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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서 하나님께로

LNCK 2023. 7. 10. 11:25

230312 자아에서 하나님에게로 (시 77:1-10)  - YouTube

◈자아에서 하나님께로         시77:1~20          2023.03.12.

◑본문 설명

본문 시 77편을 지은 사람은, 표제에 아삽 으로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성전에서 예배 시에 찬양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시편에는 아삽의 시가 여러 편 있습니다. 

시77편은 10절을 분기점으로 해서,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전반부는 1~9절, 후반부는 11~20절입니다. 

전후반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전반부 1~9절까지는, "나, 자아, 어두움" 으로 내용을 요약할 수 있고요. 

후반부 11~20절은, "당신(하나님), 빛" 으로 요약할 수 있죠.

본문 시77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면
이 시를 지은 시인은, 전형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경건한 삶을 
매우 중시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죠.

그런데 이 시를 읽어보면, 이 시인의 그러한 경건한 삶,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이 
하나님 자신에다 그 뿌리를 두지 못하고 

자아에 관한, 
또는 자기 나라에 관한 관심과 깊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7절, 9절에, 하나님의 속성인 인자함, 은혜, 긍휼이 나타나 있는데 
시인은, 이러한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시인에게 매우 가까운 분이라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늘 경건 생활, 그리고 예전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최선의 순종을 바치고 있는 나' 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매우 가까이 계신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인에게 가까이 했다기 보다는, 
인자하신 하나님께, 시인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소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그런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후반부에 교정되죠)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매우 특별한 분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신앙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그러한 기대가 
개인의 어떤 소원이든지, 국가적인 소원이든지, 
하여튼 두 가지가 여기 본문에 포함이 되어 있는데,
어떤 사유에서 인지, 그대로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의 전반에서  :1~9
시인은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내면의 갈등과 회의에서 
자기에게 몰두해 가지고, 자기 연민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1~6절까지 읽어보면, '나'라는 말이 12번이나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여기서 시인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리고 관습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왜 기도를 안 들어 주십니까? 
하나님, 이렇게 경건하게 사는데도 왜 안 들어 주십니까? 
왜 이렇게 착하고 깨끗하게 산 는데도, 하나님, 왜 기도를 안 들어 주십니까?' :1~6

시인은 전형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삶을 살면서 
반면에 하나님께 그가 바라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께 기대하고 있었던 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본문 전반부에, 바로 그런 갈등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7절, 9절에 보면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인자하신 분인가? 
그분은 정말 은혜로우신 분인가? 
그분이 긍휼이 많으신 분인가?' 

그는 하나님을 
그 전에는 인자하신 분,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자기에게 매우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자기의 경건에 의해서 뭐든지 움직여줄 수 있는 하나님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겪어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질문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분으로 변신했다든지.. 
마음을 바꾸셨다기보다는.. 

시인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서 
생긴 물음인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시인에게 매우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호의적인 분이시라고 생각을 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매우 멀리계신 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기에서 깊은 자기 연민
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르시즘에서 울부짖고 있는' 그런 내용을 상반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 자신이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시인은, 하나님을, 
'내 자아'라고 하는 매우 좁은 범주에서 하나님을 이해했고 
하나님을 그 속에 묶어놓고, 그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 자아의 범주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
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시인의 신앙에 상당히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섬기고 이해했던 그 하나님을 떠나느냐? 
스스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그러지 않으면, 어떤 다른 신앙에 물꼬를 터서, 새롭게 신앙의 길로 들어서느냐? 
하는 기로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에 있는 시인의 상태인데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새롭게 신앙의 물꼬를 터서 
거기로 자기 발길을 옮겨 내딛게 되는 장면이 시 후반부에 나타납니다. 

시인의 신앙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0절이, 전후반부의 분기점이라고 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시77:10 그 때에 나는 또 이르기를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오른손으로 일하시던 때, 나는 그 때를 사모합니다" 하였습니다. (새번역)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길은 내가 미처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또는 '하나님의 일과 그 길은, 인간 존재를 초월하신다'
그게 이 시인에게 주신 해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전환점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활동해 오신 하나님을 회상,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지난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한 가지, 한 가지 회상해 봅니다. 
그 시편 하반절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보다 앞서서 어떻게 실제로 행동해 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이 시인이 발견해낸 것은 
하나님은 전혀 내 경건과 내 착함에 묶여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내가 그분을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상을 초월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시인은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그 전까지는, 자기 경건의 틀 속에서 
그 자기 범주 속에서 하나님을 느껴보고,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면
여기서 이제 시인은 그걸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의 경건과 착함을 넘어서서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유는 누구도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이 시인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거기서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자기 경건의 틀 속에서, 자기 경건의 행위 속에서 
늘 하나님을 자기 자아 속에서 들여다봤다고 하면, 

이번에는 자유롭게 활동해 가시는 그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시인은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경건을 가지고 당신을 컨트롤하려고 했는데 용서하십시오.'  
내 컨트롤 속에, 내 착함 속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걸 넘어서서 활동하시는 위대하신 분이고, 그걸 깨닫게 되면서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신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내 소원은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그걸 넘어서서, 
이 위대하신 창조주, 이 위대하신 하나님, 
이 위대하신 신 중의 신을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이전 신앙보다도 
이 시인이 자유로워지면서도 
그전보다 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깨달음이 생기게 되는 
그런 전환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의 후반을 보면
'나'라고 하는 말이 거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 또는 '당신' 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당신'은, 주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 이득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라서 믿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위대하신 분이라는 걸 제가 합니다. 
당신의 창조주라고 하는 것을 제가 이제는 믿습니다. 

당신이 우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받을 때 
우리 백성들 앞장 서서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제가 역사 속에서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하나님의 위대함과 놀라움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본문 시편에 보면 '나' 대신에 '주님, 당신'이라는 말로 바뀌어 지면서 
전반부 내용과는 매우 반대 상황이 거기서 벌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무관심하다고 생각을 했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데서, 하나님 아닌 다른 데서 
자신의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바뀌었습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 편에 계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공동체 적으로도 그렇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안보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경제를 부흥시켜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세계 상위권에 올라서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의 자아 중심에 머물렀던 하나님은 
우리와 점점 멀리계시는 하나님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거에요. 

코로나는, 우리가 누리던 안정의 기반을 모두 앗아갔지요. 
코로나는 글로벌하게 개인과 국가 간의 관계를 모두 단절시켰고 
우리의 허세를 모두 무너뜨렸고 
착하게 산 사람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구분 없이 
코로나로 생명이 중단되어 가는 걸 우리가 보게 됐습니다. 

교회의 대형화를 분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인간의 지혜로 코로나를 막아설 수 있도록 
인간에게 지혜를 주셨지만, 
그 지혜의 한계를 철저히 우리는 절감해 가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신비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학대하던 자연이, 새롭게 숨을 내쉬면서 생기를 되찾으며 
웃고 있는 자연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모두 중단되거나 
무너져 내린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새롭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 코로나 이후에 교회는 없어진다(약해진다)는 말도 있었고요. 
청년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관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고민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느냐?' 
'어떻게 하면 교회를 떠난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매우 고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자기 자아와 나르시즘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 되찾으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범주를 넘어서서 
'(교회가) 자유롭게 행동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 무릎을 새롭게 꿇고,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천지의 주재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면서 
그 뜻을 새롭게 붙잡으면서,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느냐?'
이것이 상당히 교회에 이제 관건이 됩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요. 
이번에 이 기회를 통해서, 
정말 우리가 새롭게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가 자기의 자아에 사로잡혀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범주를 넘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느냐? 

그 하나님을 따르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행위에 우리가 전적으로 동참하느냐 
그리고 그 하나님의 품에 전적으로 안기느냐?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숙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코로나 이후에 교회 방향이 새롭게 설정될 수 있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 새롭게 눈앞에 전개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질된 게 아니고 
'우리가 이제껏 많이 잘못 됐구나. 너무 자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았구나.' 
'너무 나의 괴로운 문제라고 하는 안경을 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였구나' 
'경제부흥, 안보.. 그런 관점에서, 그런 편에 항상 서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았구나..'  과거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코로나 이후에는)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시점에 왔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어야 돼요. 


본문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양 떼처럼,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새번역)

'당신께서 모세와 아론의 손에 몸을 숨긴 채 
당신이 백성을 양떼처럼 이끄셨습니다' 라는 말씀이죠.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이 시인이 자기의 역사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인데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의 손에 몸을 숨긴 채 
당신의 백성을 양떼처럼 이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코로나로 하나님이 잠자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식으로 역사해 가시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약성경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라는 한 인격에 숨어 계신 하나님은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풍랑가운데서 거기 계시면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나인 성에 과부가 자기 외아들을 잃고 슬픔 속에 잠겨 있을 때 
그 앞에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되었는데, 무덤 돌을 굴러가게 하고 나사로를 불러 내셨고 
베데스다 못 가에 온갖 각색 병자들이 모여서 신음하고 있는데 
거기서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보여 주시고 

음산한 무덤 속에서 오랫동안 귀신들여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으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묶어놓을 수가 없어요. 
내 경건생활 속에 묶어놓을 수 없고 
착하고 깨끗함으로도 묶어놓을 수가 없다고요. 
(내가 경건하고 착하게 사니까.. 내 소원을 다 응답해 주셔야 마땅하지.. 하는 생각)

그러면 여러분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그럼 경건은 필요 없느냐, 깨끗하고 착하게 사는 것은 필요 없느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거는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의 경건과 착함과 깨끗함 이라면,
그것을 하나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도구로 삼으면 안 되고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거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생각의 범주를 초월해서 자유가운데서 활동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반응 response 으로 나타나야 돼요. 

'하나님, 당신의 위대함 속에서 
내가 당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제는 자유합니다. 이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께 경건을 드리고 
이 예식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지금도 계속해서 창조의 행위를 계속해 가고 계신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하면서, 우리의 묶여 있는데서부터 
우리가 좀 더 해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나는 전능자의 하나님 앞에 이런 응답 response 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또는 주일에 모여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돌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의 활동이 중단되지 않았다고 하는 
가장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사건이 
이 시간에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 자아중심에 의해서 움직이는 하나님이고 
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착하고 깨끗하게 사니까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 가 아니죠. 

우리는 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까? 
우리가 이렇게 잘못된 삶을 살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해서, 이 자리에 왔나이다... 
이게 신앙신의 응답 reponse 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지금도 활동하고 계세요. 
지금도 보이지 않는 데서 활동하고 계세요.

▲이태리에서 코로나가 한참 창궐할 때 
당시 의사가 쓴 에세이 글을 읽어봤는데요.

거기에 코로나 환자들이 다 모여들어 병상에 누워 있고 
예수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 의사들이 
거기에서 감당키 어려운 사건속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75세 된 나이 많은 개신교 목사님이 
자기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고서, 열이 그렇게 나고 기침이 나는데도 
백여 명의 누워있는 코로나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마스크 쓰고) 찾아다니면서 
성경말씀을 읽어 드리고 기도를 해주는 그 장면을 보고 

거기에 있던 의사들이, 
자기의 부모들이 주일에 교회에 가는 걸 비웃던 그 젊은 의사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고백하게 되고 
그리고 그 75세된 목사님이 드디어 하나님께로 가는 장면을 보고 
자기들도 얼마 있다가 그 목사님을 따라서 
영원한 본향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고 본문의 20절을 생각하게 됐어요. 
코로나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무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75세 노인 목사님을 통해 숨어서 
코로나 환자들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무신론자 의사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조금만 달리 뜨면
내 주위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지금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자기 경건, 자기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가 길들여 가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문제는 거의 다
자기의 경건과 착함으로 하나님을 길들여가려고 해요. 
(내가 이렇게 사니까, 하나님은 내 소원 들어주셔야 해요)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해서 길들여지는 신이라고 하면 
그런 유치한 신을 뭐하러 믿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들여가지는 않거든요. 
하나님 손에 우리가 길들여 가는 거죠. 

하나님 손에 길들여가면서...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고,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보게 만들고... 그렇단 말이에요.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가끔 들려오는 소식들,
어떤 영상을 보면서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그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고, 하나님은 지금도 활동하고 계세요.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지 않는 세상이라면, 교회가 왜 생겨났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희망을 어디에다 두겠습니까? 

그렇죠. 우리를 초월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face down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하며, 

이제는 내가 생각하는 소원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당신이 계시다는 것만 생각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내가 내일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그런 변화가 우리의 신앙에 나타나게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