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 주님을 아는 자 사28:1~13, 시34:8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의 설교되지 않는 희소 본문입니다.
◑두 부류의 신자들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성도님들의 신앙 생활을 쭉 지켜보는 가운데 아직도 참 미스터리로 남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前者는) 영적으로 굉장히 성숙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그 부요하신 모든 것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여전히 갈급하고 여전히 간절히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떤 분들은 (後者는), 목사인 제가 볼 때, 좀 더 간절하게 주님 앞에 구하며 나아갔으면 좋겠다 싶지만 정작 본인은 충분하신지.. 그렇게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들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이 은혜를 다 부요하게 누리며 또 은혜 가운데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근데 결국은 이런 믿음의 삶은, 전자인 분들은, 더 갈급해하며 하나님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더 풍성한,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실질적으로 누리고 흘러보내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고,
반면 후자인 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스스로 면류관 쓰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이미 만족해 버리는 거예요. 사28:1
안타까운 것은 이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착화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그것이 그들의 신앙의 일종의 패턴, 일관성을 이루어 종교인들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질문은 '어떻게 이렇게 전혀 다른 두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두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는 있어요. 부차적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정말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 이 차이가, 이 두 부류(전자 와 후자)를 결국은 갈라놓습니다.
여러분 이게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주님을 정말 아는 자들은, 주님을 알기 때문에 만족을 못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대단하신 분이시니까 이게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해서 더 갈망하고 구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게 전부인 줄 착각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의 전부인 줄, 그리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버립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나마 있는 것도 빼앗기고요. 더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죠!
◑하나님을 '아는' 정도에 따라, 신앙생활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더 갈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더 사모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시고, 얼마나 엄청나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신지를 정말 "알면", 여러분이 침노하며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일부분만 단편적으로 알고, 본인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알고 거기에 머물러버리면 이분은 그게 하나님의 전부예요. 그게 다인 줄 압니다.
제가 좀 죄송한 표현이긴 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예로써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100원짜리면, 100원만 가져도 만족합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100원짜리 분량만 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100원만 가져도 이미 만족해버려요.
그런데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백지수표인 사람은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무한대이시기 때문에! 더 갈급하고 더 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100원짜리인가요? (하나님이) 자기의 틀에 갇혀버린 거예요. 자기의 생각에, 자기의 세상적인 경험, 이론, 삶의 방식, 갖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관점, 자기가 쌓아올린 모든 노하우... 여기 안에 하나님을 딱 제한해 버리면, 하나님이 100원짜리뿐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수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신앙을 판단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판단해버립니다.
근데 하나님이 정말 백지수표인 분들은 자기를 다 내려놓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의 강으로 뛰어들어갑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안에서 마시고, 먹고, 누림으로 말미암아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부유함을 실제적으로 누리며 또한 외부로 흘러보내는 삶으로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약에서도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 호6:3 '여호와를 그냥 알라'고 얘기하지 않고 '힘써 여호와를 알라!'
여기서 얘기하는 '힘써' 이거는 테크니컬한 게 아니에요. 이건 어떤 노하우, 어떤 방법적인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의 태도와 중심의 갈급함을 얘기합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더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약에서도 바울사도가 13개의 서신서를 통해서 공통적으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이게 가장 가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가치 있는 '예수를 아는 것'을 위해서는 나머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만큼 '예수를 아는 것'에,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예수를 알고, 예수 안에서 나를 발견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과 뜻을 예수를 아는 이 온전한 앎에서 발견하여, 확신을 가지고 사는 거예요. 이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이런 신앙 생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즉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적인 삶은 곧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왜 그래요? 주님을 아는 만큼 신앙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아젠다들, 이런저런 기도의 제목들,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를 구합니다. '주님, 주님을 더 알게 해 주세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 주세요. 주님을 정말 알기를 원합니다.'
왜요? 예배도 '아는' 만큼 예배 드립니다. 예배는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아야 되는 게 전제입니다. 기도도, 주님을 아는 만큼, 기도의 제목이 확장됩니다. 깊어집니다. 더 높은 차원의 기도로 들어가요.
주님을 너무 얇게, 가볍게 아는 사람은, 기도 제목이 가벼울 수밖에 없어요. 왜요? 그게 자신이 알고 있는 주님의 맥시멈이기 때문에.. 그게 다니까요!
그런데 주님을 정말 온전히 아는 사람은, 기도를 깊이 들어갑니다. 다른 차원의 기도를 드리게 될 수밖에 없어요.
말씀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인포메이션, 이 지식을 그냥 머리에 담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원저자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결국 기록된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거예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주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말씀의 사모함이 일어나는 거예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아는 지식, 아는 것이 또한 도전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아는 게 -지식의 축적, -인포메이션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 -잘 정리된 자료로 갖고 있느냐.. 에 따라서 아는 것을 정의합니다.
그게 헬라적 관점에서의 모든 교육이고 이 시대에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이 다 거기서부터 나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런 선지식이, 참 성경에서 얘기하는 "온전한 앎"으로 들어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정말 주님을 아는 것'을 뭐라고 얘기하는가?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하나님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심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계시'가 헬라어로 아포칼립토 인데, '감추어졌던 것인데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죄로 말며 감춰져 있지만 우리 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내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드러내 주시는가? 어떤 자에게, 주님 당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시고 나타내 주시는가? 간단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이 정말 구주와 주인되심을 믿고, 그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의도적으로 '따르다' 라고 하는 단어를 쓴 겁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체득하여 아는 걸 얘기합니다. 할렐루야!
▲2. 주님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을 계시해 (알려) 주십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요' 잠8:17
여러분, '간절히'는 어떤 노하우와 방법이 아니에요. 마음의 중심입니다. '주님 알기 원합니다. 내게 주님을 나타내어 주시옵소서'
내가 주님을 알아서, 주님이 내 안에서 확증돼야만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가 되기 때문에 '주님 자신을 내게 더 계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갈망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전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주님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인격과 영을 통한 만남을 통해서 이 "체험적으로 채득하여 아는" 사건을.. 성경은 "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죽했으면 시편에는 '여호와를 맛보아 알지어다.' 시34:8등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고추장, 와사비입니까? 무슨 얘기예요?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성경은 "아는" 거라고 얘기합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을 믿고 온갖 환란과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간 거예요.
나아갔더니, 그 하나님과의 영적인,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내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경험한 거에요.
'아 하나님은 선하시구나.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시구나' 상황과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내 안에 하나님 그분의 임재와 만남을 통한 확신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담대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도 선하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자신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놀랍게 역사하시는 분이 맞구나!' 이 확신이 있는 거예요. 이걸 성경은 "아는" 거라고 얘기합니다.
근데 이렇게 "성경적으로 아는" 단계로 들어가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지 못하면 여러분, 우리는 필연코 종교인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을 가슴으로, 삶의 경험으로, 전 인격과 영으로 아는 게 아니라 머리에 축적된 지식과 정보로 아는 수준에서 멈춰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외향적으로는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근데 뭐예요?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멀어진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구하고자 하는 그런 것들은 온데간데 없는 거예요. 그냥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생각은 다른데 가 있고, 마음의 중심은 전혀 상관없이 그저 교회생활 하는 거죠.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북이스라엘이 심판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목회자들은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은혜의 말씀대로 풍성하게 누리시고 또 복의 근원으로 살며, 복과 은혜를 흘러보내는 삶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28:1~13절은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의 교만함에 대해서 심판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요.
사28:14~22절까지는, 예루살렘, 남유다의 오만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에요. 앞에는 교만, 뒤에는 오만.. 같은 말이죠. 결국 그 교만하고 오만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간절히 그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할 때 730년에 주신 말씀이에요. 불과 8년 전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사야가 '너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고, 하나님의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부르짖었지만,
스스로 오만해져서, 높은 자리 가운데 앉아 자기는 이미 다 알고, 다 들었던 말이라고 비아냥거리다가 결국 8년 후에 앗수르에 의해서 처참하게 멸망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을 왜 지금 유대인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주1)
그러면 북이스라엘이 어쩌다 이렇게 영적인 교만에 이르게 되었고, 이들의 영적인 교만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같이 살펴보길 원합니다.
▲1. 술취하면.. 사람이 교만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교만한 상태를 술 취한 자, 옆걸음 치며 비틀거리며, 토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28:7~8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술을 취해서 똑바로 걷지 못하고 생각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모습을 북왕국의 교만한 모습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술취하면.. 사람이 교만하게 됩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제멋대로 하죠. 술취함과 그 교만으로 인해서, 그 결과는 자기의 상태를 직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어느 한순간 무너지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술 취한 분들의 공통된 주장이 뭡니까? 남들이 볼 때는 다 취했는데, 자기는 뭐라 그래요? 안 취했다는 거죠.
남들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구나' 하는데 자기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정신이 멀쩡하다'
본인은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넘어져요. 그럼 뭐라고 얘기해요? '자기는 똑바로 걷는데, 길이 삐뚤어가지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넘어졌다는 거죠'
뭐예요? 분별을 못하는 거예요. 교만한 사람의 특징도, 정확하게 이런 모습이에요. 자기는 똑바로 가고 있는 줄 알아요.. 삐뚤삐뚤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 성경은, 왜 교만이 폐망의 선봉이라고 얘기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 의사 선생님들이 환자를 치유할 때 치유의 시작은, 본인이 갖고 있는 그 병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는 겁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환자가 인정할 때부터, 치료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의사가, 환자를 앞에 놓고 '당신은 이렇게 살면 큰일 납니다. 어쩌다 몸을 이렇게 해놨냐고? 함부로 막 먹고... 정말 지금 수술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똑바로 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환자가 앉아서 듣다가 '뭐 이렇게 심각하게 얘기합니까? 어떻게 그대로 정답대로만 살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면 치료가 됩니까? 안 돼요.
여러분 그런데 교만이 그렇다는 거에요. 아무리 얘기해도 못 들어요. 자기의 상태를 직시하지 못해요.
그래서 여러분, 모든 죄 중에서 정말 제일 무서운 죄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헤어날 방법이 없어요.
▲2. 교만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요. 그리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새로운 것이 없다고..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면서 맞고 틀리고를 자기 관점에서 다 정해버리는 거예요.
말씀이 뭐라고 얘기해도 '아니야, 그건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세상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세상의 이론과 학문과 사조, 철학 등 이 모든 것을 섭렵한 내 관점으로 볼 때는 그거는 순진해서 그냥 잘 몰라서 하는 말이지.. 내 생각이 맞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가듯이 교만한 사람은 그 자리에 똑같이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이미 다 안다' 내가 충분히 안다는 거죠. 여러분 그런 사람을 향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자신은 부요하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가난한 거예요.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여러분, 정말 부요한 사람은, 자신이 부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 아는 사람은, 내가 다 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신앙의 영역만 아니라, 세상의 전문 영역 안에서도 더 알면 알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게 상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비교할 때 바닷물의 한 컵, 빙산의 일각, 그 아는 수준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자기가 뼈저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대충 아는 사람은,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교만하지 않고, 겸손의 온전함에 들어갈 수 있기를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이 계시록에서는 우리가 이 온전함, 이 부요함 으로 들어가는 길을 세 가지로 설명해 줍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불로 연단한 금과 같이.. 그래서 불속에 남아있는 금과 같이 부요하게 되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론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궁 저렇궁 이론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진리를 살아내어 마치 불구덩이 한번 통과하듯이 진리 말씀 살아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연단과 모든 어려움을 다 통과하고 난 다음에도 딱 남아있는 진리!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아는 것, 그때 부여해진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머리로 이론만 알아요. 그냥 책상에서만 성경 공부 하는 거죠. 그리고 자가기 다 안다고 여기죠.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 나가면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구덩이 한 번 지나간 사람은 교만할까요, 교만 안 할까요? 한번 폭풍 같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교만할까요, 안 할까요? 불구덩이를 통과하면서 교만할 것이 다 떨어져 나갔어요...
여러분, 이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예요. 머리로만 알아요. 실제가 없어요. 여러분, 실제를 통하여 체득되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흰 옷을 사서 입어' 여기서 얘기하는 흰 옷은, 어린 양 예수의 보혈로 빨아 깨끗하게 된 세마포를 얘기합니다.
즉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전 마음으로 다 통감해서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 십자가 안에서 내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이런 죄인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대가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온몸으로, 마음으로, 영으로 확증하여, 체득하여 아는 사람...
그렇게 십자가를 통과하여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요.,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어떻다.. 이렇궁 저렇궁 말도 함부로 안해요. 그냥 십자가 얘기만 나오면 '그냥 주님 감사합니다' 할 뿐이죠.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왜 교만해요? 눈이 가려져서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해야 되는 기도가 뭐에요?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온전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복음의 진리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정말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실 여러분 어설플 때, 이게 교만해지는 거예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도 23살에 처음 교회에 가서 25살에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다음에 일본선교 갔다 와서, 워싱턴 지구촌 교회에서 청년 사역하면서 제 모교였던 메릴랜드 대학에서 캠퍼스 사역할 때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 이거 책상 앞에 붙여 놓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영성에 대한 책 20~30권 리더십에 대한 책 20~30권 십자가, 영적전쟁, 중복기도에 관한 책들 그거 막 공부, 연구해 가면서
3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막 책들을 섭렵해 가면서 제 안에 막 확신, 자긍심으로 충만했어요. 그때는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 굉장히 교만했죠.
그때는 제가 아는 게 너무 많았고, 너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게 많았고, 그때 막 제가 리더십, 십자가를 주제로, 그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책을 안 쓴게 지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만큼 부끄러워요. 주님의 은혜로, 주님이 저를 이렇게 묶어 둬가지고...
근데 여러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리더십, 십자가가) 도대체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 전에 기도하면서,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이 좀 힘든 거에요. 그래서 기도하다가 멈춰 가지고 그랬어요. '주님, 기도를 좀 가르쳐주세요.. 제가 지금 제대로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주님, 기도의 베이직부터 다시 가르쳐 주세요...' 라고 기도했어요. 과거에 그 때에는 '선교'하면, 제가 해외 선교지를 수 십 번 왔다 갔다 했죠. 또 관련서적도 많이 읽었죠.
그래서 막 '일본선교, 그거 잘못된 거라고, 일본선교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아주 확신에 찼었죠.
그런데 지금은 '선교를 오히려 잘 모르겠어요...' '일본선교.. 글쎄요. 어떻게 해야 되죠? 주님, 은혜 주세요, 제발! 저 1억 3천만 영혼들 불쌍히 여겨 주세요...'
과거에 그렇게 확신이 있었면 모든 게, 지금은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 안에 남는 것은 딱 한 가지, '주님,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만큼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제게 다시 가르쳐 주세요. 저를 인도해 주세요...' 지금은 그러고 있어요.
▲3. 마지막으로 교만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뭡니까? 도대체 말씀을, 조언을.. 듣질 않는다는 거예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8년 전에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했거든요.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으니까, 이사야는 얼마나 마음이 급급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마음으로 간절히 북왕국에게 '야, 스스로 면류관 쓴 자리, 그거 내려놓고 그 꼭대기에 있는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그들은 결국 듣지 않습니다.
안 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아냥거리고 조소하듯 그런 뉘앙스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게 9~13절인데, 9~10절만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여러분, 여기서 교만한 자들의 뉘앙스와 태도가 보이십니까? '지금 누구에게 가르치려고 그래?' 지금 그 얘기잖아요.
'야 그런 얘기는 애들에게나 해!' 하고 이사야 같은 말씀사역자를 조롱하는 거죠.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그런 유치한 얘기를 나한테 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하고 저기서도 하고' '뭘 그렇게 했던 말 또 하고, 그 지겨운 얘기를 반복해서 또 해? 내가 다 들었던 얘기야!'
그리고 결론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12절 마지막에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결국은 듣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는 이 부분이 뭐라고 해야 할까? 재밌다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고 참 두렵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안 들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세요? 이걸 알면 우리 절대 가볍게 못 넘어가요.
영적인 신비는 뭐예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알면 알수록 더 갈망해요. 왜요? 아니까 하나님이 어마어마하신 분이거든요. 선하신 분이시거든요. 너무 좋으신 분이시거든요. 너무나 대단하신 분이시거든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고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께 있고 모든 돌파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모든 은혜가 하나님께 있고...그래서 더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알기를 더 원하는 거예요.
반대로 교만은 그냥 멈췄버리게 합니다. 자기 틀에 갇혀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다 판단해요. 그리고 남의 얘기를 듣질 않습니다.
그 결론을 본문 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온전한 열매를 맺기 전에 다 쓰러져버린다'는 거예요. 결국 열매 맺지 못하고 끝나는 인생으로 끝나버린다는 거죠.
◑'교만한 자' 와 대조되는 '남은 자'
흥미롭게도 이 교만한 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한 부류의 사람을 5절과 6절이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마음이 좀 힘들 때가 있어요. 대부분 '치신다, 심판하신다'
여러분 그것만 보지 말고, 이사야서 중간중간에 '하나님이 회복하신다,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이런 말씀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28:5~6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면류관을 썼는데, 반대로 :1 '남은 자'들은 하나님이 면류관이 되어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5
그날, 쉽게 얘기해서 마지막 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날, 교만한 자와 남은 자가 구별되죠. '남은 자'를 다른 곳에서는 '거룩한 씨'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예를 들면서 마지막 때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임박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되므로 진짜와 가짜, 좋은 고기, 좋지 못한 고기를 정확하게 나눈다고 얘기합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남은 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이들을 '거룩한 씨, 하나님의 그루터기' 라고 얘기합니다.
이 '남은 자'가 누굽니까? 여러분 '남은 자'는요. 어린 양만 전심으로 따라가는 자들이에요.
어린 양에게 매료되어, 어린 양을 더 알고, 어린 양을 더 사랑하고 어린 양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어린 양을 더 닮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 지불 하면서까지 어린 양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남은 자'인 줄로 믿습니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서,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더 알고, 확증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 같이 저들도 우리 가운데 하나 되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하는 것처럼 결국 어린 양과 하나로 온전히 나아가는 자! 그래서 온통 어린 양만 남게 되는 자들.. 이게 '남은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배 가운데, 기도 가운데, 말씀 가운데, 또 삶의 자리에서
어린 양을 온전히 좇아가기 위해서 불도 통과하고, 환난과 연단을 통과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어린 양이 누구이신지'를 자기 온 몸으로 확신하여
'주님이시구나.. 주님은 선하시구나.. 주님은 놀라우신 분이시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구나..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구나..'
이 믿음의 확신으로 마지막까지 어린 양 편에 서 있는 자들, 이들을 '남은 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성경은 이 '남은 자'들에게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그 성령의 역사대로
마지막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에 이 남은 자들 위에 가장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해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영역과, 나라와, 민족과, 족속 가운데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남은 자'를 왜 나무에서 밑둥, 그루터기.. 그들을 남아있는 '거룩한 씨'라고 표현합니까?
이 모든 세상의 풍조와 연단과 환란을 다 통과하는데도 끝까지 버텨서 남은 자들을 얘기합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남은 자들은 그 비즈니스 영역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지혜와 대안과 하나님의 영적인 관점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역하는 자들은 사역하는 자리에, 선교하는 사람들은 선교하는 자리에, 평범한 가정주부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신앙생활하는 레벨이 달라지고, 증거하는 내용이나, 기도의 제목들이 달라지고, 믿음으로 취하는 것들이 달라져 버리는 거예요.
평범한 듯 하나 비범한 자들, 세상 가운데 있지만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편보좌에 앉아서 땅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자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여러분이 그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에게 결국 주님이 오셔서,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거에요. :5
'참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1
저의 간절한 바람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온전한 믿음의 부요함을, 이 능력을, 이 실재를 누리는 단계, '남은 자'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여러분과 제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면서... 저는 가끔가다 그 생각을 해요. '주님이 씌워주실 때 뭐라고 하실까?'
물론 '참 잘하였도다' 그렇게도 얘기하겠지만 저는 그 상상을 해봅니다. 면류관을 제게 씌워주시면서 '아들아, 너는 나랑 많이 닮았다. 딸아, 네가 나랑 많이 닮았다'
왜요? 어린 양에게 매료되어 전심으로 어린 양을 따라가고 어떻게든지 어린 양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좇아가려고 몸부림치며 때로는 불로, 때로는 연단으로 다 통과했더니
어느 날 예수님이 볼 때, 너무 예수님하고 닮은 거예요. 너무 똑같은 거예요. 근데 만약에 예수님이 면류관을 씌워주시려다가 너무 낯설어서 '너 누구지? 누구세요?'
성경에 얘기하잖아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라 내게서 떠나가라' 이 두 부류밖에 없다는 거예요...
주1) 북왕국 10지파는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는데 앗수르의 정책 자체가 '민족 말살 정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10지파를, 전세계로 다 흩어버렸고, 또 다른 이방민족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서, 북이스라엘과 혼혈시켜 버렸어요. 그때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본토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이고 앗수르 제국 각처로 흩어진 10지파는... DNA는 남아있을지 모르나, 정체성은 그때 말살되어 버렸죠.
그래서 남유다에 남아 있는 정말 유대인들은 북왕국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왜? 다 섞여버렸기 때문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을 지금은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왜? 남유다만 남았는데, 결국 12지파 중에, 유다지파만 남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