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제목에서 바보 3등급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사실 ‘바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금하신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5:22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죠.
여기서 “라가”는 쓸데없는 자, 속이 빈 자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니 심한 욕은 아닌 것 같지만 ‘쓸데없는 놈, 속 빈 놈’이라고 해보면 좀 더 와닿을 것입니다.
또 "미련한 놈"은, 본문 갈3:1의 '어리석도다'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헬라어는 다르지만, 의미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욕설을 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말속에 들어있는 본질입니다.
형제에 대해 ‘쓸데없는 놈’이나 ‘미련한 놈’이라는 말이 나왔다면 나의 유익을 구함에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이 상하고 원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가’나 ‘미련한 놈’이라는 단어를 쓰느냐 안 쓰냐를 문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를 만날 때 나의 유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강조점을 두어야, 예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갈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너희들 바보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정작 갈라디아 교인들은 잘되는 길에서 너무너무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잘되는 길을 코앞에 두고도 스스로 외면하며 복을 차버리고 저주받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기에 어리석다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1절에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왜 안 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복을 차버리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육체의 눈으로 십자가를 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으로 보고 의식해야 됩니다.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있을 때도 직장에 있을 때도, 십자가는 의식되어야 합니다.
‘의식’이란 마음의 시선입니다. 십자가를 의식하지 못하고 놓치면, 가정에서의 삶이든 직장에서의 삶이든 나는 바보가 됩니다. *갈3:1 ‘어리석도다’
부부가 대화할 때 십자가를 놓쳤다면 바보 남편과, 바보 아내가 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마주할 때 십자가를 놓쳤다면 어리석고 미련한 바보 부모가 된 것입니다. 회사에서 과장이 마음에서 십자가를 놓쳤다면, 바보 멍텅구리 과장이 된 것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고만 있으면 복이 절로 굴러오는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이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부러 바보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게 당면한 가장 큰 사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 이심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나와 관련되어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입니다. 독생자가 나 때문에 죽으신 것보다 돈 문제가 클 수 없고, 몸이 아픈 것이 클 수 없습니다. 직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금도 온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내게 일어난 가장 큰 일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어리석다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외면하고 있으니 어리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바보 3등급이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알고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바보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교의 스님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압니다. 힌두교도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압니다.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임에도 바라보지 않으니 바보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바보입니다.
이 바보는 첫 번째 단계보다 더 심한 바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보지 않으니 엄청난 바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할 복음으로 받아들였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최고 바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보 3등급 중에서도 슈퍼 울트라 바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러한 상태에 처해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전했습니다.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고, 충성하고 봉사하면 복을 받는다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잊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믿음의 사건이라 함은, 내가 지금 바라보면서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내 앞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기에 그래서 생활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은 곧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복음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슈퍼 울트라 바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토록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음이 어리석은 일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그 대답이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갈3:2~5절에서 성령이 주어짐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6절 이하에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깨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는 거짓 교사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 이외에도 행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특히 강조한 것은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된 선민의 징표였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고 참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이고, 할례는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신 징표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혹해서 할례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할례의 관습’이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은 자들이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할례의 본래 취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여기서 아브람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 뒤에 10절에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논리에 앞서 할례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의 육체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그의 마음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 관습에 담겨있는 믿음의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행전 7장의 설교 첫머리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좋음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좋다고 여겨서 붙잡을 만한 대상들이 많았습니다.
-어여쁜 아내 사라가 있었고, -자식에 대한 욕심도 좋게 여길 수 있었고, -안정된 삶의 터전을 좋게 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하나님도 계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말씀이 의미하듯이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일등을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바라보게 되어있습니다. 때때로 싫은 것을 보게 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상황을 가장 좋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좋겠기에 보는 것이고, 없어지면 좋겠기에 보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좋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듯 좋음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신 상태가 바로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바로 이렇게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징표로 삼으라’는 것은, 몸에 새겨진 할례를 지니고 다니듯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의 조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는 믿음을 물려받는 자들이 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면 내 마음은 궁극적인 최고의 좋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몸이 만나는 모든 상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앞마당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 건강 문제가 생겼습니다. 몸이 아프니 마음으로도 몸을 의식하게 됩니다. 건강이 마음에서 일등을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또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삶에 돈 문제가 생기니 마음으로도 돈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돈이 마음에서 일등을 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염두에 두자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돈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이 건강이나 돈보다 훨씬 더 좋게 느껴져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등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면 나는 최고로 좋은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외면한 건강 문제나 돈 문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앞마당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에 평생 좋음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만 일등으로 모시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만 하면, 좋음을 추구하는 문제는 끝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도 괜찮은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에 육체로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아귀 안으로 다 끌려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활동 영역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실 때는 내가 육체로 만나는 모든 일에 주인공이 되셔서 해나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을 일등으로 모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받아 복 터진 삶을 살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돈이 일등인 상황에 대해 죽습니다. 건강이 일등인 상황에 대해 죽습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자녀, 배우자, 직장에 관한 문제들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세상 것들에게 일등 자리를 내어주고자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저절로 하나님만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만 보이기에 하나님만을 궁극적 좋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아무리 가지고 싶어 하고 실제로 가질지라도 마음을 온전히 채우지 못합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계속해서 가져야 하고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지기 시작하고 비로소 좋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만 볼 수 있으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하나님만을 흡입하며 점점 더 하나님 부자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일어난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을 일등으로 모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아버지의 주권 아래로 끌려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의 일하심은 낯선 것이 아닌 성경의 처음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순간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실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성령께서 실제로 빛을 있게 만드십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천지창조와 같은 대단한 사건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시작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께서 일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셔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하여 언제나 좋음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좋음 대회’입니다.
이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십자가 바라봄을 지속하면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성령의 일하심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성령께서 운행하시다가 질서정연한 창조가 이루어졌듯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몸이 만나고 있는 삶의 상황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창조주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시고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러한 삶은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후손 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롬2:29절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할례가 양피를 잘라내는 일이듯이 마음의 할례는, 마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다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내 마음에 남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마음의 할례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늘 의식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선민이라는 징표입니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도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놓친다면 그야말로 슈퍼 울트라 바보입니다.
바보의 첫 번째는 예수님을 알고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바보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엄청 바보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할 복음으로 받아들였음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최고 바보입니다.
바보는 내게 좋은 것을 다 놓쳐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보처럼 살아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호소하던 사도바울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의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셨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버지의 주권 안으로 끌려오고, 성령께서 창조해나가시는 삶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