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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벗으세요

LNCK 2023. 6. 26. 11:31

모새골공동체교회 230625 - 주일 예배 - YouTube

◈수건을 벗으세요           고후3:12~18            설교 녹취, 나름 정리

*출34:29-35의 모세가 광채나는 자기 얼굴에 수건을 가렸던 사건을
바울이 고후3장에서 인용한 내용의 설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내용이죠.

고후3:16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은, 수건으로 덮인 마음(15절)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수건을 벗은 채로, 복음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며,

16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그렇게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 내면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할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성숙하게 되며, 
마침내 주의 재림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를 얻게 될 것입니다(빌 3:21). 

.................

◑위 설교 45:50초부터 아래 녹취 시작

이제 본문 말씀에서 풀어야 될 단어가 하나 있어요. 
반복적으로 몇 차례 나오는 단어가 '수건'입니다. 
 
수건을 썼다. 벗었다.  수건을 왜 썼냐? 이런 내용들이 나오는데요. 
새번역은 '수건'을 '너울'로 번역했습니다. 

수건이 고린도교인들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그들이 봐야 될 것을 제대로 못 보는 거죠. 
수건, 베일을 통과해서 보니, 어렴풋하게, 희미하게 보는 거죠.

이 수건이라는 것은 제대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잘못된 수건을 쓰고 나면, 갑자기 무지하게 되어 버립니다. 
잘못된 안경을 쓰면, 우리는 갑자기 무지하게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수건을 벗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쉽게 수건을 벗고, 환하게 볼 수만 있으면 무엇이 문제겠어요?
성경에 이렇게 언급할 필요도 없는 거죠. 

그런데 이 수건도, 따지고 보면 두려워서 쓴 거거든요. 
모세 얼굴의 광채를 보는 것을 백성들이 두려워해서, 모세가 가린 것이죠. 

출3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40주야를 그 산에서 머물다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가지고 내려왔죠. 그래서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모세 얼굴에서 광채가 났어요. 굉장한 광채였던 것 같아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광채죠. 

그래서 백성들은, 그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스스로 수건을 썼어요. 자기 얼굴을 가린 거죠.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그런 수건이 아니겠죠. 
이렇게 앞이 어느 정도 보이는 천, '너울 veil'이라고 하는 게 맞죠. 
앞이 전혀 안 보이면, 모세가 길을 걸을 수 없었겠죠. *아마 터번

모세는 너울을 가리고 백성들에게 나왔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출34:34~35

▲이 사건을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본문 안에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뭐냐면, 너희들이 그 수건을 잘못 썼기 때문에 
보아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굉장한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얘기인데 
당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방 곳곳에 
아주 애매모호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어요. 

복음을 받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율법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복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거예요. 엉거주춤한 것이죠. 

그런데 그 이유가 오늘 바울은 '수건을 써서 그렇다'고 표현했어요. 
수건을 썼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를 먼저 찾아야 되는데, 
출애굽기에 나오는 얘기로는 
사람들이 모세를 보고 무서워하니까... 
그 위엄 있는 모세의 얼굴을 사람들이 무서워하니까   출34:30
모세가 수건을 써서 가린 거죠. 출애굽기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바울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바울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고, 13절에 보면,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를 이렇게 해석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 위엄있는 빛으로인해 
백성들이 모세에게 주목함으로써 
모세에게 붙들릴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이것은 '나를 보지 마라' ..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는 거예요. 

사실 그런 모세 인간의 위엄은, 뭐 있다가 없어질 것이죠.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굉장히 위엄 있는 인물이에요. 
곧 없어질 일이죠. 사라질 영광이라서 별거 아니죠. 

근데 백성들이 거기에 묶여질 걸 두려워해서 
아예 모세가 미연에 그것을 방지하고, 차단하려고 그랬던 것인데 
백성들은 영문도 모르고 거기에 꽂힌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대신에 
'모세의 수건, 모세 자체'에 더 관심이 있었나 봐요.
아마 추측건데, 수건을 가리니까, 더 신비감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신앙 위인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 없고,
오직 '그 신앙 위인'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에 이런 분이 있었어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주목하지 마세요. 나를 철저히 버리세요.' 
그러고 떠나갔는데, 
더 매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더 달라붙었다는 거에요.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자주 벌어지는 일입니다.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린도교인들이 '수건을 썼다'는 얘기는
그들이 '율법'을 주목하면서,
그 속에 담긴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율법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거죠.
율법은 최종 목표인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도구요, 과정인 거죠.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율법으로부터,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나야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율법 조문만을 만났어요. 껍데기만 만난 거죠. 
율법의 정신은 놓치고, 

'이것은 해야 되고, 저것은 안 해야 되고...
이것은 이래야 맞고, 저것은 저러면 안 되고...' 그런 율법 조문들만 남은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율법의 정신은 전혀 전해받지 못했어요. 마22:37~39

결국 그들에게 율법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조문이 되고 말았어요. 
(원래 율법은 살리는 목적으로 주신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바울은 그것을, 모세가 쓴 수건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한 사건에 빗대어 설명한 거죠.

본체인 '하나님의 영광'은 주목하지 못하고, (이건 눈에 안 보이고)
모조품인 '모세의 수건'에만 주목한 거예요. (이건 눈에 보이니까)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었지요. 
그들을 자유케 하려는 것이었어요. 

왜냐면 율법 없이 살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마치 짐승처럼, 무법천지로 사는 거죠. 또는 본성대로 사는 거죠.

그런 고대 원시시대에, 율법은 그들에게 엄청난 빛이요, 환한 영광이었죠. 
왜냐면 당시에는 사람 살아가는 길이 뭔지를 몰랐던 시절이었죠. 

그야말로 힘 있는 자는 힘으로, 힘 없는 자는 힘 없는 만큼 눌려서 
그렇게 살아가던 시절,  힘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인간의 고귀함과 도리가 무엇인지를, 율법이 알려준 거예요. 

그렇게 율법을 통해, 인간이 눈이 번쩍 열렸으니까, 
일단 자유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거예요. 
그냥 '조문'으로 받아진 거예요.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글자로)
그래서 율법을 주신 원래 정신, 원래 목표를 잃어버렸어요. 

출34:28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느니라' 

율법을 '언약의 말씀'이라고 그래요. 언약은 약속이죠. 
율법에 어떤 약속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 숨겨진 약속, 그걸 봐야 되는 거죠.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이 율법 속에 숨겨진 약속은 뭡니까? 
오실 메시아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메시아의 성품(하나님의 사랑)이죠.

예수님이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셨잖아요.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런 것들을 봐야 되는데, 
고린도교인들이 이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다 보니까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5

모세의 글, 곧 율법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구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요.

그 예가 청년 사울입니다.
그가 율법을 엉뚱한 시각으로 보니까, 
성도들을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 일을 한 거죠. 

▲그런데 더 답답한 건 뭐냐면, 수건을 쓴 사람들이 
자기가 수건을 썼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벗어버려야 될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오히려 그 수건이 요긴하고, 안전하고, 
자기에게 신앙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답답함을 좀 풀어내고자 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저 수건만 벗어버리면 모든 것이 환하게 비춰질 텐데... 
그러면 진실이 보이고 더 자유롭게 될 텐데...' 
이런 심정으로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적용

이제 우리의 눈을 덮은 수건은 무엇인가요? 그걸 살펴야죠. 
유대인들의 수건은 그렇다고 치고, 
오늘날 우리가 덮어 쓰고 있는 수건은 뭔가요? 

▲그건 사실 나를 지켜주는,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일례로, 제게 있어서 '수건'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수건은 '영성학'입니다. 
(제가 한평생 영성학을 연구한 신학자라서)

영성,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보고,
그와 같은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입니다. :18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그 최종 목적인 18절입니다.
제가 전공하고 가르치는 영성도, 그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보고,
그와 같은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입니다. :18

그런데 '영성 영성' 말하면서도
그 최종 목적을 지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죠.

△일전에 제가 영성세미나에 강사로 갔더니, 강의 후에 토론을 하는데,
영성 이란 단어의 정의를 놓고, 세 시간이나 갑론을박 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주제를 빗나가서, 엉뚱한 곳을 주목합니다.

왜 예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영성.. 
제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혼자 '영성'을 주장하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래서 '무슨 이단 교주가 되려나?' 이런 오해도 받고 그랬는데 

왜 이렇게 영성이라는 말이 오늘은 자주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엉성하기 짝이 없어서 
그것을 어떻게 제대로 바로 세워보자는 의도이겠죠. 

그래서 '영성'은 하나의 방편이죠. 수단이죠. 본질은 아니에요.
본질은, 본문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보고,
그와 같은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입니다. :18
 
그러니 결국 이런 영성운동이나, 이런 신학적 주제는 사라져야 하죠.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철수해야 됩니다. 

그런데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금과옥조처럼 '도구'에 매달린다면 
정작 봐야 할 것은 놓칩니다. (*목회자에게는 '교회부흥'이 될 수 있겠죠)
'도구'를 생명으로 알고 붙들고 늘어지는 꼴이죠.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수건입니다. 
이것은 제 경우입니다. 제 '수건'입니다.
제가 영성신학자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수건을 가지고 있고, 쓰고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것들이 다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주고, 자기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상이나 
어떤 사람이나, 크고 작은 전통 들이 그러하겠죠. 

그런 전통, 즉 자기를 지켜주는 그 수건 아래에서 
세상을 보거나, 하나님 말씀을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정작 보아야 될 것은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붙들고 늘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수건을 어떻게 벗어버리죠? 벗어버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쉽게 못 벗어버립니다. 

왜냐면 그것이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 보호막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벗어지겠어요? 그것을 대체할 만한 대안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면 벗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결정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어요. 
고후3:16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리스께로 돌아가라!'는 얘기에요. 
본문의 의미대로 얘기하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 즉 구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헛된 영광을 뒤집어 쓰고 있는 그 모세를 주목하기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수건을 벗어버리면 다 보이는데 
수건을 벗어버릴 수 없으니까...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라. 
그러면 그리스도로부터 구약을 읽어내면 
그 구약의 본래 하나님 말씀의 의도가 드러난다는 거에요.

바로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품을 얘기하는 것이죠. 

만약 성경을 읽는데, 우리가 거기서 그리스도(의 속성)를 볼 수 없으면 
자구와 글자만 보기 시작하면 
결국 그 성경도 우리를 얽어 매는 도덕교과서가 되고, 율법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는 건 무엇입니까? 

제가 영성훈련을 받으러 오신 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소리입니다. 
그분들이 와서 여기 온 동기를 얘기를 하죠. 첫날에. 
그 얘기 중에 많이 듣는 얘기는 이것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잘 살아야 할 텐데, 그 길을 좀 찾고 싶다고'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고, 
목회자는 젊은 사람들도 오지만 
일반 사람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오십니다. 

저희 훈련원에 찾아오신 목적을 그분들은 
'나머지 생애를 어떻게 잘 살아보고 싶어서' 오셨다고들 얘기합니다.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까지도 잘 살았어요. 
지금까지 잘못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데 관심도 없습니다.
잘 살아오신 분들이.. 더 잘 살려고 하는 거죠.

그동안 나름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의 영향도 잘 받았고 
나름대로 성경적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성실하게 잘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제 남은 생애를 좀 더 잘 살아내려고, 저희 영성훈련에 왔다고 합니다.

이 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설교 내용이죠.
'그러면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세요!' :16

그러면 그분들은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잘 살았는데 또 어디로 돌아가라는 건지요?' 

'그래요. 제가 지금까지 뭐 그렇게 잘못 산 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니까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전부인 것처럼 붙들고 늘어진 
그런 모습은 보이네요. 
그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 그 수건을 벗어버려야겠네요.' . 

그것을 자각하고 나면, 그리스도 예수님이 보인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고전10:31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너무너무 자주 듣는 말씀이죠. 근데 이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기보다는 지루하게 느껴지죠. 싫증이 느껴져요. 너무 자주 들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왜 지루하고 싫증을 느끼냐면, 수건을 덮어썼기 때문이에요. 
무슨 수건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러니까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해라' 결국은 그런 얘기 아닙니까? 

누가 그렇게 얘기했는데요? 자기가 수건을 덮어쓴 거죠. 

오늘 본문 말씀을 하나 더 읽으면, 그렇게 해석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와 비슷한 말씀이 이렇게 나와요.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이, 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죽으란 의미입니까? No
이건 모세의 예하고 비슷해요. 

모세가 하나님을 뵈오니, 거기서 모세가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가 빛나는 얼굴로 바뀌었어요. 

말하자면 여기에 등장하는 '영광'이라는 것은 
내가 주님께 무엇인가 헌신하고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분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받아온 것처럼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분으로부터 받을 영광이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고전10:31절의 '먹든 마시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는 말씀도, 그리스도께 돌아가서
모세처럼, 그 분의 영광의 빛과 광채를 내가 받고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18
그게 외적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죠.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창세기에)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도록, 우리에게 빛을 비췄다는 얘기죠. 

-창세기의 빛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빛
두 개가 같은 빛입니다. 그 빛을 오늘날 우리 마음에 비췸받아야 된다는 거죠.

말하자면 일체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면, 
그 얼굴에서 비추는 빛이 우리에게 영광을 비추고요, 
그리고 우리는 그 열매로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라'는 말은 
우리가 날마다 진정으로 변화를 갈망하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삶의 목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이렇게 그리스도께 집중시키고 집중시킨다면 
우리가 쓰고 있는 일체의 수건은 
그 다음에 저절로 벗겨진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것,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모든 것, 
그것이 사상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것은 벗어야 할 수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례로, 칼빈주의, 이신칭의 라는 도구도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 얼굴에 비춰진 하나님의 빛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 도구, 그 수건도 벗어버려야 하는 거죠.
왜냐면 계속 수건을 쓰고 있으면, 그것에 가려서 그리스도를 못 보게 되니까요)

그 대신 놓지 않고 그걸 붙들려고 몸부림을 치면 
우리는 정작 보아야 될 그리스도는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끊임없이 갈망하고 간구해야 될 마음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늘 수시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게 뒤집어 쓰고 있는 수건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님 외에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옵소서' 

그러면 주의 영이, 우리를 덮고 있는 수건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고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십니다. 
일체의 모든 묶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더 높은 가치는, 하위가치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더 높은 가치를 얻으면, 
밑에 하위에 묶였던 것들이 거기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최후의 가치로 삶아보세요. 
낮은 차원의 수건은 저절로 벗겨지고, 더 높은 자유의 길로 나아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주께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덮어 쓰고 있는 수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서 
참 자유인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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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도입 "자유가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장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설적인 연설문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채 한 달이 되기 전 사건입니다. 
1775.03.23. 영국의 식민지였던 에서 버지니아 리치몬드 세인트존스 교회에서
식민지 협의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죠. 

그래서 영국의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전쟁이 터질 것이기 때문에 
이 전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담이 컸죠. 
생명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하원인 의원인 패트릭 헨리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 간청과 타협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모두 일어서서 무기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울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 하고 외칠지 모릅니다만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갖고 싶습니까? 생명은 존귀하고 평화는 감미로운 것이지만 
사슬에 얽매이고 노예가 된 채로 것을 얻고자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길을 택할지 모르지만 나는 외칩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

이 역사적인 연설은 그 의회의 의원들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민병대를 조직해서 대응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 후 이 연설문은 이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수많은 민중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에도 사용되었고요. 
대한민국에서도 1945년 겨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시위를 벌이면서도 
이 구호는 사용되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저도 매일 아침에 아침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운동을 시작합니다. 
침대에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새벽을 깨웁니다. 
서서히 몸과 마음이 깨어나면서 밤새도록 쉬고 있던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루를 여는 아침이잖아요. 아직 누구랑 부딪치지도 않았잖아요. 
근데 그 아침에 맑고 깨끗한 마음의 평안한 보다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무엇인가 잔잔하게 흐르는 불편한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하곤 합니다. 
그렇게 육체와 의식이 깨어난 상태에서, 이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만약 내가 그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채, 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평안하지 못한 그 마음의 상태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또 이런저런 사건들에 하루 종일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의식을 가지고 마음을 살피면 
그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평안이 없는 거죠. 

평안이 없는 마음은 자유와 관련돼 있습니다.
완전한 평화는, 완전한 자유로부터 비롯됩니다.
평화롭지 않은 마음의 상태는, 마음 깊이에서
원하지 않은 무엇인가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묶임이 내 마음을 흔들어 댑니다. 그리고 평화롭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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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한 고린도교인
고린도후서 3장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의 얼굴의 광채를 가리기 위하여

수건을 쓴 앞서의 그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의 역할과 ‘복음’의 의미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수건 혹은 베일'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심령의 눈이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그 영광)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욕심과 편견, 무지와 단편적인 사고,
의심과 불순종 등 죄의 수건(베일)을 통하여 율법을 봄으로써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책망과 징벌만을 보고,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요 뜻인 의와 사랑,
은총과 선하신 경륜을 미쳐 보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의 얼굴에 빛나던 하나님의 일시적 부분적인 영광의 광채,
다른 말로 율법의 광채 자체도

새로운 계시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비추일 때는
끝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악의 수건을 쓰고 율법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영원한 진리와 영광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배격하며
그 영광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인간 심령의 수건을 벗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하고

바로 그때 옛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던 율법의 일시적인 영광 대신
하나님의 뜻과 모습 그 영광의 광채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영광에 조명 받은 사람은
그 광채를 반사하고, 그 빛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