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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LNCK 2023. 7. 7. 07:50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막11:12~33

막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
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왕의 입성(종려주일)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왕께서 입성하실 때, 그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 
예수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기 삶을 드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성에' 입성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의 인생 가운데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를 영접한다' 그러잖아요. 
맞아요. 우리 삶 가운데 예수께서 들어오십니다. 
예수께서 입성하시는데,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는 것을 '예수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우리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왕의 입성 후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자 그렇다면 '왕의 입성'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은 "권위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왕이 입성은 기본적으로 권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권위가 뭡니까? 권위라는 것은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왕은 어떤 존재냐 하면 권위자입니다. 
왕께서는 질서를 정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권위가 왕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어떤 성에 입성하게 되면, 권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왕이 입성하기 전까지, 그 성에서 나름대로 유지되던 질서가 있었을 거에요. 

상인들은 뭐 아침에 7시에 문을 열어 5시에 닫는다든지 
고용주가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킬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든지 
그런 나름대로의 질서들이 분명히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왕이 그 성에 입성하게 되면, 왕은 새로운 질서를 선포할 수 있다는 거에요. 
(점령 후에) 왕은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거에요. 

그래서 왕께서 입성하게 되면, 질서의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권위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접하고 나면 이렇게 되죠)

만약에 왕의 어떤 성에 새로 입성했는데, 
기존 질서에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면 왕이 아니지요. 그냥 지나가던 행인이 그냥 성에 들어온 거죠. 

왕의 들어오면 그럴 수가 없죠.
그래서 왕이 입성하면, 항상 뭐가 일어나냐면 
옛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게 왕이 입성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로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면, 왕이 우리 삶의 입성하시게 되면 
이전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질서들이, 이제 새로운 권위앞에 무너지고 
그 왕께서 새로운 권위로 세우시는 
내 삶의 새로운 질서들이 세워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 왕을 받아들이는 거죠. 

예수께서 우리 삶가운데로, 우리의 인생 가운데로 입성하셔서 
우리가 이전까지 살아가던 그 삶의 질서들, 모습들, 습관들을 보시고는 
'야 저건 잘못 됐네' 
이렇게 왕의 새로운 질서로 만드시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로운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셔서 처음 행하셨던 서너 가지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권위와 충돌"

막11장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처음으로 하셨던 일들 
몇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충 서너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뭐냐면 
"권위와 충돌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왕께서 입성하시면 
옛 권위와 새 권위는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옛 질서와 새 질서는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충돌이 심하냐/ 덜하냐 하는 차이일 뿐이지,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왜냐면, 과거에 살아오던 삶의 방식이 있는데 
왕이 오시면 그걸 스톱 시키시고 새로운 걸 시작하시기 때문에 
항상 거기에는 갈등이 있고, 저항이 있고, 충돌이 있습니다. 

▲왕의 입성 후 첫 번째 사건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죠.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 사건은 왕이신 예수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권위의 본질이 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위는 무언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권위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이 옳은 것이고 / 무엇이 그른것인지를 권위가 결정합니다." 
그래야 질서를 세울 수 있겠죠.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불의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가르는 기준을 왕이 세운다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도 선악과 이야기로 시작하잖아요. 
하나님의 권위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먼저 결정하면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해야 될 일과, 하지 않아야 될 일을 구분할 수 있고 
해야 될 일과, 하지 않아야 될 일이 구분돼야.. 질서가 세워지는 거죠. 

그것은 각 개인의 삶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하여간 모든 권위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게 되냐 하면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한 나라에 권위가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권위를 위임을 해서 일들을 합니다. 

국회에 권위를 위임해서 법을 만들죠. 
법이란, 무엇을 해야 될 것이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될 것인지를 결정하죠.

그러면 그 법을, 행정부와 사법부가 권위로 질서를 유지하는 거죠. 
그 법을 어기게 되면 처벌을 합니다. 

그래서 하여간 모든 권위는,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먼저 규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인데요. 

▲본문에 보시면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시는 거에요. 
예수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는데 굉장히 시장 하셨어요.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서 보셨는데,
잎사귀는 무성하게 풍성했는데, 열매가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그러자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주석 스크랩) 다음날 이른 월요일 아침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신 후 도중에 길에서 시장하셨다. 
멀리서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셔서 나무에게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셨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가는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더라” 라고 설명해 놓았다. :13

그 때는 니산월(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였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에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다. 

이러한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가, 지방 소작농을 위한 일반적인 식물이었다. 
이러한 작은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그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정상적으로 무화과가 열려서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에 익게 되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작은 열매들은 1차로 떨어지고, 이후에 정상적인 열매가 2차로 맺힘.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4월중) 직전에 
비록 그때가 무화과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무화과나무에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찾기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위 주석에 의하면 '무화과 때는 아니지만, 
작은 무화과 열매가 당연히 있어야 했다'는 것이죠.

◑적용

'사람들은 전부 다 그렇게 사는 거에요. 
적당히 유리하게 말도 돌려서 얘기하고,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적당히 자기의 욕심도 취하고.. 
그러면서 사는 게 사람이죠, 전부 다 그렇게 사는 거에요.' 

그런데 왕께서 우리 안에 계속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야, 그거 옳지 않아! 
아무리 다른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너는 무화가 열매가 있어야 돼!'
이 얘기 하시는 거예요.
 
왕께서 입성하시면 권위의 전쟁이 시작되는거에요. 
내 안에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던,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그 옛 질서들이 무너지는 거예요. 

옛 질서 들을 허무시고, 예수께서 말씀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거에요. 
이 신/구 질서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적인 갈등들이 생기죠. 

그래서 기독교를 '카운터 컬처'라 그러잖아요.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는 거라는 거죠. 

▲자 그런데 더 당혹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그때는 무화과 때가 아니었어요. :13 
열매가 없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위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거를 불의 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러자 진짜로 그 나무가 '불의'가 됐어요. 

이 세상은 여러분 선과 악을 가르는 많은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도 되고,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결정하는 많은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 인륜, 인권, 평등, 자유, 공정, 양심 등
하여간 의와 불의를 가르는, 선과 악을 가르는 많은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기준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기준이 하나면 좋겠는데, 많아요...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의가 뭐가, 불의가 뭔지 
선이 뭐고, 악이 뭔지를 구분하는 것이 참 어려운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부동산 얘기만 해도, 
'평등'이라는 기준에 비춰서 보면, 
땅 많이 가진 부자들이 세금 많이 내는 게 옳은 것 같아요. 의인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반면에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 그런 기준을 가지고 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집 한 채 산게 죄입니까? 죄가 아닌 것 같아요. 

여러분 왜 이런 혼란이 생기는 거에요?
세상에는 기준이 많은 거에요. 
세상에는 이런 기준도 있고, 저런 기준도 있고, 
수많은 기준을 가지고.. 의와 불의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판단이 힘들고 복잡합니다. 

△또 '평등'이라는 기준에 비춰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조금 저급해 보여요. 

반대로 '개인의 인권과 자유' 라고 하는 측면을 놓고 보면 
유럽의 사회주의 시스템도 문제가 있어 보여요.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댐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옳게 보입니다. 
그런데 또 댐을 만들지 않으면 홍수가 나요. 

여러분 댐 댐공사를 하게 되면, 백퍼센트 생태계의 변화가 오거든요. 
생태계는 어느 정도 파괴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댐을 안 만들면, 홍수는 어떻게 할 거에요?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은 '생태계 파괴'라는 측면만 강조해서 
댐 공사에 반대하지만, 

뭐 그러다가 큰 홍수가 나서 도시가 잠기고 사람이 죽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겁니까? 

여러분 참 어렵지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기준과 판단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첨예하게 그런 이슈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어떤 사람은 친일파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친북파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그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미국과 함께 가는 것이 국익에 의해서 좋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다변화를 꾀해야 된다고 합니다. 
하여간 이것이 참 어렵고 복잡합니다. 분별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기준이 많고,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아주 단순한 이슈 하나를 가지고도, 분별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자 이런 복잡한 가치의 혼란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거에요. 

도대체 그리스인으로서 무엇이 의고, 무엇이 불의 일까? 
도대체 그리스도인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걸까 
이것이 참 혼란스러운데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오늘 본문 '무화과 나무 사건'에 비추어 접근해 보면,
이 사건은, 혼돈 속에 입성하신 예수 왕께서 
'의'가 뭔지를 구체적으로 선포하시는 거에요. 
'선'이 뭔지를 구체적으로 선포하시는 거에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의와 선이냐고? 
내가 배고플 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의이고 선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좀 당혹스럽지 않습니까? 
뭐 그 기준이 모든 인류의 평화, 모든 사람의 이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런 멋있는 말이면 문제가 안 되는데,

근데 예수님의 기준은, '저게 뭐지? 저게 기준이 될 수 있는 거야?' 
이런 (거부감 같은) 생각이 좀 들지 않으세요?

뭐가 의라고?
'내가 배고프을 때 무화가나무가 열매를 맺는 게 의다!'

즉 예수님이 절대 왕이시고, 절대 기준이라는 거죠!
예수께 이로운 것이 의요, 선이라는 거에요. 

그럼 무엇이 불의냐 하면, 무엇이 악한 거냐 하면, 
예수께 해로운 것이 불의요, 악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준이에요. 
예수님이 절대 왕이시고, 절대 기준이기 때문에!

불편하신 분은 끝까지 들으세요. 너무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고! 
'이거 뭐야, 이런 기독교는 상또라이 아냐?'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냐 하면, 예수께 이롭게 되는 것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면, 예수께 해로운 것이 악입니다. 
그분이 절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무화과 철이 아닌데,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리한 처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농사법에 의하면
지금 유월절 시기인데 4월, 그 때는 작은 무화과 열매가 1차로 열린다는 거죠.

베드로가 '지금은 철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 1차로 작은 열매가 지고, 본격적인 2차 튼실한 열매가 6월 경에 맺히는데,
그 본격적 추수 때가 아니라는 말이죠. 가봐도 별로 먹을 게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배가 고프니까, 1차로 열리는 작은 열매도 따 먹었다는 거죠.
그러니 그 무화과는 그 '작은 열매'라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없으니까,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신 거죠. 나무의 잘못입니다.
아마 다른 무화과나무들은, 1차로 열리는 작은 열매가 있었을 거예요.

물론 무화과나무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예수님이 괜히 무화과나무에게 화풀이 하시진 않으신 거죠.

베드로가 '지금 철이 아니다'라고 한 말 때문에, 우리가 오해를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문을 읽으면, 전혀 오해할 게 없는 거죠.)

▲여러분 이 기준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이 기준에 동의합니다. 
제게 선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뭐 복잡한 얘기들이 들려도 뭐 환경, 자연보호, 좌우 대립
저는 자세히 그런 거 모르겠고, 저에게는 딱 기준이 하나뿐이에요. 
그건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을 위하느냐/ 위하지 못하느냐.. 입니다.

물론 실제 상황에 들어가면 복잡하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가다보면 
궁극적으로 한 질문에 다다르게 되요.

'그래서 이게 예수님을 위하는 거냐?'
'그래서 이게 결국 예수님께 해로워지는 거 아니냐?' 
이 질문에 다다르게 돼요. 

세상에 복잡한 얘기들이 들립니다. 
환경문제가 어떻고, 공정사회가 어떻게, 평화가 어떻고, 
우리 사회 인권이 어떻고, 뭐 수많은 얘기들이 들려요.
판단 기준이 애매하고 까다로울 때도 있죠.

그리고 이 수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양쪽 주장이 충돌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실타래를 풀고 풀고 풀어서 결국 가보면 
'이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거냐, 그래서 이게 예수님이 슬퍼하시는 거냐?'
딱 그 질문에 다다른다는 거죠.

예수님은 절대 왕이시고, 절대 기준이 되시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 기준에 맞춘다는 거죠.
세상 권위와 예수님의 권위가 만약 충돌하면,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따른다는 거죠.

그러면 결과도 결국 좋고,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다른 권위를 따라가면, 결과도 결국 안 좋고, 합력하여 고통을 가져오고요.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공평하신 분이시고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공의로우신 분이세요. 

그래서 그분께만 선이 있고, 그분께만 평화가 있고, 그분께만 공의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에는 인간이, 그 가장 유일하게 공의로우신 그분의 판단, 기준을 
따라갈 때만, 그게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죠.
크리스천은 무조건 반골, 상또라이가 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의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세상적 가치로 공정과 평등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의, 불평등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나 기준은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이지, 세상 가치나 세상 나라가 아니에요.

비록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고, 시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시민사회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 당연히 협조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아이덴티티는 뭐예요?
예수의 사람이라는 거죠. 우선순위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있죠.

(※일례로, 탕자가 외국에 가서 탕진하고 쥐엄열매를 먹게 되었어요.
그때 탕자를, 누가 거두어서 자기 집에서 거하며 밥을 먹게 해 줬어요.
그건 선이 아닌 거죠. 왜냐면 탕자가 빨리 아버지 집에 돌아와야 되는데,
거기서 인도주의적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아버지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안 하는 거죠.
구제도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헷갈리는 그리스도 인들이 참 많아요. 
인본주의의 의와 선을 
그리스도인의 의와 선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가 노동자 권익을 위해서 많이 일했어요.
세상에서 노동계의 기준으로 봤을 땐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일 수 있죠.
그렇지만 예수의 기준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 사람 개인은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그의 투쟁을 드높일 필요는 없죠.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면 안 돼요.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 (그건 편향적이기 쉽죠)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해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셨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내 인생에 입성하셨다는 것인데,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얘기는,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에요. 

그분이 여러분의 원함과 권위에 따라 움직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권위에 따라서 우리가 움직인다는 얘기에요. 

무화과나무 사건이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위해서 존재하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있었어야 됐어요.
그래서 저주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거죠.

오늘날 내가 그럴 수 있죠.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아주 작은 열매도 없는...
예수님은 작은 열매라도 기대하시는데, 그것조차도 없는...
그러면 예수님은 진노하시고, 저주하신다는 거죠. 
물론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타락이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 아닙니까? 
예수를 위해 여러분이 존재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예수가 존재하십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위해 예수가 존재하는 식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나의 치유를 위해, 나의 회복을 위해, 나의 부흥을 위해, 
내 삶의 중심은 항상 나에요. 예수님도 나를 위해 맞춰져야 .. 선하신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죠.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배고프실 때, 
작은 거라도 열매를 가지고 있어야 했어요.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존재하는 거라는 거죠.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뭐라고 저주하시냐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14
 
'앞으로 너로부터 사람들이 아무 열매도 못 먹을 거야' 라고 하셨죠.
그 이야기는 뭐에요? 

예수께 열매를 드리는 무화과나무가, 사람들에게도 열매를 줄 수 있고, 
예수께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는 나무는, 사람들에게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결국, 예를 들어 공정 이슈, 노동 이슈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충돌했다...

예수께 이익이 되는 사람들이.. 결국은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며
예수께 이익이 안 되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 사람들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거죠.
예수님께 열매를 드리지 못하는 무화과는,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게 되는 이치입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행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러분 아무도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예수 제자들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멀었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와, 우리는 저렇게는 못 살아!' 하고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죠.

그만큼 다른 기준, 높은 기준을 가지고 살았는데 
보니까 백성들이 칭송했다는 거예요. 
이게 예수의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거에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세상에서 빚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되고 
소금이 되려면 저렇게 해야 되지...' 

그런데 그게 세상 기준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하다 보면, 
절대로 빛과 소금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죠.

그럼 어떻게 하면 빛과 소금이 된나요?
예수를 따라 살고, 예수를 이롭게 하고, 무식하게 한결같이 예수를 따라갔더니 
보니까 빛과 소금이 되더라는 거예요. 결과론적인 얘기라는 거에요.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해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보세요. 뭐 세상이 평화로울때는 
세상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 양심과 부딪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근데 환경이 항상 그런 건 아니었잖아요. 
로마 박해시대, 중국 지하교회에도, 북한의 지하교회도 
항상 신앙을 지키고 산다고 하는 것이 
세상과 충돌하는 때도 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충돌하는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지' 
이건 여러분 신앙 팔아먹을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기준은 예수그리스도를 유익하게 하는 거에요.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예수를 기쁘게 하는 거에요. 
우리의 한 기준은 예수를 높이는 거에요. 
그랬을 때, 그 결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되는거죠.

△여러분 일례로, 독일에서 히틀러가 처음 처음 등장했을 때 
독일 주류 교회가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거 알고 계십니까? 

왜 적극적으로 지지했는지 아세요? 히틀러가 등장했던 배경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는 엄청난 패전국의 멍에를 집니다. 
그래서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국민들은 열심히 일해가지고서 승전국들한테 전쟁보상금내고 
이러면서 살 길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이 무너진 상태에서 히틀러가 등장해서, 독일 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이, 독일인의 입장에서 애국심을 가지고 봤을 때 
'저 사람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사람인 거야' 
그래서 애국심의 기준을 가지고 히틀러와 나치 당을 열렬히 지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준이 아니었죠)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2차대전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홀로코스트로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또 독일국민들도 엄청나게 죽고, 피해를 입었지요.
본회퍼를 제외하면, 독일교회가 제대로 역할을 못한 거죠.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했던 거죠. 그 대가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