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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안식과 기쁨

LNCK 2023. 6. 21. 21:04

침례 요한의 안식과 기쁨 [요한복음 21] - - YouTube

◈침례요한의 안식과 기쁨               요3:22~30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참 나를 안 도와주신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살다보면 한두 번 그런 일이 있었을 거예요.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어요. 

하필이면 그때 바로 그 일이 거기서 일어나는게...
'하나님이 나를 조금만 좀 도와주시지...
어떻게 하나님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경험 혹시 있으십니까?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죠. 
'아니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신데, 다 아실 거 아니에요? 조금만 좀 도와주시지...' 

근데 뭐 안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어떨때 보면 하나님이 훼방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지?' 

'분명히 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막으시고 꼬이게 하시지?' 
뭔가 하나님께서 방해하고 훼방하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안 하셨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버린 자식 일수도 있어요. 

자 이 일들에 대해서 오늘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자 오늘 본문에, 세례요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날 세례요한이 애논 이라는 곳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지금 세례요한이 침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도 똑같이 침례를 베푸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하소연 하는 거죠.
'스승님,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 분이 지금 저기 가까운 곳에서 침례를 베푸는데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사실 여러분 세례요한이 정말 망한 게 맞거든요.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백 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이었어요. 
사백 년 동안 선지자가 없다가 처음으로 등장한 선지자였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고자 그 앞에 나왔고 
또 그가 베푸는 침례를 받으려고 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딱 등장하는 순간부터, 세례요한의 사역이 완전히 꺾입니다. 
꺾여서 이렇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번도 반등해서 올라온 적이 없어요.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뭐 그때까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던.. 
사백 년 만에 등장한 민족의 선지자가 
이때부터 시작을 해서,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가면서,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그러면서 영향력도 없어지고요. 
그러다가 헤롯한테 미움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힙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사람들이 계속 자기에게로 모였었고 
백성들이 계속 사백 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라고 지지했으면 
어떻게 헤롯이 그를 잡아다 가두겠습니까? 민중의 영향력을 무시 못 하죠. 

근데 세례요한에게 지금 아무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거죠. 
(예수님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도 안 모이고, 자기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헤롯이 약간 마음에 안 드니까, 그냥 옥에 가둔 거죠. 
그러다 조금 있으면 이제 목베임을 받아서 죽고 끝납니다. 

그러니까 이 세레요한의 사역은, 
예수가 딱 등장하는 순간부터 정말 급락하기 시작해서 
쭉 내리막 길을 걷다가 한 번도 못 올라오고, 그냥 망해서 끝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의 제자들의 이런 하소연하는 것이 
사실은 과한 것이 아니죠. '저 사람이 등장하므로 우리는 망했습니다'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3:26

▲본문은, 이런 상황에 대한 세례요한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안 드러납니다. 

그때는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게 잘 되면 
사람들은 별 문제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한테 원망하지도 않고요. 뭐 그냥 아무 문제 없이 삽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을 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안 도와주시는 것 같을 때 
그때 내 안에 있는 진짜 뭐가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믿음은 무엇이었고, 나의 영성은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어려움들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안에 진짜 뭐가 있는지 나도 모르거든요. 
뭐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나는 모르죠. 

그런데 이런 힘에 겨운 상황을 통해서 
내 안에 뭐가 있는지가 진짜 드러나게 될 때 *욥처럼
비로소 내가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은 나아가게 되는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진짜 무엇이 있는지 
이렇게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런 상황들을 허락하십니다. 
전혀 안 도와주시는 것 같은 상황!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방해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이런 상황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이 정확히 이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가 계속 그런 상황이었죠.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세례요한 안에 있는 믿음이 무엇이고, 
영성이 무엇인지가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이 믿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맞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없이 
그냥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뭔가 하면 
열매도 얻고 또 성공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도와주신다고 믿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정반대 상황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돕는 자(세례요한)를 망하게 하고 계신 거에요. 

이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이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예수님이 칭찬하실 정도로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사역을 망가뜨리고 계신거에요. 

사역만 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이제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결국 망하고 끝나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화가 난 것도 당연합니다. 
'아니 이 바닥에도 상도덕이 있는데, 우리 근처에서 우리와 똑같은 것을 하냐?' 

'하려면 저기 멀리 떨어져서 하든지.. 근처에서 똑같은 사역을 하면 어떡하란 말이냐?'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 뭐 이런 원망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될 것 같은데...'
'아니 도와주시는 건 고사하고, 방해만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뭐 내가 나쁜 짓 하자는 것도 아니고, 뭐 주를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건데 
근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아니 도와주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 이 프로젝트는 분명히 되는 거예요. 안 될 수가 없어! 
그날 비만 안 오면 돼!' 그러면 꼭 그날 비가 와요. 기도 했는데도 말입니다.

'야 이거는 안 될 수가 없어요. 안되면 기적이야!' 
그런데 딱 그때 암이 발견된다든지... 이런 거죠.
마치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방해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뭐 살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이 있고 
또 주변에 신실하신 목사님들을 보면 이런 일들을 많이 겪으세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시고, 정말 충성된 분이시고, 
정말 예수 밖에 모르시는 분들인데... 그런데 (사역이) 안 돼요. 참 이상하죠?
정말 어떨 때 보면 하나님께서 막 일부러 방해하시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어떤 교회를 갔더니, 그 교회가 건축을 잘했더라고요. 
너무 예쁘게 잘 지었는데, 그 목사님이 자랑스레 간증을 하시더라고요. 

'이게 코비드 직전에 건축을 했는데, 
하나님이 정말 도와주셔서 말도 안 되는 싼 값에 했습니다.'  
들어보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싼 값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코비드 지나면서 자재값이랑 인건비가 엄청나게 오른데다가 
또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자재가 안 들어와가지고 
지금 만약 그 건물을 건축하려고 그러면 2.5~3배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거에요.

물가도 오르고, 환율도 올라서 지금은 비용이 몇 배 더 들건데,
코비드 전에 잘 지었다는 거죠.

그 간증을 듣고 있는데, 저는 속이 잠깐 쓰리더라고요. 하하하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건축을 하게 하시려면 좀 빨리 하게 하시든지 
왜 지금 자재 값도 다 오르고, 환율도 오르고...
우크라이나 전쟁 날 것도 하나님은 다 미리 아셨을 텐데
왜 우리 교회 건축을, 그 전에 좀 시작하게 하시든지...
(그 교회처럼) 조금만 우리를 일찍 도와 주셨으면 됐을 텐데...'

우리가 뭐 다른 건물 짓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님 섬기는 예배당 짓겠다는 건데...
하나님의 집인데 뭐 좀 협조를 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사도 바울도 그 얘기를 했습니다. 
고전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비협조하시는지 
'마치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이렇게 바울이 얘기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나를 정말 죽어라 죽어라 하시는구나!'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까?' 그랬는데.. 실제로 더 나빠지고 
'여기서 어떻게 더 고생할까?' 그랬는데 더 고생하고.. 뭐 이랬다는 거죠.

'마치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 같다'는 거죠.
'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시나?'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더 최악으로 내 모셔서 고생하게 하시는 거죠. 
 
'꼬여도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고 
안 돼도 안 돼도 어떻게 이렇게 안 될 수 있을까?' 
이 마음이 들었다는 거잖아요. 
'마치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 같이 사람들과 천사 앞에 
조롱거리가 되게 하셨도다' 이 말을 합니다. 고전4:9

세례요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 있겠나? 했는데
갑자기 감옥에 들어갑니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게 하시나? 여기서 더 나빠질 일은 없겠지?' 
그랬더니 목베임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백 년 만에 등장한 위대한 민족의 선지자가 
피크를 한번 치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는 순간부터 급락을 하는 겁니다. 
아주 정말 급락을 하는 거예요. 요즘말로 '떡락한다' 그러나요?

그러니까 급락을 하면서 완전히 망했습니다. 상황이 꼬였습니다. 
여러분이 세레요한 입장에서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평생을 부귀영화를 누렸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를 했습니까?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섬긴다고, 광야에서 먹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정말 그러고 평생을 살았는데.. 오로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렇게 살았는데..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마 우리라면 이런 한탄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지금 이런 상황가운데 처하게 됐습니다. 

▲자 그런데 참 놀라고 감사한 것은 이 상황 속에서 
비로소 세례요한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진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영성이고, 세례요한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마음대로 풀릴 때는, 그 안에 진짜 뭐가 있는지 몰라요. 
나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도 몰라요.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 진짜로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실상이 뭐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축복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 쭉 마지막까지 간다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당황스러워질 거에요. 

그런데 드러내서 미리 보게 하심으로써 
마지막에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걸 준비할 수 있게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 참 감사한 것으로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상황 속에서 세례요한의 반응을 보면서 
세례요한 안에 정말 무엇이 있었는지, 
그의 믿음이 무엇이고, 영성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도, 이런 믿음과 영성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례요한의 믿음과 영성

▲1. 자 이 상황에서 세례요한의 첫번째 대답입니다.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것이 세례요한의 첫번째 믿음이었고 영성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수 없다'는 거에요. 

이것이 세례요한이 믿었던 믿음이었고, 그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만 받을 수 있다는 거에요. 

아니, 하나님이 주신 것만 받아야 된다는 거에요. 
그것 이상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에만 만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첫번째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세요. 
그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셔야 될 지를 정확하게 하는 분이세요.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분이세요.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원래 이만큼을 줬어야 되는데 
'미안하다. 내가 아까 실수해서 절반밖에 안 줬네? 미안!' 이런 게 없다는 거에요. 

정말 쌀 한 톨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우리에게 주셔야 될 것만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세요. 
절대로 우리에게 주셔야 될 것들을 놓치거나 실수하는 분이 아니세요. 
반드시 베스트를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만족해야 돼요. 
그것을 베스트로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그것은 과욕이 되고, 죄가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만큼이, 우리에게 베스트 입니다. 아멘?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고 어떻게 이거밖에 안 주십니까?' 
그래도 그게 베스트 입니다!

아멘 소리가 굉장히 작네요. 여러분, 믿으셔야 돼요. 
이것이 세례요한이 보여주는 그의 영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이것이라면 
거기서 멈추고 감사하십시오. 

물론 우리가 죄를 짓거나 게으르거나.. 그래서 일이 망가지는 것은 회개해야죠. 
그러나 그게 아니고, 정말 성실하게 일했고, 정직하게 일했는데 
결과가 그거다... 그러면 거기서 멈춰야 돼요. 그리고 감사하셔야 돼요.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분량이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려고 하고, 더 깊게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저놈이 그렇게 하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됐어!' 하는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세례요한도 얼마든지 그렇게 예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죠.

여러분, 원망의 무서운 점이 뭔지 아십니까? 
처음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사람에 대한 원망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가요. 

이거 안 가는 경우를 못 봤어요. 
사람에 대한 원망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발전돼요. 
그러니까 아예,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돼요...
'그때 하나님은 그걸 왜 안 막아주셨지?'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멈추는 걸 할 줄 아셔야 돼요. 
'여기까지가 하나님한테 주신 분량이야' 이거 하실 줄 알아야 돼요. 
안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십니다. 
이게 여러분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거듭난 자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나에게 베스트입니다. 
이게 여러분 믿음이고, 영성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는 세뇌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내가 믿는다' 라는 게 아니에요. 

믿음의 대상은, 어떤 사실/팩트/지식가 아니고, 인격이에요. 
'하나님 이라는 분을 믿습니다' 이거에요. '신뢰한다 trust' 는 뜻이죠.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건 뭡니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거에요. 

내가 병이 나을 것을 믿고, 내 기도가 이뤄질 것을 믿고...
이것은 '믿음의 결과'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런 결과도 생기겠죠.
그렇지만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 trust 하는 것입니다.

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선이 있습니다. 
'여기까지야!'하고 딱 정해 놓으신 선이 있어요. 허락하신 선이 있어요. 
그 선까지가 나에게 베스트 입니다. 

사람은요. 무조건 많은 것을 좋아하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달라요. 

사람은 지금 현재 밖에 보지 못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세요. 

그래서 그 선을 넘어가면, 나한테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하는 걸 아시는 거에요. 
사람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내 소원대로 되어서) 하나님 섬기면 좋은 거 아닙니까?' 
사람 눈에는 그거 밖에 안 보여요. 

그리고 이번 일만 보면,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 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보시거든요. 그리고 베스트를 주시는 거죠.
우리는 믿음으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거죠.

우리는 무조건 많은 것을 좋아하고, 무조건 더 큰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세요. 항상 선을 정하세요. 
'여기까지가 너한테 베스트야!' 

'여기서 넘어가면, 사람의 눈에는 좋아 보일 수 있어도 
결국 네 인생을 망치는 독이 돼!'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을 딱 그으십니다. 
'이것은 넘어가면 안 돼, 여기까지야!'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족하기를 배우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느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해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자족하기를 배우는 게 뭐에요? 영성(믿음)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당연히 알아서 제일 좋은 것을 주셨겠지!' 
이 믿음이 영성이라는 거에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조바심내지 마십시오. 
'혹시 하나님이 모르고 지나치셨을까?'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여러분의 몫이라면, 
여러분이 숨고 도망가도 끝까지 좇아오셔서, 여러분 입에 떠 먹여주세요. 
절대로 여러분의 몫을 놓칠 리가 없으세요. 아멘! 

많은 경우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조바심을 내요. 
'이러다가 혹시 놓치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뭔가 손해보는 게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만 짓지 않으면요. 

그러면 여러분, 조바심 내야 될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까봐 조바심을 내야 되는 것이지 
누리지 못할까봐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땅 끝까지 도망가도, 
정말 하나님이 주실 거면 땅 끝까지 좇아오셔서 떠먹여 주세요. 

그 예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다윗을 보세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해요? 숨어 있어도 찾아내시잖아요. 

사무엘을 보내서 '기름부으라'고 했는데 
그 집에 가보니까 다윗은 없습니다. 이새는 다윗이 있다는 얘기도 안 해요. 
형들만 사무엘에게 쭉 보여줍니다. 

다윗은 저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어요.
숨어있었던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내시잖아요. 끝까지 숨어있는 다윗을 찾아내셔서 
그에게 기름부으셔서, 결국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 

정말 여러분에게 주시기로 되어 있는 것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으세요. 
조바심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좋은 거 주시는 분이세요. 
주기로 결정하셨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분이세요. 
좇아가서 찾아내서 떠먹여주는 분이세요.  
조바심내지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그게 영성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교사님 한 분이 계신데요. 
이 선교사님은 평생 어떻게 사셨냐 하면, 
어떤 분이 이제 후원하겠다고 말을 꺼내십니다. 

그러면 항상 대화의 주제를 딴 데로 돌리세요. 
'이번에 그 프로젝트 하는데 혹시 재정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은데요. 황사 없는게 얼마 만입니까?'

'제가 후원 좀 하려고 그러는데 계좌번호 좀...'
'요즘 한국 정세가 이게 참 문제네요. 신문 보니까...'

이렇게 계속 대화의 주제를 딴 데로 돌리시는 거에요. 
근데 왜 돌리셨냐 하면, 그 분 안에 있던 믿음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것이면, 내가 피하고 도망가도 주신다'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받으면 안 된다는 거죠.
뭐든지 넙죽넙죽 받지 않겠다는 거죠.

그래서 평생 후원 얘기만 나오면, 계속 얘기를 딴 데로 돌리시는데 
평생 한 번도 부족한 걸 본 적이 없고 
충분하게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것을 제가 봐왔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이 믿음을 가지려고 저도 많이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건축... 이게 베스트니까 하나님이 이 길로 인도하시겠죠.

조바심내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것, 
그게 여러분 믿음 아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키십니다. 

시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 자족하는 영성이 있을 때, 우리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샬롬,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자꾸 선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의 욕심이죠. 
그 욕심은 우리 영혼에서 안식을 빼앗아가요. 
그리고 불안과 염료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게 있었던 '주신바 영성' 
'주신바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는 이 영성이 있을 때 
우리 영혼은 비로소 샬롬,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까지만 받고.. 그 이상은 주셔도 안 받겠습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 까지만 받겠다는 거죠.
그 이상은 (세상 사람들이) 주어도 안 받습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영혼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모으고, 아무리 열심히 성취해도 
그건 내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하늘에서 주신바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멘이십니까?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그게 믿음이에요. 

혹시 여기 불안하고 조바심가운데 있으신 분 계십니까? 
이제 그렇다면 숨을 좀 크게 한번 쉬세요. 해보세요. 
그리고 좀 이렇게 편안하게 기대서 앉으세요. 
그러고 relax 하십시오. 

주께서 일 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도 아니하십니다. 

▲2. 세례요한의 두 번째 영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영성이 평안이었다면 
두 번째 영성은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요3:28~30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에게는 기쁨이 되는 근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흥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는 그 기쁨'이 
세례요한이 누렸던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은 뭡니까? 
내가 흥하는 것,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그가 흥하는 것, 즉 예수께서 높아지시는 것입니까? 

물론 쉽게 생각하면 '당연히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이죠'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오케이, 예수께서 흥하시고 잘 되시긴 하는데 
그 일에 여러분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내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그냥 예수님만 높아지십니다. 그래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입니까? 

그러면 이제 기쁘긴 기쁘지만, 약간 기쁨의 강도가 떨어질거예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예수께서 높아지시고 흥해요. 그런데 그 결과, 나는 망해요. 그럼 어떨까요?
그 상황에서는 어떠세요? 기쁘십니까? 
아 이건 대답하기가 좀 어렵지요. 

자 이 상황에 대한 세레요한의 대답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아멘!

세례요한의 두 번째 영성은 뭐냐하면 
'내가 망해도, 예수가 흥하는 것이 기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내가 망하는 거예요. 
나를 쇠하게, 망하게 하므로.. 예수를 높이고 흥하게 하는 것이에요. 
이게 세례요한의 영성이었어요. 

무슨 그런 이상한 영성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었어요?

십자가가 뭐에요? 예수께서 스스로를 쇠하게, 망하게 하심으로써 
스스로 망하는 길을 선택하심으로 우리를 흥하게 하셨죠. 

영성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정리하지만 
영성의 가장 정확한 정의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성은 뭐였어요? 십자가였거든요. 
'너희는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흥하게 하신 이 십자가가 
예수님의 영성이었다면, 당연히 우리의 영성은 뭐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거죠.

-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평강을 누렸다면 
-두 번째 영성은, 자신을 죽이는 영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은 기쁨이 충만했다는 거에요. 

내가 쇠함으로 그분을 흥하게 하는 이것이, 왜 기쁨이고 영성인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은, 자신을 망하게 함으로 
사랑하는 자를 흥하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어요. 
완전하신 사랑은 하나님 밖에 없으세요. 

그런데 우리도 이제 사랑을 합니다. 사람도 사랑을 하는데 
우리 사랑은요. 완전히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의 죄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오염돼 있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랑이긴 한데, 그렇다고 순전한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사랑할 때 보면, 내 안에 이기적인 마음이 함께 섞여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물론 잘 되길 원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이지만 
그 사람과 동시에 그것으로 인하여 나도 즐겁고, 
나도 어떤 유익을 누리고, 나도 그 사람이 잘 되는 걸 통해서 기뻐하는 
나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잘 되게 하느라고, 희생한 내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하여간 뭔가 있잖아요.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완전히 순전하지가 않아요. 
굉장히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 있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인간의 사랑의 한계죠. 
그 안에 우리의 욕망도 들어있고, 쾌락도 들어있고, 또 사랑도 들어있고... 
이게 한꺼번에 막 섞여있어요. 

그런데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이게 왜 순전한가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안에 다소 불순물들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나도 좀 유익을 보고, 나도 즐거워하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내 기분도 좋고... 이런 것들이 이제 섞여 있단 말이에요. 
'내 유익'이라고 하는 게 조금이라도 섞여있어요. 

그런데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내가 뭔가를 누리고 어쩌고, 느끼고 하는 이게 
하나도 없잖아요.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잖아요. 
그래도 이 사람을 흥하게 하는 것,
이게 가장 순전한 사랑의 가깝되는거에요.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운 사랑은 없느니라' 
이게 성경이 얘기하는 순전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바라는 것 
이게 순전한 형태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내가 망해도 참고, 내가 쇠해도 견디고... 왜요? 
그를 흥하게 하기 위해서! 
이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아니었습니까. 

십자가, 이게 가장 순전한 형태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세례요한이 보여주는 영성이고, 믿음입니다. 

이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영성이라는 거에요. 
왜냐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적어도 이 땅에서는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에요. 

물리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도 
돌려받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 사랑한다고 할 때는 
물리적인 어떤 보상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감정적인 보상들은 기대를 하잖아요. 

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뿌듯해지는 마음, 
또는 '와 나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런 만족감,

또는 그 사람이 '고마워요' 라고 얘기해주는 것에서 오는 어떤 만족감, 
하여간 우리는 뭔가 심리적인, 마음으로 주어지는 보상을 기대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이런 보상들을 하나도 못 누려요. 
그래도 '그가 흥하기를 바라는 것' 이게 뭐에요? 
가장 순전한 형태에 가까운 사랑이라는 거예요. 


아마 아이를 키우시는 어머님들은 
세례요한의 영성을 이미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 아기라서 좀 그렇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기는 정말 힘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기가 왜 두 시간마다 먹게 해놓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두 시간마다 먹어야 돼요. 
그래서 밤에 잠들만 하면.. 응에 하고 먹을 것 달라고 우니까, 
매 두 시간마다 깨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룻 잠 자는 동안에도, 서너 번씩 깨야 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게 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는 영성과 비슷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깨면 기뻐요. 그렇게 기쁠수가 없어요. 
아이를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냥 눈물이 핑 돌고 기쁘죠.
간밤에 잠을 못 자서, 몸은 너무 피곤하지만.. 아이의 흥함을 보고, 기뻐하는 거죠!

왜 기쁠까요? 사랑에는 항상 기쁨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본문의 세례요한의 기쁨이었죠.


여러분 밤에 강남 대치동에 가보면, 세례요한의 영성으로 충만한 
어머니들이 차고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늦은 밤까지 자녀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집안이 거덜나던 말든 아끼지 않고 자녀에게 투자합니다. 
세례요한의 영성이 충만합니다. '그는 흥하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정말 몸이 부서지도록, 그를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투자합니다. 

그럼 여러분 왜 이렇게 할까요? 정말 몸이 부서져라 하거든요. 
왜 이렇게 할까요? 기쁘니까 하는거에요. 기쁘니까! 

그 나이 되어보니까, 자식 말고는 낙이 없는거에요. 
그러니까 유일한 기쁨의 근원이, 자식들이 잘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쇠하는 것을 감내하면서 희생을 합니다. 
왜? 사랑하니까! 

뭐 방법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모든 사랑에는요. 기쁨이 있어요. 모든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영성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순도가 높아지면, 
높아지는 것만큼 기쁨의 순도도 높아져요. 
이게 영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다시 말해서, 그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불순물들이 빠지면 빠지는 것만큼... 

불순물은 뭐에요? 사랑을 줌을 통해
그래도 내가 뭔가를 누리길 원하고. 내가 더 흥하길 원하고...
 
그러나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 불순물들이 빠지면 빠지는 만큼.. 
우리의 사랑은 더 순전한 형태의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순전한 형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지는 것 만큼 
우리의 기쁨도 순전한 기쁨에 가까워지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망하게 하므로 예수를 흥하게 하고자 했던 
세례요한의 영성에는 기쁨이 충만했다는 거에요. 
순전한 형태의 기쁨이 충만했다는 거에요. 

금년에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이 세례요한이 누렸던 순전한 형태의 기쁨이 더 충만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