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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배船를 비우십시오

LNCK 2023. 6. 18. 12:48


◈당신의 배船를 비우십시오       눅5:1-3         05.02.27. (과거 냉수한그릇 창고 글)

▶몇 해 전에 어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학교에는, 자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을 해서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던 여섯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훈계해도 안 되고, 징계해도 안 됩니다. 
교화시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삐뚤어져 갑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교장선생님이 이 학생들을 데리고 
정신박약아 수용시설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있으면서 몸도 못 가누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했답니다. 

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화장실을 데려가고, 
아이들이 잠잘 때면 빨래를 하는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얼마나 고됐겠습니까? 
처음에는 모두가 다 불평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이런 데 데려다가 부려먹을 수 있느냐고 투덜대더랍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 학생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정신박약아들을 돌보면서 자신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자신같은 사람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자기들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다른 누군가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맘을 바꾸고, 
그들 중에는 이런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언제 가장 사는 보람을 느낄까요? 
아마도 자기가 쓰임 받을 때일 것입니다. 

이 여학생들은, 여태까지 자신들은 보잘 것 없고 
살 가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자기들도 뭔가에 쓰임받을 수 있다고 깨닫자 살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 또는 어떤 일인가에 쓰임 받을 때
 사는 뜻과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일 걱정하는 것 또한 공부를 마치고 나서 (유학생 주축 교회)
"아! 내가 쓰임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것일 겁니다.  

▶오늘 우리는 배 위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 배는 누구의 배입니까? 
베드로의 배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배는 고기잡는데 쓰였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강단講壇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배를 뭍에서 약간 떨어 뜨려놓고 
그 위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호숫가에는 베드로의 배 말고도 
또 한 척의 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배 가운데 베드로의 배를 택하시고 
그것을 빌려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두 척의 배 중에서 왜 한 척만이 
예수님께 쓰임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베드로의 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셨겠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여러 사람을 위해 쓰여질 때 참 뿌듯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주님을 위해 쓰여질 때 
거기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촛점은 '어떻게 해야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오늘 제목처럼 
‘자기의 배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대체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은 
초저녁에 나가서 밤을 꼬박 세우고 새벽녘에 일을 마칩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리고 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렸을 겁니다. 

고대 사람들은 별의 흐름을 보고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데, 
첫 번째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깔릴 무렵이라고 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그물을 끌어 올렸는데 
뭔가 묵직하질 않고 가볍게 당겨지는 겁니다. 
다 끌어올리고 보니까 한 마리도 안 잡힌 거예요. 

여러분! 가득 잡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고기 한 마리 안 잡힌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마 일부러 그러게 하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래도 "뭐 한 번이야 그럴 수 있겠지!" 그러면서 또 그물을 내려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 마리도 없는 겁니다. 
또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도 없어요. 
오기가 생깁니다. 또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분명 있겠지!"하면서 끌어올렸습니다. 그런데 또 허탕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느새 동이 뿌옇게 터 오고 있는 거예요. 
밤새 헛그물질만 한 것입니다.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사실, 사람은 결과가 좋으면 피로도 잘 못 느끼는 법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면 그 피로는 몇 곱으로 몰려오는 겁니다. 
밤새 헛손질만 했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마도 몸과 맘이 모두 극도로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호숫가에 배를 대놓고 또 내일을 위해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셔서 배를 좀 빌려달라고 하신 겁니다. 
피로가 자기를 겹겹이 감고 있는데, 
얼른 손질을 마치고 집에 가서 자야겠는데 
배를 빌려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일단 배를 빌려드리면, 예수님의 일이 마쳐질 때까지는 
꼼짝없이 그 옆에 잡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빌려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뭔가에 끌려서인지는 모르지만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를 빌려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배를 내 드렸다는 것은 베드로에겐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배는 곧 베드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의로 주님을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뭔가 거절할 수 없는 예수님의 초청이 있었던 겁니다. 

감사하게도, 베드로나 우리나 그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절반의 성공입니다. 
그러나 아직 절반이 남았습니다. 

우리의 배가 완벽하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바로 비우는 일입니다. 

베드로의 배가 쓰임을 받은 것은 그 배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배가 평소대로 그 안에 이런저런 것들로 차 있었다면, 
예수님은 배에 오를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일정 기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을 광야에 계셨고, 
다윗은 광야에서 오랜 세월을 지냈고,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을 있었고, 
요셉은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13년간 있었고, 
모세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다 무슨 시간이었겠습니까? 
비우는 시간이었던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가득찼던 것을 다 쏟아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채워야 되었기에 
그런 시간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워야 합니다. 

원래 베드로의 배에 있어야 할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 세 가지가 다 비워졌을 때, 그 배는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첫째, 그물을 비웠습니다. 
어선을 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배 안에서 그물이 차지하는 공간은 반이 넘습니다. 

그물 때문에 운신을 못할 정도입니다. 
그물은 일하는 도구입니다. 수단입니다. 그게 없으면 고기를 못 잡습니다. 

고기잡이를 할 때나 안 할 때나 늘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게 그물입니다. 
그게 없으면 못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것을 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있으면 주의 일을 하기에 훨씬 더 편할 것 같은데, 
그걸 비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있으면 하나님 일하기가 좋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것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권력이란 그물은 주의 일을 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돈으로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하나님 일 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쉽기도 하고 효과도 금방 나타납니다. 

하지만 돈으로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하다가 
시험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컴퓨터를 잘 하는 사람은 컴퓨터로,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은 경영으로, 
음식을 잘 하는 사람은 음식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진 달란트를 사용하면 효과 만점입니다. 
또 엄청나게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지식은 영적인 힘과 결합할 때만이 
더 강력해지고 오래가는 법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가진 수단이나 방법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거부가 됐습니다. 
거기까지는 자기 힘으로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겁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의 마음을 꺾는 거나, 
뒤틀린 아들들을 바로잡는 것은 
자기 능력 밖이었던 겁니다. 

기억하십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재능과 지식 이전에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파워인 것입니다. 
권력보다, 돈보다, 달란트보다 주님이 더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 꿇어 엎드리는 무릎입니다. 

주 앞에 가지런히 모은 손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입술인 것입니다. 
새벽에 달려 나오는 발길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입니다. 

주의 일을 제대로 못할까봐 두려워 떠는 그 조바심을 
주님은 받기를 원하십니다.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가라면 영국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꼽습니다. 
참 훌륭한 설교가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떤 분이시냐 하면 의사였습니다. 
의사도 보통 의사가 아니라 왕립 의사였습니다. 

영국에서는 국립 National 보다 더 위에 있는 게 Royal 왕립입니다. 
왕립의사라는 것은 명예와 돈과 실력, 튼튼한 배경, 
이 모든 게 다 있다는 얘깁니다. 

이 분이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을 때는 왕립의사라는 것을 
최대한 살려서 목회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도, 진료도 해 주면서 목회를 하면 
대단히 유리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안 존스 목사님은 진료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설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아직도 그 분을 따라갈 만한 강해설교가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권력이란 그물, 돈이란 그물, 재능이란 그물을 다 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네가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을 다 비우고 
나 예수가 주는 능력을 최우선으로 사용하라!"  

우리가 첫 째로 비워야 할 것은 우리가 의지하는 수단과 도구인, 그물입니다. 
그 그물을 비움으로서 주께 쓰 임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배에 있었어야 할 것은 고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배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고기가 비워져 있을 때, 그 배는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배에 고기가 없는 것은 물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아서였습니다. 

어찌보면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이 
예수님께 빌려드리기에는 훨씬 좋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진 게 없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주님은 우리의 그런 상태를 더 좋아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고기가 배에 있게 되면 배 안에는 냄새가 나게 됩니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할 겁니다. 
그러면 냄새나는 배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기에는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배는 빈 배입니다. 
고기가 없어서 냄새 또한 나지 않는 빈 배입니다.  
그럴 때 이 배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장소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고기는 무슨 의미일까요? 
고기는 그 배가 있기 위한 궁극적 목적입니다. 

고기를 잡아서 팔아야 돈이 생기고, 
그 돈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는 베드로의 야망이요, 삶의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라도 더 잡아보려고 여태까지 몸부림을 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 목표와 야망이 없어졌을 때 
그 배는 쓰임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만을 위한 목표를 버려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늘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메시야로서 자기 나라를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줄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모두가 마음 한 켠에, 자기의 야망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해방 이스라엘이 되면, 자신들이 독립운동가로서 
예수님과 함께 왕의 대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야망은 출세요, 권력이었지만 예수님이 바라신 것은 순교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인도에서, 로마에서, 이름모를 곳에서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거나 
톱으로 켜져서 순교하는 거였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바램이셨습니다. 

우리의 야망과 예수님의 소원은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소원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쓸 데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저 자신을 한 번 바라봤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또 매일 새벽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우리 교회의 부흥을 원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부흥인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께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인가? 
흔히 큰 교회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감과 당당함을 
나도 한 번 누려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교회가 부흥하면 교회가 목사에게 베풀어주는 
온갖 편리함을 누려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설교를 잘 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떠받들어주는, 
그런 인기를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가? 

목사가 교인들에게 뭔가 한 마디만 지시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런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이 모든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곤, 
제가 아직도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속에 우리만을 위한 야망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비우십시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향한 거룩한 목적, 거룩한 야망을 갖도록 하십시다. 

지금 이시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기를 모두 다 배 밖으로 던져 버립시다. 
그래서 주님께 다시금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그 배에는 지금 반드시 있어야 할 어부가 없습니다. 

바로 베드로 자신이 그 배에서 내려왔을 때, 
그 배는 존귀한 일에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배는 베드로의 배였지만, 그는 그 소유권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배에 남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자기 배라고 해서 만약 베드로가 그 배에 남아 있었다면, 
그는 어쩌면 착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래 있고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자기도 뭔가 된 것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완장을 채워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속물 근성이 
인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부인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비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이름으로 채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다 버릴 수 있어도 딱 한 가지 못 버리는 게 있지요? 
자존심입니다. 
무시당하는 것, 그것만큼은 참지 못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당하면 사람들은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는 영화배우 송강호를 존경합니다. 
저는 그 배우를 보면서 늘 복음을 듣습니다. 

다른 배우들은 영화 속에서도 자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영화 속에 자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여지없이 이발사요, 형사요, 북한군이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조폭두목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없을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예수가 산 것일 수 없을까요? 

내가 그리스도의 거울이라면 나 때문에 
주변 사람이 예수의 모습으로 전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야 될 사랑의 전령(傳令)이라면, 
우리가 가는 길엔 그 사랑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텅 빈 베드로의 배를 보십시오.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존귀하신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도 그 배 주인임을 포기하고 아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혼의 저 깊은 곳에서 
소망이 펑 터져나오지 않았을까요? 

내 배를 비우고, 내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킬 때, 
우리 속에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강같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의 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베드로의 배는 다시 원래의 목적대로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그 배는 이전의 베드로가 주인이었을 때의 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배였습니다. 

말씀따라 배를 몰고 나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고기가 잡힐 때가 아니었는데, 그물을 끌어올리려고 
손목에 그물 끝을 감았는데 이상했습니다.   

들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물이 이렇게 되는 경우는, 그물이 수초와 완강하게 얽혔을 땐데 
그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물고기였습니다. 
고기가 떼로 몰려 든 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것을 비울 때, 그때부터는 주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에서 고기들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그 놈들이 토해놓은 무지개 빛 물보라를 보면서 황홀해 했을 겁니다.     

우리도 그런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십시다. 
우리의 수단을 포기하십시다. 
우리만을 위한 야망도 접읍시다. 
나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그래서 이제부터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십시다. 
우리가 우리 것을 비워서 우리가 어떻게 쓰임 받는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십시다. 

그물도 비우고, 고기도 비우고, 나 자신까지 비우십시다. 
여러분께서 지금 작게나마 쓰임받고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비우셨기 때문에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비우도록 노력하십시다. 
우리가 많이 비우면 많이 비울수록, 주님은 우리를 더 크게 쓰실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99%비우는 게 아닙니다. 
100%를 비우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비우게 하셨던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배를 비우라고 하십니다. 
내 수단의 그물, 내 야망의 고기, 아무 능력없는 나 자신까지 비우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모두 비우고, 주님께 크게 쓰임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