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1:16~1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저는 사역에 특성상 여러 나라와 또 민족들 또 지역을 돌아다닙니다.
이번에도 고목사님하고 함께 또 다녔고 개인적으로 그 외에 또 몇몇 나라들을 다녔는데 그런 과정 가운데 많은 선교사님들, 또 현지 사역자들, 또 청년들이렇게 만나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선교지는요 정확하게 둘로 나눠집니다.
선교지는 딱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하늘이 열려 있는 선교지 교회 -또 하나는 하늘의 닫혀있는 선교지 교회
열린 선교지의 특징은, 강력한 예배와 기도에 불이 붙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와 예배하는 자리를 지켜냄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말미암아 계속 하늘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의 닫혀있는 곳의 특징은, 기도와 예배의 불이 다. 꺼져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 선교사님들이 다 강력한 기도를 하고, 또 예배도 드리고 나름대로 불을 가지고 선교지에 갔겠죠.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 지속성 입니다. 영성의 관건은 지속성에 있습니다.
불받는 것은, 그래도 웬만하면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집회 가운데 가고, 또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정말 양심에 화인 맞은 자 아니면, 웬만 하면 불 받고, 은혜받아요.
근데 중요한 것은, 이걸 얼마만큼 지속하느냐? 그런데 여러분, 영성이 있어서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다. 보니 영성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걸 "버티기 영성"이라고 합니다. 인내하며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는 하늘이 열립니다. 버티는 자에게는 영성이 임합니다. 버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원리가.. 복잡하고, 깊고, 심오하고 어려워서가 아니라 굉장히 단순한데, 이 단순한 걸 우리가 놓쳐요.
여러분 제발 제가 다시 한번 강조드리는데, 영적인 원리는 단순합니다. 단순한 것을 놓치면 안 돼요.
기도하는 자리를 버텨내는 사람에게... 영성이 임합니다. 말씀앞에 버티고 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예배하는 자리 가운데 버텨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속하고 버텨내면, 영성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지속하지 못하고 기도와 예배에 불을 다 꺼뜨려버리고, 하늘도 닫혀버리면, 여러분 물어볼게요. '하늘이 닫히면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선교지에 공통적인 고백이 뭔지 아세요. '밤새 수고하였지만 우리가 잡은 게 없나이다.'
수고한 열매로 '뭔가 이제 이루었다. 됐다' 싶은데 한순간에 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그동안 수고한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다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만 늘 해요. 기도, 말씀, 예배에 버텨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니까 힘들고 어렵고 지치는 거죠.
반대로 하늘이 열린 선교지의 선교사님의 고백은 늘 똑같아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왜 되는지 모르지만, 그냥 (사역이) 됩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과 말씀에 따라 순종했는데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공급하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해주셔서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정확한 이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에요. 굉장히 단순한 말씀이죠.
약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왜 속지 말라고 그랬을까요?
'하도 잘 속으니까' 야고보 사도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속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뭘 도대체 속지 말라는 거냐? ↙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좋은 것, 모든 좋은 은사, 이 모든 좋은, 필요한 것들은 다 위에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제발 기억하고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걸 속으면, 땅에서부터, 세상으로부터 오는 줄 알고 맨날 거기 기웃거리고, 거기에 매달리고, 거기에 휩쓸려서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고, 얽어매이는 삶을 살 수가 밖에 없기 때문에 제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영적인 원리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죠. 어떤 일이 딱 터지면, 그 일의 해결점을 땅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찾지요!
그런데 어리석은 육과 혼의 사람은, 뭔 일이 터지면 늘 땅에서 찾아요. 영적인 세계에서 어떻게 결정지어진 것에 대한 결과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에서 결국 나타난 것 뿐인데
나타난 곳(현실)에서만 해결하려고 하니까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해결이 안되면 늘 (문제를)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거죠.
그러면 육과 혼 같은 땅에 있는 영역들이 필요 없나? 그런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우선순위라는 거예요. 우선순위는 영적인 하나님과 교통하고 정리시키는 거라는 거에요.
그분의 의중과 그분의 뜻에 딱 연결시키면 나머지 모든 혼과 영은,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정렬시키는 거예요.
이게 창조 때 얘기했던 'formless 혼동한 것이 질서있게 정렬된' 걸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의 하나님이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에 따라 피조물과 섭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과 질서에 따라 딱딱 자기 위치와 자리 역할을 정확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 질서가 다 깨져버린거에요. 그러니까 이 영적인 질서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땅에 있는 것, 이미 깨지고 망가진 것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니까 영원히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영적인 이 질서가, 딱 하나님 앞에서 정렬되면 혼과 육의 영역에서도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는 지가 정리가 끝납니다.
그리고 혼과 육도, 영안에서 정렬시킬 때, 극대화를 이룰 수 있어요. 가장 탁월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진리를 이룰 수 있는 통로가 되고, 도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혼과 육의 영역이, 영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뜻가운데 정렬이 안 되면
이 탁월한 혼적인, 육적인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대항하는, 대적하는 통로와 도구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늘 우선순위 입니다. 우선순위에 있다는 거죠. ▲사실은 주님은 우리가 이런 영적인 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거듭나게 하신 거예요. 육신으로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거듭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이 창조의 질서의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에 예비하신 모든 좋은 풍성한 은사와 선물들, 완전하신 것들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풀어냄으로 말미암아 혼과 육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하늘의 탁월함을 통하여 모든 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렬되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걸 놓쳐버리면 육과 혼으로만 싸우려고 그래요.
제가 늘 얘기했지만,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보면, 육과 혼으로 극대화를 이룬 세상을 우리는 홍가 육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여러분, 세상을 우리 혼과 육으로 어떻게 이겨요? 혼과 육의 끝판왕이 세상인데 그걸 무너뜨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에요. .
영적인 하나님의 지혜, 영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하나님의 은사와 좋은 것들을 통해서 이걸 이겨낼 수 있다.. 라는 거죠. 약1:17
그런데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7b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은 그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거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이 원리는 절대 안 바뀐다는 거예요.
'지금 세상이 어떻게 급속히 바뀌는데요?' 그거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는 안 바뀐다는 거에요.
영적으로 하나님께 정렬된 사람은 자기 모든 혼과 육을 극대치를 이루어 혼과 육으로 준비되어 있는 세상을 거뜬히 돌파해내게 된다는 거죠.
▲우리가 잘 알듯이 그렇게 주님은 먼저 사셨고요. 그렇게 주님을 따라 살라고 자신들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원리에 좇아살겠다 라고 결정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제자'예요.
제자란 무엇인가요? 간단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죠. 제발 복잡하게 얘기하지 마세요. 제자를 막 한 서너 줄로 설명하면, 반드시 까먹어요. 간단하게 암기하세요.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다' *본받아 행하는 자
'따라간다' 라는 것은 방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여러분 방향 direction 이 잘못되면, 뭘 해도 잘못된 것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착하게, 성실하게,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나이스 하게 살아도 방향이 잘못되면, 나이스 하고 도덕적으로 착하고 훌륭하게 잘못돼요.
그러니까 현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착각하고 있어요. 방향성은 잘못되어 있는데 도덕적으로 착하고 나이스 하게 덕을 세우고 아름답게 살면 자기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천만의 말입니다.
여러분, 절에 다니는 분들도 착한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분 기독교의 본질은 그게 아니에요.
물론 우리가 예수 따르면서도, 덕을 세우고 섬기고 겸손히 아름답게 살아야 되는 건 맞아요. 그러나 그건 다 부차적인 거예요.
신앙의 본질은, 세상을 좇아서, 세상을 따라 살던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이제 예수께 꽂혀서 예수를 좇아 사는 거에요.
그 좇아 사는 과정 가운데, 예수를 보고 배워 예수의 삶을 우리의 삶 가운데 다시금 재현하는 게, 제자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열심히 따라 살다보니까 뭐라 그래요? 예수의 닉네임이 별명이 그리스도거든요. 메시아,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까 초대교회 시절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누스' 그리스도인, 영어로 크리스찬이라고 부른 거에요.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들'이란 뜻이죠.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 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을 좇아 열심히 살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이 '아휴 저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로 불렀는데, 순수한 한국말로 '예수쟁이'죠. 그런 예수쟁이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믿음의 주로 또한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거에요. 히12:2
여기는 '바라보는' 것은, 그냥 멀뚱히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시선과 마음과 생각의 중심을 예수께 고정해 둔다'는 얘기에요.
왜요?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 살다보면 내 시선과 마음과 생각이 세상 모든 것에 흩어져 다 뺏겨 버리거든요.
그 시선을 예배를 통해서 다시금 모으는 거에요. 기도를 통해서 다시 모으는 거에요.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 정렬시키는 거예요. 왜? 예수 놓치면 안 되거든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놓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거는 꽝입니다. 목숨 걸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쳐서 예수께 복종시키는 거예요.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가운데 나타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리스도를 내 삶 가운데 나타내야 돼! 내가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돼,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해야 돼!'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그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께 꽂혀서, 그리스도께 모든 마음과 생각을 드려서 (기도, 찬양, 예배, 말씀, 헌신봉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려고 하다보면 자동적인 결과로, 그리스도가 내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리스도께 꽂히거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공급받는 것을 놓쳐버리고 내 힘으로 그분을 닮아가려고만 할 때는 본질을 놓쳐버리고 율법의 행위, 종교행위 같이 돼버린다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고달파요. 그런 삶은 힘들어요.
그러니까 실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왜 이렇게 예수 믿는 게 힘들지?' 하는 분은 간단해요. 자기 마음과 생각과 중심이 예수께 딱 꽂혀서 공급을 받지 못하니까 신앙생활이 그런 상태에서 열심히만 해야 되니까.. 고달프고 힘들죠.
본질을 돌아가야 돼요. 다시 한번 예수께 꽂히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렇게 할 때, 그렇게 예수님께 꽂혀서 따라올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똑같이 살 수 있고 또 더 놀랍게 행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우리가 예수님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나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예수께 꽂혀서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갈 때 예수가 행한 것을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믿고 따라가는 거에요. 믿고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믿음이 이미 거기서 결판이 나요.
여러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이슈를 자꾸만 '믿느냐/ 안 믿느냐' 그렇게 따져요.
그게 아닙니다. '뭘 믿느냐?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걸 따져야 돼요. -예수가 하신 말씀을 믿고 있느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믿고 따라가고 있느냐?
여러분, 예수님이 이 말씀 하셨으면 예수님이 '뻥을 치신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걸 믿으셔야돼요.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다고, 내가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더 큰 일도 나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멘 입니까? 요14:12
▲그런데 현실은, 주님이 행한 일은 고사하고 뭐 더 큰 일은 말도 안 되고, 주님을 따라 행하는 일이 안돼는 사람이 있어요.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이유가 있고, 되는 사람은 되는 이유가 있는 거에요.
주님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다'라고 얘기했는데 안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삶을 통하여 보여주신 대로, 내가 안 따라가고 있어서 그런 거죠'
주님은 육신의 몸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땅의 원리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 있는 것들을 풀어내는 삶을 살아내셨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 가운데 뭔가 빼 먹은게 있다는 거죠. 그래서 주님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거죠. 오늘 여러분과 그거를 같이 좀 나누기를 원해요.
◑주님의 공생애 삶과, 오늘 우리 삶의 다른 점
▲1. 첫번째, 여러분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회당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되었으되...'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해서 아무 말씀이나 감동되는대로 막 전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일에, 주님 당신의 모든 사역을 삶을 집중시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서, 주님이 행한 건 딱 두 가지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대로 증거하시고 -그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기의 삶을 거기에 맞추신 거에요.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뭐라고 얘기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할 때 듣는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는 말씀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권세가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이 순복했거든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삶 가운데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도록 부어주신 거예요.
그러면 단순합니다. 왜 우리의 삶가운데는 권세가 안 나타나죠? 특별히 말씀의 능력이 안 나타나죠? 간단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나를 쳐서 순복시켰냐?'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권위에 내가 순복을 안하는데 어떻게 그 진리의 말씀의 권위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겠습니까?
영적인 원리는 간단해요. 내가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복하면 그 진리의 말씀의 권위가, 내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거에요.
나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말씀이, 어떻게 내 삶을 통해서 권위로 나타납니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영적인 원리는 단순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설 때, 해야 할 것은 단순해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주야로 묵상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깨닫게 해 주신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그 권위 앞에 내가 무릎을 꿇는 거에요.
우리가 날마다 지금 큐티 묵상할 때, 여러분 다른 거 하려고 하지 마시고 이거 하나의 모든 초점을 맞추세요. '오늘 주신 일용할 양식 앞에서는 내가 내 삶을 쳐서 맞춘다' '오늘 주신 메시지 앞에서는 내가 그 말씀을 살아낸다' '오늘 주신 메시지의 권위 앞에서는 내가 순종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말씀으로 활성화 되기 시작하는거죠.
말씀이 우리 인생의 권위를, 지지해주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말을 잘해서가 아니에요. 뭔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권위가 부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왜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앞에 내가 순복했거든요.
△근데 현대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거예요.
말씀에 대한 자료, 말씀에 대한 지식.. 이거 많이 갖고 있는 것은 별의미 없어요. 구글에 다 있어요. 네이버 들어가면 다 나와요.
그게 권위를 내게 안 줍니다. 그게 (지식이)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이유는 이 말씀이 영적인 하나님의 수술대와 같이 우리 전 삶을, 우리 전 생각과 마음을 스캔해서 말씀과 내 안에 매치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다 영적으로 수술하고 맞추도록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도록 말씀이라고 하는 거울 앞에, 이 진리 앞에... 나를 비추는 거에요.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감동과 깨달음 앞에 내가 무릎을 딱 꿇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요14: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보다도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두 번째 예수님은, 늘 기도로 아버지하고 교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영원 전부터, 이 땅에 오시기 바로 직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계셨어요.
그리고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33년반을 사시고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다시금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잠깐 떨어져 있는 기간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33년 반이에요.
그 33년 반을,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교제하시던 시간에 비교하면, 정말 '순간'이요,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 33년 반 동안 혹시라도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질까봐 정말 예수님은 주야장천 기도 하셨습니다.
영원과 비교할 때, 그 33년 반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인데 그 잠깐 시간을 떨어져 있으면서도 주야장천 쉬지 않고 기도하셨어요.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기도를 안 하셔도 될 만한 분, 기도 안 해도 별 어려움이 없으실 것 같은 분, 한 분을 들자면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기도하신 분이시죠.
그럼 여러분,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죠. 왜 우리의 삶가운데 예수님처럼 역사가 안 일어나는가요? 왜 여러분과 제 삶가운데서는, 도대체 이 예수님의 역사가 잘 안 되는가요? 너무나 분명해요.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면, 예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안 나타난다? 간단해요. 우리에게도 나타나요!
예수님처럼만 기도하면, 예수님의 역사가 우리 삶가운데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의하시면 크게 아멘!
△근데 놀랍죠? 죽어라고 우리는 기도 안 해요. 우리는 이 원리를 알고도.. 기도 안 해요. 이게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치열한 것은, 정작 기도에 자리에서는 안 일어납니다. 왠만 하면 기도의 자리에 온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세요.
그런데 대부분 영적인 싸움이 언제 일어나냐면, 기도의 자리에 나오기 직전까지 일어나요.
왜요? 원수가 알거든요. 기도의 자리에 안 나가게만 하면, 마음껏 우리를 주무르고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마귀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제가 자주 쓰는 방법이에요. 뭐냐면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갈 때 여러분의 생각을 '공백화' 시키세요. 생각하지 말라고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으라고요. 자기 생각을 비워버리라고요.
왜 그러냐면, '오늘 피곤한데 내가 지금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면 오늘 하루 살 때 온종일 힘들 텐데..' 이런 생각을 공백화 시켜버리세요.
또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꼭 해야 할 일이 떠올랐어요. '그거 해 놓고 기도하자' ... 그렇게 하면, 대개의 경우 기도 못 합니다. 뭐 이런 생각이 많은 거에요. 잠깐 다 내려놔야 돼요. 그냥 무조건 기도하러 가야 돼요!
그냥 아무 생각없이 기도의 자리로 가세요. 너무 피곤해요? 그럼 가서 자더라도 가세요. 기도의 습관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자는 사람도, 홀연히 어느 날은 반드시 깨어서, 기도할 때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은요. 그 바쁜 공생의 가운데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면서 난리를 쳤습니다.
근데 예수님 뭐 하다 내려 오셨어요. 기도하다 내려오신 거예요. 마치 그 바쁜 가운데서도 땅에 있는 모든 전기 스위치를 다 뽑아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께만 딱 스위치 꽂는 시간, 단둘이서,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또는 밤이 맞도록... 또는 한적한 곳에 가서... 할렐루야!
△여러분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정말 못 배우신 분들이거든요. 우리처럼 제자훈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글도 잘 몰랐어요.
저희 어머니도 그랬어요. 권사님이셨는데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 믿고 성경 말씀 읽는데 띄엄띄엄 읽는 거죠.
근데도 여러분 성경말씀 다 써가면서, 필사하면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중간중간 모르는 것은 이렇게 다 따로 기록해요. 그리고 나한테 나중에 모아서, 주말에 만나면, 저한테 질문하셨어요. 어떤 때는 질문이 20가지나 되는 날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저희 일가친척들 각 사람의 이름 불러가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종일 기도하셨어요. 다른 거 안 했어. 그러다가 피곤하면 드라마 한번 보는 거예요. 나머지는 계속 기도 하시고요.
그러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 왜 하나님이 역사해 주셨나?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새벽에 습관에 따라서 기도하신 것을 본받아, 새벽기도 했어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산에 올라가서 밤에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어요. 또 골방에 가서 기도하라고 명하셨죠.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그대로 따라 한 거예요.
이런 기도를 서양에서는 '코리안 스타일 프레이어' 라고 얘기하기도 하죠.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 짧은 기독교 역사가운데서도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엄청나게 하나님이 부흥과 역사를 부어주셨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한대로 기도 했어요. 무식하게 진짜로 기도했죠. 새벽에도 기도하고, 수요일도 기도하고, 금요철야 기도 하고 주일도 기도하고, 그리고 또 특별새벽기도, 주기 별로 기도하고...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일 년에 상반기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한 번에 팔십일 씩 기도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힘들어해서, 40일씩 네 번으로 나눴대요. 그러니 거의 일년 내내 기도하는 거죠.
이게 여러분 간단합니다. 기도해야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예수님도 말씀하신거죠.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올 수 없느니라' 막9:29
△그런데 제가, 예수님의 기도를 연구하면서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셨을까?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봤어요.
우리가 오래 기도하다 보면, 막 기도할 제목들이 많이 고갈되잖아요. 막 사돈의 팔촌까지 기도 했는데도, 그저 십 여분 지나가고 막 열방 한 바퀴 돌아왔는데, 막 이십 여분 지나가고, 종말을 위해서 기도해도 삼십 분... 거의 막 순교할 것 같은데 겨우 한 시간 찍고, 힘들고 어려운데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셨다는데, 도대체 뭔 기도가 그렇게 많았을까?'
제가 사복음서를 연구해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해서 결론을 내렸는데 딱 세가지였어요. 내가 이걸 발견하고 너무나 놀라가지고...
1)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첫번째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우리는 하나!"
죄송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주된 레파토리가 이거에요. I love you, you love me, we love each other! 이거 였어요.
육신의 몸을 갖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아버지하고 이 기도를 통해서 뭘 안 잊었냐면, 뭘 놓치지 않았냐면 아버지가 누군지를 안 놓친 거예요. 아버지가 누군지를!
또한 자신이,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자신이 아버지 안에서 누구신지를.. 안 놓친 거예요.
여러분, 사실 이 두 가지 문제만 해결돼도 우리 신앙의 대부분의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자존감, 정체성의 문제, 혼란... 이 모든 문제는, 이걸로 정리 끝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좋은 분이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안 받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이십니다. 능력이십니다. 반석이십니다. 그게 우리 하나님이세요. 우리 아버지세요.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아들 독생자 예수의 피 값을 주고서 하나님이 사신 그렇게 엄청난 값을 치르고 살만큼 소중하게 여긴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에요. 그게 우리 각자의 정체성이에요.
우리가 뭘 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존재 자체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값으로 살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거에요.
그래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얘기하잖아요. Prove!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걸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명 안 합니다. 왜? 할 필요가 없어요. 왜 증명해야 되는데요?
이미 자기의 정체성과 존재감이 분명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증명하려고 시달리지 않습니다.
왜 증명해야 되는데? 여러분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 뭐하러 증명합니까? 왜 거기에 매달리입니까?
여러분의 존재적 의미? 여러분의 어떤 정체성? 여러분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에 대한 것들을 왜 세상에서 내가 증명을 받으려고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걸로 정리를 끝내는 거예요. 이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죠. 요8:32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우리가 얼마짜리이고, 얼마나 가치 있고,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지... (증명해보라고) 거의 폭력적으로 휘두를 때 우리는 그거에 대해서 어떻게 해요? 자유하는 거에요. I don't care!
왜요? 그거에 의해서 나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에요. 거듭남으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땅에 있는 기준에 의해서 평가를 받습니까? 하늘에 속해 있는데.. 하늘이 기준에 의해서 평가를 받아야지죠.
근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평가를 끝냈어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유업을 이을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삼아주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사역이나 일이나 직장이나 성공이나 이런 거를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존재감을, 우리의 정체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이미 증명해주시고, 확정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막 사역에 목숨 걸고... 그게 아니었어요. 왜요? 막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잖아요. 예수님이 기적 행하시고 말씀 전하니까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는데 예수님은 굉장히 가볍게 떠나십니다. 거기를 떠나서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세요.
막 제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밀려오는데, 예수님은 없어졌어요. 어디 갔냐고 나중에 물어보니까, 무리를 떠나서 아버지하고 대화하고 오신 거예요. 'I love you, you love me.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이거 기도하고 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것에도, 예수님은 휘둘릴 수가 없어요 왜? 이게 너무나 분명하니까!
여러분은 이게 분명합니까? 이게 분명합니까? 자유하세요. 자유하십시오! 이게 분명한데, 왜 세상에 있는 것에 우리가 흔들립니까?
2) 두 번째,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했어요. 끊임없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어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해달라고' '내가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늘로 데리고 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보내는 데, 저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달라고' 끊임없이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합니다.
여러분, 기도의 양을 늘리고 싶잖아요? 그러면 지도를 보세요. 기도할 거 겁나게 많아요.
저는 이제 취미가 지도 보는 거거든요. 제 방 뒤쪽에도 지도가 붙어 있어요. 그거 보면 기도할 게 너무 많아요. 기도할 게...
저는 월요일 날은, 미국 동부를 위해서 기도하고 화요일은 일본, 수요일은 한국과 북한, 목요일은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이렇게 쭉 기도합니다. 금요일은 중동을 위해 기도해요.
중동을 위해 기도하는데 기도할 게 너무 많아요. 왜요? 중동을 한 바퀴 도니까요.
우리 중동 선교사님들 이름만 불러도 10~20분은 금방 가요. 기도의 양을 늘리시려면, 중보기도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목사님,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중보기도 합니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맞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요!' 그리고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기도의 마음을 부어주세요.
3) 세 번째는 자기 부인, 즉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추는 기도를 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자기 부인하고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게 무슨 도 닦듯이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어요. 주님이 그것을 한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뭐냐면, 아버지가 누구고, 자기가 누구고 그리고 자기가 어떤 목적에 따라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는지가 딱 분명하니까, 아버지의 뜻에 딱 꽂히는 거예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늘 갈등이 있는 거죠? 죄송하지만 일본말로 아다리가 이게 안 맞냐면,
'아버지가 누구고, 내가 누구고, 내가 어떤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가.. 이게 정리가 안 되면 아버지의 뜻하고 내 뜻이 늘 안 맞아아요. 갈등이 생겨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시고, -주님이 정확하게 누구시고, -주님 안에서 내가 어떠한지 자이고 -그리고 주님이 나를 이 땅을 보내시고 구원하신 그분의 목적과 뜻이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해지면 하나님의 의중과 뜻과, 내 소원이 딱 연결되는 거예요. 드러맞는 거예요.
그러면 라이프가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단조로워져요. 왜? 그 뜻에 딱 연결돼서, 그것만 이루면 되니까요.
근데 복잡해요. 왜? 내게 생각이 너무 많아요. 왜 많아요? 아버지가 누군지가 헷갈리는 거에요. 자기의 정체성이 흐릿해지는 거에요.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가 애매해지기 시작할 때 굉장히 삶이 복잡해지고요. 정렬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거를 쳐서 맞추는 작업이 사실은 그게 영성이에요. 거기서 결판이 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삶을 보면 간단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고, 아버지 하시는 일에 자기를 맞춥니다. 그냥 아버지 뜻에 모든 것을 맞춘 거예요.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가 계획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어요. 전부 다 아버지 뜻을 이루는 일만 하셨죠.
요5:19~20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걸 아예 못 박으신 거예요. '난 스스로 안 한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거 보고, 거기에 내가 동참한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도 아들을 사랑해서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아들에게 다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게 안보이냐? 간단해요. 내가 하나님 뜻에 안 맞추니까 그렇죠. 거기에 맞춰야 보여지죠.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사실 저의 사역을 보면, 부끄럽긴 하지만 저는 늘 사역에 분주하고 바쁘고 그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어떻게 보면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달력을 딱 보고 스케줄이 꽉 차 있으면 거기서 내 존재감과 함께 Everybody wants me 이러면서 이런 쓸데없는 거... 사역하면서 힘들면 오히려 전투열이 더 불타고.. 제가 그러는 스타일인데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인 줄을 알았어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딱 하나예요.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대로,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돼요.
여러분 이건 사역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구체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대로, 보여주신 만큼만 순종하고 따라가면 됩니다. 할렐루야!
뭘 막 많이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확하게 아버지의 의중과 뜻에 맞춰서 하는게 중요하다는 거에요.
열심히는 했는데, 아버지의 뜻하고 전혀 안 맞게 열심히 해요. 무익한 종이죠. 아버지의 뜻을 아는데도 안하는 거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고요.
근데 성경에서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해요. 마24:45 지혜롭다는 것은 뭐예요? 아버지의 뜻을 아는 거예요. 충성되다는 것은.. 그 뜻을 정확하게 알고, 그 뜻에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또 도와주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