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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비유

LNCK 2023. 7. 24. 14:07

 

2014-08-03 "씨 뿌리는 사람 비유" 임영수 목사 - YouTube

*12:55 초부터 녹취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막4:1~12        2014.08.03.

 

◑도입 주1)

 

◑본론

 

본문 비유에 네 종류의 토양이 있습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10월 말경이나 11월 초순에 첫 비가 내리는데

그때 농부들이 보리와 밀을 심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때를 생각하시면서

그 농사 환경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파종 과정은, 오늘날 우리의 파종 과정과는 다릅니다.

 

우리 모새골에도 농장이 있습니다.

펜스를 두르고 한 300평 되는 땅을 정원처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관계 시설, 배수 시설,

거기에 들어오는 분들이 함께 농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작은, 봄이 오면 먼저 전부 갈아엎어서 돌을 골라냅니다.

또 잡초뿌리, 가시나무 뿌리와 같은

식물이 자랄 때 방해 요인이 되는 것들을 다 골라냅니다.

그리고 딱딱한 씨가 자랄 수 없는 길가와 땅도 다 일구어 부드럽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씨를 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를 뿌린 다음에 씨의 손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씨를 뿌렸는데 약 3/4의 씨의 손실이 있다고..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밭을 일구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냥 파종 시기가 되면, 그냥 실을 뿌립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 후에 밭을 갈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 과정에서 씨의 3/4이, 손실이 일어나게 됩니다.

 

 

1) 먼저 씨가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길'은 4월 경에 보리와 밀을 추수한 다음부터

10월까지 밭을 그냥 묶혀두는데

그 묵혀두는 사이에 사람들이 밭위로 걸어다니면서 길이 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밭에 경계가 있는데, 그 경계에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가 바로 거기 '길' 위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나 발에 밟히거나, 새들이 와서 쪼아먹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을,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씨앗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2) '돌짝밭'은 밭의 겉은 흙으로 덮여있지만

그 아래에는 (석회암) 바위가 깔려있는 땅입니다.

그곳에 씨를 뿌리게 되면, 흙이 많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음으로 인해서

해가 뜨면 뿌리가 석회암 층에 막혀서, 뿌리내리지 못해서 말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돌짝밭은.. 흙이 있지만, 몇 센치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몇 센치를 파고 들어가면 밑에는 석회암층 바위가 있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깨뜨려 물을 냈다고 하는, 그런 석회암층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을,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는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3) '가시밭'은, 땅 속에 잡초나 가시나무에 잔 뿌리들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가시나무들이 막 자라 있는데,

그 속에다 씨를 뿌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게 아닙니다.

즉, 마치 보자기 덮듯이 가시덤불이 그 위를 덮여 있다는게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길가, 돌짝밭, 가시밭이 다 똑같습니다.

겉모습으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다 흙입니다.

 

그런데 가시밭은, 흙 속에, 팔레스틴에 많이 분포되어있는 가시나무의

잔뿌리들이 거기에 남아있는데, 그것을 묘사한 겁니다.

(*모세도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는 모습을 보았죠. 그런 나무죠)

 

그런데 씨를 뿌린 다음에, 씨가 싹이 나서 자라는데,

그와 함께 그 가시나무의 잔뿌리들이 같이 자라나서

밀의 싹이 자라는 기운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시밭' 현상을,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들

이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데,

 

이것은 그 땅 자체가 씨를 잘 배양할 수 있도록

돌(바위)도, 식물의 잔뿌리, 잡초도 없는 그런 땅이란 말은 아니고

 

그런 세 가지 종류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잘 넘어선 것을 말합니다. 그 땅이 그 땅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좋은 땅', 저 사람은 '돌짝 밭' 이렇게 딱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상태에 따라서, 좋은 땅도 되었다가, 돌짝밭, 가시밭도 되었다가

이렇게 상태가 변하는 것이죠. 이게 물리적 땅이 아니라, 영적 땅이라서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시간부터

완전히 평화가 오고, 사업이 잘 되고, 승승장구하고 이러진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지만, 넘어야 될 의심의 강이 있고

깊이 빠질 수 밖에 없는 회의의 강도 있고

또 넘어야 할 들판도 있고

여러가지 앞에 부정적인 세 가지 요인들이 다 있습니다.

 

근데 그것을 넘어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다음에

그 자유의 맛, 그 감사의 맛, 희망의 맛, 기쁨의 맛,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그 삶의 내적인 동력을

조금씩 조금씩 경험을 해가면서, 즉 맛을 들여가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부르심을 놓지 않고,

그 부르심을 따라서 계속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지금 70 넘어선 나이입니다만, 지금도 이렇게 돌이켜보면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에도

돌이켜보면은 넘어야 할 산도 있었고, 깊은 회의의 늪도 있었고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그 내면의 쓴 뿌리와 같은 상처들도 있었고

외적인 고난도 있었고, 그리고 신앙을 자꾸 흔들어 대는 환경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제가 '블랙홀'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런 블랙홀에 삼킨바 되지 않고,

계속 그래도 묵상시간에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시고

또 묵상 시간에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또 새로운 빛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면서, 계속 이끌어 주셔서..

오늘까지 왔다고 제가 생각이 됩니다.

 

전혀 저는 돌짝밭도 경험 못했고, 가시떨기도 경험 못했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온실해서 자랐다.. 라고 그렇게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하나님 나라의 맛을 알기 시작하니까

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그 전체가 매우 크고, 깊고, 헤아릴 수 없는 건데

 

부분적인 맛을 보게 되면,

그 작은 부분적인 맛이

큰 덩어리 자체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기다림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습관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지옥 갈까봐 무서워서 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때는

그 맛이 너무 좋아서

그걸 상실했을 때 오는 허무와 무의미에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그걸 (죄를) 거절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계속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루어 가면서

계속 (죄의) 결별과 (의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가 되는 것들은 자꾸 놓게 되고, 버리게 되고,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 의해서 자꾸 선택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어지는데

'좋은 땅'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라는 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만약 제 경우를 본다면, 제가 앞으로 80이나 90세를 살고

세상을 마치게 된다면, 그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는 과정에서

실패하거나 신앙을 버리지를 않고 꾸준히 이 상태로 간다면

그때 내 인생을 마칠 때, 믿지 않았던 사람과는 삶의 질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목사였다.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갖고 있었다. 부자다'

그런 세상적인 것을 얘기를 하지 않고,

여기서 30배 60배라고 하는 말은 '내면적 신앙의 차이'를 말합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런 질적인 차이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타나 있는 네 종류의 밭들은,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에는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밭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길가, 가시떨기, 돌짝밭이나.. 겉포면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았는데

때가 되어서 농부가 일단 씨를 뿌린 후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건 길가였구나, 이건 가시떨기 뿌리들이 있는 땅이었구나,

이것은 돌짝밭이었구나..' 하는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유형의 밭이냐?' 하는 것은

씨와의 관계성 속에서 그것이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4가지 밭이 다 비슷해 보이지만

일단 씨가 뿌려지고 난 후에, 비로소 그 땅의 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그다지 심각한 구분이 생기지 않지만

씨가 뿌려진 후에는, 현저한 구분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밭들 가운데는, 아예 싹을 내지 못하는 땅도 있고 *길 가

싹을 내어도 곧 말라 죽게 되는 땅도 있고 *돌짝밭

어느 정도 자라기는 해도 결실에는 이르지 못하는 땅도 있습니다. *가시밭

 

이러한 땅들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내는 땅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씨앗'입니다.

 

그 전에는 표면적으로 다 같았지만

씨와 접촉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그러한 결과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인생에, 말씀과 접촉이 있을 때

표면적으로는 다 같아 보입니다마는

그러나 점점 현저한 구별이 생깁니다.

그 구별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양적인 차이가 아닌, 질적, 인격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해가는데, 뭔가 그 삶 자체의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현격한 차이를 가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렇게 신실한 사람'

'그렇게 자기를 초월해서 살아가는 저런 삶'

'그리고 사랑을 늘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

'어떤 인생의 블랙홀이라는 덫이 있지만, 그 덫에 빨려들지 않고

그것을 오버패스해가면서 늘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그 삶'

 

그리고 정말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그 자유함을

늘 내적으로 누리고 사는 삶... 우리가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좋은 땅

흔하진 않지만요...

 

그때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저렇게 우리와 다른 현격한 차이의 삶을, 저 분은 만들어내는가?'

 

돈이냐, 사회적 지위냐?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씨앗)이 그렇게 했다고.. 백배의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본문이 말씀해줍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경제학과에 들어가서, 첫 시간에 재정학 시간인데

그 재정학 교수가 들어와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사회에 나가서 유일한 씨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유일한 씨를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한양행 회사로 직접 찾아가서 좀 둘러보고 그랬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돈을 좀 모았는데

그 돈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면서

그 돈을 다 갖고 와서 유한양행 회사를 세웠어요.

 

그리고 또 유한공고도 세우고, 사회 복지도 좀 하고

그렇게 해서 상당히 모범적으로 했습니다.

 

그때 유한양행의 직원이 약 100명이라고 가정하면

주식을 거의 사원들 80%에게 다 골고루 나눠줬어요.

 

본래는 기업하는 분들이, 주식의 절반 이상은 자기가 소유하고

쥐꼬리만큼 나눠주잖아요. 그래서 이윤을 극대화해죠.

 

그 분은 자기 주식을 다 나눠줘서, 해가 바뀔 때마다 그 이윤이

거의 다 회사사원 주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세무신고가 하도 거짓말이 많았는데

제가 세무계통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유한양행에서는 서면대로 신고하는 걸, 세무서에서 액면대로 믿어준대요.

 

그리고 그분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일간신문 양면에 크게 기사가 났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이 미국에 있는데, 대학을 졸업한 아들입니다.

자기는 그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것으로 부모 책임을 다했다고 하면서

자기 남은 재산을 전부 사회에 다 환원했습니다.

 

그 당시에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축출되면서

이멜다 부인의 사치가 신문에 많이 나왔는데

얼마나 사치했는지 구두가 200켤레라고 하는 얘기가 신문에 공공연하게 났습니다.

(원래는 3천켤레인데, 2백켤레만 박물관에 전시)

 

그런데 그것과 대비시킨 겁니다. '유일한 씨는 구두가 4켤레고

사계절에 한 번씩 갈아입을 수 있는 양복 몇 벌이 전부다..' 그렇게 신문에 났어요.

 

그분이 크리스천입니다. 아주 훌륭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볼 때

'무엇이 똑같이 기업을 하지만, 이렇게 질적인 차이를 나게 했는가?'

그것은 '말씀'이 그런 질적인 차이를 내게 한 겁니다.

 

평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30배, 60배, 100배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본문은 어떤 사업적인 이윤을 내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발을 들여 놓은 다음에 꾸준하게

그 나라를 향해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면서

살아가는 그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서 본문의 비유는, 그 질적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속에 가만히 파묻혀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실패하는 것 같지만

 

'구별된 좋은 밭들'이라는 것은

말씀을 들은 다음에 흘러보내지 않고

듣고, 음미하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시켜가고...

 

그리고 어떤 고난과 회의와 절망과 그런 것들이 있더라도

그런 것이 오히려 신앙을 더 견고하게, 향상하게 만드는 걸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바로 '좋은 밭'입니다.

 

저도 지금 돌이켜 보면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70평생을 살아오면서

무수히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저의 삶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씨앗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많이 무익한 것이 됐다는 걸.. 제가 시인합니다.

 

그런데 청년기에 들어와서 어떤 동기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삶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하고

신앙은 그분과 함께 이 세상에서 평생 함께하는...

영어로 얘기하면 콜라보레이션 (협업)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그분의 인도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해가는 그런 훈련을 해가면서

점점 그 씨앗이.. 그래도 싹이 나기 시작하고,

줄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오늘 이 시점까지 왔습니다.

 

그 말씀의 씨앗은 무수히 많이 떨어지는데... 거의 다 죽어버립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나무 밭에 떨어진 씨앗들...

때문에,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발을 들여놨지만

그 후에 또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는데.. 거의 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탄이 와서 씨앗을 쪼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삶의 어떤 복잡한 문제들에 사로잡힐 수 있고

-자기 생에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그 상처의 쓴뿌리가 신앙을 계속

자라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저도 돌이켜보면, 그 말씀의 씨앗이 제 삶 속에 떨어지고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내면의 깊은 쓴 뿌리의 상처가 점점 치유되기 시작하고

 

그리고 늘 열등감, 비교의식 속에서 살던 데서 빠져나와서

올바른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고,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도 또 넘어야 될 산이 있고...

깊은 회의와 절망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때마다 또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줘요.

 

▲한국에서 오늘날 신앙을 갖고 사는데 상당히 많은 도전이 있습니다.

신앙을 무익화, 무의미화 시키는 그런 일들이 많고

 

또 기독교 복음의 종주국인 유럽이나 북미주에 와보면

그 나름대로 잘 살기는 하는데, 이 상황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갖게 만듭니다.

 

'결국은 하나님 나라가, 제가 독일에 가서 느낀 건데,

이렇게 이런 모양으로 쇠퇴해 버리고

사회의 한 구석의 기능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우리가 예수 믿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종주국이 막 풍부하고 잘 돼야 힘이 나잖아요?

'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된다. 저런 사회 공동체의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겠는데...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는 본질적으로 '내면적 신앙의 성장' 입니다.

 

씨를 하나 심으면, 싹이 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잎이 생기고, 줄기가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그렇게 성숙, 성장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 내면, 내 신앙이 이렇게 성숙, 성장해 가고 있는가요?

 

그렇지만은 주님은 언제나, 항상 하나님 나라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서구 기독교의 쇠퇴 볼 때 생기는) 회의를 넘어설 수 있는 빛을 주시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시고

그것을 넘어서게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제가 30대, 40대 때 설교를 할 때보다

지금은 이렇게 노숙해져서 설교를 할 때,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면

 

회의의 산을 넘었고, 절망의 늪을 지나왔고,

의문의 산을 넘어선 신앙,

연단된 신앙을 갖고 있다고... 제가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내 (노년의) 설교는 좀 무게가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45~60세 사이의 목회자는, 나이가 그런 때라서 그런지

자꾸 '외적 성장'이란 주제로 설교하기가 쉽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꾸 연단이 돼야 본질에 더 가까워지고

또 한 번 걸러지고, 또 한 번 걸러지면서

주님은 자꾸 그런 길로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기독교인의 '소명'이라는 것은 직업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소명을 직업과 일치시키는데, 직업이 일차적 소명이 아니에요.

 

언제나 하나님 나라로 발을 들여놓은 우리들에게

계속 하나님이 내면의 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의 부름, 희망의 부름으로 우리를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아마 이 부름이 이 세상 여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이 (하나님과 교제로의 부름, 하나님 형상으로 살라는) 부름이 계속이 돼요.

저와 여러분들을 모두 다 이 하나님 나라의 자리에 초대한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 여러분들이 발을 들여 놓은 겁니다.

 

그러나 날마다 깊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그 발을 들여 놓은 다음에, 계속해서 답보(정지)상태에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고도,

그 나라의 맛을 보질 못하고

계속 무의미성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이 나라에서 발을 빼면, 하는 것마다 다 안 되고..

뭐 자녀들도 잘 안 되고.. 그럴까봐 무서워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앙의 여정의 시작은,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시작했는데

도중에 그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이 계신데, 그 장로님과 한 번 식사하며 교제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서리집사, 안수집사, 장로로 지내오면서

교회를 몇 군데 옮겼습니다만, 교회에서 받는 전도 훈련은 다 수료했습니다.

무슨 전도법, 전도 폭발.. 그래가지고 자기가 전도훈련 과정은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되고 난 다음에, 다른 교인들과 함께 전도를 나갈 때

자기는 마음이 참 무거워진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믿으면 천당..' 그런 얘기를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는데,

자기는 전도지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어떤 질문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연인으로 잘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거 또 한 사람 교회를 끌어들였다가

혹시 나처럼 고민 많은 사람 만들면 어떻게 하나?

 

아마 장로님은 교회를 몇 군데 옮기면서, 싸움을 많이 경험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도했다가, 괜히 이 사람을 싸움쟁이로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전도에 자신이 없대요... 괜히 나름 잘 살고 있는 사람을...

 

그런데 자기에게 상당한 변화가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 삶에 변화가 왔는데, 지금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제게는 더 명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발을 들여 넣고, 꾸준히 그 나라 가운데서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자유함, 그 기쁨, 그리고 생의 역경을 주님과 함께 풀어가는 그 스릴,

물론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돈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 얘기가

'이제부터 복음 들고, 가장 가까운 내 친구부터 찾아갑니다.

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보게, 이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진짜가 아니네,

참 진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있네!

 

나는 그걸 소유했네, 아 그걸 소유하고 나니까

이 현실세계가 전부 이전과 다르게 해석이 되네!

그리고 그 나라를 소유하고 나서, 이 현실세계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안목이 트이기 시작하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점점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삶의 궤도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네!'

 

아, 장로님이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야, 이분에게 구원이 임했구나,

이 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싹 트기 시작하는구나!'

그렇게 제가 감동적으로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근데 그 나라에 발을 들여놨다고 전제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오신 분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그 과정에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또 앞으로 그 나라에 초대된 우리가

어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될 것인지

그런 질문은 한 번씩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의 '씨앗은 예수님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궤도 수정을 해서

우리는 꾸준히 그 나라로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굉장히 비싼 겁니다. 아주 고귀한 겁니다.

이런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이것이 자라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무의미해집니다.

이것이 그 속에서 자꾸 자라야 됩니다.

이런 축복된 생으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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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제가 성장 과정 때 우리 한국교회는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그때 그 전도의 표어가 이랬습니다. '예수 믿고 잘 살다가 천당 갑시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 더 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황불이 활발 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지옥에 갑니다' 그랬어요.

 

그 전도 구호를 지금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욕구 충족에 대한 극대화된 하나의 구호였고,

또 하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다고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전도를 받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나라의 그 참맛, 그 참 본질적인 것을 접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들어오기보다는, 공포감 또는

이 세상에 살 때도 (부자로) 잘 살고, 또 내 세상에서도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해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의 시작이, 거의 다 자기 자신의 하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동기로 기독교에 입문하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와서, 자꾸 신앙적으로 양육을 받아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바르게 듣고 깨닫고 돌이키고 하면서

정말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똑바로 나가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사실 그 욕구를 가지고 들어와서 예수 믿어봤지만, 그대로 잘 안되니까)

그래서 실패하고 교회 밖으로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신약성경 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한 40여 가지가 넘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 내용의 대부분이 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서도 계속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사람들을 초대를 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초대의 말씀을, 협박을 한다든지

이 현실에서 어떤 인간적인 욕구를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그것을 전하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면으로 전(도)했습니다.

 

이 비유를 읽어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한 내용인데

그 하나님 나라가, 비유로 설명있는 하나님 나라가

미술로 얘기하면, 구상화가 아니고 추상화에 가깝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 현실성,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떤 깊은 연관이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나라로 너희들을 초대한다. 들어오라'

본문을 읽어 보면, 또 다른 비유를 읽어 보면

거의 다 협박이 아니고, 초대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현재성)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나라에 사람들이 다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해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 길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다 이해하더라도

여전히 귀와 눈이 닫혀져 있을 때는

그 나라와 멀어지게 되고, 그 나라 밖에 있게 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비율을 통해서, 그 나라의 초대에 응하고

그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을 맛보면서

또 어려운 그런 과정들을 겪어가면서 자꾸 성장해 갑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두 부류의 삶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관념적이라기 보다는 체험적이기 때문에

체험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부류와, 그러한 부류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전할 때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벌써 이미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분적으로 아주 지극히 부분적인 하나님 나라의 맛을 느껴가면서

또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 맛과 비교하면서 기다리는..

그런 부류에 속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귀도 열지 않고, 마음도 열지 않아서

전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비유에 그러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가서, 계속 그 맛을 느끼면서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

그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도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은 의미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똑같은 상황, 똑같은 시간의 장소에서 그 비유를 듣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일률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다가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너희들에게는 이 비유가 쉽게 이해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 밖의 외인들에게는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질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질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인들,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가져오는 깨달음, 돌이킴, 또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미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있었고, 돌이킴이 있었고, 회개와 죄사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실 때, 그 비유의 내용의 대부분에는

'말씀하심' 과 '들음'이라는 두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본문은, '저희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해서 4:2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비유를 마치고 있습니다. :9

 

여기서 '말씀하심'과 '들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됩니다.

먼저 들어야 됩니다. 바로 들어야 됩니다.

엉터리로 들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다음에 '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눈까지 열어서 듣는 가운데서

보고 깨닫고 변화되는 반응이 일어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