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마가의 의도가 보이십니까? 앞서 막7장에서는 '귀 먹고 말 못 하는 자를 치유'하시고 바로 이어진 8장, 오늘 본문에서는 '보지 못하는 자, 맹인'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귀머거리, 벙어리, 맹인... 그래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들이 망가져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아주 기본적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즉 '영적인 맹인'들의 상태를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단순히 인간의 몸의 질병들과 연약함 들을 고치셨다.. 가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우리 인간 가운데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될 영적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즉 영의 귀가 닫혀있고, 영의 혀가 마비되어 있고, 영의 눈이 감겨있는 이 상황들을 마가는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이것들을 다시 고치신다'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두 표적 사이에 샌드위치 처럼 끼워진 3 사건
본문 앞의 귀머거리 고치신 사건과, 7:31~37 본문의 맹인사건 사이에, 8:22~26 샌드위치처럼 끼워진 일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8:1~21
마가가 귀머거리, 벙어리, 맹인... 이것을 대비시키고 대조시켜서 영적인 상태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면 사실은 그냥 쭉 이어서, 연속해서 기록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러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선명해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마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두 사건 사이에 뭔가 삽입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8:1~21
근데 마가가 정확히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다면 중간에 끼어 있는 것(8:1~21)은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중간에 세 가지 다른 사건들을 끼어넣습니다. 일부러 끼어 넣은 게 아니고, 중간에 일어난 사건이라 볼 수도 있겠죠.
-7병2어로 4천 명을 먹이시는 사건 8:1~10 -바리새인들이 표적 구함 8:11~12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8:13~21
이 세 가지 사건이 삽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 사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주제로 쭉 꿰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보는 것"이에요. 너희는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란 말이죠.
-첫 번째, 표적을 보이십니다. 7병2어로 기적을 행하시는 표적을 '보이세요'.
-근데 바리새인들이 와서 하늘의 표적을 또 '보여달래요'
-예수께서 분명히 표적을 보이셨는데, 제자들이 '보고 나서 금방 잊어버려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사건은 쭈욱 연결됩니다. 래서 이 세 가지 사건을 결론짓는 예수님의 마지막 결론이 뭐냐면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주제 구절)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한 결론이 뭐냐하면 '너희가 눈이 있는데 보지 못하고 귀가 있는데 듣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바로 이어지는 사건이 본문의 '벳세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죠. "우리의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귀를 듣게 하시는 그리스도"
그 상징적인 예표로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7:31~37 (중간에 3가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고 8:13~21) 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거에요. 8:22~26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에 질병을 고치신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초월해서 영적인 귀머거리, 영적인 맹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오늘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영적인 눈을, 영안을 뜨게하시는 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7병2어의 표적 8:1~10
예수께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신 거에요.
'나는 단순히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인자다' 하는 것을 증명하시는 거죠.
'나는 땅에 법칙에 메이는 자가 아니야 나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야!'
그래서 떡 몇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주신 거지요. 이것이 여러분 표적입니다.
표적이 영어로는 싸인 입니다. *세메이온 싸인은 길가다가 보면 '대전 200 Km' 이렇게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있죠.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표적들은 다 싸인인데, 무슨 싸인이냐면, '예수께서 이런 존재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싸인(표적)이라는 거에요.
그것을 나타내보여주는 표적으로서 이런 기적도 행하시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으셨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적을 통해서 보이시고 또 어떤 때는 가르치심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또 어떨 때는 가득한 사랑과 긍휼을 통해서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하여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계속 보여주셨어요. 표적을 보여주셨어요.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 역시 하나님을 보여주는 표적이라고 얘기합니다.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창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세상 피조물 속에 분명히 보여주셨다는 거죠.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핑계치 못할 거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보려고 하면 다 볼 수 있다(알 수 있다)는 거에요.
※피조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창조과학) 주1)
그러면서도 사람이 창조됐음을 믿지 않습니다. 비웃습니다. 왜요? 영적인 맹인인 거죠.
그래서 성경은 뭐라 그러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것들 곧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의 분명히 보여 알려졌으니 그들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 그러셨어요. 롬1:20
그래서 여러분 과거에, 뉴턴, 케플러 이런 사람들이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 이었던 것을 아십니까?
아이작 뉴턴은 신학저서를 쓸 정도로 *존 뉴턴과 구분요 아주 신실한 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찬찬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관찰했을 때, 그 안에 '표적'을 본 거죠.
그래서 흥미로운 것은 여러분 과학자 와 엔지니어들이 조금 다른 거 아세요? 엔지니어(공학자)들은 아무리 그거하고 있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해요. 왜요? 그것은 인간의 테크놀로지 이거든요.
그런데 과학자 scientist 들은, 그 안에 예수 믿는 비율이 월등히 높아요. 왜요? 관찰하는 거거든요.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거거든요.
관찰해보면,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죠. 왜요? 그 안에 표적이 있다는 거에요. 핑계치 못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보여주시고 *일반계시 또 예수께서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보여주시고 *특별계시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어떤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보여주시는 하나님 이세요. 그래서 이걸 신학적으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 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다(계시해 주신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누구든지 정말 누구든지,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누구든지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다 볼 수 있다는 거에요.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는 거에요.
◑2. 표적을 보고도 못 깨닫는 바리새인들 8:11~12
7병2어의 이적 직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14절 이후에 이어지는 대화 내용을 보면 7병2어 바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방금 전에 그 7천명 먹인 거 못 봤어?' :19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걸 보면, 바로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에요.
하여간 7병2어의 기적 직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찾아와서는, 이 엄청나고 분명한 표적을 보고도 뭐라 그러냐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또 보이라'고 합니다. :11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표적을 보기 원하는 걸까요?
진짜 맹인은, 22절부터 나오는 벳세다 맹인이 아니라 바로 이 바리새인 들이라는 거에요. 그 메시지를 지금 성경이 전하고 있는 거에요.
진짜 맹인이 누구냐는 거죠. 분명히 봤어요. 분명히 지금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는 걸 봤고 그것 말고도 수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을 예수께서 행하셨는데 와서는 '표적을 보이라' 그러자 예수님은 '야, 너는 장님이냐?' 그 얘기를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뻔히 봤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 그러시냐면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2 이 말은 여러분 잘 이해하십시오. '넌 얄미오니까 표적을 안 보여줄 거야'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대신에 '표적 보여 줘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안 주겠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3:14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자 그렇다면, 왜 어떤 이들은 보는데, 어떤 이들은 보지 못할까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보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첫번째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가 진짜 하나님이야? 그가 진짜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이렇고 저런 표적은 보여야 돼!' 이렇게 자기가 정해 놓은 표적에 대한 기준이 있어요.
자기가 정해놓은 '하나님이라면 이래야 되는' 자기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아무리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표적이 일어나도 그것을 표적으로 보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는 거죠.
△왕하5장에 보면, 아람의 대장군이었던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엘리사앞에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하5:19~12에 보면 '내 생각에는'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여기 보면 나아만이 '내 생각에는' '뭐 요단강은 보니까 코딱지만한 강인데 내 생각에는 저게 진짜 선지자라면 내 앞에 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내 환처 부위에 손을 흔들어서 나병을 고칠까 하노라'
뭐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고쳐야 선지자라는 거죠. '내 생각에는' 이게 문제였던 거죠. 결국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7 번 씻으니까 나앗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 가운데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셔도 '내 생각에는' 이러고 있으면 그 역사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는 거에요. 예수께 '하늘로부터는 표적을 보이라'고 했을 때 :11 이들은 이미 정해놓은 답이 있었어요.
11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 나온 목적이, '시험 test 하러' 나온 거예요.
무엇을 테스트하러 나온거에요? '내가 정해 놓은 그 표적을, 이 사람이 보이나 안보이나?' 그걸 테스트 하러 나온 거죠.
그래서 지난번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도 '음식 먹기 전에 왜 손을 닦지 않느냐?' 그걸 가지고 트집잡았잖아요.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영적인 소경이 돼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많은 일을 행하셔도, 못 보는 거죠.
아무리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일을 행하셔도, 자기 눈에는 안 보여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해요.
혹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어떤 하나님의 표적들을 구하고 계십니까? 혹시 이미 표적이 막 넘쳐나는 그런 삶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늘로부터 오는 다른 표적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그냥 '겸손하게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을 보겠다'고 하는 마음, 편견없이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들을 다 그대로 인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표적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약속했거든요. '핑계치 못할지라' 롬1:20 누구든지 표적을 볼 수 있어요. 내 주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일들을... 누구나 볼 수 있어요.
△제가 잘 아는 선교사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선교지에 있을 때 어떤 무신론자랑, 그 분이 논쟁을 한 적이 있대요.
그때 선교사님이 아주 간단히 대답하셨답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디 없어? 어딜 둘러봐도 다 하나님이 계시구먼!'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어디를 둘러봐도 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꽃을 봐도 하나님의 역사, 와 이건 사람이 만들 수 없어! -개미를 봐도 '어떻게 이렇게 절묘할까?' -손가락 하나만 들여다 봐도 '와 이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것이 영적인 눈의 비밀입니다. 영의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람은, 어디를 봐도 안 보여요. 그런데 영의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은, 어디를 봐도 보여요.
▲두번째로, 이 바리새인들을 영적 소견으로 만든 것은 이들의 삐딱한 태도였습니다.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를 힐란 하며' 예수님을 비난하러 왔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예수를 존경해서 뭔가를 배우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삐딱한 태도로 나왔습니다.
앞에 사람들, 표적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예수께 배우고 싶어서 사흘이나 예수를 굶으면서 좇아다닌 사람들입니다. 이 갈급한 태도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지 표적을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갈급해서 온 게 아니에요. 막 사흘씩 배를 굶어 가면서 예수님한테 배우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비난하고, 시험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태도로 나온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적인 게 보이지 않았다는 거죠. 맞아요. 여러분, 영적인 원리가 있는데 '영적으로 무엇을 보느냐, 가리워져 못 보느냐?' 하는 것은 태도에서 결정돼요.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가?'에 의해서 결정돼요. 삐딱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나가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셔도, 아무 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뭐냐면, '쉽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대요.
그래서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대충 관심 없는 사람들은 '뭐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고 돌아갔고, 갈급함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예수를 찾아와요.
그래서 '그 비유의 의미가 뭡니까?' 물어봤더니 예수께서 비유의 의미를 쫙 설명해주세요.
자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뭔 것 같아요? 사람들 안에 있는 갈급함을 활성화시키는 activate 거에요.
왜요? 그래야 영의 눈이 열리는 거에요. 아무런 갈급함이 없고, 배부른 사람...
그러니까 영적으로 배불러서, 뭐 별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그런 사람은요,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영적으로 못 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우리 안에 갈급함을 일으키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 갈급함 때문에 예수님을 막 좇아가가지고 물어보는 거에요. 그러면 비로소 그 진리의 말씀들을 쫙 풀어서 설명해 주셨어요. ◑3.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8:13~21
이번에는 주인공이 놀랍게도 제자들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제자들도..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실 때도 보고 경험했고요. 또 칠병이어로 4천 명을 먹이실 때도, 표적을 보고 경험했어요. 보고 경험한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눠줬던 사람들이잖아요. 표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까, 완전히 딴소리를 합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를 비난하거나, 마음이 삐딱한 마음은 아니었죠. 그런데 문제는 '둔감한 마음'이었어요. '너희 마음이 이렇게 둔하냐' :17
떡에 모든 제자들의 마음이 가 있다 보니까, 육의 생각, 먹는 생각에는 민감했어요. 근데 영의 생각에는 둔감했어요. 이 얘기를 지금 하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영' 얘기를 하고 계신데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라' 그랬더니
'아이쿠, 우리가 떡 안 가지고 온 얘기를 하시는구나' 이게 얼마나 먹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왜곡되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떡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그런 거죠.
물론 떡이나 먹는 것은, 아주 슈퍼센스티브 한 어젠더죠. 그런데 제자들의 영은 어떤 거에요? 둔감한 거에요. 영이 무뎌졌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못 알아들어요. 방금 기적과 표적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떡걱정을 하고 있어요.
17~1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자, 제자들이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를 뭐라 그러시는 거에요? 둔해서 그렇다는 거에요.
영적으로 왜 둔해집니까? 떡 걱정 때문이죠. 이게 우리를 영적으로 둔감하게 하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세요. 떡걱정을 하잖아요? 그러면 육이 예민해져요. 먹는 문제, 돈 문제, 자식 문제... 하여간 이 땅에 있는 떡문제를 가지고 예민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육이 센스티브 해지고요. 그 대신 영은 무뎌져요.
▲영이 둔한 또 다른 증거는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러셨거든요. :18
영적으로 둔한 또 다른 증거는, 기억하지 못하는 거에요. 금방 잊어버리는 거죠. 분명히 은혜도 받았어요. 분명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도 봐요. 그런데 뒤돌아서면 잊어버려요. 혹시 우리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이거 흔한 일상 아닙니까?
분명히 어저께 은혜도 받았어요. 울기도 했어요. 그래서 헌신도 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면, 다 잊어버렸어요. 생활의 염려와 세상 걱정으로..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린 거예요.
제자들의 떡 걱정은, 오늘날 다른 버전으로 보면, 재정 문제, 먹고 사는 문제, 건강, 우리 애들 교육, 집 문제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수많은 '떡 걱정'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는 거죠.
조심하십시오. 이게 '영적인 소경'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래서 염려가 없을 수는 없지요. 살아가다보면 염려가 당연히 있죠. 그런데 그 염려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말고.. 어떻게 해야되는 거예요? 기도하라는 거에요.
계속 염려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거에요.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거에요.
영의 원리는, 그렇게 복잡한 거 아닙니다. 사실은 그냥 아주 단순해요. 말씀과 기도안에 서 있으면 되는 거에요.
말씀과 기도안에 서 있으면 영의 눈을 계속 떠있게 하셔서 마땅히 볼 걸 보게 하시고, 마땅히 할 걸 하게 하신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영적인 장님이 되는 이유는, 이거 안 해서 그런거에요. 아주 단순한 건데, 이거 안 해서 그렇다는 거죠.
왜 은혜를 받았는데, 뒤돌아서면 잃어버립니까? 그 다음 날 기도 안하니까 잊어버리는 거죠.
기도 안 하면 여러분, 잊어버려요. 깨어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 벳세다 맹인이 예수께로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벳세다 맹인의 눈을 여십니다. 8:22~26
마가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여신 것이 육신의 눈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이 앞에 이어지는 3개의 사건은 (위 ◑1. 2. 3)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보아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맹인의 눈을 팍 여시잖아요. 마가의 의도가 보이십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예수께서는 물론 우리 육신의 소경된 눈도 여실 거에요. 그렇지만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행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적은 뭐냐면, 우리의 영안을 여시는 거에요. 영의 눈을 여시는 거에요. 할렐루야!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 영안을 여시는 예수님의 손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맹인에게 손을 내셨을 때, 그의 눈이 열렸듯이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보는 자,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영안이 열리기 시작할 거에요.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꼭 초자연적으로 천사를 보거나, 귀신을 보거나 이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뭐 그런 것도 포함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자연과 초자연의 하나님이세요. 두 개를 다 포함하는 분이세요. 초자연의 역사를 우리가 무시하면 안 돼요.
자연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도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을,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에 포함 하세요. 그렇지만 그것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뭐냐면, 표적을 보고 깨닫는 거에요. 영적인 일을 인식하는 거에요. '아 지금 이게 하나님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구나' 이걸 알아보는 거예요.
삶의 현장에서, 영적인 것을 인식하는 거예요. '아, 이게 지금 영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거구나' '아 내가 사업이 계속 막히는 게, 하나님이 지금 뭔가 뜻이 계시는거구나' 이게 영안이 열리는 거에요. 정확히 성경이 그 얘기하고 있습니다.
▲발람 이야기 여러분 기억하시죠? 발람이 돈 준다 그러니까, 열심히 나귀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의 발람 메시지의 핵심은 뭔지 압니까? 발람이 예언을 잘 하더라.. 그게 아니에요.
신약에 가면, 탐심 때문에 그랬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발람 얘기의 주제는 '탐욕'이에요.
발람의 모든 동기는 뭐냐면, 돈 욕심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본문으로 따지면, 떡 생각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발람의 나귀는, 오늘날의 자동차 입니다. -이상합니다. 오늘은 차가 시동이 안 걸려요. -근데 이상합니다. 운전해서 가는데, 자꾸 엉뚱한 길로 가고 있어요. 세 번이나 옆으로 빠져서 딴 길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열 받아가지고 나가서 차를 발로 뻥 찼어요.
그 순간에 영안이 열리는 거에요. 영안이 영안이 열리는데 보니까 그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지 않습니까. '아, 이 길로 가면 안 되는 거였구나' 이게 영안이 열리는 거에요.
오늘 날도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실수들 많이 저지르지 않으세요? 뭔가 하나님이 자꾸 막으시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그걸 미련하게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코로나 사태가 났을 때, 하도 교회가 억울한 일을 당하니까 '이거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내가 자료와 데이터를 모아가지고...' 이걸 그냥 한 번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절묘하게 막히는 거예요. 진짜 세 번을 시도했어요. 그러는데 할 때마다 절묘하게 막히는 거예요. 약간 그 김을 다 빼놓는 거에요.
그래서 세 번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제 영안이 열렸어요. '하지 말라 하시는 거구나!'
▲흐릿하게 보는 것 가지고 예수님은 만족하지 않으셨어요. 예수께서 이 벳세다 맹인의 눈에, 손을 얹으시고는 이제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3
여러분은 무엇이 보이십니까? 눈이 열려 계십니까? 소경이 대답합니다. '뭔가 보이긴 하는데,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같기도 하고..' :24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아직 흐릿합니다.
주께서 하신 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라 그러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말라 그러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예수께서 멈추지 않고 계속 안수하시고 기도하십니다. 그거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안수하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예 모든 것이 밝혀보입니다.'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눈에, 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삶주변에서,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들을 밝혀보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씩이나 차 사고 난 후에 (발람처럼) 나고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치시고 그래야 겨우 흐릿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밝혀볼 수 있는 눈! 한번만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아~ 하나님이 지금 이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 하나님이 이거 하지 말라 그러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이걸 기뻐하시는구나!' 이걸 알아보는 눈이 열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눈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면 그냥 전부가 다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내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가족도, 건강도, 심지어 재난처럼 보이는 코로나 사태까지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에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 눈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눈, 이게 여러분, 축복아닙니까?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아멘!
예배는.. 이 눈 뜨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벳세다 맹인이 왜 예수 앞에 나왔어요? 눈뜨려고 나온 거죠. 귀먹고 말 어눌한 자가 왜 예수 앞에 나왔어요?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지도록 하기 위해 주 앞에 나온 거잖아요. 예배는 여러분 이거 하러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 은혜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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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피조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창조과학)
하늘의 별들의 움직임을 보십시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이 수많은 별들이 과연 우연히 생겼을까요?
이 별들의 움직임을 수식으로 써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수식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타원의 방정식이 나와요. 케플러가 발견한거잖아요.
이 별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봤더니, 그냥 원으로 돌줄 아는데 타원으로 도는 것을 발견했어요. 중심이 2개라는 거죠. 이런 정말 타원의 아름다운 방정식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오죠. 하나님의 창조 솜씨입니다.
또 우리 안에 있는 몸의 구조들을 한번 천천히 들여다 보십시오. 와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작은 우주'라고 할 만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는 우리 몸의 구조를 보고 있으면 '이게 과연 우연히 생겼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죠.
이게 우연히 생겼다고 하는건 마치 이와 같은 거에요. 바다에 모래알들이 있는데, 모래알 속에 규소도 있고 철분도 있죠.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그랬더니 철분들이 막 모이기 시작하더니 톱니바퀴가 돼요. 그러더니 시간이 한참 지났더니 그 안에 있던 규소들이 막 모여가지고 유리가 돼요. 또 시간이 한참 지났더니 그것이 척척척척 맞춰지더니 시계가 생겼어요. 믿어지세요? 진화론 이론이 그런 거죠.
왜냐하면 그건 열역학 제2법칙에 반하는 거거든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게 돼 있지 무질서에서 질서로 오게 돼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연은 가만 놔두면 무질서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그 아이들 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가만 놔두면 어떻게 되나요?
가만 놔두면 질서정연하게 딱딱딱 방이 돌아갑니까? 안 되잖아요. 반대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죠. 엔트로피 법칙 때문에 그런 거죠.
바다의 모래를 그냥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시계가 생길거라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아요.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그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그들은 '시간만 충분히 지나면 뭐든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여러분 사람하고 비교할 수 없는 이 간단한 시계조차도 아무리 오랜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이게 자연히 생겼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인간은 자연이 생겼다고 믿죠? 인간의 몸은, 시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게 돌아가잖아요.
시계의 복잡도가 1이라면, 인간의 몸의 복잡도는 아마 십억조를 따져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복잡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몸만 천천히 들여다봐도 창조주의 표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거는 누군가가 디자인 하셨구나!' 그래서 핑계치 못할 거라는 거에요. 롬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