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 단순한 순종의 위력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소 당황스러운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묶여있는 남의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는 거예요.
오늘날로 하면 이런 겁니다. '저기 동사무소 앞에 가면 새로 뽑은, 아직 한 번도 사람들이 몰아 보지 않은 모닝 한 대 있거든, 그거 열면 키 꽂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몰고 와!' 뭐 이러는 겁니다. 이거 하고 뭐 같은 거죠. 그 당시에 나기가 모닝(소형차)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좀 당황스럽지 않았겠어요? 여러분들에게 그 명령을 하신다면, 조금 당황스럽지 않았겠어요?
할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걸어가서 차 몰고 오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은 항상 이런 식이더라고요. 순종이라고 하는 게, 막 불가능한 걸 순종하라고 그러지 않으세요.
'너 혼자서 50억 헌금을 해라!' 이러지 않으시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인데, 물리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아요. 내 역량 안에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좀 당황스러워요! 이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나귀 주인이 누군지? 그냥 가서 가져와도 되는 건지? 왜 또 굳이 나귀를 타고 가시려고 하는지?
이왕 그렇게 준비해서 타고 가실 거면, 말이나 좀 멋있는 이런 마차나... 이런 조금 더 있어 보이는 걸로 하시지... 제자들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요. 그냥 가서 나귀를 풀어서 데려옵니다.
이게 왕을 모시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에요.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불평하고 대꾸하고... 이러지 않아요.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그냥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주어지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뭐냐면 항상 하나님 뭔가 말씀하시면,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함들이 있다는 거예요. 항상 그래요.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이렇게 떠오릅니다.
'꼭 그렇게 해야 돼?' '그거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 남의 나귀를 그냥 가져와?' '꼭 나귀이어야 돼? 그 옆에 있는 말을 끌고 오면 안 돼?'
하여간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명하시지만 막상 복음 전하려고 하다보면, 꼭 전하지 못할 이유가 생깁니다.
'지금 전하면, 저 사람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지금 전하면 어떻게 잘못 되지 않을까?'
항상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다 보면.. 걸리는 게 있어요.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이 있어요.
분명히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용서 못할 이유들이 있고요. 분명히 헌신하라고 하셨는데.. 꼭 헌신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사실은 이것이 순종하지 못할 이유라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순종하지 못할 이유가 아니라, 왕이 입성하지 못하는 이유예요.
우리 삶 가운데 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왜 초대교회의 그 놀라운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역사들이 우리 삶 속에는 재현되지 않는가?
우리는, 순종하지 못할 이유, 불편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게 바로 왕이 입성하지 못하는 이유라는 거에요.
우리의 삶 속에 여러분, 이 이유들을 제거해 보십시오. 그래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왕께서 말씀하실 때 아무 대꾸하지 않고 바로바로 움직여 보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왕의 통치와 역사는 여러분, 반드시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과테말라 알모롱가 라는 마약과 사탄숭배와 창녀들이 득실되는 슬럼 도시에 마리아노라고 하는 목사님이, 1990년대 중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도시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는 교회가 한 군데도 없었고요. 창녀촌, 술집들이 바글바글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마리아노 목사님이 들어갔을 때 *알모롱가 갈보리교회 한 10여 년 지나고 나니까, 전 도시에 90% 이상이 크리스찬이 되고요. 술집 36개 중에 33개가 문을 닫게 되고 땅의 소산들이 이따만한 무 radish가 나오고, 이따만한 당근이 나오고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는 그런 놀라운 기적의 도시로 변화되었습니다.
또 영국의 에반 로버츠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도시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을 때 웨일즈 대부흥이라고 하는 부흥이 일어났고요.
또 평양의 길선주 장로님이 그 당시에는 장로님이셨죠. 길선주 장로님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서, 집회 가운데 공개적으로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의 평양 대부흥 이라는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보면, 항상 똑같은 패턴들이 있는데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하는 거예요.
그 순종하는 행위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길선주 장로님 같은 경우에 뚜벅뚜벅 걸어나와서 강대상 앞에서 '내가 뭐 잘못했습니다' 이거 못할 사람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 보면 걸리는 게 있죠. '이걸 말하게 되면 내가 쪽팔려서 앞으로 어떡하나?' '이걸 말하면 내가 교회에서 장로로 계속 있을 수 있을까?'
하여간 수많은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밑에서부터 이렇게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못할 이유들을 제거하고, 그냥 말씀하셨을 때 순종해서 걸어나와서 자기의 죄를 공식적으로 회개했을 때 거기에 꽝 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거예요. 그곳에 왕이 입성하시는 거예요.
또 마리아노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노 목사님께서 그 도시로 들어가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자기도 과테말라 사람인데, 그 도시에 가는 게 뭐가 어려워요? 운전해서 들어가면 되잖아요. 물리적으로 어려울 건 전혀 없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정착해 산다고 할 때는 두려움이 있죠. '이 마을에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이렇게 강도들이 많은데 혹시 위험에 처하는 거 아닐까?'
이런 두려움들이 있지, 물리적으로 어려운 건 전혀 없어요. 그런데 그 밑에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이렇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죠. 이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이, 왕의 입성을 막는 이유라는 거예요. 이거를 치우고 그냥 말씀에 그대로 담백하게 순종했을 때 꽝! 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거예요.
항상 하나님은 그 도시 가운데, 그 사람의 삶 가운데 입성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이유들이 있다는 거죠. 사람의 불순종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서 대꾸하지 마십시오.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냥 담백하게 순종하시는 거예요.
'왜 꼭 나귀이어야 됩니까?' 이러면 안 돼요. 하나님의 입성이 안 일어나요.
그냥 단순하게 순종하십시오! 그랬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작은 순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때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뭐 나귀 한 마리 끌어오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그런데 그 나귀 한 마리 끌어오는 일로, 전 인류가 구원 받는 십자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순종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하고 다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순종, 그까짓 거 뭐 하나가 그렇게 대단한 거에요? 이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순종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일은 하나님만 아세요.
'에이 뭐 이까짓 작은 일 순종 하나가 안 한다고 큰일 나겠어?' 꼭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큰 일이 캔슬,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는, 작은 순종을 통해 크고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때 기독교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그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놀라운 헌신을 했던 게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 어떻게 보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일, 그렇지만 그냥 순전한 마음으로,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했을 때 그것이 시작이 돼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에 주시는, 작은 순종의 무게들을 여러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 무슨 일을 행하실지 몰라요. 이 일에 다 쓰임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는.. 겸손과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11:2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께서는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 '도구'를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겸손' 나귀는 왕의 입성에 그렇게 어울리는 존재는 아닙니다.
왕이 입성하려면, 적어도 백마, 큰 화려한 마차.. 이런 거 타야죠. 오늘날 얘기하면 화려한 람보르기니, 벤츠 500은 타야 되나요? 하여간 모닝은 아니에요. *소형차
왕이신 예수님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끼 나귀를 타십니다. 얼마나 초라하고 우스웠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항상 이렇게 역사하세요. 왕의 입성에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평범한.. 아니 어쩌면 평범한 것보다 더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이런 존재들을 쓰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보면, 세상적으로 크고, 권세 있고, 유명하고, 뻔지르하고... 이런 사람 쓰시는 거 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없어요.
힘 있고, 능력 있고, 높은 지위에 있고, 돈 많고... 그렇다고 해서 쓰시는 거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사람 쓰시는 적은 있어요. 그건 그 사람을 쓰실만한 다른 어떤 퀄리티가 있었던 것이지, 그 스펙, 그 경력, 그 배경... 이것 때문에 그 사람을 쓰셨던 적은 없어요. 예수님은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분이시거든요.
항상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무명하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초라하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에요.
사람 가운데 '내가 아니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하는 정말 능력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실어 나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만약 예수를 실어 나르면, 예수가 보이는 게 아니고, 그 사람만 보여요.
▲세계 선교 역사를 봐도 그렇고, 세계 기독교 역사를 봐도 그렇고 사람들이 항상 실수했던 전략들이 있었어요.
'크고 힘 있는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면 나라가 변할 거야' 이런 생각, 또는 전략이었죠.
'왕이 예수를 믿으면, 그러면 나라 전체가 변할 거야' 그래서 왕이나 귀족들을 전도하는 전략을 세워 나갔는데, 선교의 초점과 방향성과 전략을, 그 방향으로 세우고 나갔을 때는 역사의 교훈으로는 다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나 나라가 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잠깐은 반짝 좋은 것 같은데, 잠깐 반짝 변화는 있는 것 같은데 조금 길게 보면 그렇게 믿었던 데는, 나중에 보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어 냈어요.
오히려 진짜로 한 나라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장 밑바닥부터, 풀뿌리부터 별로 영향력 없고, 평범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들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나라가 바뀌게 되는 것이지 탑다운으로 나라가 바뀐 적이 없어요. *위에서 아래로
그런데 오늘날도 똑같이 생각해요. '예수 믿는 기독교 대통령이 나와야지..'
기독교 대통령이 나오면 아닌 것보다 낫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나라를 변화시킬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기독교 대통령이 나와서, 진짜 크리스천 대통령이 나와서 양심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통치한다 그러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진 않아요.
정말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사용하시는 자는, 왕이든지/천민이든지... 겸손한 자입니다. (*왕이 겸손하기 쉽지 않다는 거죠.)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이에요.
▲또 나귀가 상징하는 바는 '순수함' 입니다. 순수라고 하는 건 이런 거예요. 이 나귀는 아무 사람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기입니다. 경험도 없고 선지식도 없어요.
이 나귀는 이 사람 저 사람 태워본, 닳고 닳은 나귀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닳고 닳은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경험이 많지 않은 초신자, 갓 예수 믿고 갓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요.
성령께서 '하라' 그러시면, 하라 그러는 대로 하고 자기를 이끌어줬던 분들이 '이렇게 하세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 한 시간씩 꼭 해요!' 그러면 하라는 대로 해요.
그런데 죄송합니다. 닳고 닳은 나귀들이 있어요. 이 닳고 닳은 나귀들은 경험이 많아요. 자기 등 위에 사람을 많이 태워봤어요.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해야 되고, 저건 저렇게 해야 되고...' 훈수가 많아요.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하는 게 더 좋고...' 이러면서 닳고 닳은 나귀들은, 점점 예수를 실어 나르는 횟수가 줄어들어요. 하나님을 경험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초신자들이 막 하나님 경험하는 거 보면서 '나도 옛날엔 그랬어...' 이렇게 스스로 위로합니다.
마치 어떤 느낌이 드냐면 '오래 신앙 생활을 하면, 하나님 경험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요.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초신자 때 많이 경험하고, 시간이 지나면 못 경험해요? 반대가 돼야 되는 거잖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경험하는 게 많아져야 정상인 거지...
교회 안에 여러분, 이런 닳고 닳은 나귀들이 가득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본문의 '어린 나귀'들이 가득해야 돼요.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이런 순수함이 있어야죠. 20년, 30년 신앙 생활을 했어도, 마치 영적인 어린아이인 것처럼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자인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이 '이거 해라' 그러면 이거 하고, '저거 해라' 그러면 저거 하고...
교회 리더들이 '매일 우리 1시간씩 기도하는 운동을 합니다. 아침마다 1시간씩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닳고 닳은 신자들은 '작년에도 했었고 재작년에도 했었고 매년 하는 연례 행사야!'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어린 나귀는 어떻게 듣는지 아십니까? '1시간씩 기도하는 거래' 하면서 그대로 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분, 어린 나귀들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은 10년, 20년 신앙 생활을 했어도, 계속 어린 나귀가 돼야 돼요.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 믿고 거듭나서 처음 예배 드릴 때와 같은 그런 떨림과 감동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익숙해지셨습니까? 늙은 나귀입니까, 어린 나귀입니까?
여러분, 헌금 드리는 건 어떠세요? 이 헌금 드리는 생활이 '와! 이게 정말 하나님 앞에 내 예물이 드려지는 거지?' 이런 긴장감과 감동과 감격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냥 교회 나가면 십일조, 헌금하는 거야..' 어린 나귀십니까, 늙은 나귀십니까? 기억하세요. 늙은 나귀는 예수를 실어 나르지 못한다는 거예요.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어린 나귀가 돼야죠. 장로님이 되시면 더 어린 나귀가 돼야 되는 거고 목사가 됐으면 더 어린 나귀가 돼야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안에 신선함이 계속 유지가 돼야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늙은 나이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은 후패할지 몰라도, 우리의 영은 계속 신선해지고 *고후4:16 계속 더 어려져야 돼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시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주는 사람
5~6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본문엔 '어떤 이들'이라고 나와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주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자기 나기가 묶여있는 줄을 풀려고 합니다.
'이거 뭐 하는 겁니까?' 물어봤더니 '주가 쓰시겠다'고 합니다.
주인이 입장에서는 더 당황스럽지 않았을까요? 주인이 새 차로 모닝을 뽑았어요. 그래서 한 번도 안 타보고 동사무사 앞에 다 딱 세워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이 오더니, 갑자기 차를 몰고 가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이 나와서 '뭐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제자가 '주가 쓰시겠답니다!' 이런 상황이란 말이에요. 참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죠.
근데 재밌는 것은, 성경 기록에 보면, 이 사건이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전부 다 기록돼 있습니다. (마21:1~17, 눅19:29~44, 요12:12~19) 그 대조본문(병행구절)에도 보면, 주인이 더 이상 캐묻지 않습니다. 진짜 묻지 않고 그냥 내어준 것이에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가 쓰시겠다' 그러니까 그냥 내줍니다.
예수를 모셔오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에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주는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러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요. 그냥 주께 내어드리는 거예요.
사실 제자들이 이거 다 설명하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나귀는 어디 쓰시게요?' 그랬더니 제자들이 한참 설명합니다.
'그럼 예수가 누구예요?' 그럼 제자들이 예수는 뭐 이러저러한 분입니다... 하고 한참 설명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나귀를 타세요?' 그러면 또 제자들이 일일이 설명한다고 했을 때, '성경에 보면 스가랴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나니...' 슥9:9
만약 계속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과 설명이 오고 갔다면, '에이 관둬, 걸어가는게 낫겠다' 아마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을 거에요. 어떤 때는, 설명 필요 없이 무조건 순종해야 될 때가 있다는 거죠.
저와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어주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보면 항상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의 일에 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선교가 한창 활발하게 일어나던 1990년대에 *1989년베를린장벽함락 미국한인교회 중에, 전세계에서 교회를 가장 많이 세워서 기네스북에 오른 교회가 있습니다. LA에 있는 은혜한인교회 이죠.
그때 원로목사님 계실 텐데 *김광신 목사, 2022년 소천 그 교회가 9천개인가, 1만개인가 교회개척을 했어요. 그래서 기네스북에 공식적으로 올랐어요. 하여간 어마어마한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수백 명의 선교사를, 한 교회가 파송하고 있고요. 자 그런데 여러분, 선교지에 교회가 그냥 세워질까요? 선교사들이 그냥 파송될까요? 저희 교회가 해봐서 알잖아요.
이거 하려면 천문학적인 물질이 들어갑니다. 누가 후원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이 어마어마한 재정이, 그럼 어디서 나왔을 것 같으세요? 누군가는 드린 거에요. 누군가는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린 거예요.
장로님들이 성도님들이 그냥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에 그냥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린 결과입니다.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개척할 선교사가 없는데, 교회가 개척이 되겠습니까? 누군가는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 '주가 쓰시겠다'고 했을 때, '내 남은 평생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드린 사람이 있으니까, 거기 교회가 세워진 거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린 사람들, 그 헌신들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예수께서 입성하신 거예요.
주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이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한 세대 전에 여의도의 교회가 부흥할 때도 그랬고 미국이 세계 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할 때도 그랬고 중국에 교회들이 세워질 때도 그랬고..
항상 주의 일이라면, 진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렸던 사람들이 있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헌신자들 이 사람들이 누군지는 잘 몰라요. 전면에 잘 안 드러나요. 나귀 주인이 누군지 여러분 아십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저 나귀가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 보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항상 주의 역사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나면
'중앙아시아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나 보다' '선교지에 큰 선교적 부흥이 있었나 보다'... 이렇게 그냥 원래 저절로 그냥 거기에 그게 있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여러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현장들을 지나갈 때 '저 교회는 어떻게 해서 누가 저걸 세웠을까? (누가 나귀 주인처럼 헌신했나?') 이런 생각 거의 안 합니다. 사람들은 그냥 원래 그건 저절로 거기 있었던 거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귀가 어떻게 원래 그냥 저절로 거기 있었겠습니까? 누군가 드린 사람이 있으니까, 내어준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된 거죠.
한국에 농촌에 가면, 정말 오래된 옛날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래 저절로 그냥 거기 세워졌겠습니까?
과거 일제 시대에, 1백년 전에, 누군가 주의 일이라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린 사람이 있으니까 거기에 오래 전부터 교회가 세워진 거죠.
어떻게 선교지에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냥 저절로, 원래 거기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녜요.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초청에 자기 인생을 드리고, 자기 소유를 드리고, 뭔가를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주의 일에 드린 사람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선교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부흥이 어떻게 그냥 일어나겠습니까?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듣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부흥이 원래 저절로 그냥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왜 일어나는지를 잘 몰라요. 그냥 저절로 일어나려니까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아뇨.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원래 저절로 그냥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나귀를 드린 사람들이 있으니까 일어나는 거예요.
뭐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항상 왕의 입성이 일어날 때는 왕이 타고 오실 나귀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천국에서 상급이 있을 거예요. 왜요? 땅에서는 철저히 자기를 죽이고 예수만 드러냈거든요. 자기가 드렸다고 갑질하려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철저히 자기를 죽이고, 예수의 모습만 드러나게 한 사람들이에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근데 이 주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니 와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데 '생각이 없는 사람인가?' 깊이 묵상하는데 그런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아 이 사람은, 이 나귀를 원래 하나님의 일에 쓰려고 따로 떼놨던 거겠구나'
그러니까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원래 그렇게 쓰려고 떼놨던 거니까 '가져가십시오.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내주지, 그렇게 원래 떼놓지 않았던 것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놓겠어요?'
우리 삶 가운데도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이건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거야' 그러고 딱 떼놨던 것은요. 그냥 그런 기회만 되면 '아, 지금이 기회인가 보다' 그러고 그냥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까?
그거 드리는데 이것저것 물어보고, 따지고 하지 않습니다. 왜요? 원래 드리려고 떼놨던 거기 때문에 '언제 드릴까?' 이러고 기회만 보고 있었던 거죠.
'어쩌면 이 나귀는 서원했던 나귀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됩니다.
이 주인이 오래 전부터 '이번에 태어나는 나귀는 그냥 하나님께 바칠 거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거야' 그렇게 딱 떼놨던 거면 기회가 오면, 그냥 바로 드립니다.
저희가 오래 전에 이 건물을 건축할 때도 다른 교회 교인분들이 헌금한 것도 좀 있었어요.
그래서 '아니, 다른 교회 분이 왜 헌금하셨습니까?' 좀 알아봤더니, 다 그런 거예요. 서원했던 것들이 있으신 거예요. '내가 주 앞에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들이 있는데 '언제드릴까?' 하고 기회만 보고 있다가..
저기 보니까 우리 교회는 아니지만, 남의 교회인데 학생들이 주축이 된 교회가 건축을 한대요. 그러니까 '옳지!' 그러고 드렸던 거예요.
이 나귀를 드렸던 주인은, 주님께서 요청하실 때 드렸던 게 아니에요. 만약 그랬으면 이것저것 물어봤을 거예요.
주께서 일하실 때는, 주 앞에 드려진 것들을 사용하세요. '그건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도, 내 시간도, 내 재물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드릴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께서 필요할 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왕을 이 땅에 모셔 오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서원하는 거예요. 쓰시는 때는, 하나님이 정하실 거예요. '내 인생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도, 내 삶의 목적도, 나의 모든 소유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쓰시고 싶으실 때 그냥 편안하게 쓰십시오. 언제든지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헌신과 드림을 통해서 주의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현대 교회는 여러분, '헌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교회가 '헌신'이라고 하는 얘기를 자주 하면, 사람들이 잘 안 모인대요.
'치유'라는 얘기를 해야지 많이 모이고 '위로, 은혜'를 얘기해야 된대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회 안에 잃어버린 단어가 생겼어요. '헌신, 드림!'
그것이 어쩌면 오늘날 현대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아닌지 한번 좀 짚어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오시는 것들을 우리가 계속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은 아닌지...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 하나님이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역사들이 회복되어지기를.. 드림과 헌신의 본질들이 회복되어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