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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좇는 믿음

LNCK 2023. 7. 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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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좇는 믿음           요2:23~25, 막16:20             2009.08.29.

 

지난 주, 어느 교우께서 제 아내에게 책을 하나 건네 주셨습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중국 대사를 지냈고,

2008년부터 1년 동안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 장로의 영적 자서전

<하나님의 대사>(규장)라는 책입니다.

 

그 교우께서는 “이 책을 읽고는 기도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내가 반쯤 읽더니, 저도 한 번 읽어 보면 좋겠다고 권합니다.

 

김하중 장로님은 어릴 적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로 양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났고,

결혼도 믿지 않는 여성과 하게 되었습니다.

 

직업 외교관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에 아내가 먼저 회심하게 되었고,

그분도 1994년, 47세의 나이에 회심하게 됩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그 때의 일을 그분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목사님이 내 머리에 물을 부으면서 손을 대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뭔가 뜨거운 것이 내 몸 속으로 확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게는 짧은 순간처럼 느껴졌지만 몇 분가량이 흐른 듯 했다.

그야말로 내 온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처음으로 체험한 사건이었다.”(29쪽)

 

늦은 나이에 믿음의 길에 들어선 김하중 장로님은

특별한 은사를 가진 기도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신비를 깊이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공무로 인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자신이 맡은 일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기며,

중요한 결정 앞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구합니다.

새로운 일 앞에서는 늘 기도로 시작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그분은 의전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급히 회의가 소집될 때는 미처 기도 할 시간을 찾지 못하고

회의실에 들어설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그분은 대통령께, “죄송합니다만, 제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잠시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허락을 받고 나와 가까운 빈 방으로 찾아 들어가서

기도로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회의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공인 김하중 대사 혹은 김하중 장관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릴 것입니다. 제가 오늘 그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그분을 위인으로 미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의 영적 자서전에 기록된 “하나님 체험” 이야기에만 집중하려 합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지식인이요

공직자라는 점에서, 우선 그분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전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영적 세계의 신비에 입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깊은 기도로써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연결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몸이 비틀리고 혀가 꼬이고 구토 증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 증상이 사라집니다.

 

나중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그 대상자의 아픔을

느끼게 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기도를 하며 무엇을 간절히 구하는데

갑자기 양 팔이 만세 하듯 번쩍 들려 올려집니다.

 

나중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응답으로

그 이적을 허락하셨음을 깨닫습니다.

 

더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자,

손이 들려 올려지는 현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그분은 믿기 전에 폭탄주를 마시곤 했는데, 믿고 나서 술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공무상 마시는 포도주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 정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식 석상에서 포도주로 건배를 하는데,

잔을 쥔 팔이 올라가질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아서, 몸을 숙여서 마셨습니다.

그랬더니 구토가 일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술을 완전히 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열정이 새로워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제가 이 영적 자서전을 신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김하중 장로님이 신비 체험을 달라고 간구하거나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에 전념했고,

기도의 사람들에게 겸손히 기도를 요청했을 뿐입니다.

 

또한 그분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서문에서 그분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했던 기도

가운데 응답받지 못한 것이 없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할 때에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5쪽)

 

그분은 공직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나라와 민족과

하나님을 위해 섬기도록 주신 기회로 믿었고,

그래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걸고 순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신비로운 은사와 이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그분의 영적 자서전을 믿도록 만든 이유입니다.

그분은 ‘이적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이 영적 자서전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적인 체험에만 붙들리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이적을 좇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적을 좇는 경향이 너무도 강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적을 보고 싶어하며 경험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욕구를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 그 욕구가 통제할 수 없이 강해질 것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소위 은사 받았다는 사람들

혹은 능력 받았다는 사람들을 찾아 전전하며,

아무에게나 머리를 들이밀면서 기도해 달라고 보채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리고 그같은 영적 욕구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영적 사기꾼들이 더욱 활개를 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것이 괜한 걱정이기를 바랍니다만,

저의 염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한국 교회의 영적 실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지역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같은 욕구를 악용하여 ‘기적의 복음’을 선전하는 교회와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이적을 좇아다니는지, 이적이 그 사람을 좇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김하중 장로님은

이적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욕구로 가득합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러다 보니 이적이 그분을 좇아 옵니다.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막16:20

 

반면, 우리 주변에는 이적을 좇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많은 능력과 은사를 받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없는 은사를 선전하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욕구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을 통해 한 순간에

그 한계를 훌쩍 넘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신비와 이적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에서의 삶이 어려운 분들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을 기적으로써 이루어 보고 싶어합니다.

현실에서의 삶이 편안하거나 넉넉한 분들은

이적으로써 삶의 권태를 떨쳐 보고 싶어합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에게 이같은 욕구가 특별히 강하다는 사실을 보고 놀랍니다.

 

얼마 전, 미국 중부 지방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님이

제게 비디오를 하나 보여 주셨습니다.

미국 중부 지방의 한인 2-3세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열광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집회를 찍은 것입니다.

 

그 목사님도 누구에겐가 이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렵게 참여하게 되었고, 간신히 몇 장면을 비디오로 찍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동안 자라오면서 방언, 입신, 환상 등의 영적 현상들을

볼 만큼 보아 왔습니다만,

비디오에서 본 광경은 제 경험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그같은 영적 광란은 결코 건강한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더 강한 경험을 추구하다가

정신질환에 빠지거나, 그 열정이 식어 버리면

아예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로 귀착됩니다.

 

실제로, 그 집회에 다녀 와서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사탄의 공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아무런 약물치료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왜 우리 자녀들이 이같은 영적 광란에 몰입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보거나, 영적 광란에 빠지는 사람들은

삶에서 심한 좌절감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이적을 좇는 경향’이 특별히 강한 사람들도 알고 보면

삶에 있어서의 좌절감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열광적인 집회에 몰입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좌절감이 크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다른 이유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들의 좌절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보아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어도 잘 하지, 부족한 것 없지, 일류 교육을 받았지, 높은 연봉의 직장도 있지…

이민 1세로서는 그런 아이들이 커다란 좌절감의 상처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민 1세에게 좌절감의 원인이 되었던 것과

2세 혹은 3세에게 좌절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가정에서 입은 상처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부모의 기대감이 원인일 수도 있고,

소수 민족으로서의 한계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에게는 뭔가 초월적인 힘을 통해

해결하고픈 절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열광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사모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자녀들의 신앙을 잘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적을 좇는 신앙이 위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적은 주로 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반면, 믿음은 우선적으로 마음(내면)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하나님과 관계를 트고

그 관계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따지고 보면,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마음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그렇고,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릴 수가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 왔습니다.

 

그 중에는 인생의 경험이 많은 어른도 계셨고,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기 꺼리는 장년도 있었으며,

패기 만만한 청년도 있었고,

손 대면 깨질 것 같은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문제의 뿌리가 마음에 있는 것을 아는데,

그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안절 부절합니다.

저 자신도 이런 좌절감을 가끔 겪습니다.

마음에 대한 잠언서의 말씀이 얼마나 진실인지요!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잠4:23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돌아섰다면,

마음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믿지 않아서 그로 인해 기도하며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것입니다.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믿음을 넣어 주는 일입니다. 부모가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냐야 합니다.

오직 그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의학 용어에 ‘심인성 질환’(psychosomatic disease)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생기면 그 병의 영향이 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온몸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원인이 마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또한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육신의 질병은 때로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지만,

마음의 병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이 치료 받고 나면,

아무 이유도 없이 육신적인 질병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의 영성 수양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목격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며,

걷고 말하는 것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이렇듯 파급 효과가 큽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그리고 그 믿음이 깊어지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의 육신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긴장되고 경직되었던 표정이 부드러워집니다.

냉기가 느껴지던 딱딱한 태도가 변하여 온기를 풍깁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던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니

스트레스 레벨이 낮아집니다.
믿음이 깊어지면서 잠도 잘 자게 되고, 소화력도 좋아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이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요2:23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직접 본다면, 압도되지 않을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원전에 ‘몸’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헤아투’인데, ‘himself ‘그 자신을’이죠.

그러므로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로 번역함이 옳습니다. 공동번역)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할 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

적을 좇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초기 감리교회 목사님 중에 박재봉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기독교 작곡가로 유명한 박재훈씨의 큰형입니다.

 

이분은 17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열흘 동안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력한 신유의 은사를 받으십니다.

그 이후, 해방 전부터 70년대까지 목사로서

그리고 부흥사로서 많은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한 때, 그분은 자신의 집회에서 치유받은 사람들의 이름과 증상을

하나 하나 기록한 적이 있었습니다.

8년 동안 기록한 것이 1만 건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집회를 통해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던 사람들이 걷게 되고, 폐병이 치료되며, 암이 나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집회를 인도하던 중에 목사님에게 의문이 생겼다고 합니다.

‘내 집회를 통해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믿음이 제대로 들어갔을까?’

 

목사님은 확인하기 위해 몇 교회를 찾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아주 크게 실망하십니다.

자신의 집회에 와서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믿음을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분의 집회에 찾아왔던 사람들이 ‘이적을 좇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박목사님은 하나님께,

신유의 은사를 가져가 달라고 다섯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은사를 거두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박목사님은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서

이적에 치우치지 않도록 힘썼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적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믿음을 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지 없는 양초는 천하의 성냥을 다 그어대도 불이 붙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심지 있는 양초는 단 한 개피 성냥으로 불이 붙습니다.

성냥을 그어대는 사람의 재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본 것을 박재봉 목사님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알았던 것을 박재봉 목사님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적에 대한 욕구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았습니다.

 

이적으로는 마음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적은 믿음에 따라 오는 것이지, 믿음에 앞서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믿음이 참되고 진실되어 이적이 발생하면 좋은 것이나,

믿음이 없이 이적만 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김장로님이 신유집회나, 이적집회를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이, 그것을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이적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활동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적이 그렇게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김하중 장로님의 영적 자서전을 보면,

마치 신비로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같은 일들을 한 데 모아 놓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일 이적이 일상사처럼 일어난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서만 기도하거나

그것을 보여준다는 사람들을 좇아 다닌다면,

그 사람은 심한 영적 위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장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적을 구하는 기도는 잘 응답되지 않으며,

그같은 기대는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적만을 구하다 보면 실망하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렇게 디자인을 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적은 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사기꾼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입니다.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사기꾼에게 밥이 되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설사 이적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의 결과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믿음을 통해 병 치료 받는 것입니까?

방언이나 신유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해 보는 것입니까?

 

믿음을 통해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믿음을 통해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아주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작 그 정도를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과 만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새롭고 참된 삶을 찾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때 생기는 이적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의 강한 손길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것으로도,

그분의 세미한 속삭임을 듣는 것으로도

혹은 그분의 임재를 힐끗 보는 것으로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참되게 만난 사람은 이적을 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을 구합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힘쓸 때,

김하중 장로님의 영적 자서전에 기록된 것 같이,

때로 신비한 이적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만,

그것을 경험하면 우리의 영적 눈이 더 밝아지고

영적 귀가 더 잘 들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 중에 꼭 기억할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적을 좇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실 때, 마음을 주실만 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제기한 저 자신이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제 믿음을 보실 때,

“미안하지만, 너에게는 아직 마음을 줄 수가 없구나.

네 믿음을 안심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두려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이 시간 다짐하며 기도하십시다.

영적 미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다. 이적을 좇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다.

 

온갖 신비로운 것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거룩한 머리를 내어주지 마십시다.

그 대신, 우리가 선 자리에서 기도하십시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루어지도록,

그것만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깊이 닿을 만큼

더 깊이, 더 간절히,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매사를 하나님께 의뢰하며 그분께 의지하십시다.

 

내 욕심과 내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이루기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십시다.

이렇게 살 때, 우리에게는 참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때 우리는 겸손하나 담대하게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이 한 가지 마음으로 기도하며 신실하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 되었구나. 너의 그 마음과 믿음을 보니,

내가 이제 마음을 줄 수 있겠구나. 너를 믿을 수 있겠구나.”

 

주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 모두, 이같은 마음의 기적을 경험하시고,

또한 이같은 믿음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 마음의 영토를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

오셔서

주님께서 왕좌에 앉으시고

저희를 다스려 주소서.

 

저희가 바라는 것은

육신의 이적도 아니요

물질의 이적도 아닙니다.

오직 마음의 이적을 구하오니,

허락하소서.

 

이적을 좇는 믿음이 아니라,

이적이 좇아오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김하중 장로님 설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