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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가 웃다

LNCK 2023. 7. 4. 21:11


https://blog.naver.com/karamos/80048533882
 
◈사라가 웃다          창21:1-7       1999.05.23.

세월이 흐르면 쓰는 언어가 달라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말로 서로 인사했습니다. 
정말 한 끼 밥 먹기가 몹시 힘든 때였습니다. 

그 때 우리가 좋아했던 한 경구(警句)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 입니다. 
'고통 끝에는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고, 또 엄청난 속도의 발전을 하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성공이 우리에게 겹겹이 쌓이니까 
'고생 후에 기쁨이 온다'는 사실이 잊혀졌고, 
고진감래라는 말 역시 우리 주변에서 자주 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IMF의 고통을 지나면서  *1999년 설교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정말 인생에게 고통의 인내 다음에, 진정한 기쁨이 오는 법칙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고진감래 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생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한 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너를 모든 복의 근원을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의 근원'이 되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놀라운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서 사면을 보아라. 이 가나안 땅 전부를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자식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제 조카 엘리에셀을 불러다가 후사로 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 된다. 엘리에셀은 네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된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를 만들 것을 궁리합니다. 
애굽인 여종 하갈을 통해서 그를 대리모로 삼아 자식을 만들어 대를 잇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일 뿐 아니라 사라에게서 날 자니라" 21:13

훌쩍 24년이 흘렀습니다. "내년 이 맘 때 쯤 아이를 주겠다." 18:14
원문을 직역하면
"내년에 풀이 푸르게 즈음에 너에게 아이가 있겠다"
그리고는 드디어 사라가 아 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되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그 정한 기한에 하나님의 방법 으로 주셨습니다.
그 때까지 아브라 함은 25년 동안 인내로써 오래 참았 습니다.
 
◑하나님은 인내를 훈련시키신다

믿음은 인내와 함께 나아갑니다.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믿음 과 인내로써"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의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안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당장 주셔야 됩니다."

'인내'하고 '당장'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질이 급한 한국 사람들, 인내도 당장입니다. 

인내는 이럴 때 필요합니다. 
인내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 때 하는 것이 인내 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고, 또 인내 합니다. 

그러면서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그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께 서는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의 품 속에 이삭을 안겨줌과 동시에 
'인내의 인격'을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 놓으셨습 니다. 

쉽게 기도 응답 되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응답되지 않는 것도.. 또한 축복입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해서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너무나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때마다 하나님 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주시지 않기 때문에, 나는 또 매달리고 기도한다, 
또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바란다. 

쉽게 기도 응답을 안해주셨기 때문에, 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기도의 영광을 알았고, 기도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오래 참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더 확실히 가르쳐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더불어 아이를 안으면서 
그의 영혼 속에 인내하는 놀라운 인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아이만 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알았습니다. 
로마서 4장에는 아브라함의 그 때 심정이 어떻했는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가 닫힌 것을 알고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아무 것도 생각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이재록 씨 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요술을 믿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미신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되, 직접적으로도 치료하시지만 
자연은총 속에 과학적으로도 치료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에게 찾아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병원에 안 가고, 약 안 먹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그냥 신령한 은사를 주셔서 
저 고통받고 아픈 사람에게 손만 대면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고통하고 아파하는 환우를 보면 
그런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유의 은사 있다는 사람들이 
마치 나중에는 그 치료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방정을 떨다가, 실수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상식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상식은 소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상식적인 모든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 몸의 죽음도 알았고, 사라의 태가 이미 닫힌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상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없는 자를 있는 자 가운데서 부르실 뿐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중략

◑작은 응답은, 앞으로 있을 큰 열매를 예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특권 아닙니까? 
도무지 나로 어찌 할 수 없을 때에 
다윗 앞에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하신 하나님! 
내 생애 속에서도, 우리 교회 가는 길에서도 
얼마나 여러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셨는지 모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밀알학교> 건물, 안지어졌어야 됩니다.
"하나님, 이 건물 안 되는 것입니까?"

울부짖으면서 기도했던 날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대 때마다 
그 반대를 이용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시더라구요. 
우리 모두가 경험한 것 아닙니까?

안될 때마다 더 온전한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갈릴리 조그마한 산천에 십대 후반의 처녀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 처녀를 만나러 갑니다.

"하나님 께 은혜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어쩐 일인지요?"
걱정할 때 천사가 말합니다.

"네게서 아이가 출생하겠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때 천사가 말합니다.
"대저 하나 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으시니라."

그 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 처녀는 그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천한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처녀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 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 하나님을 
기나긴 세월을 참고 기다리면서 삶 전체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이삭을 알았 던 아브라함과 사라, 그 아이가 태 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아이 를 기점으로 해서 인류의 구속주가 출현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의 족보라."

아이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아이가 통로가 되어 서 이 땅에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놀라운 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될 것 인가를 고민하고 계시는 분 계십니까? 
자신있게 이렇게 행하십시오. 
내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 인지를 분명히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뜻대로 순종해서 사십시오. 
그러면 그 순종은 또 다른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놀라운 통로가 됩니다.

어느날 주일학교에서 아이 들을 가르쳤던 킴볼이라는 선생님, 
그 선생님은 10대 후반의 어린 소년 무디라는 아이가 
지난 주에 나왔다 가 이 주간에 빠진 것을 알고는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무디가 일하고 있는 구두방에 찾아갑니다. 
그는 무디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권고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는 다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냥 한 아이가 교회 나온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하는 이 기도, 그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받으셔서 
미국의 가 장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D.L.무디가 되게 하셨습니다.

킴볼, 그 분은 그 후에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무디가 자기 간증을 할 때마다, 킴볼 선생님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 사건은 지극히 작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다른 엄청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떻게 살것인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십시오. 
손해나는 것 같습니다. 안될 것 같 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뿐만 아니라 
응답하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더 다른 크고 놀라운 일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이번에 열 아홉분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연해 주로 갑니다. 
장로님들이 연해주를 다니면서 사진 촬영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해주를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냥 한 번 가 보고 그냥 한번 그 곳에 
사랑의 관심을 쏟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올해 여름에는 우리 대학부 학생들이 연해주에 가서 
농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몰려드는 우리 고려인들, 그들의 농장에 가서 
그들의 위로가 되고 그들의 협조가 되고 그들의 격려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사건을 통해서 이런 놀 라운 꿈을 바라봅니다. 
앞으로 언젠가 식량 문제가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날이 올텐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때 남북한보다 더 큰 저 연해주의 푸른 들이 
통일한국의 식량을 공급하는 주 산 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꿈이 아무리 커도 세금 내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꿈이 크다고 시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면 될 줄로 믿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우리 교회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유학생들이 성경을 공부합니다. 
우리가 최선의 친구가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주고 
그들의 적은 것을 채워주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키운, 우리가 만나서 교제한 분들 가운데 
중국을 영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여러분들이 목장에 모여서 한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냥 기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한 선교사를 통해서 그 땅에 복음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대하고 거룩한 역사를 이 땅에 이 루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결론을 알고 보니까 그렇지 
그 때 아 이 하나 낳았다고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요? 

그렇지만 평범한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엄청난 인류구원의 역사를 아브라함 가정에 시작시켜 주셨습니다. 

◑인내한 자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사라는 웃었습니다. 과거에도 웃었습니다. 1년 전에도 웃었습니다. 
그때 웃음은 비웃음이었습니다. 쓴웃음이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웃음은 다릅니다. 
기쁨의 웃음입니다. 참된 만족의 웃음입니다. 

문자 그대로 고진감래의 웃음입니다. 
그냥 기쁨으로 끝나는 웃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인격적인 믿음을 가진 
그러한 웃음이었습니다. 

그는 웃고 있습니다. 이 웃음은 지금까지 당했던 모든 슬픔, 안타까움, 
나는 안된다는 절망감, 늘 자기를 생각할 때 쓸모없다는 모멸감, 
이것을 한꺼번에 씻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말합니다. 

창21:6~7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 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라의 노래가 여기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이런 웃음입니다. 과거에 고통스러웠던 모든 일, 
그 고통의 깊이와 아픔 만큼이나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꾸어버린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웃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삭이라는 뜻은 웃음입니다. 
사라가 웃음이라는 이름의 이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십시다.

▲저희 가정에도 이삭이 있습니다. 
제 누이 동생 둘이 미국에서 결혼해서 삽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두 누이가 아이를 못낳았습니다. 10 년이 더 지났습니다. 

둘째가 12년 만에 임신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 이름이 예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큰 누이는 그 이후에도 아이를 못가지다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 5개월인가 될 때 유산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울며 통곡하며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러시더래요.

"너 꼭 애기 같다. 어린 아기에게 선물을 주었다 빼앗으면 울지 않냐? 
너에게 원래 애기 없었어. 그런데 있다가 내가 빼앗아갔는 데 왜 울어? 
너 애기 같지 않니?"

그리고 얼마 있다가 아이를 주셨습니다. 14년 만에 아이를 안고는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기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작은 누이가 아이를 하나 낳고 수종이라고 했습 니다. 
예수님의 종입니다. 첫째는 예 자를, 둘째는 수 자를 땄습니다. 

그러니까 큰 누이가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우리 가정에 이삭을 주셨을 때, 온 가족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이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범죄 한 인류에게 구속주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붙잡으셔서 
한 민족, 메시야의 통로를 만드셨습니다. 

사탄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는 것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계속 반대했습니다. 

그렇지 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품으로 떠난지 
2천년 후에 베들레헴 에서 한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 아기가 태어나자 천사들은 이렇게 노 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평화로다"

놀라운 기쁨을 안겨주는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 약속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처녀의 몸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인류에게는 놀라운 참된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실 돈이 주는 기쁨은 허전한 기쁨입니다. 
가져보십시오. 우리가 가져봤지 않습니까? 

집만 있으면 될 것 같아서 전세방 살이하다가 새 집에 들어갈 때 
그처럼 기쁘더니 3일이 안가더라구요. 
그처럼 원했던 것 가져보면 기뻐할 것 같더니 
그것을 가진 다음에는 기쁨이 일주일도 안가더라구요. 

그런데 어느날 우리의 이삭되신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태어나자마자 
내 속에 그칠 줄 모르는 기쁨, 꺼질줄 모르는 기쁨이 생겼습니다. 

저는 1965년에 우리 주님을 만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슬픔도 있었습니다만 
꺼지지 않는 기쁨을 주시더라구요. 

마치 어떤 불은, 물 속에 집어넣어도 꺼지지 않는 불이 있습디다. 
모든 불은 대부분 꺼지는데, 하나님께서 내 속에 주신 기쁨은 
도무지 슬픔도, 절망도, 실패도 상관치 않고 
내 마음 속에서 기쁨을 다시 솟아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 밀알학교 미술관 에서 그림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하고 있는 그림들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 자매님이 그린 작품들입니다. 
원래 이 그림을 우리 학교에서 전시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우리 학교에서 지금 그림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회를 하기 전에 이 분이 우리 학교에 선물하기 위해서 
장애인 앞에 서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에바다'라는 그림입니다. 

선물 하기 위해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마음 속에 주시는 그 놀라운 이미지들을 놓칠 수가 없어서 
두 달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너무 배가 고프면 
베이글 빵을 입에 물고 두 달동안 쉼 없이 18점의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그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제가 그 그림에 둘러쌓여서 한 30분을 미술관 내에 있어 보았습니다. 

각 그림들을 눈높이 위치에 걸어 놓았습니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제가 성서 속,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감동을 받더라구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얼굴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장애인을 그렸는데. 그리다 보니 예수님 앞에 자신이 서있더래요. 
열 여덟 점 모두 여러 모습으로 장애를 가진 자신를 그렸노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웃음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 진정한 웃음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명화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여인의 단순한 신앙고백입니다. 거기에 보면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폐업 예배'를 제가 알 고 있습니다. 
한 분이 자기 친구가 다 망해서 손댈 수 없는 기업을 
그냥 물려받고는 열심히 노력해서 제품을 개발했더니 
날개 돋힌듯이 물건이 팔리기 시작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생활을 떠났습니다. 
어쩌다가 명절 때 생각나면 교회에 가서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끝나기 전에 나왔습니다. 돈 버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었습니다. 

사업을 계속 키워갔습니다. 이 잘 되는 사업에 
은행도 별 이의없이 많은 융자를 내주었습 니다. 
그런데 IMF가 닥쳤습니다. 신용이 좋아서 얻었던 그 돈은 덫이 되고 *이자 업 
열심히 기계를 설비해서 만들어놓은 그 제품들은 판로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 등록은 하지 않고 신앙생활은 적당히 해야돼.'라는 것이 지론
이었던 그가 자기 발로 교회에 등록을 하고 하나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사업을 정리해 야겠다고 생각해서 폐업 예배를 드려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무일푼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원대복귀한 것입니다. 

그가 폐업예배 끝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무일푼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무일푼으로 원대복귀 했습니다. 
그러나 원대복귀가 아닙니다. 이 기간 동안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갖게 된 것은 확실한 구원입니다. 
만일 사업이 잘 되었으면, 내 영혼은 하나님을 영영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 큰 구원을 내 속에 시작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내 사업은 폐업이지만, 내 신앙은 개업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주시는, 주님만을 즐기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삭되신 주님은 망해서 폐업예배 드리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십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특권이 있다면 
임종을 보는 것입 니다. 제가 임종 순간에 가서 마지 막 찬송을 할 때마다 
보는 감격은, 암으로 신음하고 고민하던 사람이 
그 임종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얼굴이 화사하게 펴지면서 
밝은 웃음을 머금고 숨을 거두는 그리스도 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을 비틉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의 노래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그 사람은 
마지 막 임종의 순간마저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삭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실패했습니까? 가진 것을 빼앗겼습니까? 
아닙니다. 빼앗기지 않는 구원의 기쁨 되시는 
우리 이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지금도 내게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그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 
사라로 웃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 하시며, 
그 분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웃음이 열리는 생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