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는 못된 습관 가톨릭 묵상글 토대로 정리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는 세상 *비슷한게 양비론兩非論 이란 말이 있죠
요즘 너무나 덥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찡그려지며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너무 강한 햇볕이 싫다...”
그 순간에 저는 깜짝 놀랐다.
사실 지난 장마 때,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비가 싫다...”
해가 나와도 싫고, 비가 내려도 싫다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실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비단 날씨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싫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여름(봄, 가을, 겨울)이 싫어!”
“한국이 싫어!” (중국, 일본이 싫어!)
“가족이 싫어!”
“직장이 싫어!”
“그 인간이 싫어!”
“그 식당이 싫어!”
“그 도시가 싫어!”
▲예수님이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천한 사람이라서 싫다)
더 심하게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아비가 불분명한 자식이라서 싫다, 막6:3)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무조건 ‘싫다’라고 쉽게 말하는 인간의 나쁜 습관 때문이었을런지도...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님이 싫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싫다고 거부반응 일으키는 무리들이 생겼다.
이번에는 너무 똑똑해서 싫다는 것이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파마머리를 보면 볶아서 싫고, 생머리를 보면 단순해서 싫다.
신문을 읽어도, (과거에도)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이러면 이래서 싫고, 저러면 저래서 싫었다.
잘했다는 평가는 가물에 콩 나듯... 거의 없었다.
그래서 비판만 난무하는 것이 우리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
나도 너무 쉽게 말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이래서 싫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저래서 싫고...”
국내 목사님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이유로 죄다 싫어한다.
내가 만약 2천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예수님도 싫다고 배척했을 ‘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창 1:18
그것도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창1:31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싫다!” 라는 말 대신에 “좋다!” 라는 말만 해 보자.
정말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글을 거의 마무리하며, 컴퓨터를 덮었을 때의 일입니다.
오늘 장거리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앞쪽에 젊은 엄마가 안은 아이가 계속 칭얼거렸습니다.
아마 엄마가 자기를 안거나 업어서 왔다 갔다 해주길 바라는 모양이었죠.
(대중교통 특성상, 움직이는 차 안에서 그게 힘들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만2세로 보임) 보챔이 계속되자
제 속에서 슬슬 쓴소리가 올라왔습니다.
‘저 아이가 한국 애라서 저렇지.. 외국 애라면 안 저럴 텐데..’
(편견일지 모르나, 서구 애들은 어려도 공공질서를 잘 지킵니다)
문제는 방금 ‘싫다’ 하면 안 되고, ‘좋다’ 해야 된다는 글을 묵상해 놓고선
제가 돌아서자마자 즉시
‘저 보채는 아이가 싫다’ .. 하고 판단하더라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
‘싫다’고 얘기하는 못된 습관이, 평생 그렇게 제게 길들여졌나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TV를 보면서도 ‘아무개 탤런트는 이래서 싫다’
‘아무개 개그맨은 저래서 싫다’, ‘아무개 방송사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이렇게 ‘싫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평생을 살아왔으니...
하루 아침에 그게 교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제 제 교만을 알았으니,
누구 말대로 ‘침묵 훈련’이라도 해서,
‘싫다’가 아니라, ‘좋다’고 얘기하는 습관을 가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제 스스로 머슥해서 인지, 차에서 내리는 시간에
우연히 그 ‘히어로’에게
(제가 아까 보챌 때, 그 아이를 ‘히어로’라고 아내에게 칭했죠. 비꼰 거죠.)
미안함을 사과하는 의미로, 한 번 환하게 웃어주고,
또 손도 흔들어 주었습니다... (얘야, 아까는 마음속이었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그렇게 아이는 아무 영문도 모른채, 엄마 가슴에 안겨 자기 길을 갔습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습관인 장로님
이상춘 장로님이야말로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증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에 대하여 말씀드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분은 평생 교도소에서 사역하시고, 은퇴 후에 재소자들을 위하여 사셨고,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도 소망교도소 건립을 위하여, 남은 생애를 다 사신 분입니다.
그는 교도관으로서, 평생 죄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아는 사람들은 다 이 장로님을 “작은 예수”라고 부릅니다.
“(대통령이 그 자리에 없을 때는) 서로 속상하면, 대통령도 욕한다는데
‘그 사람 보기 싫다. 야단치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상춘 장로에게서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장로가 연로해서 간암에 걸린 후에도 이 장로는 얼굴이 항상 밝아서
그를 만나는 성도들은 가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 분이 진짜 암 환자가 맞나?’
이 장로는 항상 웃었습니다. 언제나 여유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어느 날 메릴 스트립이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갑니다.
아이와 남편을 버려두고. 남편은 갑자기 혼자 아이를 키워야 되는 입장에 직면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허둥지둥하지만,
어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익숙해집니다.
같이 아침식사를 만들기도 하고,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갔던 아내가 불쑥 나타나, 이혼을 요구하면서 양육권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사이에 양육권을 둘러싼 법정소송이 시작됩니다.
이 소송이 남편에게 점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변호사가, 아이의 아빠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아이의 양육권을 원하느냐? 집에 가서 종이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장점을 써 보고, 다른 쪽에는 단점을 써 봐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고 당신이 정말로 키워야 될 이유가 분명해 지면,
이 소송을 계속하자.’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운 후에 변호사의 말대로
A4 용지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장점을, 한쪽에는 단점을 쓰기 시작하는데
장점은 별로 생각나는 게 없고, 단점만 떠오릅니다.
직장 생활하는데 제약을 받고, 사생활에 제약을 받고,
아이 봐주는 사람을 구하느라고 늘 신경 써야 되고 등등.
그런데 이 아버지가 갑자기 종이를 내려놓고
아이 방에 가서, 잠자는 아이를 꼭 껴안고 이 말을 합니다.
‘얘야, 아빠는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
계산은 끝난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입술에는 ‘좋다, 좋았더라’가 안 나온다면,
사실은 근본 바탕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을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 계명은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한 여름의 땡볕을 보고도 ‘좋았더라’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된 이웃들도 덩달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 무더운 계절에는
좀 더 성숙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사랑이 더욱더 깊어지게 하소서!’
........................................
▲나름대로 다 좋다
「안산 동산고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이 고등학교 이사장이신 김인중 목사님이 쓰신 책이다.
김 목사님은 그는 학생들의 다양함을 파악했다.
그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성적인 학생은 생각이 진지해서 좋다. ( ↔쟤는 너무 내성적이라서 문제다)
사교적인 학생은 정직하고 과장이 없어서 좋다. ( ↔ 사교계의 여왕 납시네!)
소심한 학생은 실수가 없고 정확해서 좋다. ( ↔ 겁쟁이 녀석!)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의욕이 넘쳐서 좋다. ( ↔ 질투심때문에 망할 놈이다!)
말이 많은 학생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 ↔시끄러워서 질색이다)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겸손해서 좋다. ( ↔ 무슨 죄 지었보다)
직선적인 학생은 속정이 깊어서 좋다. ( ↔ 저 상처주는 인간이 싫다! )
이사장님의 생각에는 모든 학생이 다 좋아 보인다.
왜?
학생 각자의 중심의 선한 면을 보고 있으니까...
▲성격적 차이에서 오는 비판
인간은
-건설적 비판과, (not 악의적)
-이해, 관용의 양면성을
한 인격에 모두 가진다.
그런데 7:3식으로 비판이 더욱 발달된 사람은 ‘판단형’ 이고 judgemental
반대로 이해나 관용이 비판보다 더 발달한 사람은 ‘인식형’ perceived
이라 구분한다.
무조건 비판을 잘 하는 사람은...
반대 기재인 관용심을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고
무조건 관용(무조건 융통성 있는 사람)만 하는 사람은...
반대 기재인 비판심(법과 규칙대로 하는 것)을 더 보완해야 한다.
자기나 남에 대해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비판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비판일변도의 사회(사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관용과 사랑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