위자거든!' 

▲우리 말씀을 정리합시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가 내게로 오느냐? 그러면 죽을 각오는 돼 있냐?'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거에요. 

바리새인처럼 그 말씀에 반항하고, 그 말씀에 저항함으로 예수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내 자아를 죽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 앞에 나아가면 이 싸움이 벌어져요. 

내 안에 있는 예수를, 즉 예수의 말씀을 그냥 묻어둘 것이냐? 
그건 '내가 옳습니다' 하는 태도죠.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어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면 
'예, 당신이 옳으십니다!' 
정말 내 자아가 죽는 거지요.

우리 안에 그 교만이 죽을 때 
비로소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 전에는 여러분 영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영이요. 딱 막혀 있어요. 

그러면 내 혼과 육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내 논리로 살아가는 거에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전혀 그러지 않고 
와서 엎드릴 때 
무엇이라 말씀하셔도 '당신이 옳으십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마음과 태도로 나갔을 때 
그 위에 성령의 역사가 부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를 보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음이라' 

예수께서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거예요. 

그 태도를 주목하여 보시고, '오케이 너에게 믿음이 있구나'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 믿음이 역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