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성격상 임영수 목사님의 글로 보입니다. 밑줄을 그을 게 너무 많아서, 아예 하나도 긋지 않았습니다/편)
▲‘영적’이란 말의 정의 게리 하보 Gary Harbaugh 는 「인간으로서의 목회자」라는 책에서 영적 spiritual 이라는 용어를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구성요소 중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 주1)
오히려 그는 '영적'이라는 말을 전체를 통합하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의미와 일치한다.
바울서신서에 ‘영적’ 혹은 ‘육적’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용어 역시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어떤 구성요소라기보다
오히려 전인격이 성령님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를 받는 삶이냐/그렇지 않느냐를 가늠하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롬12:1)라고 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성을 가질 때 하나님은 전인(全人)을 상대로 하지,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 너희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경적 인간관을 중시하면서 게리 하보는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사회적 존재로서 이것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전인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영성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전인(全人)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서로 네트워크 적이고도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기능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그 움직임의 중심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영적(spritual)이냐 혹은 육적이냐(바울적인 의미로는 flesh)를 판단한다.
▲1. 영적침체에 관하여 이러한 논리를 따라간다면 영적인 침체는 표면적으로 볼 때, 육체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요,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것 중의 어느 하나가 심각하게 부조화를 일으키면.. 영적침체의 원인을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고 할 때, 이러한 문제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때, -정신적으로 혼란을 겪을 때,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거나 답답하다고 느낄 때, -자신이 속한 구성원들과의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내적인 혼돈과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곧 영적인 침체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그럴 경우 육체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규칙적인 운동을 하거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하여 무엇인가 조처를 취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독서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 자연 속에서 쉼을 찾는다. 또한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추구해 본다.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어우러져서 영적인 존재가 된다. 영적인과 육체적인 것(전통적으로는 영혼과 육)을 분리하여 생각할 때, 이론적으로는 명쾌하게 느끼는 것 같으나 실제적인 삶에서 그러한 논리를 적용하기는 매우 모호하다.
요즈음 ‘영적전쟁’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사단과의 싸움'이라는 엡 6: 12절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체를 고려하지 않는 사단과의 싸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칫 잘못하면 영지주의적인 오류에 빠진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깊은 심리적 침체의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그것은 소위 '영적인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자신의 육체와 관련한 주변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고 초상황적이고 초시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으로는 구체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더 혼란만 야기시킬 뿐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간단한 침체의 원인을 복잡하게 만들고 마침내 눈앞에 놓여진 현실적인 자신의 문제를 간과하게 함으로서 점점 더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철저히 하나님과의 소외, 그리고 하나님 부재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2. 시간과 영적침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악령의 실체인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을 빌미로 하여 접근하며, 그것으로 영적인 침체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영적침체에 빠져들었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육체를 지닌 존재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육체적으로 자신을 탈진케 하는 요소나 잘못된 습성이나 주변의 상황들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목회자들에게 있어 가장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은 시간관리의 문제이다. 오늘 현대 목회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소리가 바쁘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주한가? 목회를 하기 위해서이다. 목회를 일로 보고 있다.
즉 목회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관리하는 일로 정의한다.
이것은 목회신학적인 정의라기보다는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정의이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방법론을 익힌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난다. 행정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붇는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는 동안 육체와 정신이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지치고 탈진한다. 특별히 오늘의 목회는 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들을 얼마나 모이게 하고 그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움직이게 하느냐에 따라서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
그것이 더욱 목회자들로 하여금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일에 에너지를 쏟게하고 육체와 정신을 탈진하게 한다.
비본질적인 일로 몸이 지치고 정신이 탈진해 있을 때 그것이 영적침체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영적침체에 빠져든 사람이 그 침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그 고통을 외면하려고 다시 분주한 삶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안위감을 얻는다.
반면에 자신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불안하다. 왜냐하면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 만큼 자신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에 몰두해 있으면 있을수록 그 만큼 침체의 국면에 빠져든다. 자기만족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침체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철저히 영적인 침체에 속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존재를 보기보다는 일 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외부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점점 소외되어 간다.
그것을 영성학에서는 영성적 고독이라 한다. 그 고독은 심리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소외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간을 조화롭게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때 영적침체를 방지할 수 있다. 시간을 지배하는 내면의 통제능력이 있다면 많은 일들로 쫒기지 않는다.
이러한 습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기의 시간표를 다른 사람이 채워넣기 전에 자신이 먼저 채워넣고 나머지를 다른 사람에게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오늘의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자기의 시간표를 채우넣게 하고 나머지를 자신이 채워 넣는다. 그 결과 그의 생활 속에서 이미 시간이 상당히 부족하게 된다.
꼭 해야할 일이 아닌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 나머지 정작 해야할 일에 쫒기게 되고 그래서 더욱 분주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간다.
마침내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본질적인 일에 시간을 집중한다면 그 분주함이 진정한 자기만족으로 되갚아 주기 때문에 탈진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일과 비본질적인 일을 구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먼저 해두어야 하나,
시간이 없으면 그만 두어도 되는 일은 뒤로 미루는 결단이 필요하다.
▲3. 영성훈련과 영적침체 현대 목회자들을 탈진케 하는 또 다른 요소는 목회자들끼리의 경쟁의식이다. 목회의 성공과 실패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적인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회자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우위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서로 보완적이고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가 아니라, 자기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편안함보다는 적대감을 느낀다.
이러한 상태가 우리의 심신을 피곤하게 하며 그것이 곧바로 영적침체로 이끌어 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독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내게 약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강점으로부터 보완받도록 지음 받은 것이며, 내게 강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약한점을 도와주도록 하나님께서 부여한 나 자신만의 은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나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독특한 존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가 평가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존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영적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자기의식을 키워가기 위해 필요한 조처가 있다면 그것이 영성훈련이다. 영성훈련이란 어떤 특별한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향을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당면하는 일에 쫒겨 자기 마음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의식적인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의 흐름을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면의 혼돈과 시끄러움을 평정케 하고 자기성찰을 위하여 내적인 침묵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음을 비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응답하려는 준비작업이다.
영성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상한 인격을 형성하거나 효용성 있는 어떤 능력을 부여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대로 순종하기 위한 조처들이다.
영성훈련은 닫혀진 내면의 공간을 자유롭게 열어놓는 행위이며, 그 결과 성령님의 요구에 자유롭게 응답하기 위한 훈련이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영성훈련중의 하나가 자아성찰이다.
목회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바울사도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고 말한다.
동시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거나(살전 5:19),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한다. 감각 없는 자가 되지 말라(엡 4: 19)고 권한다.
이러한 바울사도의 권고들은 성령님은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우리는 성령님의 요청을 외면하고 모르는 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의 요청에 민감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조처가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내적성찰이다.
양심성찰이라고도 하는데, 그 양심성찰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내적인 성향을 감지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집착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적합한 집착은 발전을 향한 애착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일지라도 그 집착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요구를 방해할 정도로 내면을 닫게 한다면 영적성장에 적합한 것은 아니며, 동시에 성령님의 요구를 들을 수도 없다.
내적성찰의 목표점은 자신이 중심에 서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적성찰은 성령님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 취할 수도 있고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중용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준비시켜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적성찰의 과정으로서 먼저 발견해야 할 점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내면의 상태이다.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내면에 숨겨져 있는 부적합한 집착, 왜곡된 열망이나 야망, 반복되는 악습 등을 직시한다.
영적침체는 일반적으로 자기와의 관계에서 자기로부터의 소외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참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참자아를 찾아가는 작업으로서 정기적인 침묵과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말로 일이 이루어진다. 말은 힘이다. 반면에 말은 또한 우리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말은 우리의 내면을 거짓되고 위선되게 만들기도 한다.
끊임없이 말의 세계 속에서 맴돌 때 자신의 본래의 모습보다는 말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몰두한다. 그것을 자신의 참자아로 인식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평가하려 한다.
특히 목회자는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며, 목회자의 말이란 자주 지시적이고, 명령적이다. 그리고 매우 원칙적이며 고상하며 교훈적이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는 청중들과는 다른 류의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 동안 자신의 ‘참 자아’는 숨어버리고 ‘거짓자아’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존재를 한껏 부풀린다.
그러므로 참자아를 찾아 만나고자 한다면 말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침묵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 침묵 속에서 진정한 자기 모습이 드러난다.
자기와 만나기 위해서 자주 침묵가운데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 말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을 적합하게 조화시켜야 한다.
▲4.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적침체 이제 소위 사람들이 영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특별히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면서 하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부딪히는 가장 흔한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의 문제이다.
먼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서 성찰해 보자. 그 부재가 규칙적인 경건생활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부재인가?
목회자들 자신은 목자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양떼 옆에 늘 붙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 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이 지낸다.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목회자는 탈진한다.
그러나 사실 목회자는 자주 청중들을 떠나야 한다. 왜냐면 목회자 역시 목자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돌봄을 받아야할 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청중들을 떠나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하며, 훌륭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 거듭 거듭 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중을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함이다. 그 구체적인 실천방식으로 기도와 말씀묵상이 있다.
영적침체의 정도를 가늠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생활습관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도생활이다.
우리의 기도생활의 내용과 태도를 살펴보자. 우리들의 기도생활의 중심은 대부분 자아이다. 그렇기에 기도를 통해서 만족된 삶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러한 불만족이 지속될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영적인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기도를 지속적으로 할지라도 그 기도가 효용성이나 도구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하나님의 부재는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기대와 성령님의 기대가 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때 우리는 자주 영적침체의 위기를 맞는다.
이 경우 영적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부재의 원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주 '기도가 잘 않된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무엇을 두고 기도가 잘되고 잘 안된다고 하는지를 명료화 시키기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보통은 자신의 욕구가 잘 알려지지 않는 것 같고, 기도로부터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고 느낄 때.. 기도가 잘 안된다고 한다.
그러한 경우 자주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확인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다.
이러한 부재는 우리의 신체적인 조건이 좋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을 때 나타날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이미 언급한대로 신체적인 쉼과 적당한 환경적 조건을 제공하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되찾고 자신의 내면이 열리게 됨으로서 하나님 부재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 부재는 자신의 기대와 성령님의 요구가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는 느낌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느낌은 내면의 혼란과 불안, 분노 등을 일으키고 심리적으로 점점 냉담해지며,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기대가 식어지고 무기력해진다.
△이때 영적침체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는 길은 기도에 대한 이해를 좀 바꿔보는데 있다.
보이는 효과를 전해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도보다는 이미 주어진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 기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도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기도 자체로서 모든 것이 충분하다.
왜냐하면 기도는 이미 주어진 은총과 생명에 대한 감사와 응답으로 우리의 생명 일부를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받으려는 행위이전에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부재로서의 침체를 경험한다면 지속해서 더 헌신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태도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로 주셨음으로 기도로 시간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목회자가 하나님께 드릴 산제물이란 시간이다.
실용적이고 효용적인 어떤 것을 기대함이 없이 드려지는 기도야말로 생명을 드리는 산제물이 된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란 곧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할애하는 것은 생명을 드리는 산제사와 같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봉사해 주는 분으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두는 사람이다.
이 체험이 바로 기도에 반영될 때 그 기도는 효용성 이전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산제사적인 기도가 된다. 이러한 기도생활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그저 내 자신을 드린다는 심정으로 일정한 시간을 기도로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 그러한 기도 생활로부터 우리는 거듭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며 영적침체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영성훈련에 있어서 또 다른 필연적인 작업은 말씀묵상이다.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말씀을 보고 묵상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말씀이 실용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잦은 설교와 가르침 때문에 성경을 묵상할지라도 개인의 영적양식이 되기 이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수단이 되기에 바쁘다.
그러한 식으로 매일 말씀을 묵상할지라도 자신의 마음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기 전에 자신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자기를 돌보는 말씀묵상이 필요하다.
그 결과로서 청중들에게 말씀이 전해지고 선포되어진다면 그 때에 경험하는 청중들의 반응이 또한 자신의 영적부흥을 자극시켜 줄 수 있다.
목회자들이 말씀을 보고 묵상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기보다는 청중에게 전해주는 수단에 불과할 때,
해가 거듭되면서 내적인 고갈을 느끼며, 경우에 따라서 습관화된 목회와 삶에 대하여 무미건조함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영적인 침체의 위기를 맞이한다. 특히 밀려오는 설교준비는 아무리 자주 성경을 보고 관련된 지식을 축적할지라도 그것은 소모적인 행위이며 영적인 고갈만 가속화시킬 뿐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통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에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드린다는 개념을 중시했던 것처럼, 말씀묵상에서도 자기자신이 먹는다는 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결과로 가르치고 설교할 때 그것은 청중을 위한 소모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인 공급이 된다.
이러 저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적침체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면 하나님 부재의 원인을 다른 차원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하나님 부재의식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식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영적인 침체는 아니다. 단지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스러운 영적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시킨다면 머지않아 심리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 부재로부터 비롯된 영적인 고통은 때때로 하나님이 허락한 하나님의 교육방법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에 기도자는 인내하면서 영적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저항하고 기도와 말씀묵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5. 영적지도와 영적침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영적침체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일단 목사가 되거나 담임목회자가 될 경우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이 공동체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을 의미한다. 개인은 온전한 전인(全人)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우리는 각 지체들이 됨으로서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의 실현을 위해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각각의 지체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전인(한몸)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각 개인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영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도움을 영적지도라 해왔다. 한 권위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도한다는 차원에서의 영적지도가 아니다. 가장 적합한 표현은 영혼의 친구 혹은 영혼의 동반자이다.
영적침체에 빠지게 하는 육체적인 탈진이나 심리적인 고통이나 정서적인 혼란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적당히 도와줄 수 있는 영혼의 친구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적침체의 원인중의 하나는 자신의 내적인 성장을 가늠할 수 없을 때이다.
목회자가 자기 내면의 성장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영적인 침체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때 외적인 성취에 매어 달리게 된다. 외적인 성취는 경쟁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결국 본질적인 일보다는 비본질적인 일에 매어 달리게 하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하게 되고 그것이 영적침체의 국면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도 지속적인 영적성장을 촉진케 하기 위해서 영적지도자가 필요하다.
목사 계속교육이나 갖가기 세미나를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영적침체는 지극히 개별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개인적인 영적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 안내자는 동료일 수도 있고, 선배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다. 단지 자기를 개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영혼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치는 영적지도를 정기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영적침체의 원인을 잘 알고 있다면 영적침체로부터 빠져 나가는 길도 알게 되고, 동시에 사전에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영적침체로 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관문은 육체적인 탈진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이 곧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삶 전반에 걸쳐 무의미성과 무기력증을 가져다준다.
이런 침체는 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소원함으로 들어가며, 그것이 곧 영적침체이다.
그러므로 영적침체에 빠져들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육체적인 돌봄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정신적 영역, 감정적 영역,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가야한다.
그리고 사전에 영적침체를 방지하기 위해서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사회적 영역 전반에 걸쳐 균형 잡힌 전인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조치에 충실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영적침체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그러므로 한 걸음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관계형성의 삶을 지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조치는 말할 것도 없이 기도생활과 말씀묵상의 삶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그 사역의 성격상 기도나 말씀묵상이 단순히 사역을 위한 수단이요 실용적인 도구에 머무르기가 쉽다. 너무 많은 설교와 너무 많은 프로그램에 의존해 있는 목회이기 때문이다.
기도나 말씀묵상이 도구나 수단에 불과할 때 목회자들은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현대사회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다.
그래서 목회는 소모적이 되고 탈진상태에 빠져든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먼저 목자이기 전에 주님의 양으로서 충분히 기도하고 말씀을 자기 자신의 양식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을 정기적으로 하면서 자기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