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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청년을 떠받들고 있던 것들

LNCK 2023. 6. 30. 22:04

부자청년을 떠받들고 있던 것들 [마가복음29] - YouTube

◈부자청년을 떠받들고 있던 것들             막10:17~22              

본문 말씀은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과    *마19:16~30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눅18:18~30
마태복음에 조금 더 자세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조금 자세한 부분들은 마태복음 구절(대조본문)들을 함께 찾아보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와서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주제는, 본문 자체에서 얘기하고 있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본문의 부자(:22)는, 마태복음에 의하면 '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요. 
마가복음 본문에 보면, '한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17
누가복음에 의하면 '관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마19:20
이미 세상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들을 성취하고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였고요. 또 사회적으로도 '관원'이라는 *눅18:18
명성을 얻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청년들이 굉장히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죠. 
오늘날 청년들이 원하는 게 결국 그거 아닙니까? 
안정된 직장, 안정된 미래, 사회적인 성공! 
이런 것이 세상의 청년들이 기대하는 것인데,
본문의 주인공 청년은 그걸 전부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얘기하면 돈도 아주 많이 벌었고요. 
그러니까 벤처를 해가지고 그냥 돈을 엄청 벌었는데, 
거기에다 청년 때 이미 국회의원에 당선됐어요. 뭐 이런 거잖아요. 
부자이면서 관원인 청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청년 때 벌써 거의 다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청년들도 꿈이 뭐냐,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건 뭐냐 하면, 
결국 다 이런 얘기들 아닙니까 

사업을 해서 크게 비즈니스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외교관이 되거나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꿈인데 
이 청년은 그 꿈을 거의 다 이룬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청년 안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 앞에 왜 나왔겠습니까? 

그 삶이 완전히 만족스러웠다면, 예수님을 찾아 나올 이유가 없죠.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그는 이룰 만큼 이뤘고, 가질 만큼 가졌고, 성취할 만큼 성취했는데 뭔가 이상해요. 
인생이 꽉 찬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거에요. 

'가만히 있어봐..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이것만 이루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선행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선행을 열심히 하는 중간에 보니까 
선한 선생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선행에 대한 것, 선한 일을 묻고자 예수 앞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마19:16

뭔가 부족함을 느끼면서, 이제 구원에 대한 갈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다가 아닌 것 같은데...?' 

유대인이었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믿었겠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생이, 이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솔로몬도 모든 것을 다 이루었지만, '헛되고 헛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부와 성공으로 채울 수 없었던 부족함을 
선행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19~20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말하자면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요. 
또 하나님의 계명도 다 지켰습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겨본 적 없고, 주일도 빠져본 적 없고, 
종교적으로도 아주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그는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다 이룬 사람이었고요.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이고 
-또 하나님의 계명도 다 지켜온 그런 '엄친아' 였어요.

문제는 뭐냐면 이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제발로 찾아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많은 사람들은 이 부자 관원 청년을 보고서
'세상에서 그렇게만 살 수 있으면, 더 이상 뭐가 부족하겠어? 
그렇게만 살 수 있으면 인생이 완벽한 거지...' 
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실제로 삶도 경제적으로도 넉넉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열심히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부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거에요.
또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도 열심히 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일반적으로 '그 정도면 인생이 완벽하네, 더 이상 뭘 바라겠어?' 
그런데 막상 그렇게 살아왔던 이 청년이 
예수께 나와서 묻는 것은 
아직도 자기 삶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느낀 허무감과 비슷한 거죠.

그의 영혼에는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족함이 이 청년을, 예수 앞에 스스로 나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청년은 예수께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국 결론은 어떻게 됩니까 
22절에 보면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가니라!' 

비극으로 끝났어요. 결국 예수 앞에 나왔는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자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청년이 했던 것들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더라는 거예요. 

이 청년이 해왔던 세 종류의 일이 있죠. 
-세상적으로 성실하게 살면서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즉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두 번째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세 번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사는 것, 

뭐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엄친아 청년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인간은 여러분, 
-이 땅의 돈이나 성공, 
-또는 선한 행실, 
-또는 종교적 열심 
그것 가지고는 채울 수 없는 부족한 게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이것 말고도, 이것 외에 인간이 정말 인간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대적인 뭔가가 있다는 거에요. 
그것 외에 뭔가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구원"입니다. 

인간은 여러분,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아무리 선한 삶을 살아도.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뭔가 종교행위를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인간은 여러분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종교생활을 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럼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봅시다. 

자 이 부자 청년의 슬픈 결론은요, 
사실은 잘못된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청년의 아마 그 근본적인 문제를 끄집어낸다면 
아마 그 안에 있는 잘못된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잘못된 질문은, 
이 청년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던져왔던,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죠. 

막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이 던졌던 잘못된 질문은 뭐냐면, 구원을 얻고 싶은 건 좋아요. 
구원을 얻고 싶어해야죠. 구원에 대한 갈망이 당연히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청년의 그 선지식 속에는, 이 청년의 의식 속에는 
'구원은 무엇을 하여서 얻는다' 라는 그 명제가 있는 거예요. 
(뭐 당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겠지만요)

그래서 구원, 영생을 '무엇을 해서 얻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뭘 했던 거예요. 

이 청년의 삶을 보면, 참 많은 걸 했잖아요. 
-열심히 해서 돈도 벌었고 
-열심히 해서 관원도 됐고 
-열심히 뭔가 해서 선한 행실, 종교적인 행위도 했고... 참 많은 걸 했어요. 

그래서 이 선한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서, '선한 선생'에게 나온 거죠. 17

그래서 이 청년의 근본적인 문제는 뭐냐면 
'무언가를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시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열심히 여러분의 꿈을 이루려고 하십니까? 
그 꿈을 이루면 뭔가 내 인생이 꽉 찬 것 같이 느껴질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척 하지만, 다 그런 생각의 찌꺼기들이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 있잖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청년은 그거를 성취한 거에요. 
근데 우리 중에 참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그 성취를 못했죠. 
성취를 못하다 보니까, 아직도 꿈으로, 미련으로 남아있는 거죠... 

▲자, 그런데 부자청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뭐라고 답하십니까? 
18 '예수께서 이러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근데 아주 싸늘한 얘기를 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뭐예요? 인간은 절대 선해 질 수 없다는 거에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고, 인간은 결코 선해질 수 없다는 거에요. 

이 청년 여러분 열심히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얻겠다고 한 건 뭐예요? 
선한 일을 해서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선한 선생님이여' 하고 불렀잖아요.

그런데 예수께서 찬물을 확 끼얹으십니다. 
선한 이는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인간은 절대로 선해질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은 어떤 선한 일을 해도, 어떤 선행을 해도,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면 여러분, 구원은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차이를 여러분 아십니까? 이게 복음이에요.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선한 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선한 영을 받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거지요. 

사람들은 이걸 거꾸로 생각하는 거죠.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저와 여러분이 선한 영이 되느냐?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거죠.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는, 소위 선한 영만 들어가는 거예요. 
의인의 영만 들어가는 거에요. 선한 영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여러분 '선한 일을 행해서 선한 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온 우주에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어'

그러니까 선행을 행함으로, 선한 영이 되겠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순서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선한 영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 선한 일을 하는 거죠. 

그래서 구원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해서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인본주의자의 생각이고, 

구원은 선한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선한 영이신 예수의 영을 영접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구원을 '영접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선한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로 선한 일을 하게끔 만드시는 거죠. 

'그러므로 너희가 선한 영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일한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을 받는 수밖에 없어! 
유일하게 선하신 영이신, 이 하나님의 영을 받는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더욱이 이 청년은 예수님을 스승 또는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그냥 인간으로 인식했어요. 

이게 여러분 사실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기독교 역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그리고 지금도 등장하고 있는, 그런 인본주의의 인식 아닙니까? 

예수를 그냥 위인으로 보는 거에요. 
예수를 그냥 좋은 길, 선한 길, 인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해줄 그런 사람, 
그래서 예수의 정신을 배워서 우리는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 배워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 아무리 선한 길을 배워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셨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여러분,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예요. 
우리 안에 어떤 영이 거하시냐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은, 예수께 '배워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 받으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근데 '구원을 아직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은, 경험을 해보셔야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게 뭔지' 경험해 보셔야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시고, 그 영을 받으셔야 돼요. 그래야 구원에 이르는 줄 믿습니다. 

아마 21세기 교회와 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인본주의의 도전'입니다. 
이 청년의 삶은 인본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청년은요. 땅에서 참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이루고 성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관원도 됐습니다. 

둘째 선행도 많이 합니다. 셋째 구원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 구원이 무슨 구원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구원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도 있습니다. 율법도 다 지켰고, 심지어 예수 앞에도 나옵니다. 
'선한 선생'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여러분 인본주의자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불신자들은 꼭 이렇게 이해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선한 사람들'
영적인 신비와 초월과 영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죠)
   
이 땅에서 뭐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착실하게 잘하자는 거죠. 

'그럼, 목사님, 이 땅에서는 착실하지 않게 막살아도 된다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니에요. 

아까도 얘기했던 순서가 바뀐 거에요. 
선한 일을 행함으로, 선한 영이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영을 받아서(변화되어서) 선한 일을 하는 거예요. 

당연히 '구원은 막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원의 핵심은요. 
이 땅에서 무언가를 행함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에요. 

△누가 제게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는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해서
한 번 들어봤어요. 이 사람이 목사인지, 인문학자인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슨 구원을 얘기하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천국, 성령' 이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거냐?' 
그래서 도덕, 윤리, 사회 변혁, 그 다음에 뭐 환경 문제, 
이런 걸로 강의가 그냥 가득 차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를 팔로우하고 듣는지 모르겠어요. 

어~ 저는 이렇게 듣고 있다가 
'야, 기독교 내에도 결이 다른 기독교가 참 많구나' 라고 생각했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여러분 이것이 참 많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영, 성령의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영생의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 땅의 얘기만 주로 해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런데 모든 관심이 다 '땅, 현실'에 있다는 거에요.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청년한테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셨다' 그랬지요.  :21

청년이 뭐 잘못한 건 아니에요. 
잘못한 건 아닌데, 부족한 거죠. 

그가 했던 말은, 나쁘거나 악한 얘기가 아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악했죠.
그렇지만 구원의 이르는 길은 아니었던 거죠.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는지 몰라요.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더 선한 삶을 살고 
-어떻게 하면 이 땅을 더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어떻게 하면 이 땅을 더 평등하게 만들고, 공의롭게 만들고 
-어떻게 하면 이 땅의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개인적 사견인데, 아브라함 카이퍼, 프란시스 쉐퍼
이런 분들이 여러 다른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강조한 신학자들입니다.
이 분들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신학적 특징이 그렇다는 거죠/편집자)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영, 성령, 영생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굉장히 인기가 있더라는 거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요. 팔로우합니다. 

기독교 안에도, 이런 결이 다른 기독교가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는지 몰라요. '땅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그런데 이 청년의 중심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날카롭게 19절에서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뭔지 아시죠? 10계명입니다. 
10개 명에서 앞에 4개는 빼고, 뒤에 6개만 말씀하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아니 이왕 십계명을 말씀하시려면, 10개를 다 얘기해야지 자연스럽잖아요.
왜냐면 여러분 앞에 4개는, 하나님에 대한 거고요. 
뒤에 6개는 사람에 대한 계명이에요. 

그래서 앞에 4개를 제외하고, 뒤에 6가지는 
사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 가져다 놓아도, 잘 어울리는 것들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남의 것 빼앗지 말라(탐내지 말라), 부모 공경하라!' 
이것은 여러분 인간의 보편적인 선에 대한 내용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은 불교에 갖다 놔도, 불경에다 이렇게 집어넣어도 
아주 잘 어울리고요. 
유교사상에 집어넣어도 별로 문제를 안 일으키고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앞에 1~4 계명이죠. 
이 앞에 4가지 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거 하나만 가지고도 다른 어떤 종교에도 어울릴 수가 없어요. 
불교에도, 유교에도 갖다 놓을 수 없어요. 어디에도 갖다 놓을 수가 없어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시키라 
이 계명들은 충돌을 일으킵니다. 

불교하고도 충돌을 일으키고, 인본주의하고도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이 네 가지를 빼고,             *대신 관계 
뒤에 여섯 가지, 곧 '땅에 관한 율법'만 물어보십니다.   *대인 관계

아마 이것은 이 청년이 '선한 일'에 대해서 물어봤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땅에 대한 질문이었잖아요.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봐서 
하여간 그 선한 것에 대해 대답한 겁니다. 

▲자 그랬더니 20절에서 이 청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맞아요. 이 청년은, 인본주의적인 선함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열심히 살았고요. 진심으로 선을 행했고, 전심으로 선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아직도 뭐가 부족해요. 
이게 뭐냐면 여러분 인간의 인본주의의 한계에요. 

인간은 영이기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본주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에요. 

이 땅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아무리 성공해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종교행위를 열심히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특히 여러분,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더욱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청년이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라고 물어봐요. :17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거죠.

이 청년의 고민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이른 거예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됐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관원도 됐어요. 
이 땅에서 이룰 거 다 이뤘어요. 
사람들의 칭찬 들을 정도로 선행도 많이 했어요. 
율법에 따른 종교행위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줄까요? 
'나의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줄까?' 고민이 여기까지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것이, 전도서에서 솔로몬의 고민이었잖아요. 
다 이뤘어요. 다 가졌어요. 다 성취했어요. 다 해봤는데,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딱 이르니까.. 넘어갈 수 없더라는 거예요. 
아무리 고민해도 넘어갈 수 없더라는 거예요. 

이 청년의 고민도 여기까지 이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어요. 기특하게 보셨다는 거예요. :21
'어휴, 젊은 청년이 어떻게 거기까지 고민이 이르렀을까?' 

보통 젊었을 때는 그냥 앞만 보고 달리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런 것들 이루고, 성취하고, 선하게 살고.. 뭐 이렇게 살고 있으면 
자기가 잘 산다고 생각하고 달려갈 텐데 
이 청년은 고민이 그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간 거예요.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고민이 이른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휴, 아직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고민이 이르렀어? 
이 친구는 싹수가 있네' 
그래서 제자로 초청하신 거잖아요. '나를 따르라' 
이게 아무나 부르신 초청이 아니거든요!                   

그 전에 여러분 보세요. 다른 병자들은요. 
'돌아가라' 그랬지, '나를 따르라' 그런 사람 많지 않았어요. 

근데 이 청년은요. 딱 집어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고 제자로 초청하셨어요. 
이 표현이 뭔가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앞에 열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어요. 
제자로 초청하신 거에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

여러분의 고민은 어떻습니까? 고민이 어디까지 이르셨습니까? 
이 청년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이르셨습니까? 

아니면 고민이 그냥,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고민,
또는 선한 사람이 되는 고민에 머물러 계시진 않습니까? 
그거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인본주의자들이, 여러분 이 한계점까지 이릅니다. 
그냥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거죠. 
그게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겠지만, 혹시 만들어 지더라도, 
더 좋은 세상 만들어서.. 그 다음에는 어떡하겠다는 거에요?
그게 더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해 줄지는 몰라도, 
영생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기독교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그 뒤의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젊은 나이에, 이 고민에까지 이르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구원에 대한 갈망은, 우리의 고민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예수 앞에 나가게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시간이 다 끝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 살아보신 분들 다 아시잖아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뭐 그냥 후루룩 흘러가잖아요. 
그럼 한 번만 더 후루룩 흘러가면, 우리가 다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나는데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 '시간'에 대해서, 즉 '영생'에 대해서 
이 청년 관원처럼 고민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자 그래서 이 청년도 그런 올바른 고민 가운데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 가지만 더 넘어가면 돼요. 딱 한 가지 남았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사랑하셨어요. 
그 한 가지만 넘어서면, 그는 진짜 될성 부른 나무였거든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마지막 그 한 가지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자,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함께 기도합시다. 

자, 이 청년을 향해, 인본주의자를 향해 마지막 한 가지가 무엇인지 
예수께서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땅에 있는 것을 다 팔라는 거예요. 
 단순히 돈을 다 나눠주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네게 있는 것, 네가 땅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으라는 거에요. 

-둘째는 '너는 나를 따르라'는 거예요. 

여기서 '다 내려놓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순히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것입니다. 
'땅의 모든 것' 그것은 땅의 모든 방법, 힘, 사상, 철학, 네가 성취한 것, 
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하여간 땅에 있는 모든 것, 
너를 받들고 있는 모든 거예요. 

땅에서 여러분, 우리를 받들고 있는 게 있습니다. 
뭐냐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규정하게 하는.. 
여러분들을 받들고 있는 땅의 것들이 있어요. 

그것은 여러분들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의 '성취, 업적'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의 '학벌'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의 '신분'이 될 수도 있어요.

또 미국 같은 데서는 백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인종'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상, 철학, 신념'이 될 수도 있고... 
(*요즘 이게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죠. 크리스천인데 골수 좌편향, 우편향이 있죠)

하여간 여러분들을 떠받들고 있는 그 땅의 것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그거를 다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팔아서 나눠줘 버리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본문을 대할 때, 그저 '땅의 것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만 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21 '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청년이 느꼈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하늘의 보화'였죠.

이 청년은, 땅의 것은 충분히 가졌는데,
'하늘의 보화'는 많이 부족했던 거죠.
왜냐면 '땅의 것들'을 너무 다 내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땅에서는 어떤 존재이십니까?
그리고 '하늘의 보화'는 얼마나 가지셨나요?

부자 청년이 가졌던 모든 화려한 스펙과 소유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통과하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영생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결핍된 것, 
꼭 필요한 그것을 얘기해 주신 것입니다. *그야 말로 신의 한 수 였죠.

'네가 이 땅에서의 모든 일들은 성공적으로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했겠지만, 
너는 땅에만 속한 존재가 아니거든. 
땅에서는 네가 많이 이뤘을지 몰라도 
하늘에선 이룬 거 하나도 없잖아?' 

미안하지만 너는 하늘에선 개털이라는 거죠.

여러분 인간은 육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의 삶, 하늘의 삶이 없으면 
아무리 땅의 삶을 완벽하고 성공적이고 모범적으로 살아도
인간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 '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21
는 예수님의 도전은, 단순히 재물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너를 받들고 있는 것들, 너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들, 
네가 성취한 것들, 네가 믿고 신뢰하는 것들... 이것을 다 버리라, 내려놓으라는 거죠.
그것이 아무리 좋은 거라 해도, 다 땅에 속한 것일 뿐입니다. 

'네게 지금 부족한 것은 '땅의 것'이 아니다. 
이 땅의 것을 지금보다 더 많이 성취해봐야.. 
즉 더 많이 돈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많은 선행을 해도,
더 열심히 종교행위를 해봐야.. 너의 부족함은 여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게 진짜 필요한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보화를 취해라!' 이 도전을 던지신 거예요. 

이 청년은 안타깝게도, 이 벽을 뛰어넘지 못했죠.
그 청년은 자기 살 동안만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 청년이,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서, 땅의 것을 팔아서 나눠주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바울, 막달라 마리아 등과 같은
영원히 성공하는 인물이 되어서, 영생에서 영원히 성공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도전하시는 것은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실은 내려놓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 더 핵심이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오라는 거예요... 내려놓음은 선결 과제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