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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와 수건 요13:34-35, 갈5:13 2006.09.24.
※갈5:1절과, 13절을 대조하는 전개를 놓치지 마세요!
우리가 좋든 싫든, 뒤집지 못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종이요, 노예요, 사환이요,
사자(심부름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니, 그 말을 뒤집으면,
우리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노예로, 사환으로, 사자로 일하게 만드십니다.
목회자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의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산 상속자로서, 왕같은 제사장(왕족이며 제사장)으로서 높여지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모든 사람의 종으로 낮추어집니다.
이 신분의 변화 (change of status)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기도 어렵고,
그 일을 오래 지속할 수도 없고, 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종이 되지 말라'는 5:1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자유를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갈5:1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산 상속자로서, 왕같은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되는 자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죄책감과
죄에 대한 형벌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그로써 율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운명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온갖 유혹의 올무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억눌러 헛된 삶을 살게 했던 악한 영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면
이같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구절 뒤에, 바울 사도는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기꺼이 종이 되라는 13절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5:13
개역 성경에는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이제 막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맛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다시 종이 되라고 요청합니다.
얼른 보면 모순되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앞에서 말한 종살이와, 뒤에서 말한 종 노릇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종살이’는 갈5:1
우리를 억압하고 파괴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힘에 눌려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 뒤에서 말한 ‘종 노릇’은 갈5:13
성령의 자유케 하시는 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한 종살이는 의지에 반하여 그렇게 된 것이고,
뒤에서 말하는 종 노릇은 기쁨으로 자원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종살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노예로 전락하여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며,
뒤에서 말하는 종노릇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이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두 종이라는 말은, 노예, 사환, 사자(심부름꾼)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에 속박되어 노예 상태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로 회복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같은 ‘사랑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1)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 회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거룩해지며
변화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산 상속자로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신분이 회복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얻게 되는 자유입니다. 행복입니다. 기쁨입니다.
이 신분 회복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에 그런 자각이 생기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점차적으로 그런 믿음이 형성됩니다.
2) 다른 하나는 그 신분 회복에서 오는 기쁨과 감격과 능력으로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귀한 신분으로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자리에서 내내 즐기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 특권과 권세와 능력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럴 때, 그 섬김은, 그 종 노릇은 굴욕감이 아니라
성취감과 자존감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자신도 진정한 유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도는 ‘종’이라고 불려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아니, 종을 종이라고 부르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아니, 자신은 종이 아니라고, 종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 목회자들이 모인 모임에서 강의할 때면,
자주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목사는 종입니다. 왕이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나면, 강의가 끝난 후, 꼭 몇 분이 찾아와서
이의를 제기하곤 했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말입니다.
"저도, 교수님의 말씀이 원론적으로는(in theory)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교수님이 아직 목회 현장을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지 아세요? 제가 종으로 내려 앉는 순간, 교인들이 짓밟으려 합니다.
저를 ‘종님’이라고 부르던 분들이 어느 순간 ‘종놈’ 이라고 부릅니다.
저를 자기들의 종처럼 여기고 별 일을 다 시킵니다.
목회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종이 아니라 왕이라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이런 지경이 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교회는, 신앙이 깊어갈수록 더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곳입니다.
반면, 이 세상은 실력이 커갈수록 더 높이 올라가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곳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백은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실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교인들에게 짓밟힐까 두려워 자신의 참된 신분을 거부하려는 목회자나,
스스로 낮추어 종처럼 섬기는 목회자를 함부로 여기고 부리려는 교인이나,
타락한 정도로 따지면 난형난제(no difference between the two)입니다.
실로, 이민 교회를 보면, 교인들의 종살이를 하는 목회자가 많고,
목회자를 종 부리듯 부리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목회하면서 탈진되고 낙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예 목회 현장을 떠나고는 다시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를 종 부리듯 부리는 교인들을 보면,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만큼 목회자를 부리다가, 성에 차지 않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등을 돌려 버립니다.
자신을 위해 종노릇하듯 헌신한 목회자에 대해서는
‘무능해서 그렇다’고 폄하해 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이민 목회자들이 이렇게 야위어 가는지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신음하고 있는지요!
▲분명히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이라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목회자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직분 없는 사람이든,
모두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것도 ‘자원하는 종’입니다.
‘자원하는 종’ 이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종 노릇을 강요할 아무런 자격이나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자원하여, 기쁨으로, 즐거이,
다른 사람에게 종 노릇하라는 부름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종 노릇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받을 아무런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받을 때마다 겸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며,
자신도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그 빚을 갚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종 노릇 하기를 꺼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종 노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종 노릇의 본질은 허드렛일,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
귀찮고 짜증나는 일을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종 노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가 종 노릇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 노릇을 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task)이 무엇인지 압니다.
종마다 맡겨진 소임이 다릅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종이 있고,
청소하는 종이 있고, 아이들을 돌보는 종이 있습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도 각각 주어진 소임이 다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종이 있고, 성도들을 돌보는 종이 있고,
돌아다니며 구제하는 종이 있고, 행정을 맡아 하는 종이 있습니다.
종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전심하는 것입니다.
청소 맡은 종이 부엌 일에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본다면, 목회자가 교인들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심해야 할 소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교우들이 도와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전심해야 하는 일은 부단한 영적 생활을 통하여
영성을 키우고, 그 영성에 기초하여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여,
거룩함에 있어 함께 자라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시간을 내어 교인 가족의 여행 가이드를 해 주거나
혹은 이삿짐을 날라 주는 것은 참으로 감동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목회자의 소임을 다하는 일에 손상을 준다면,
잘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 전하는 일은 귀한 일이고, 여행 가이드나 이삿짐 운반이
천한 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얼마나 전심을 다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해하기 좋도록 목회자의 예를 들었지만,
실은 이 원칙은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입니다.
직원들이 할 일을 사장이 대신하는 것은 종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종처럼 직원들을 섬기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사장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백성을 종처럼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백성을 섬기고 싶다고 해서 새벽에 나와 길거리를 청소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 백성들의 아픔을 체험해 보기 위해 가끔 추운 새벽에 나와 청소를 해
본다면, 대통령의 소임을 다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백성을 위해 종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전심하여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해 어떤 일로 헌신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일에 전심해야 합니다.
"이 일은 내 소관이니, 아무도 참견하지 말라"는 식의 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정성으로 받들어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끼쳐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단에 서서 설교를 하는 것도 종노릇 하는 일이며,
부엌에서 설거지 하는 일도 종노릇 하는 일입니다. 다 같은 일입니다.
다만 맡겨진 사람이 다를 뿐입니다.
신실한 종은 무슨 일이 맡겨지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노릇 하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일을 맡기신 주인의 뜻을 이루도록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노력의 목적이 제 자신을 내세우고, 더 많은 수입을 얻고,
더 많은 명예를 쌓고, 더 널리 알려지는 것에 있다면,
저는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우리 교회에서 섬기도록 세워 주신 것은
저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이루시려는 일이 있어서 저를 이곳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종처럼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서는
저와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부단히 찾고 그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신실한 종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내 걸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비싸고, 크고, 화려한 것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더 귀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자주 자본주의 ‘정신’의 위험성에 대해 말씀 드리곤 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정죄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위험 요소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시키려는 것입니다.
왜 소명을 위해 살려는 사람에게 자본주의 정신이 큰 유혹이 되는가?
소명에 따라 섬기며 살려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신분, 권력의 크기,
보수의 크고 작음 등을 따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신은 신분의 높낮이, 권력의 크고 작음,
보수의 크고 작음에 따라 자신의 값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것에 이끌리다 보면, 소명에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종노릇 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 해집니다.
소명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종 노릇 하려는 사람들은
때로 보수가 없거나 작은 일에 기쁨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며,
자신이 누리던 특권과 권력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입니다.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신약학자가 있습니다.
저의 박사 논문을 ‘외부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읽고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지금은 켄터키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봉직하고 있는
벤 위더링턴 3세 (Ben Witherington, III)입니다.
저의 학위 논문을 심사할 즈음에, 그는 저서 한 권을 막 세상에 내보인
소장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거의 매 년, 아주 비중있는 저서들을 출판하면서,
현재 미국 신약학계의 권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 미디어에서 기독교의 문제에 대해 다룰 때, 자주 이분에게 ‘한 말씀’을 청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더 크고 전통있는 대학교에서 부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명성 있는 학자라면 University Distinguished Professor
같은 명함과 함께, 대단한 보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학자의 보람은 뭐니 뭐니 해도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박사 제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즈베리 신학교에서는 박사를 배출해 낼 수 없습니다.
그곳은 목사를 키워내는 학교입니다.
그러니 큰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싶은 유혹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벌써 15년이 넘도록 그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필경 일년에도 몇 차례씩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텐데, 요동하지 않고,
작은 시골 학교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최지훈 목사님이 이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바가 있다 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최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제게 전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기타를 들고 오더니,
자신의 애창곡을 멋드러지게 부르고 나서,
자신이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켄터키 시골까지 오게 되었고,
왜 그곳에 머물러 있는지를 담담하게 고백하더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왠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머물러 연구하며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도 시카고에 있는 매우 명성있는 학교에서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자신은 그냥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과연, 내 믿음이 옳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분이 신학만 옳은 것이 아니라 삶도 옳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실력 있는 신학자는 많습니다. 잘 가르치는 신학자도 많습니다.
탁월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가르치는 바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학자는 드뭅니다.
그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입니다.
제가 그 세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목사나 신학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해야 하고,
이런 ‘기적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생에 한 번, 이런 위대한 선택을 꿈꾸기보다는,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선택 앞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손익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선택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
위더링턴 교수처럼, 소명을 따라 선택하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 믿음 안에서 신분의 회복을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얼마나 영화롭게 하셨는지,
여러분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 것으로 바뀌었는지 깨달아 알고 계십니까?
아직 그렇지 않다면, 주님 안에서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 자신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는 ‘참 나’(true self)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로이 그리고 참되게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위해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은 참된 자유로써 우리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위해 종 노릇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임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 일로써 나를 드러내거나 나의 유익을 찾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실로 나를 유익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필경(slowly but surely)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길로 인도하시기를,
우리 모두가 이 길 안에서 견고하게 걸어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왕이신 주님,
주님은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로써 저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주님을 따르도록 도와 주소서.
주님처럼
왕같은 제사장의 위치를 떠나
종으로 내려 앉아
형제 자매들을 섬기게 하소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저희를 참되고 신실한 종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성숙한 신의 경지에 이른 섬김신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펀 글)
어떤 분들은 오랜 시간의 몰입된 기도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금식을 통해서
주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정말 높은 차원의 신앙생활입니다. 좋은 것이긴 합니다.
미숙한 인간의 경지에서의 섬김
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울고, 배고플 때는 또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고,
짜증날 때는 짜증을 내고, 아름다움 앞에서 또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모습도 실로 동감이 갑니다.
우리는 ‘신(god)의 모습’으로 하나님(God)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미숙한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울 때 사랑스럽습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말을 한다면
우린 징그럽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우리 인간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신(god)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 역시 거북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 역시 우리들의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날 때는 화를 내는...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 역시 신(god)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분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신(god)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았던 세상 한가운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자들을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신(god)과 같은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을 때 서로 높은 자리 앉아 있게 해달라고 조르던 모습,
예수께서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의 수난 때 도망쳐버린 제자들,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동료 바나바와 전도에 대해 심하게 논쟁을 하고
결국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던 바울...
모두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렇듯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부대끼어 살아가는
그런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들이 신(god)처럼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지 않으실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듯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사랑에 신뢰하면서 다시 일어나 또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자’the saint 라고 합니다.
우리가 단식이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신(god)으로서의 극기가 아니라
부족한 인간으로서의 극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든 후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의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 치유를 받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치유해서 완벽한 모습을 갖춘 후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우리의 감정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다가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겸손이며,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