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민족고유의 명절인 유월절에 성전을 찾아온 장애인들입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은 성전에서 늘 찬밥신세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맹인의 눈을 만져주시고 기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다리 저는 부분을 만져주시고 기도하시며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실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또 어린이들의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꼭 예수님의 팬클럽의 모습입니다.
성전 안에는 늘 동물 울음소리, 돈 바꾸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입장에서 이 모든 상황이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고 이상하게 보입니다. 잘못된 데 익숙해 있으면, 정상적을 것을 볼 때 오히려 어색해집니다.
-또 본문 23절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예수님께서 성전에 온 백성들에게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전하는 그 복음이 대제사장들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상한 교리처럼 들립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말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암행어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메시아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차례 침묵명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으시고 나서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막1:34)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고 경고하셨습니다.(막1:43-44)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도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고 경고하셨습니다.(막8:30)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후에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막9:9)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한 의도적 행위들이었습니다.(막7:24, 9:30)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이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11-12)
이것은 모두 ‘메시아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되신 것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 비밀은 동시에 메시아 폭로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니라"(막1:2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고, 단속하시고, 경고하실수록 더욱 널리 전파하더라"(7:36)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7:24
그렇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문둥병이 깨끗이 고쳐졌는데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을까요? 정말 놀라운 사건을 경험했는데,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고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막11:30
예수님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고 대답합니다. 막11:33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의도입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메시아의 비밀이 드러나는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요한이 와서 세례를 요단강에서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심판설교는 유대나라의 회개운동, 대각성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이것은 무슨 권세로 한 것이겠습니까?
유대지도자의 태도는 대단히 간사하고 교활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나서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인가?"를 의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한가를 서로 의논하고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는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 하였느냐" 는 책망이 두렵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매우 곤란한 입장이 됩니다. 참 선지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합니다.
갈팡질팡하는 종교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어쩔줄 몰라 쩔쩔매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늘로부터" 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면 그는 '참된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세례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짓선지자로 인정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잘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의 내면입니다.
세례요한은 암행어사가 아닙니다. 일반어사입니다. 공개적인 선지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백일하에 드러낸 선지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을 참 선지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아합시대처럼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왕상18:21
'참 선지자'라고 대답하지도 못하고, '거짓 선지자'라고 대답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현주소요, 아브라함 자손의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참된 권위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하늘에서 온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암행어사이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해서일까요?
아마도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초미의 관심은 아마도 '나사렛 예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예의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위기감, 위기의식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탁월했고 그 병 고치심은 전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요즈음 우리 시대는 권위에 도전하는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권위 하면 벌써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권위가 없는 세상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권위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집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신앙이 허물어집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늘에서 온 세례요한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사실은 자기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진정한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권위였습니다.
세례요한의 권위를 믿지 않으면, 참선지자의 권위를 알지 못하면 불신앙입니다.
왜 권위가 이처럼 중요합니까?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요, 권위의 근거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을 믿지 않으면 그 권위에 뿌리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처럼 권위주의자는 아닙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흐를 때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은 으뜸이 되고 자세는 종이 될 때 권위가 살아납니다.
실력은 최고가 되고, 실력은 일류가 되고, 자세는 종이 될 때 섬기는 자세가 있을 때 권위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다고 여깁니다. 으뜸가는 사람들이 종처럼 섬기게 될 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교만해서도 안되지만, 무능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King - Servent"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실력은 왕이었지만 자세는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권위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낮아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작아지시고, 드디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방울방울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참된 권위는 사랑입니다. 올바른 권위는 사랑입니다.
현대인은 권위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사용설명서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여기에서 범죄와 타락이 만연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날'이 옵니다. 그 날이 무엇인가요? 암행어사가 옵니다. 암행어사가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적용
▲그리스도인, King - Servant 의 삶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을 숨깁니다. 27절에 보시면 하반절에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암시적으로만 밝혔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늘의 권위로써 세례 사역을 했듯이, 나도 하늘의 권위로서 이런 사역을 하고 있다" 는 뜻을 암시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는 감추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메시아로 존중되면, 십자가 지시기가 아려워지니까.. 가급적 감추십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지고 죽는 메시아’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지금은 하나님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창조 후에 나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가 있을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귄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권능, 권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능한 사람, 유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늘 자세를 낮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King - Servant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실력은 왕이지만 자세는 종이어야 합니다. 태도는 늘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참다운 권위와 카리스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관행은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팀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즈음 신자들은 권위적인 성직자보다는 친절하고 꾸밈이 없는 성직자를 더 좋아합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마20 :28), 그 말씀 그대로 사신 분입니다.
내 능력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면.. 집착이 되고 죄가 됩니다. 내 능력과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카리스마입니다. 그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데 써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지도자들이 가졌던 세상적 권위의 모습은 분별해서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진정한 영적 권위, King-servant 의 권위를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에 암행어사처럼, 부지불식간에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또는, 늘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못 알아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속히 가리니 I come quickly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1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3:20
과거에 어떤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전임 수도원장이 재직할 당시에는 영성이 충만하기로 꽤 소문난 수도원이었는데,
신임 수도원장이 부임한 후로는 이상하게도 수도원이 시들시들해 지며,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전임 수도원장, 말하자면 스승이 그 곳을 방문하셨다. 신임 수도원장은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은 부담을 느끼면서 전임 수도원장이신 스승에게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며 도움을 간청했다.
그러자 전임 수도원장은 아무 말도 없이 수도원의 기도실에 들어가서 오래 동안 기도하며 찬양을 드리셨고 말씀을 묵상하셨다.
그러고는 어느 날, 편지 한 통만 써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그 수도원을 떠나셨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내가 여기 묶는 동안에 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네. 이 수도원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어!
그런데 그분은 평범한 사람으로 변장하고 계셨는데 예수님께서 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해서 누구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사건이 너무도 중요해서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알려주는 바네...”
이 편지는 수도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변장한 그 분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전임 수도원장은 워낙 영성에 권위가 있었던 사람인지라, 아무도 그의 편지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성도들은 서로를 질시하고 무시하던 태도가 부쩍 줄어들었다.
예배시간에 자기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이 예배 후에 자기와 눈인사를 나누는 그 사람이 혹시 변장하신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변장하신 예수님일지 모른다고 서로 의식하며 존중하다보니 미움, 다툼, 시기, 게으름 ...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사랑, 화평, 성실, 충성 ... 이런 곳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자 그 수도원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다시 찾아오게 되었고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