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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을 현실 속에서 살아내기

LNCK 2023. 6. 25. 06:09

초월적 삶을 현실에서 살아내기 [마가복음25] -- YouTube

◈초월을 현실 속에서 살아내기           막9:2~29 

◑도입

지난주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기독교의 초월성, 초월적 신앙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초월성이 있습니다. 

이 땅의 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고, 또 땅의 것으로는 다 인지할 수도 없고, 
또 땅의 것으로는 다 해결할 수 없는, 그 세상 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나라이지, 
이 땅에 보여지고 만져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거죠. 

만약에 초월성이 없다면, 그럼 하나님이 어디 계신 거예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실재 하시는 분이세요. 

어디에 실재 하시냐면, 초월 속에 있는 그 나라, 
영적인 세계 속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세요.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자 이렇듯이 기독교의 핵심은 초월성에 있어요. 
이 땅을 초월하는 하늘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하늘을 대면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지고 실제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내가 알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언제? 하늘을 대면할 때! 

또한 이 하늘을 대면할 때 
비로소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될지가 명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에는 초월성이 있습니다. *기적, 표적 포함
자 오늘은 계속 이어지는 막9장 말씀을 통해서 
이 <초월의 현실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월의 현실성 (초월은 현실 속에 나타나야 한다)

변화산 사건,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초월적으로 변화하신,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변화하신 그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막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초월적인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이 뭐냐면, 산 위에 초막 셋을 짓고 싶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빠집니다. 
초막 셋을 짓고 그냥 거기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하죠. 

초월적인 경험을 하고 나니까, 너무 좋고, 너무 황홀하고 
'와, 정말 초월적인 세계가 있구나. 그냥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게 
전부가 아니구나' 그냥 그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요. 

그런 생각 여러분, 해보신 적 없으세요? 
방언을 처음으로 받았다든지, 성령 체험을 한다든지..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그냥 거기에 머물고 싶어져요. 
그게 그냥 전부인 것 같고, 거기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제가 초막 셋을 찍겠습니다' 
초월을 경험하고 나면,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게 되는 고백입니다. 

과거에 저도 그랬어요. 벌써 37~38년 됐군요. 
제가 처음으로 성령 받고 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너무 좋아서 나오는 게 뭐냐면 '그냥 여기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 
마치 그게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거기 떠나기 싫고, 그냥 그 은사만 계속 사용하면서 있었으면 좋겠고, 
초막 셋을 짓고 싶은, 그런 유혹이 있더라고요. 산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습니다. 

'주님,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신거죠. 

여러분, 변화산을 경험하셨습니까? 경험하셔야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셨습니까? 체험하셔야 됩니다.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받으셨습니까? 받으셔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돼요. 
그 산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시간이 되면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이지 
세상과 분리된 초월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께서는 세상과 분리된 채로 
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초월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초월은, 
세상 속에 있지만, 그 세상을 뛰어넘는.. 그 초월을 가르치신 것이지 
세상과 분리되어서, 산속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사는 
그런 초월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고 희어졌다고 그러는데 
옷 자체는 여전히 그 옷이었어요. 
옷 자체는 여전히 일상에서 입으시던 그 옷이었어요.       
 
옷 자체가 막 하늘의 보석으로 잔뜩 치장된 옷을 입으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일상에서 입고 있던 그 옷, 일상을 사는 옷, 
그 일상 가운데서 변화되셨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초월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초월은, 일상의 삶이 무시되는 신비주의적인 초월이 아니에요. 
일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초월이었습니다. 

매일 수고하는 삶 속에서, 
그 수고하는 삶을 새롭게 하고, 그 땀을 새롭게 하는 그런 초월인 거죠.
'산 위에서의 영성'이 아니라, '일상에 뿌리박은 영성(초월)'이라는 거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삶, 즉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 설거지하고, 
아이들 키우며 씨름하고... 이런 매일매일의 삶을 
영화롭게 바꾸는 그런 "일상의 초월"이었지 

이 땅의 삶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즉 집에서 설거지하는 거는 의미 없어,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의미 없어.. 
그래서 다 때려치고 산에 가서 초막 셋을 짓자.. 하는 초월을 가르치지 않으셨죠.

그냥 매일 일상의 옷, 그 옷을 그냥 그대로 입으신 채로 변화되셨어요. 
그 옷이 거룩하게 구속이 돼서 빛이 나고 하얘졌다는 거에요. 

그 옷을 벗어던지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화려한 새로운 옷을 입은 게 아니었죠.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수님의 초월이 바로 이런 초월이라는 거예요. 

매일매일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가운데서 나타나고 보여지는
영성, 초월, 영광스러운 천국 성도의 삶!

우리가 일상에서 땀이 배고, 구겨지고, 냄새 나고 하는 일상의 옷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희어져서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이에요. 
즉 초월적인 천국의 영광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초월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초월은 
이 땅의 수고와 땀, 고통과 상처, 매일의 일상을 모두 살아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휘둘리거나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땀을 새롭게 하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그런 초월이에요. 
이 초월적인 삶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직 변화산의 체험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체험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삶은 
그냥 보이는 기독교, 인본주의의 기독교 이상을 넘어가지 못해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게 아니에요. 
분명히 기독교에는 일상의 삶을 뛰어넘는 초월(기적, 신비, 초자연)이 있어요.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초월성이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산(초월)에 머물고자 하는 것.. 
아니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에요. 
매일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땀의 의미가, 새롭게 되고 
여러분의 일상의 일하는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그래서 천국의 영광으로 변화되어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땀 흘리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의 일상의 삶들이, 새로운 거룩함을 가지고 하얗게 변하고 
영광의 빛을 이 세상 가운데에 발하게 되는 
그런 초월이 여러분의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그 황홀한 경험을 뒤로 하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랬더니 "현실"이 예수님과 세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큰 무리가 둘러싸서, 변론하고, 떠들고, 싸우고, 
귀신 들리고, 병 들고, 죽어가고 하는 이 현실! 
이 현실이 딱 예수님과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는 생각했을 거예요. '아, 산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산에 있을 때는 이런 거 하나도 없거든요. 

영광으로 변하신 예수님, 그 외에도 엘리야가 있고, 모세가 있고.. 
모든 게 황홀했고.. '아, 거기가 참 좋았는데..' 

근데 산에서 내려와 보니까 이게 웬걸? 
"현실"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어요.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변론하고, 다투고, 
고통의 신음소리, 슬픔의 울음소리.. 이런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선택하신 곳은 바로 이 "현실"이었어요. 
왜냐면 초월(변화산)은, 이 현실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초월을 현실 속에서 살아내기"입니다. 
초월은 이 현실 속에서 살아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떠들고, 다투고, 울고, 신음하고, 땀 흘리고, 아프고, 죽고 하는 
이 현실 속에서 초월성을 살아내야 되는 거에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슨 일로 변론하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17~18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고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귀신 들린 아이를 아이를 좀 고쳐주십시오' 하면서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내쫓지 못했다는 거에요. 
초월에 실패했습니다. 현실에 그냥 눌려버렸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마가가 두 이야기를 대비시키는 것이 보이십니까?  

변화산에서 어마어마한 초월을 경험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예수님이 변화되시고... 
이 어마어마한,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영광과 초월을 이야기하고, 

바로 뒤이어서, 
귀신들린 아이 하나 데려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을
아주 냉철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거예요.  

초월을 경험한 얘기와, 현실에 눌려버린 이야기의 대비!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초월은 현실 속에서 살아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변화산에서 대단한 엘리야를 보고, 모세를 보고... It's okay 다 좋은데 
현실에서는 뭐하고 있냐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그 귀신 들린 아이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가지고 
그냥 눌려버리는... 

마가는, 현실 속에서 살아낼 수 있는 초월을 얘기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지금 마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산에서 초막셋을 짓는 초월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건져내는 초월! 
현실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구원! 

이것이 여러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또 예수께서 제자들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초월의 모습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의 황홀한 경험,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사모하십시오. 그게 시작이에요. 
그 경험이 없으면 현실에서 초월을 살고 어쩌고 저쩌고.. 다 불가능해요. 

초월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현실에서 초월을 어떻게 살겠어요? 
당연히 여러분들은 산에서 초월을 경험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경험되지 않았는데, 
현실에서 초월적인 삶을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꼭 기억하십시오. 

이런 놀라운 성령의 체험이 있었다면, 놀라운 변화산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곳에 초막 셋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와 이웃에게로 향해야 됩니다. 
산에서 내려와 현실을 직면해야 됩니다. 

떠들고, 싸우고, 괴로워하고, 아프고, 울고, 마음대로 안 되고, 
힘들고, 땀 흘리고, 억울하고, 손해 보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이게 다 진짜 보기 싫은 현실들이잖아요. 

우리는 산에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산에 있었으면 모세가 속 썩여요? 엘리야가 속 썩여요? 
아무도 속 썩이는 사람이 없어요. 
항상 에브리데이 기쁘고, 에브리데이 황홀해요. 

그런데 산에서 딱 내려오는 순간, 속 썩이는 사람들 투성이에요. 
뭐 애들 문제, 미워하고 질투하고, 직장에서 일이 잘 안 되고...
땀 흘려 일했는데 억울하게 사기 당하고...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는 현실에 내려오면요. 
아 보기 싫어요, 보기 싫어! 
그냥 이렇게 눈 가리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여러분, 그런 유혹들 때문에 
기독교가 '도피처'라는 오명을 받게 되는 거 아닙니까? 

안티들은 '기독교 신앙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거 아니냐?' 라고 공격하죠.
기독교 신앙이 정말 현실로부터 도피라면, 
만약 그것이 진짜로 기독교의 본질이라면, (산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 
기독교나 마약이나 뭐가 달라요? 

그래서 과거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그랬잖아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종교!

아니요. 여러분, 기독교하고 마약은 분명히 달라요. 
마약은 그냥 도피하고 끝나는 거에요. 
산속에 초막 셋 짓고 현실은 그냥 무시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복음은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는 겁니다. 

현실 속에 들어와서, 그 현실의 고통의 문제, 귀신 들린 문제, 
해결 안 되는 문제, 이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해결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특별히 제 안에 조금 염려되는 게 뭐냐면 
'코로나 사태를 겪고 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2020년 설교

어쩌면 예배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텐데,
'이웃들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될까?'
이게 여러분, 정말 우리가 싸워야 될 싸움일 수 있어요. 

(비대면 사회, 언텍트 사회로 진화하면서
가뜩이나 문제인 '개인주의'가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할까봐 우려합니다)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하고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거는 갈수록 어려워질 거거든요. 

코로나 시대가 해결되기 전까지, 모이는 것도 힘들거고 
주일에 왔다가는 빨리 그냥 흩어져서 집에 가야 되고 

우리 교인들이 나눠서 작은 교회들 찾아가서 그 교회에서 밥 먹고 교제하던 것, 
이런 것도 점점점 못하게 될 거고, 
소그룹 모임도 점점 어려워질 거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이웃을 향한 관심들이 점점점 희석돼 가는 거죠. 
이거 참 싸우기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진짜로 기독교가 어떻게 전락해 버릴 수 있냐면 
산에서 초막 셋을 짓는 기독교가 되어버릴 수 있어요. (*코로나 여파로)
주변 이웃들의 소리에는 귀를 닫는...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거든요. 
이웃의 소리에 귀를 닫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 떠들고 시끄러운 소리 한가운데로, 예수님은 들어가셨어요. 
그래서 우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 살려달라는 소리, 불평하는 소리, 
원망하는 소리, 그 소리 한가운데로 들어가셔서 그것들을 돌파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인데, 이게 참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아요. 
참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아요. 

이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돌파해야 될지는 숙제지만 
하여간 이런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두신 곳, 제자들을 두신 곳은 고통의 소리 한가운데였어요. 
그곳에서 초월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자들을 데리고 향하신 곳은
삶의 시끄러운 소리, 그 현장 한가운데였어요. 
너희가 초월의 삶을 살아야 될 곳은 바로 여기라는 거에요. 
이 자리를 여러분,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주의 여러분을 축복하고 도전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고통의 비명이 울리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초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이 가운데서 초월의 삶을 살아가는 몇 가지 방법들이 나옵니다. 

물론 선결 과제는 초월을 먼저 경험해야 된다는 거예요. 
초월을 경험하지 않았는데, 초월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에요. 

하여간 변화산 사건의 경험들이 있어야 돼요. 
우리 삶 가운데 '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우리의 일상을 뛰어넘는 뭔가를 행하시는 분이시구나' 

'보이는 무언가를 뛰어넘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시구나, 
영의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인카운터(만남, 조우) 하셔야 돼요. 

그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 일상에서 초월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 세 가지만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1.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가 초월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 얘기는 뭐냐면, 제자들이 그 가운데서 초월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는 거에요.
'야, 이거 (축사) 너희가 당연히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너희가 이거 못하고 있는 거, 내가 언제까지 참고 봐야 되는 거야?' 

'이거 너희가 당연히 했어야 되는 일이잖아!' 
예수께서는 여러분, 우리가 초월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월의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올바른 지식입니다. 
'아, 복음은, 이 현실의 삶 속에서 초월의 삶을 살아내는 거구나, 
그게 복음이구나!' 하는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돼요. 그걸 알아야 돼요.

예수께서는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초월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아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월적인 삶'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 위에 초막 셋을 짓는 신비한 초월만 생각하거나 
-아니면 산 아래에서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초월!
이 두 가지 극단을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본문이 보여주고 있어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산 위에서 황홀한 경험을 한 제자들과 
-산 밑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는 제자들, 
두 부류를 딱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사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의 현실 아닙니까? 
-산 위에서 신비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는 것을 기독교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산 아래서 현실 속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체념한 신앙,

그것을 그냥 기독교라고 생각하죠. 둘 다 틀렸다는 거예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은, 
-산 위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아래서 무기력한 삶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신앙도 아니에요. 

예수께서 원하시고 또 원하셨던 것은 
산 아래서, 즉 현실 속에서, 매일매일의 삶을 초월하는 삶을 사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될 방향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기독교는 어느 곳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지향하는 기독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초월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산 아래에 있는 기독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깨어나셔야 됩니다. 

초월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성과 합리성 속에만 갇혀 있으면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로 전락해버리는.. 
무기력하고 체념하는 그런 기독교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여러분 많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불치병에 걸리기도 하고 
-재정적인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하여간 수많은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이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취해봤는데.. 해답이 없어요.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실은 여러분, 복음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곳은 바로 여기거든요. 
바로 그전까지는, 그냥 생각해서 이성으로 해결하면 되지 
뭐하러 믿음이 필요해요? 

감기 걸렸으면, 그냥 감기약 먹고 자면 돼요. 믿음 없어도 돼요. 
그런데 해결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초월성'은 뭐냐면, 
초월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괜히 초월하려고 오버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감기약 먹고 자면 돼요. 

초월은, 어디서 진짜로 필요하게 되냐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입니다. 

본문에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이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이 영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무슨 약 먹어서 낫는 것도 아니고 
심리치료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영의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이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진짜 믿음으로 초월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 그건 원래 안 되는 거야' 하고 체념하든지.. 

여러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셨어요. 
기독교는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곳에서부터 
초월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 이게 기독교의 본질이에요. 아멘! 

즉 기적을 믿는 거에요. 
세상의 법칙과 이성의 한계, 그 앞에서 기적(초월)이 일어나는 것,
이게 여러분 복음의 본질입니다. 믿으셔야 됩니다. 

예수께서 원하셨던 건 바로 이 삶이에요. 
현실의 삶에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휘둘리거나 낙담되지 않는.. 
설령 죽음 앞에서도 휘둘리거나 낙담되지 않는 거에요. 

왜요? 부활이 있는 것을 믿으니까. 
지금 당장 경험되지 않을 수 있어도, 그날 부활할 걸 우리가 알고 믿잖아요. 
그래서 죽음에게 조차 휘둘리지 않는 거예요. 아멘! 
이것이 복음의 초월성인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 초월의 삶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다면, 이제 믿어야 돼요.

22~24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초월의 삶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다면, 이제 믿어야 돼요. 믿음이 있어야 돼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부르짖습니다.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갈급해가지고 소리 지르는 거죠. 
결국 '믿음'에 대한 이슈라는 거예요. 

여기 본문뿐 아니라, 예수께서 항상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실 때는 
항상 물어보셨어요. '네가 믿느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기서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초월적 삶의 두 번째 열쇠가 믿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하나님이 뭔가 행하시려고 해도 
내게 믿음이 없으면, 그 삶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믿음은, 여러분 초월성의 기초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초월은) 볼 수가 있어, 만질 수가 있어, 인지할 수가 있어, 들을 수가 있어요? 
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믿음까지 없어요. 그러면 초월의 영역을 어떻게 접근할 거에요? 
초월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밖에 없는 거에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초월의 영역에 액세스할 거냐고요? 
초월의 영역에 액세스하는 유일한 열쇠는 뭐냐면,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그래서 그 기초라는 거에요. 

△믿음은 여러분, 마치 육체의 호흡과 참 비슷해요. 
호흡은 여러분 육체의 신진대사가 돌아가게 하는 기초가 됐죠. 
호흡을 통해서 산소가 들어가야, 이제 피 속에서 산소가 활동하면서
이제 몸에 신진대사가 일어나듯이.. 믿음이 그와 같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호흡이 딱 끊기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아무런 신진대사가 일어날 수 없죠. 
비슷하게 믿음이 그렇다는 거에요. 
믿음이 초월적 영역에 있어서 호흡 같은 거죠.

믿음이 있어야 초월적인 삶, 초월적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대사작용이 일어날 수 없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데 
믿음이 없이 어떻게 뭐가 일어나겠어요? 

초월적인 영역, 영적인 영역에서 뭐라도 일어나려면 
하여간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초월을 믿지 않는데, 초월성을 인식할 수 있겠어요? 
치유를 믿지 않는데,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초월적 가치를 믿지 않는데, 초월적 기적이 일어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초월적 가치를 믿지 않는데, 초월적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자기가 가치도 두지 않은 것에, 어떻게 초월적인 삶을 살겠어요? 
초월적 나라를 믿지 않는데, 천국을 사모할까요.? 
초월적 존재를 믿지 않는데, 하나님을 정말 따를까요? 

모든 초월적인 삶에는, 항상 반드시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초월이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고, 혼과 육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초월의 영역은 "오직 믿음으로만" 접근할 수 있어요. 

초월은 항상, 반드시 믿음으로만 액세스할 수 있어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초월성을 경험하는 두 번째 열쇠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33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을 살리라! 
이것이 여러분 성경이 선포하는 위대한 믿음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예, 믿으셔야 됩니다. 믿지 않으면 인본주의 기독교 이상을 넘어갈 수 없어요. 
초자연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인본주의적 기독교' 이상은 넘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나라는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니고는 들어갈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어요.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만 액세스(접속)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초월적 삶을 살아가는 세 번째 열쇠는 기도입니다. 

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초월적인 삶, 권능의 삶을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의 기독교는 초월에 이르지 못한 
그래서 땅에 속한 무기력한 기독교였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갈 수 없느니라' 이렇게 하셔도 되는데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것은 귀신뿐만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라는 뜻이죠. 

이런 류 뭐예요? 영적인 종류의 일들이란 뜻이에요. 
영적인 종류의 일은,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는 거예요. 

귀신을 쫓아내는 일, 치유, 기적부터 시작해서 
우리 마음의 변화 등이 다 '이런 류'죠. 

여러분 마음이 변화되는 거는요. 영적인 일입니다. 
못 믿겠다면 여러분이 마음을 변화시켜 보세요, 되나요? 
마음의 변화는 안 일어나요. 이건 영적인 일입니다.
내 마음의 변화도, 타인의 마음의 변화도.. 영적인 일입니다.
영적인 일은,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우울한 마음이 있어요. 우울한 마음은 여러분이 변화시켜버리면 되는데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거잖아요. 

마음은요, 내 마음대로 변화가 안 돼요 그건 뭐예요? 
마음은 영하고 깊게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이런 마음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종류의 일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이 영적인 종류의 일들은..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는 거예요. 
성경의 대답입니다. 

야고보서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약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믿음의 기도를 하면,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초월적 삶을 이끌어내는 열쇠는, 뭐니뭐니 해도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초월적 종류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어쩌면 제자들은 '우리는 왜 내쫓지 못했습니까? 스승님 비결이 뭡니까?' 
하고 물었을 때, 심오하고 오묘한 어떤 비결 같은 것을 기대했을 거예요.

'우리는 왜 안 되고 예수님은 왜 되지? 뭐가 다른 거지?' 
'뭔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생각하지 못했던 비결' 뭐 이런 걸 이제 사부한테 기대한 거지요. 

오묘한 비결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했어요. 
'아니 그거 몰라서 묻느냐? 기도해!'  Pray more! Pray hard! That's it! 
그것으로 끝이라는 거에요.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여러분, 영적인 비밀 같은 건 없었어요. 
몰라서 못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 오묘한 비밀을, 심오한 복음의 비밀을 몰라서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거에요.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많았지만요)

제자들 같은 경우도 몰라서 못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뭐예요? 기도하라는 거에요. 
영을 움직이는 것은, 단순하지만 확실한 비밀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게 기도해야 되냐고요? 무엇을 기도해야 되냐고요? 
그거는 기도해보면 알아요. 

기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엇을 기도해야 됩니까? 
이거는 여러분 기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얘기에요. 
기도하다 보면요. 그냥 다 알게 돼요. 

무엇을 기도해야 되고, 어떻게 기도해야 되고, 
이거는 여러분 기도해 보면 자연히 다 알게 돼요. 

기도를 하다 보면,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 
다 알게 된다는 거죠. 

기도하면 여러분, 어떻게 기도하든지 간에 기도하면 
영이 맑아지고, 믿음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기도하든지 간에 그냥 기도하잖아요? 
그럼 영이 맑아지는 걸 느낄 거예요. (*기복주의적 기도는 제외, 여전히 냉랭함)

무엇을 기도하든지 간에 하여간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밝아집니다. 여러분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게 여러분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거에요. 
왜? 마음은 영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세게 기도하십시오 

반대로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영이 탁해집니다. 영이 둔감해집니다. 
그래서 점점점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도 몰라요. 
점점점 인생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게 돼요.

기도를 여러분 쭉 한번 쉬어 보세요. 혹은 쉬었던 경험을 돌이켜 보십시오 
영이 탁해져 있는 게 뭔지 떠오르실 거예요. 

기도를 계속하면, 여러분 영이 좋은 의미로 날카로워져 있고, 깨어있고 
아주 맑은 산속의 호수 같은 느낌... 기도하면 여러분 이 느낌이 와요. 

근데 기도를 안 하잖아요? 
웅덩이에 물고여 있는,, 막 이렇게 이끼 껴있고 이런 거 있죠? 
여러분 영이 탁해지고요. 영이 둔해져요. 마음이 어두워져요. 염려가 많아져요. 
걱정이 나를 짓눌러요. 

△예수 믿기 전에 우리 마음은 어떤 상태예요? 다 부패했다 그러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거예요. 

그런데 마음은, 우리의 영의 상태가 계속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영이 맑아지고 강해지면, 마음은 반드시 새롭게 됩니다. 
제 얘기가 아니고 성경의 약속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라, 그러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거죠. 

△저는 경험합니다. 제 마음에도 여러분 염려가 몰려올 때가 있어요. 
마음이 복잡할 때가 있어요. 

'이 인간은 또 왜 이럴까? 저 문제는 왜 이렇게 됐을까? 
아 이거 했어야 되는데 왜 안 됐지? 아 이게 왜 이러지?' 
짜증나고 볶이고 염려되고 그러면.. 여러분 뭐 합니까? 기도합니다. 
한참을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영이 맑아지고, 마음이 새롭게 돼요. 
여러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염려가 있고 근심이 있으면 
이 말씀 그대로 입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래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대로 이루어져요. 

염려가 가득하고 근심이 가득한데 해결되지 않아요. 
마음이 우울하고 무기력한데 해결되지 않아요. 
왜 해결되지 않는지 아십니까? 제자들이 왜 해결 못했어요?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그랬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마음이 바뀌는 이 영적인 종류의 일, 
이런 류를 꺾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는 거에요. 

△나는 왜 안 되냐고요? 기도하셨습니까? 
혹시 기도는 하지 않고, 고민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고민만 하니까 무기력해지는 거예요. 

나는 왜 안 되냐고요? 기도하지 않고 근심만 하고 있으니까 안 되는 거에요. 
나는 왜 생각이 복잡하냐고요? 기도하지 않고 근심만 하고 있으니까 
생각이 복잡한 거에요. 

기도하면 여러분 폭풍 중에도 평안이 있고요. 
기도하지 않으면 태평천하 중에도 불안합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지 않으면 무기력합니다. 

기도하면 영이 활성화되고 
기도하지 않으면 영이 죽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기쁨과 겸손과 은혜가 충만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울과 교만과 자기가 판을 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 마음이 새로워져서 예배하게 되고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이 눌려서 낙심하게 됩니다. 

기도밖에는 없어요. 단언컨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고 초월하여 승리하는 길 
영적인 종류의 일들을 돌파하는 길은 기도밖에 없어요.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기독교는 여러분 초월의 종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현실 속에서 초월을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혹시 삶 속에서 현실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셨습니까? 
혹시 삶 속에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세상의 방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셨습니까? 

예, 그렇다면 그때가 바로 초월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류는 기도밖에는 다른 류가 없습니다.

'에휴 그냥 이건 안되는 일이야'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는 무기력한 기독교를 선택하실 겁니까?
아니면 그것을 초월하여 뛰어넘는 초월적 기독교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여러분이 택하시겠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 길은 여러분 낙심과 무기력의 길이 아니라 
뛰어넘고 또 뛰어넘는 소망과 초월의 길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믿음의 기도에 있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