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아침기도회 김영준 목사 - YouTube *33:15초부터~
◈ 성령의 인도에 유연했던 베드로 행10:1~35 2023.06.16.
<내적 음성, 예언>관련글 모음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간 스토리입니다.
우리가 익숙히 아는 내용이라서, 본문 설명은 생략합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가 '오늘 내가 아무개 집에 찾아가서 어떤 일을 해야지...'
라고 궁리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강력한 방법으로 베드로를 감동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을 만나,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일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뭐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루틴으로 일어나진 않았겠죠.
가끔씩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겠죠.
그런데 5~10년 경과해도, 한 번도 안 일어나면... 자신을 돌아봐야죠)
성령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데리고 가실 때까지
베드로는 영문을 몰랐고, 할 말을 갖고 있지 않았고,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그를 만나고, 영적으로 교제하는 순간에
베드로는 그 때에 비로소 자기가 그곳을 찾아 온 이유를 알았고,
할 말이 생겼고, 줄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강력하게 줄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이에요.
여러분이 이것을 배우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님이 하시는 일, 우리가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지레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겠지..' '나도 이래야 되겠지...'
일평생 성도들을 지배하는 선입견,
'예수 믿는 사람은 당연히 이래야 되겠지.. 저래야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주님은 전혀 우리의 선입견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성도가 항상 성령의 능력을, 갑옷처럼 24시간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원하지만,
성령의 권능이 내가 원할 때 나를 항상 따라다니거나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기가 왜 거기 보내졌는지 몰랐고
가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고,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실지 몰랐어요.
몰랐지만 순종해서 간 것입니다.
평소에 사도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사도'라고, 늘 '내가 누구에게 전도해야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지..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시겠지' 를 지레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사가 칼을 차고 다니지만, 항상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리스도인도, 자기가 전할 구체적인 말을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마음 준비는 항상 하고 있어야 되겠지요.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은, 그냥 책을 들고 가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무슨 말을 할지를 알고,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누구를 만나게 하셔서 마음을 감동하실 때
그때 비로소 무슨 말을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감동이 있어야 되고,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요청받아서 심방을 갈 때
대다수의 성도들은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할지를 알고 준비하고
들고 올 것으로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제가 도착하면, 도착하자마자 안방에 들어오게 해서
방석을 깔고, 그리고 목사가 성경책을 열고 준비한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갔을 때
고넬료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할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주의 종이 미리 말씀을 준비해 가서, 전한 게 아닙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어야 되고, 믿음과 믿음의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이 감동하시고,
성령이 감동하실 때 말씀이 촉발이 되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 떠오르고
그리고 '아 이 일을 위해, 나를 여기로 보내셨구나,
내가 이 말씀을 전하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목사가 집에 도착하면, 마치 미리 준비해온 말씀을 전할 수 것이라 생각하는데
성령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서 기도해서, 미리 받아오는 방식도 있습니다)
결국은 다수의 성도들은,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주목하고, 저분이 기능적으로 목사이기 때문에
저분이 역할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분이 직분적으로 주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은혜를 끼칠 수 있으리라'는
약간의 샤마니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물어봤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나를 무슨 일로 불렀습니까?' 행10:29
목사의 입장에서 뻔 한 것 아니에요?
성도가 왜 불렀겠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고넬료의 입을 통하여
베드로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의 집으로 왔기는 했지만
그러나 어떤 일인지를 넘겨 짚으려고 할 수 없고
고넬료가 자기 입으로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초청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전할 말씀을 듣기 위해, 당신 앞에 모여 있습니다.' 라고 말할 때
그때 비로소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제야 내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은혜주시는 것을 알았도다' 라고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목회를 하면서 심방도 많이 다니고,
성도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인도하고, 설교도 많이 하며
열심히 하고 성심껏 했지만
'왜 더 효율적이지 않고, 더 은혜롭지 못할까?' 에 대해서 늘 고민했는데
그 이유는, 성도도 그렇고 목회자도 그렇고,
성령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확신을 모르고
노하우를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선입견대로 목회를 하고
심방을 받고, 선입견대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주님이 당신의 말씀을 하고, 당신의 일을 할 만한 여유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목회와 사역 현장에
주님의 능력이 더 나타나기를 원하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방식을 바꿔야 됩니다.
(고정된 방식에서 유연하게) 방식을 바꿔야 되고
우리의 선입견을 버려야 되고,
성령주도적으로..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이 일하실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우리의 믿음으로 만들도록 애를 써야됩니다.
(*미리 준비하지 말고, 주님이 그때 주시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뜻인듯. 대체로 고수들의 방식)
(그 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넘겨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라고 하더라도, 넘겨짚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화를 나눈 거죠.
예수님의 수제자니까, 뭐 사도니까, 넘겨 짚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물어보고,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29
그러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이 전하라고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거죠.
베드로라도 주님의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지레 짐작으로 넘겨짚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의지해야 되고, 허락하셔야 되고,
축복하셔야 되고, 은혜를 주셔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고, 말씀을 주셔야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오순절이 임하기 이전에 이미 베드로는
그때 그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맛디아를 뽑을 때,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에 이런 이런 말씀이 있고,
유다가 떠나갔으니, 이제 예수님이 처음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있었던 자 중에 한 사람을 뽑아서
그 빈자리를 메꿔야 되지 않겠느냐'
이걸 주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그때 그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베드로가 설교하게 된 계기는
사람들이 성령충만한 사람을 보고서, 더러는 '술 취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아니요. 지금이 오전 9시니 이들이 술취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은 설교입니다.
설교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고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미문 가에 장애인을 일으켰을 때도
원래 설교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기와 요한을 주목하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에 사람들아, 어찌하여 우리의 능력과 경건함으로
이것을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라면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인물입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그때 그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잘못하면 비판받는 즉흥 계시)
그렇기 때문에 미리 고넬료가 자기를 불렀다고 해서
할 말을 준비하고 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고넬료가 나를 왜 불렀을까?
어떤 일을 하나님이 하실까?'를 알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던 거죠. :29)
그걸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어요?
무슨 형식적인 말을 하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을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넬료가 마음을 열 필요가 있고,
고넬료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베드로가 느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고넬료가 자신을 낮추었어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올 때,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했죠.
베드로가 '우리는 사람이요. 우리에게 절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 대화를 하는 중에
고넬료가 자신의 믿음이 담긴 말을 했죠.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행10:30~33
그 말을 듣고 베드로의 마음이 감동합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알았도다' :34
그러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죠.
베드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어요.
정말로 예수님의 증인이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어요.
자기가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할 때도 예수님을 전했어요.
'이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이 사람에게 건강을 주었다' 행3:16
또 성령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내려 주셨도다.
너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에게도 성령을 주시리라'
이런 식으로 베드로는 늘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도, 예수님에 대해서 말을 했죠.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계획을 하고, 계획을 실행하고
이 일을 수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목사들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고, 경영학을 공부해야 됩니다.
경영학, 마케팅, 또 이 일을 수행하는 능력, 플래닝.. 이런 것을 공부해야 되겠죠.
하나님의 나라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계획을 한 게 아닙니다.
'내가 오늘은 누구네 집을 심방할까?
내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계획을 해서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데,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이 나타나서
'너는 누구누구에게 가라' 라는 지도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면
이방인에 대해서 평소에 갖고 있었던 편견을 깨뜨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공부해서 되는게 아니고, 계획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일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되고
주님이 인도하실 줄을 믿어야 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를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이 일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
나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건 어떤 계획을 해서, 무슨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서
그렇게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서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베드로가, '누구를 전도하면 도움이 될까?,
누가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에 보탬이 될까?'
이런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잖아요.
베드로는 그런 식으로 고넬료를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재력이 있고, 이런저런 능력이 있으니
저 사람이 교인이 되면 도움이 되겠네..'
이런 식으로 고넬료를 주목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그런 말입니다.
우리 눈에는 고넬료가 유력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백부장이고, 영향력이 많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우리 눈에는 백부장이 유력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베드로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집을 찾아간 것이 아니에요.
그 일 때문에 그를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참 좋을 텐데...
저 사람이 교인이 되면 참 유익할 텐데...' 이렇게 해서 전도한 적이 있죠.
얼마나 우리 생각대로 적중이 됩니까? (적중 안 됩니다)
그거야말로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주님이 그런 식으로 일하신다면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안 불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식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보지 않았죠.
베드로가, 사자가 사냥하는 것처럼 '누가 적합할까?'
무슨 세일즈하는 것처럼, 무슨 보험 판매하는 것처럼
누구를 타겟으로 정해서, 그렇게 접근하면..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를 전도한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고넬료는 전혀 레이더 망 바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주님 당신이 주도하셨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셨어요. (그럴 여지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찬송가
베드로가 그것을 배웠어요.
3년 반 예수님을 좇으면서,
그 이전에 세례요한의 제자로 있을 때에도
그의 신앙의 트레이닝을 통하여 배운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 열심으로 되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계획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내 의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성도들이 막연한 의무감을 갖죠.
성도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교회가 막연한 의무감을 심어줍니다.
'뭐를 해야 되고, 이렇게 살아야 되고..' 막연한 의무감을 잔뜩 심어주는데
그것처럼 성도들의 마음에 안타까움을 일으키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뭔가는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모르다 보니까
해야 되는 일을 못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죠.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럴 것입니다.
뭔가는 해야 되는데 못하는 거,
그걸 느끼면서 늘 부족한 마음으로 사는 것인데
여러분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까?
막연한 의무감을 줍니다. '전도하십시오!'
주님은 막연한 그런 의무감을 주고 일하게 하실 것 같습니까?
(막연하게 말고, 성령의 떠밀림이 있을 때, 전도하십시오.. 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막연한 의무감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아갈 수 있습니까?
막연한 의무감으로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하실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막연한 의무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선한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선한 의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트렌스 로컬, 그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즉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성령께서 베드로의 사역의 범위를 초과하게 하셨어요.
로컬 지역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사역의 범위를 넓히셨죠.
이것이 사도의 역할이에요.
사도는, 목회자의 목회자입니다. 교회들의 감독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독하고 코칭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사도 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노회장, 또는 주교
사도 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장로와 사도를 구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의 역할이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도 에게는 그 지역을 초과 (트랜스 로컬)하는 역량을 주님이 주셔서
이제는 이방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말씀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이러한 은혜를 오늘날도 주님이 주시기를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 오 거룩하신 주여, 옳소이다.
주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시고,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서
그 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복음이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아직도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자,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아버지여, 저희가 평소에 계획하고 넘겨짚을 수 없으나
그러나 주님이 하시는 일에, 저희가 동참하게 하옵소서.
저희 모두에게 순적한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저의 모두에게 즐겁고 복된 길을 허락하옵소서...
아버지, 베드로에게 그 지역을 벗어나는, 범위를 벗어나는 사역을 주신 것처럼,
저희 교회로 하여금, 로컬을 벗어나서, 현재 사역의 범위를 벗어나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 또 새로운 사람 군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세계선교를 위한 일이요,
여러 백성과 여러 방언에게,
주의 생명을 전할 수 있는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뉴욕행 열차에서 체험한 ‘성령의 인도’
그 다음 또 제가 한번 체험한 것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저녁에는 뉴욕 33가에 와서 집회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행 열차를 탔습니다.
저녁 5시쯤 기차를 타고서 뉴욕으로 오는데
뉴욕에 와서 지하철로 바꿔 타는 것을 내가 몰랐어요.
나는 가방을 열어서 책을 꺼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뉴욕으로 갈 사람은, 뉴욕 근처에서 지하철로 갈아타야 됩니다.’ 방송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확 내려요.
그래서 나도 벌떡 일어나는데 가방을 안 닫고 일어나서 다 쏟아졌습니다.
내 파자마로부터 시작해서 치약, 칫솔, 런닝까지
사람들의 발에 걸려서 끌려 나가고..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는 그것 주워 담는다고 막 주워 담는데, 짐이 많으니까 가방이 잘 안 닫히잖아요.
무릎으로 눌러서 닫는데, 기차가 그냥 문을 닫고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정거장에 내리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확 타는데
내가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요. 큰 일 났습니다.
저녁 집회시간은 다가오고... 그래서 내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하철 놓치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뉴욕 맨해튼 33가에 저녁 7시에 설교를 해야 되는데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도를 하니까
앞에 험상궂은 사람이 다가와서 내 등허리를 탁탁쳐요.
“당신 어디에서 왔느냐?”고 그래서 미국에는 갱이 많다고 하는데
이 사람도 갱이 아닌가 싶어서
내가 한국서 왔다고 하니까 아주 반기면서
“내가 한국 전쟁에 참석한 전쟁용사라고, 한국을 내가 참 좋아하고,
한국 전쟁에서 내가 살아서 돌아왔는데, 한국사람 만나니까 반갑다”고 하면서
어디 가냐고 그래서 “내가 맨해튼으로 가는데 지금 어디냐?”고 하니까
“아이구 여보시오. 당신은 지금 맨해튼하고 정 반대편으로 가고 가는데
당신 이쪽으로 가다가는 맨해튼 못 간다. 그런데 맨해튼에서 뭐 합니까?”
“난 목사인데, 오늘 저녁 7시에 설교를 해야 되는데 큰 일났다” 하니까
“큰 일났네, 큰 일났네.” 그러더니만
“그럼 날 따라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가 갱인지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가니까
기차에서 내려서 또 다른 지하철을 타고,
또 내려서 다른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이 중지하니까 여기 빨리 내리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빨리 내리니까 손을 흔들고 그냥 가버려요.
그래서 지하철에 나와 보니까 맨해튼 33가 교회 입구에 딱 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예배당에 들어가니까
막 “오늘 저녁에 OOO 목사가 설교하겠습니다” 하고 나를 소개를 해요.
그래서 내가 아무 사고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가서 강단에서 설교했지요.
그것도 내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지하철 앞에 한국전에 참석한 용사가 타서
그렇게 선한 마음으로 나를 이끌어 줍니까?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선한 일을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시마다 때마다 중요할 때는 예비를 해주셨어요.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저는 늘 마음속에
‘하나님 어디에 무엇을 예비해 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찾습니다.
꼭 하나님이 예비한 길을 열어 주세요.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하거든 당황하지 말고
이것을 이미 하나님 미리 아시고 길을 예비해 놓았다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이시여 예비한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예비한 길로 걷겠으니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예비한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십시오.
당황하면 안 됩니다. 당황하지 말고
아무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피할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쯤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