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공부하면 안 됩니다. 존 칼빈의 경우에도 다른 주석은 다 기록했지만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완전히 알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시록은 한 사람이 다 알아서 파악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그만큼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이 상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징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은 시대에 따라 다른 깨달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출간된 요한계시록의 주석들을 보면 방향성에 따라 해석도 천차만별 달라집니다. 해석의 원리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한 절, 한 절 연구하는 방식으로 가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절씩 연구하는 것보다는, 큰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 부분이 말하는 핵심을 공부하는 방식이 더 합당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너무 세세하게 공부하려다가 자칫 엉뚱한 길로 빠질 가능성이 많으므로 각 부분이 다루고 있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주제에 주목해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대단히 어렵고 상징적인 책이지만, 닫혀진 책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열린 책입니다.
계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계시받은 1세기에도 이 책은 인봉된 책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유배당했다는 밧모섬을 가보면 요한이 늙어서 힘이 없음에도 기도를 해서 기도하려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은 자리가 파여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위에 이마를 대고 기도해서 바위가 파인 곳이 있는데, 약간은 과장된 것 같지만, 요한이 기도를 그만큼 많이 했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하나님이 하늘문을 열어서 계시록을 계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1세기에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았을 때에도 인봉된 것이 아닌 열려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서 읽히고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책이지만 못 읽은 책은 아닙니다. 즉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공부하지 않아야 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3
요한계시록은 먼저 혼자서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읽고, 듣고, 지키는 세 가지 동사가 중요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계시록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동기는 충분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에는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석을 한 가지 라인에서 하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며 광신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사람들, 또 “한 세대가 지나고”라는 것에서 40년을 잡고 1988년에 오신다고 하거나, 1992년, 1999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광신주의라고 합니다. 광신주의에서 나온 종말론을 통해서 이단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단들은 바로 이 종말론에서 가장 큰 문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광신주의에서 나오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덮어두고 공부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인봉된 책이 아니라 열려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읽고, 듣고, 지킬 때에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무시하지 않고 광신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필요한 자세는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교훈을 받아 삶에 적용하려는 책임성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책임성 있게 성실하게 적용하려고 하는 신앙적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광신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시행착오를 겪어 가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졌습니다. 1세기에도 열린 책인 요한계시록은 21세기인 지금도 열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도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요한계시록의 몇몇 주제는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겠다며 확실한 견해를 밝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년왕국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분의 설교는 어떤 때는 전천년주의자, 다른 때는 후천년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잘 모르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면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렇게 잘 몰랐던 것이 20세기에 조금 더 알게 되고, 21세기에는 조금 더 알게 되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깊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사람들이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3가지 중요한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학파는 과거주의자, 미래주의자, 역사주의자입니다.
과거주의자는 요한계시록이 1세기에서 3세기 콘스탄틴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된 종교로 세우기 이전에 기독교와 로마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이미 과거에 다 실현된 내용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3세기 혹은 4세기 초에 관한 예언에 불과하고, 1세기에 예언되고 4세기에 지나갔으므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다 실현된 책이라는 입장이 과거주의입니다.
미래주의적인 해석은 요한계시록은 모두 미래에 실행될 예언으로 봅니다. 1-3장에서 나오는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들은 1~ 21세기까지의 교회를 연대기적으로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1절에 사도요한이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 올라간 것을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고 4장 2절에서 19장까지 교회가 하늘로 휴거된 이후에 이 땅에 불림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대환란에 대한 얘기인데 교회는 아직 들림 받지 못했기 때문에 4~19장까지의 얘기는 모두 미래에 일어날 얘기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미 하늘로 올라갔기에 대환란하고 아무 상관없으며 환란당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위에서 환란을 본다고 해석을 합니다.
교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으며 이 땅에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앞으로 어느 7년에 있을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며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미래적인 해석입니다.
20~22장은 미래에 다가올 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 그리고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런 미래주의 해석 방법은 20세기에 만연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해석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1세기 사람들에게 몇 천 년에 있을 일들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역사주의적 해석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교회역사 전체에 관련되어 있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사건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1-22장까지 모든 내용이 초림부터 재림까지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주의 해석방법은 초대교회로 국한하고 역사주의적 해석방법은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서 연대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석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 해석방법은 각각 부분적으로 옳은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적용하면 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 가지 해석방법은 요한계시록에 전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부분은 옳지만 전체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방법은 부분적인 타당성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타당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계시록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점진적 해석 병행법이 가장 적절합니다. *'반복 진행적'
이 방법은 윌리암 헨드릭스가 요한계시록 주해를 ‘넉넉히 이기는자라’는 책을 통해 소개되었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요한계시록은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아니라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자세히 보면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숫자입니다. 완전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숫자가 42회나 등장합니다.
일곱 별, 일곱 교회, 일곱 나팔, 일곱 금촛대, 일곱 인, 일곱 대접 등 계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7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 숫자는 일반적으로 완전수, 충만수, 완전, 완성수를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심판도 일곱 번이나 나와 있는데 한 번에 몰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걸쳐서 7번 나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악인을 심판한다는 메시지가 7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병행되어 나와서 병행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병행되어 있는 이 일곱 번의 사건들이 점진적으로 의미가 깊어진다고 합니다.
일곱 번 중에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교회가 핍박을 받습니다. 다른 네 가지는 교회가 핍박받는 이유가 사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투쟁 때문에 교회엔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는 현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고,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는 영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가 현상적인 것에서 영적인 의미로 점진적으로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방법을 가리켜 ‘점진적 병행법’이라고 말합니다. *‘반복 진행적 구조’
지금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방법이 점진적 병행법입니다. 이것이 역사주의와 다른 것은 역사주의는 1장부터 22장까지를 초림부터 재림까지 연대기적으로 보고 일회적으로 바라보지만,
점진적 병행법은 일곱 번 반복된다. 그리고 사건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고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인, 나팔, 대접 이런 순서로 나옵니다.
1-3장까지는 복음서 시대, *7교회 교회시대에 나오는 다양한 교회 유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것을 각 세기에 맞는 교회의 모습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가 각 세기에 따라 하나의 모습으로 정형화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모두 미지근한 교회만 존재하는 시대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곱 교회는 전 모든 세대에 보여 지는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에베소 교회, 서머나, 두아디라,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곳들이 있습니다. 1-3장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회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7장까지는 일곱 인의 재앙입니다. 천상에 계신 어린양 그리스도가 일곱 인을 떼는데 이것은 땅에 있는 <교회가 받을 환란과 핍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인을 뗄 떼마다 환란을 받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모든 환란을 이기고 어린양이 목자되시고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 주시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즉 교회는 환란을 당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핍박자들은 6:16절에 보면 어린양의 큰 진노를 받아서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6:16)고 애원합니다.
한마디로 “바위야 내 위에 떨어져라. 내가 차라리 떨어지는 바위에 깔려죽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자는 이렇게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핍박받은 교회는 결국 환란을 이기고 어린 양이 목자되어 눈물을 씻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사람이 있다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8-11장은 일곱 나팔의 심판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전쟁>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즉 일곱 나팔을 분다는 것은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예언입니다. 전쟁과 전쟁이 일어나도 교회는 복을 얻고 전쟁을 통해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수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나팔 규례가 나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팔은 전쟁 심판입니다. 갖가지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1:18절을 보면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11:18)
전쟁을 일으켜서 땅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상을 주십니다.
중간정리하면, 1-11장까지 교회는 지상에서 핍박을 받지만,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2~22장은, 교회가 왜 지상에서 핍박을 받는지에 대한 영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핍박받는 이유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교회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1장은 제1부로서 현상적인 사건이고, 12-22장은 제2부로 영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초림, 재림을 반복을 하면서 의미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점진적 병행법이라고 말을 합니다.
12-14장까지는 용과 짐승들이 나옵니다.
바다에서 나오고, 땅에서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적그리스도들입니다. 정치적인 힘과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사단은 정치적인 힘과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을 통해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핍박을 받고 끝나게 됩니다. 용들은 심판받고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15-16장은 진노의 일곱 대접에 관한 말씀입니다. 악인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겁니다. <악인에게 진노의 심판을 부으신다>.. 이것이 일곱 대접 심판의 주제입니다.
17-19장은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바벨론은 큰 음녀이며 교회를 대적하는 종교적인 세력을 상징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바벨론은 멸망하고
20-22장은 이 짐승들, 바벨론의 머리인 용이 심판을 받고 무저갱에 빠지게 되고, 불 못에 빠지며 그들을 추종하던 사람들도 불 못에 빠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되면서 진행될수록 현상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의미로 점진적으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로마황제 도미티안이 통치하던 81-96년까지 밧모섬에 유배되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록을 쓸 당시에 성도들은 핍박을 받았고, 추방당했고, 투옥, 순교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거짓 이단들이 출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핍박받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핍박자들은 아무리 강해도 심판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들은 목베임을 당해서 망한 것처럼 보인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천상에서 왕노릇하는 교회의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승리하고 있음을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히려 망한 자들은 교회를 핍박하고 악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 못에 빠뜨려서 심판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은 핍박을 받고 어려워도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굳게 지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심된 주제이며 목적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읽으면서 신앙이 더욱 커지고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