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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도 빈자도 마찬가지로 낙타가 바늘귀..

LNCK 2023. 7. 1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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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도 빈자도 마찬가지로 낙타가 바늘귀..     마19:16~30     2011.11.20.

 

▲서론

 

‘부자도 빈자도 낙타가 바늘귀..’

이 말은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미리 밝혀 두자면,

 

돈은 있어도 부자가 아닌 사람이 있고,

가난해도 빈자가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먼저 기억해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자면 구원 없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그런데 빈자에게도 구원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매우 어렵고,

빈자는 천국에 쉽게 간다고 여기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부자는 돈이 있는 상황,

돈을 두둑이 가진 자신을 보면서, 그게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빈자는 뭡니까?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는 상황이다’

이것을 늘 ‘자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향하고 있는 마음은 똑같아요, 빈자나 부자나.

단지 부자는 돈이 있는 상황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고,

빈자는 돈이 없는 상황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요.

 

근데 이들은 둘 다 ‘바늘귀를 통과 못하는 낙타’라는 겁니다.

부자만 아니라, 빈자도 .. 통과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부자인 채로, 빈자인 채로 그들을 천국으로 끌고 가신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빈자라는 자리에서 떨쳐내시고,

부자라는 자리에서 이탈시키신 뒤에,

부자라는 의식도 없고, 빈자라는 자아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시키신다는 얘기입니다.

 

▲부자가 천국 문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왜 몹시 놀라요? 뭐가 그렇게 대단해 몹시 놀랍니까?

제자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들이 모두다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다니면서 이루고 싶었던 게,

어쩌면 자기들도 다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거예요.

 

근데 자기들이 예수님 쫓아다니며 이루려고 하는 그 부자의 상태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천국 가기 어렵다’ 그러시니까..

깜짝 놀란 거지요.

 

사실 여러분 유대사회에서, 율법에 근거해서 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묵계적으로 인정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 원리가 뭐냐 하면 선민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이 부자라면.. 그는 구원 받았다는 증표를 갖고 있는 겁니다.

 

부자로, 건강하게 오래 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는 증거물이에요.

신명기 28장이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이 부자 청년은, 관원이란 벼슬까지 한 사람이고, 존경 받는 젊은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등사윗감이죠.

 

그런 사람이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갖고 와서 고민한다는 것은

사실상 유대사회 내에서는 불필요한 얘깁니다.

 

왜냐면 돈을 많이 벌고 산다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고 계셔서, 축복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니까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돈이 많다는 것은 ‘아이구~ 복 받았어 복 받았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긴다는 증거가 되는 건데,

 

주님은 그 사람에 대해서,

‘빈자가 되지 아니하면 넌 구원 못 받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구제를 권면하는 게 아닙니다. 마19:21

‘네 마음으로부터 돈을 떼어 내라’는 얘깁니다.

 

▲자! 그러면 왜 부자가 되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낙타가 바늘귀 앞에 섰을 때와 같아질 정도로 몸집이 커지는 겁니까?

 

여러분 ‘물먹은 소’ 얘기 들어 보셨죠?

소를 도살하기 전에, 물을 잔뜩 강제로 주입시켜서,

소의 무게를 늘여서,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돈 아닙니까, 돈이 마음에 닿지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소에다 강력 펌프에 연결된 호수를 갖다 끼우고 물을 먹이면, 소가 팽창되듯이..

이 세상에 있는 돈이, 내 마음에 닿기만 하면,

내 자아를 팽창시키게 됩니다.

 

원래 사람의 자아는 빈 채로 나오는 거예요, 빈 채로.

성장하면서, 그 빈 속을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채워가지요.

 

그 자아의 빈껍데기 속에다가 내용을 채워 넣는데,

그렇게 채워져서 자아가 팽창돼서 내 자아의식이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이라는 것이, 소에 물을 먹이듯이,

자아의 빈껍데기 속에 의식을 집어넣어서

‘내가 부자’라는 생각(자아 의식)을 갖게 될 때,

내 자아가 점점 팽창되면서..

구원, 영생, 천국하고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자아가 팽창이 돼가지고

부자라는 의식으로 팽창이 되기 때문에

천국의 문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자아가 팽창되니까, 천국 문이 들어가기에 좁은 겁니다.

 

그게 내 본래 모습이 아닌데,

내가 나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천국을 들어가겠습니까?

들어갈 수가 없어요!

 

빈자도 마찬가지에요, 돈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 늘 몰입되어서,

‘내가 빈자’라는 의식을, 내 자아의 빈껍데기에 채워 넣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아의식이 어떻게 (물먹은 소처럼) 부풀려지느냐?

‘나는 가난뱅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천국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그것 역시 부풀려진 내 자아의식입니다.

 

▲이 ‘부자’라고 하는 의식을 주님께서 영역을 확대하십니다.

이어지는 마19:29~3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보세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이 정도 항목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을 다 얘기합니다.

 

그럼 왜 이걸 다 ‘버리라’고 말씀 하십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대상이던지 내가 마음으로 연결이 되게 될 경우에,

내 마음에 자아의식을 넣어줘요.

 

내 형제가 내 마음에 자아의식을 팽창시켜서,

자아의식을 넣어주게 되면 뭐가 됩니까?

나는 형이거나 동생이 됩니다.

 

또 부모라고 하는 관계, 부모라는 대상이 마음에 닿으면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만들어 버립니까?

‘아들, 딸’이라는 자아의식으로 채워 넣고,

 

또 내 ‘자식’들을 대상으로 삼고 관계하게 되면,

내 마음에 ‘부모’라는 자아의식을 팽창시켜 넣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왜 버리라 그러느냐?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로 자아가 팽창된 상태로서는

즉 나는 아버지로 팽창되고,

엄마로 팽창되고, 자식으로 팽창되고,

(마찬가지로) 부자라는 의식으로 팽창이 되고,

빈자라는 의식으로 팽창이 되던,

 

무엇으로든지 이 세상의 상태, 상황, 대상, 관계 사람으로 의해서

내 자아의식이 팽창된 그런 자아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천국을 못 누립니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하시는 얘기는

십자가를 지라는 얘기에요.

 

십자가가 뭐 하는 겁니까?

세상이 물 먹인 내 자아의식이 팽창된 상태에서 물을 다 빼내는 거예요.

못으로 찔러 빼내고, 가시로 찔러 빼내고, 창으로 찔러 빼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창에 맞아 못에 찔려 피를 흘리시고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신 것처럼,

완전히 내 자아의식이, 세상의 대상에 의해서 팽창된 자아가

완전히 물이 다 빠져나가서.. 빈껍데기만 남아서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사도바울의 말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자아의식이 팽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앞에 두고도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 자식에 대해서 ‘내가 아버지다’라는

팽창의식이 죽어버린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진정한 나를 찾아야 되요.

 

▲돈이 있다고..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

돈이 없다고.. 나는 빈자가 아닙니다,

 

자식이 있다고.. 나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부모가 있다고.. 내가 자식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그 모든 대상에 대해서 죽고, 주님이 다시 살려 주실 때,

태어난 아기가 담요를 빨 듯이

순수한 내 자아가 어린아이처럼 입에 물고 빨아야 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첫 번째가 아버지하나님!

 

그래서 그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자아의 주머니가 팽창됐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라는 겁니다.

그게 유일하게, 유일하게 진정한 ‘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강림사건이 바람처럼 임합니다.

 

하늘의 바람이 그들을 채울 때,

베드로는 비로소 하나님이 하늘에서 원래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그 (본래) 모습의 베드로가 되는 거고,

요한도 그 (본래) 모습의 요한이 된 거고,

사도 바울도 그 (본래) 모습의 사도 바울이 된 겁니다.

 

세상의 대상에 의해서 물 먹는, 세상에 물 먹은 그런 소 같은 모습에서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 바람으로 채워져서,

진정한 ‘나’로 내가 나를 찾을 때, 그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돈이 있습니까? 부자는 되지 마세요.

부자가 안 되려면 그 돈에 대해 죽으세요.

 

그 돈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세상을 향하여 갖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

절대 돈이 있다고 그 마음대로 사지 말고 그 마음을 주님 십자가에서 죽이세요.

 

그 돈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음대로 쓰잖아요? 구원이 없어요.

 

왜? 부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팽창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다고 나는 가난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도 구원이 없어요.

빈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요, 부자도 천국에 못 들어가요,

 

아무개의 아버지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어떠어떠한 집을 갖고 있는 소유주도 천국에 못 들어가요,

누구의 딸도 천국에 못 들어가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 천국에 들어가요.

 

그러기 위해서 주님 십자가에서 세상이 내 마음에 불어넣은,

그래서 팽창된 자아는 십자가에 못과 가시와 창에 의해서

찔려서 찢기고 죽어야 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팽창되어진 자아,

그럼 팽창이라기보다는 자아확장이라고 할까요?

자아를 되찾은 거라고 할까요?

 

그런 자아만이 내 자식과 내 남편과 아내와 내 전토와

내 재산을 향하여 올바른 태도로 관계할 수가 있을 것이에요.

 

부자도 빈자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현재 천국도 못 누립니다.

내 자아의식이 ‘하나님의 자녀’만 된 그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에 물 먹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죽게 해 주시고,

 

새롭게 태어나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나의 자아의식이 팽창되고

확장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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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면서도

한 가지가 부족하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수만 가지 계명을 다 지켜도

<부족한 것 하나>가 뭘까 생각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1)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2)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3)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이 말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가진 것을 다 포기하는 것-가난

2)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웃 사랑

3) 주님을 따르는 것-주님 사랑

 

문맥상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

그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신 거지만

 

 

만일 세 가지 중에서 또 하나를 고른다면

그 한 가지 부족한 것,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가난입니까, 2) 이웃 사랑입니까, 3) 주님 사랑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 사랑’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이어야겠지요.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고

정작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면

즉 1)과 2)는 하는데, 3)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 역시 부자 관원처럼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는 것이 되겠지요.

 

제가 과거에 아주 잘못하였고 지금도 가끔 그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1) 바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2)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은 열심히 하고

3) 정작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1) 소유의 포기 2) 가난과 이웃 사랑과 3) 주님을 따름이

다 한 묶음이지만, 다 통털어 한 가지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1) 가난도

2) 이웃 사랑도

3)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고,

 

주님을 따라서 곧 주님처럼

가난도 하고 이웃 사랑도 해야 하는 겁니다.

 

왜 괜히 가진 것을 다 팝니까?

왜 괜히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떠납니까?

왜 내 소유를 팔아 부모 형제에게 주지 않고 생판 모르는 이웃에게 줍니까?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치

사랑에 눈 먼 연인들이 그 사랑을 가족이 반대하니까

부모형제 버리고 그리고 가진 것 다 포기하고 연인을 따라가는 것과 같지요.

 

너무도 그를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그만 있다면 다른 것 아무 것 없어도 괜찮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