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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LNCK 2023. 7. 21. 09:01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39] - - YouTube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막14:1~11          마가11~16장 설교모음

◑도입

본문 막14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의 일입니다.

아마 하루 이틀 전 시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라는 위기가 점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사람들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원색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잖아요.

또는 십자가가 우리한테 점점점 다가오잖아요.

그러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편 설교에서 더욱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십자가가 점점 다가오자

예수를 대적하던 사람들은 이제 드러내놓고 예수를 죽이기로 모색합니다.

또 예수를 따르기는 했지만, 뭔가 못마땅하고 100% 동의하지 못했던 유다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엄누르거나 감추지 않고 원색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수를 배반하고 팔기에 이릅니다.

반면 예수를 정말로 사랑했던 한 여인은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그 아주 비싼 향유를 깨서 예수께 붓고

또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

아주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합니다.

맞아요. 여러분 사람은요. 위기가 닥쳐봐야 그 안에 진짜 뭐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위기가 닥쳐봐야 본심이 드러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떨까요?

위기가 닥칠 때 저와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드러내게 될까요?

그런 생각들 여러분, 한 번 또 해보시지 않으셨나요?

'정말 초대교회 때 만약 내가 살았다면,

아니면 중국 가정교회 핍박이 한창 심했을 때 만약 내가 거거 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상황이 우리 안에 있는 진짜 믿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잘 몰라요. 모든 것이 평안하고 아무런 위기도 없고

십자가가 멀리 서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좋아 보여요.

가룟유다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처음부터 이상한 제자가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래도 예수님께서 가장 충성되고 가장 제자로 합당해서 뽑혔던..

그런 최측근이었어요. 12제자 중에 한 명이었고

3년이나 예수를 좇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다 안에 이런 마음이 있었을 거라고 하는 걸

누가 상상이라고 했겠습니까?

십자가 앞에 서기 전까지는, 유다 자신도 몰랐을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위기 앞에서, 비로소 유다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고

비로소 대면하게 되고, 비로소 깨닫게 된 사실이죠.

저와 여러분이 제자들처럼, 이런 위기 앞에 서게 됐을 때

또는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올 때, 십자가가 한 발 한 발 우리 앞으로 다가올 때

드러나게 되는 내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지 않으십니까?

과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감추어져 있고

눌려져 있던 그 본질, 본심은 뭘까요?

그래서 우리 각자가 위기 앞에서 드러나게 될 그것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그때 새롭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거에요.

유다가 보였던 이 배신, 예수를 팔았던 행동은

그때 갑자기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니라

유다 안에 그렇게 될 수 있는 뭔가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고 눌려있었던 거죠.

새롭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 감추어져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것을 미리 발견할 수 있고

지금 그것을 미리 대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굉장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위기와 십자가의 때가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다시 바꾸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의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감추어진 본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예수를 따르는 것의 본질은 뭔가?

또 내가 믿고 있는 '이게 믿음의 본질이야' 라고 생각하는 그 본심은 뭔가?

어쩌면 나도 잘 모를 수 있어요. 어쩌면 사람들도 모를 수 있어요.

위기가 다가오기 전에는 잘 안 드러나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가 끄집어내서, 말씀 앞에서 끄집어내서

내 안에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 그 본질은 무엇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나?

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내 안에 있는 깊은 곳에 있는 그 본심들, 본질들,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의 실체들을 끄집어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그게 만약 좋은 것이라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고 당황스러운 것이라면 주님 앞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이 고침받고

새롭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드러내시고 고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십자가의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민낯들, 본심들을 드러내면서

반응하기 시작하는데요...

◑1. 첫 번째로, 위기가 오면 예수를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14:1~2절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이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냐면, 처음부터 예수가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이에요.

다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냥 잠잠하고 있었던 것뿐이지요.

이 사람들은 언제든지 기회만 오면, 사람들이 민란만 일으키지 않을 것 같으면

예수를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사람들의 민심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를 잡아주길 그런 궁리를 하면서도

'이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야?'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들의 관심은 '사람들의 민란이 나지 않을까?' 이게 유일한 관심이었어요.

위기 앞에서 여러분, 저희가 어떤 모습을 드러내게 될까요?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우리 안에 있는 이 본심은요, 여러분 위기가 다가올 때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진짜로 드러내는 거예요.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평상시에는 멀쩡할 수 있습니다.

굳이 나서서 교회를 핍박하거나 교회에 불 지르거나 이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 위기의 때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할 때,

교회가 큰 위기 가운데 처하고 환란 가운데 처할 때, 그런 때가 오면

반드시 하나님을 핍박하는 편에 서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이고, 민란이고,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니까요.

로마 시대 때 그랬잖아요. 로마 시에 큰 불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네로 황제는, 그것(거짓 소문)을 조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속은 거죠.

네로가 민란을 두려워해서, 결국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네로와 로마는,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존재가 누군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아무 일 없을 수 있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가 오면, 십자가의 때가 오면,

그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이에요.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유다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위기 앞에서

가장 난해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은 당연히 가룟유다입니다.

유다에 대한 기록은, 성경을 찾아보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백그라운드를 가졌는지 거의 잘 몰라요.

그런데 하여간 그의 반응을 보면, 굉장히 당황스러운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는 처음에 살펴봤던 대제사장들처럼

대놓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그런 안티가 아니었어요.

이 사건 이전까지는, 가장 측근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12사도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가장 충실하고 믿을 만한 제자로 보였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돈괘를 맡기셨죠.

그런데 십자가 위기를 앞두고 드러나는 그의 민낯, 신앙의 민낯은 충격적입니다.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넘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냐면 '차라리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더라' 14:21

▲과연 위기 앞에서 드러난 유다의 민낯의 본질은 뭐였을까요?

유다안에는 도대체 뭐가 있었을까요?

유다는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왜 따라다녔나요?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는 무엇인가요?

이렇게 유다 안에 있는 본질들을 한 번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는 또 다른 유다가 없는지

깊게 대면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중간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요한복음에 가면 그 여인은 '마리아'라고 기록합니다.

여인은,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깨뜨려서 예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습니다.

나드 한 옥합은 300데나리온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

오늘날로 치면 3~4천만원 되는,

그 한 번의 이벤트를 위해서 깨뜨리기에는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는 유다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을 봐도 그렇고, 요한 복음을 봐도 그렇고, 누가복음을 봐도 그렇고

본문 마가복음을 봐도 그렇고, 이것이 항상 백투백(연속)으로 기록돼 있어요.

여자가 향유를 깨고, 유다가 화를 내고,

예수님께서 '아니야, 유다야 그가 좋은 일 한 거야' 하셨는데,

유다는 바로 나가서 제사장을 만나고 팔아 넘기고...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복음서를 보든지 간에 이것이 붙어서 나와요.

그러니까 이 마리아의 옥합과 유다의 배신 기록이 붙어 나온다는 거예요.

그전부터 이상한 낌새는 있었을 거에요.

그전부터 예수님한테 온전히 동의가 안 되고

'저거 뭐지?' 이해가 안 되고.. 이런 게 있었겠지만

결정적으로 '아, 예수 이 사람은 진짜 아니다' 이렇게 유다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향유 옥합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4:4~5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요한복음은 화를 낸 어떤 사람이 '유다'라고 기록합니다. 요12:3

▲그렇다면 유다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건이 못마땅했을까요?

이유를 몇 가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못마땅했던 이유는, 효율적이지 않아 보였던 거예요.

유다는 여러분, 계산에 굉장히 능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돈괘를 맡았잖아요.

돈괘를 맡았다.고 하는 건, 아주 현실적이고 계산에 능했던 사람이라는 거죠.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효율적인 유다가 봤을 때, 이게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거에요.

'아니, 그 비싼 향유를 깨뜨려서 예수께 붙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한 번의 이벤트를 짜내낸다고 해서, 나오는 아웃풋이 뭐야?'

'차라리 팔아서 그 3백 데나리온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게 낫지...'

유다가 봤을 때, 지금 이 여인이 했던 행동, 이 여인의 선택은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아무 의미 없는 낭비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이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5

그런데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다의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아, 이분은 비효율적인 분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는 전혀 마음이 없는 사람이구나..

메시아라면 당연히 이 민족을 구원해야 되는데..

메시아라면 당연히 구제하고 선행하고 인권과 평등을 위해 애쓰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 될 텐데..'

그래서 유다의 마음이 흔들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유다의 항변에서

여자의 헌신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의미는 도대체 뭘까요?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유다에게 의미 있는 신앙은,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고, 소외된 자들이 도움을 받고,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인권과 공의와 자주와 독립과...

그래서 세상을 좀 더 공의롭고 아름답고 살만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가 있는 일,

그게 유다가 생각했던 '의미'고,

그게 유다가 예수를 따라갔을 때 기대했던 '구원'의 의미였던 거죠.

자, 이런 의미에서 이 여인이 했던 광적인 신앙 행위,

이건 진짜 광적인 거로 보이는 거에요.

그저 자기만족적인 소모적 종교행위로 보였던 거죠.

그래서 못마땅해서 여자를 꾸짖은 거예요. :5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유다가 돈 욕심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의 깊은 곳에 있었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그에게 예수를 따르는 것이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공의와 인권이 존중되고

그런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용어로 '사회복음 social-gospel'

여러분, 이것이 틀렸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좀 다르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마리아가 잘 했다고 두둔하시는 겁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

더 나아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9

복음의 본질이 그 안에 있다는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유다의 마음이 더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사람 Jesus 의 정체가 뭐지?'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합리적인 유다에게

예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존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유다 자기의 신념과 맞지 않는 거예요.

◑3. 그런데 세 번째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리아,

향유를 부은 여인이에요. 유다와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거예요.

아니, 그전에는 그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어느 날부터 '나는 십자가에서 죽을 거다' 이 말씀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 얘기를 모든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아무도 걱정하거나 아무도 '어떡하지?' 이러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참 이상해요.

그런데 이 여인만은 그 소리를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그녀의 목적이었거든요.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더 나은 세상, 가난한 자들이 살만해지는 세상..

마리아는 그런 거 잘 몰라요.

제자들은 그런 마음도 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진짜 왕이 되시면 누가 좌편, 우편에 앉게 될까?'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것도 관심 없었어요.

오로지 마리아에게 관심 있는 건, 예수님 그 자체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죽는다는 거예요.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마리아는 아무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차이였어요.

이것이 마리아와 변화 받기 전 제자들의 차이였어요.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마리아가 원하는 전부였습니다. 그것뿐이었어요, 끝!

그런데 그 존재가 지금 죽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염려가 됩니다. 걱정이 됩니다. 잠도 오지 않습니다.

계속 눈물이 납니다. '아이고, 이거 어떻게 하지? 죽으신다는데 어떻게 하지?'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요? 예지를 받았던 것일까요?)

이상하게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안 가져요.

아무도 준비하는 사람도 없어요.

아마 이 마리아가 향유를 들고 나오기 전에, 며칠을 못 자지 않았겠어요?

그게 자기 전 재산인데, 그걸 깰 정도면,

굉장히 고민도 많이 하고, 끙끙 앓고, 잠도 못 자고 그랬을 거예요.

'아, 유월절에 돌아가시는구나'

시간이 다 된 거에요. 이제 1~2일 전입니다.

말릴 수도 없는 것 같고, 막을 수도 없는 것 같고..

시간은 다가오고 '내가 뭘 해야 되지? 뭘 해 드릴 수 있지?'

'죽으신다는데, 이제 이 땅을 떠나신다는데..

떠나시기 전에 뭐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을까?'

'맞아, 내게 제일 소중한 거, 내가 제일 아껴왔던 거, 그거를 드리자'

그래서 정성껏 모았던 향유를 들고 나가서, 옥합을 깨고, 그 머리에 붓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붓습니다.

▲여러분, 유대인 여인들에게 '향유'라는 것은 결혼 준비금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입이 조금씩 생기면

조금씩 조금씩 향유를 사서 모았다가, 결혼할 때 쓰는 거예요.

그런데 300 데나리온 가치를 모았다는 거 보면, 평생 모은 거에요.

그것을 깨서 예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게 그녀가, 죽으시려는, 세상을 떠나시려는 예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입니까?

정말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통해서, 이루거나 얻고 싶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입니까?

여러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여러분의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정말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는 그것이 여러분의 복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또는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될?

꼭 기복신앙을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가룟유다도 기복신앙은 아니었어요. 사회복음주의자 였죠.

▲우리가 구원 또는 복음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럼 '인격적 관계'란 무슨 뜻일까요.?

그 관계 혹은 그 존재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관계를 얘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가족과 또는 배우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죠.

그 관계 자체가 최종적인 골 goal 이라는 거에요.

그 관계를 통해서 또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비즈니스 관계는 다릅니다.

그 사람 존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죠.

그냥 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얻고자 하는 어떤 게 있는 거죠.

그건 비인격적인 관계라는 거예요.

가룟유다는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거에요.

유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과 어떤 유토피아를 이루는 수단으로

예수를 생각했던 것뿐이고,

그래서 그 수단인 예수가 자기의 신념을 이루어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자

혹은 당시 종교권력이 예수를 잡아죽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냥 그를 팔아버렸어요.

이왕 그럴 바에야 자기 개인적 잇속이나 챙기려 했던 거죠.

유다가 예수를 통해 기대했던 그의 신념이나 생각이

꼭 악하고 잘못됐고.. 뭐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저 그가 예수와 인격적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유다가 소망했던 것들이 그렇게 나쁜 게 아니었어요.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죠.

가난한 자들 돕자는 건데 뭐가 나빠요?

그게 예수님의 가르침하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저 유다가 예수와 인격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거죠.

포인트는 바로 이거예요.

그런데 유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제자들도,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예수 자체보다도, 더 큰 관심이 있었어요. *출세 등

그런 관계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죠.

'인격적 관계'는 뭐냐 하면

그 존재 자체하고, 다른 것을 비교할 수 없는 거에요.

그 존재 자체가 가장 크고 중요한 거에요.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를 따르는 것, 마리아에게 예수를 믿는 것은

무언가 자기 소원,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어요.

마리아에게 예수는 그냥 목적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와 이런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리아에게만 '예수께서 죽으시겠다' 하는 말씀이 들리는 거예요.

잘 기억하세요. 여러분,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요.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요.

분명히 예수께서 모든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말씀하셨거든요.

'나는 곧 죽을 거야, 십자가에 달릴 거야, 사흘 후에 부활할 거야'

모든 제자들한테 아주 공식적으로 전부 다 얘기했는데

왜 마리아만 그 말씀을 기억하고 반응했는가요?

마리아만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가 있었던 거에요.

기억하세요. 오늘날도 저와 여러분이 언제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되는가요?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을 때.. 듣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좋은 일에 속지 말아야 돼요.

결국 유다.도 '좋은 일, 선한 일'에 속은 거거든요.

이 '좋은 일, 선한 일'이 예수 자체를 대체해 버렸어요.

예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대체해 버렸어요.

이 인격적인 관계가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해서 울고,

그 은혜 때문에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예수님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좋아지고...

예수님만 생각해도 '야, 그분이 나는 너무 좋아!'

오늘날 기독교계 일각에서 보면,

예수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율법적 의무로 대체하든지

-비전과 목표로 대체하든지

-선행과 구제와 공의와 인권으로 대체하든지

틀린 얘긴 아니에요. 다 좋은 것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이런 것들로 대체해 버리지 않았나요?

적어도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와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여러분은 맺고 계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는 데도, 아무도 슬퍼하지도 않고

아무도 걱정하지도 않았어요.

오로지 '예수님이 죽으시면,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이딴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염려하고 슬퍼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인격적인 관계는 '예수께서 죽는다' 그러시면 슬퍼하는 거예요.

걱정되고 마음이 아프고 잠이 안 오는 거에요.

인격적인 관계는

예수께서 기쁘다 그러시면, 나도 기쁘고 신나고 막 흥분되는 거예요.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는

내가 잘한 것이 있으면, 막 그분께 가서 보여드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알려드리고 싶은 거에요.

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격적인 관계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에요.

인격적인 관계는, 나의 제일 좋은 거를 드리고 싶어지죠.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나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에게 좋은 거 있으면 입혀주고 싶고, 먹여주고 싶고, 예쁜 거 주고 싶죠.

그게 인격적인 관계인 거에요.

그리고 이 인격적인 관계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라는 거예요.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해요? 결국 신앙의 핵심은 딱 두 개라는 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에요. 마22:37~39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며

이웃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라는 거에요.

그 존재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이고,

그래서 그 존재가 아프다 그러면.. 나도 막 아픈 것 같고

그 존재가 죽는다 그러면.. 나도 걱정되고, 잠도 못 자고

그 존재가 정말 기쁘다 그러면.. 나도 막 기쁘고

이게 여러분, 인격적인 관계예요.

예수를 팔아서, 예수를 수단 삼아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

그게 가룟유다가 한 일이죠!

▲'인격적 관계'에는 몇 가지 특징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인격적 관계는

그 사랑의 대상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낭비와 소모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 배우자 또는 자녀가 불치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너무 늦어서 가능성 제로 라고 합니다.

'지금 이 병 걸려서 살아난 사람은 100만 명 중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아시겠어요?

효율성을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능성 제로니까 그냥 편안히 죽도록 냅둬야 되는구나' 이렇게 하시나요?

아니면 '가능성 제로'라고 아무리 과학이 얘기를 해도

집 팔고, 땅 팔고, 적금 깨고 해서라도,

그래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지 않습니까?

그게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게 제3자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여요...

왜 마리아가 그 쓸데없어 보이는 옥합을 깼냐고요? 사랑하니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거예요.

낭비처럼 보였고, 소모적으로 보였을 거예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 잘 보십시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신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독교는 뭔지 아십니까?

사회에서 선한 일을 하고, 구제도 좀 많이 하고 그런 것으로만 생각하는 거죠.

전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2) 두 번째로, 인격적 관계는 합리성,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참 놀랍게도 예수께서, 마리아의 의미없어 보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행하였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6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생각하면.. 유다의 주장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인격적인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 그 마음을 받으신 거잖아요.

'아, 얘가 이렇게 나를 생각하는구나.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서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구나'

예수께서 '좋은 일'이라고 하신 것은

향유를 사용해서 얻는 효율성이 아니었어요.

향유를 드린 마리아의 마음, 예수께 드린 그 마음이었죠.

여러분, 정말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정말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께서 1차적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뭐냐면

예수께서 죽는다.. 그러시면 우리가 슬퍼하는 거에요.

예수께서 힘들다.. 그러시면 나도 힘들어하는 거에요.

예수께서 기쁘다.. 그러시면 나도 기쁘고 즐거워하는 거에요.

정말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다는 말에.. 제자들이 슬퍼하는 거에요.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말에.. 제자들이 잠 못 이루는 것이고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말에.. 제자가 아끼고 아끼었던 형유를 깨뜨려서

그 발에 붙는 거에요.

여러분 오늘날 현대 기독교 안에, 저와 여러분 안에,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크리스천들은 많지만

정말 예수님 앞에 눈물로 향유을 깨뜨려 그 발에 붙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정말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행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마음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잖아요.

정말 예수께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셨다면.. 십자가 안 지셨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효율적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이셨어요.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에

가능성 제로라고 해도

집 팔고 논 팔고 다 팔아서 그에게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랑으로

예수님 움직이신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의 예수는 어떤 예수십니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 본질이 정말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향유옥합을 깨뜨리는 본문을 볼 때마다

제가 처음에 목회 시작할 때 생각이 나요.

왜냐하면 그때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제게 도전을 하셨던 거든요.

제가 미국에서 7년인가 걸려서 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은혜를 받고 소명을 느껴서 목회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저를 말리고 반대하셨습니다. 정말이에요.

그중에 목사님들도 많이 계셨는데

그때 한 목사님이 저를 불러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야야, 너는 왜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냐? 왜 그렇게 낭비하면서 살려고 그러냐?

네가 받은 학위가 어떤 학위인 줄 아냐?' UC Berkeley Ph.D.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건데, 좀 효율적으로 생각해라.. 그런 뜻이었죠.

'그 학위 그냥 두는 게 아깝지 않냐?

목사는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그런데 네가 받은 학위는 아주 소수의 사람 밖에 없잖아?

그걸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지 않겠냐?'

대학에 가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네가 그걸로 영광 돌릴 수 있지 않겠냐? .. 라는 뜻이었죠.

물론 저를 위에서 해 주신 말씀이에요.

그렇지만 제 안에는 전혀 다른 프레임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효율성? 효과적?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제 안에 돌아갔던 생각은 뭐냐 하면,

제일 좋은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싶었던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드려서 예수님을 섬기고 싶었던 거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물론 예수님께서 저를 그 길로 초청하시고 부르셨지만

초청하시고 부르실 때

내가 가진 제일 좋은 것을 예수님께 드려서 섬기고 싶었고

최고의 것을 예수님께 드려서 섬기고 싶었고... 그거 말고 없었어요.

저에게 예수를 따르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선행을 많이 하거나, 구제를 많이 하는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효율적이고 고귀한 삶을 사는 것하고도 결이 다릅니다.

인류를 위해서 인류애적인 삶을 살고, 선행과 구제... 그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는 좀 비효율적이고 낭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냥 예수님께 좋은 걸 드리고 싶은 거예요. 마리아처럼!

That's it! 제일 값진 걸 드리고 싶고, 제일 좋은 걸 드리고 싶어요.

왜요? 너무 감사하니까!

예수께서 나에게 제일 좋은 걸 주셨잖아요. 십자가에서 구원하셨잖아요.

그 은혜가 제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격과 울컥함이 있기 때문에 그냥 드리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거지

머리로 움직이고 계산하는 거 아닙니다.

머리로 계산해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옵티멀 솔루션이 뭔가?

그건 비즈니스지, 인격적 관계가 아니에요.

인격적 관계는 계산하지 않는 거에요.

옵티멀 솔루션(최적의 해결책).. 이런 거 안 찾아요.

신앙은 여러분, 울컥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효율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 은혜... 그거에 대한 울컥함이

진짜 내 안에 있는 신앙의 본질이지

효율성과 머리에서 나오는 계산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멘?

여러분 안에는 그 울컥함이 있으십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얘기를 들을 때

여러분 뜨거운 것이 이렇게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가룟유다 안에는

좋은 비전이 있었을지 몰라요.

건전한 신앙관이 있었을지 몰라요.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It's not enough!

그건 그냥 결과적으로 나오는 일들이지

본질은 속에서 올라오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 그 사랑, 그 울컥함'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마리아의 마음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하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예수께서 원하셨던 구원, 예수께서 원하셨던 복음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