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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누구냐

LNCK 2023. 7. 26. 11:03

 

https://blog.naver.com/karamos/220975273395

 

◈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누구냐       계5장 1-14        2011.09.11.

 

계시록 4장은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5장에서는 요한은 새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보게 됩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시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원래 두루마리로 된 책은 한 면만 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겉에도 글이 있고,

‘인봉’도 원래는 보통 한, 두 개 하는 법인데,   *인봉:양촛물로 sealing 함

이 책은 일곱 개나 되어 있었다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본 요한은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성격적으로 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막3:17

‘성격이나 몸집이 강하다’뜻이지,

연약한 사람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강한 사람이며 울 사람이 아닙니다.

 

밧모 섬이라는 척박한 땅에 유배되어 있음에도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오직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영광을 돌리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밧모섬은 다닐 교회도 없습니다.

읽을 책이 있는 곳도 아니고, 교제를 나눌 성도도 없는 외로운 자리이지만

항상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4절을 보면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냥 운 것이 아닙니다. “크게” 울었습니다.

 

사실 자주 우는 사람이 울었다고 하면 “또 눈물샘 터졌구나.”하고 생각하겠지만,

평소에 눈물 없는 강인한 사람이 크게 울고 있다면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을 울게 한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밧모섬의 고독입니까?

아니면 부당한 재판의 억울함 때문입니까?

 

요한이 육신의 병이 있어서 그것을 한탄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책인데,

안팎으로 쓰였고,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이었습니다.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계 5:3-4)

 

아무도 일곱 인봉한 책의 인봉을 떼고, 책의 속 내용을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공자, 맹자, 마호메트 등 인류 역사에

기라성 같은 사람들 누구도 뗄 수 없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일곱 인봉을 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울고 또 울고, 우는 것입니다.

 

▲당시에 책은 보통은 한 면만 기록되어있는데, 양면으로 기록되었고,

한두 개의 봉인만 찍혀있어야 하는데

일곱 인봉이 찍혀있는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성경을 주석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이 인류역사를 운행하는 계획’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역사를 이렇게 운행하겠다, 교회를 이렇게 세우고 발전시키고,

인류 역사를 언제 끝내겠다는 역사 운행의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수행할 때에 인봉한 명령서를 받게 되고

그 명령서 인을 떼면 지휘관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명령서가 인봉되서 오는데 그것을 떼면 “0월 0일 0시에 000을 공격하라”고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즉 일곱 인봉한 책은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운행할 것이며, 어떻게 택한 백성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어갈 것이며, 교회가 핍박을 받는 중에 있으면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를 기록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봉한 책의 인봉이 떼어지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요한이 울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가요?

그것은 인봉이 떼어져야, 하나님의 계획이 집행되고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명령서 인봉되서 온 것인데 그것을 떼지 않으면

그 명령은 집행될 수가 없습니다. 집행하려면 인봉을 떼서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집행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 인봉이 떼어져야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성장할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이렇게 심판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는 보호함을 받을 것이며, 소아시아에서 핍박받고 있지만

유럽으로 거쳐서 미국으로 거쳐서 아시아까지 와서

대한민국에서 부흥을 일으킬 것이며,

이런 것들이 다 인봉이 떼어져야 집행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 인봉을 뗄 자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을 집행할 자가 없다는 이유로 통곡하고 통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장로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울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 가문에서 나온 구주, 유대 지파에서 나온 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인을 떼시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집행하신다는 겁니다.

어린 양이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눈을 들어서 보니까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으로 서있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이 어린 양이 일곱 눈이 있습니다. 눈이 한 개만 더 있어도 지혜로운데,

일곱 눈이 있다는 것은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뿔은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곱 뿔이 있다는 것은 완전한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지혜와 능력이 충만한 어린 양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양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죽임을 당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수난 당하신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에 못자국과 몸에 창자국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그 소식을 듣고 의심합니다.

“내가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고, 내 손가락을 그 손바닥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

 

그러자 다시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죽임 당한 흔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린 양이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며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책을 취하여 일곱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고 명령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자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구원을 집행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이 영혼들을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에게 저 택한 자들의 죄 값을 갚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 값을 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집행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만이 하나님의 일곱 인봉한 책을 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무의미하고 무질서한 시간의 연속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지금 역사 운행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좌절할 필요 없고, 밧모섬에 유배되었어도 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나타나자 천국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이 울던 것이 그치고 노래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천국이 온통 찬양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어린 양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일곱 인봉한 책을 취하고 뜯자

천국에 온통 찬양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찬양 할 이유가 있습니다.

계4장과 5장 모두 찬양이 나오는데 조금 다릅니다.

 

4장은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주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그런데 5장은 새 노래가 나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새 노래는 새로운 가사를 지었다는 겁니까?, 아니면 새로 작곡한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 송가를 부를 때에도 “새 노래로 부르자 랄라라.”하면서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 노래가 무엇입니까? 새 노래는 계시록 4장이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5장은 구원의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겁니다

 

즉 새 노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르는 구원의 노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택하신 백성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하는 구원의 사역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인종의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사역은 족속, 인종, 피부색, 언어, 정치 문화를 초월해서

택한 백성들은 모두 건져 내십니다.

 

1이 새 노래는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일곱 가지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함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일곱 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완전한’ 찬송을 돌리고 있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

 

보좌를 둘러싼 24장로와 네 생물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어마어마한 성가대를 만들어서

어린 양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계 5:11)

 

만만은 얼마입니까? 만 곱하기 만입니다. 천천은 천 곱하기 천입니다.

계산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수의 천사들이 다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가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는 셀그룹을 한다고 성가대를 없애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는 엄청난 수의 성가대가 있습니다.

그 엄청난 수의 성가대가 새 노래로 어린 양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 만만 천사만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자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계 5:13)

 

만물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온통 성가대원입니다.

다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새 노래가 생겼습니다. 어린 양이 인봉을 떼면서 새 노래가 생겼고,

 

그 새 노래는 어린 양의 피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사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천 만만의 천사가 성가대를 하고 만물이 다 찬양할 때에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4)

 

찬양하는데 “아멘”해야 합니다.

찬양할 때 “나는 저것 아니야.”하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찬송할 때 네 생물처럼 “아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가 다 엎드려 경배할 분입니다.

우리에게 준 구원이 그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엎드려 있을 때에 엎드린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천국에 있는 것들 중에 분명한 것은 찬양과 새 노래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두 번째는 우리가 올린 기도를 24장로가 향이 가득한 금대접에 담고 있습니다.

그 향이 바로 성도들이 땅에서 한 기도가 거기 담겨서

하나님 보좌앞으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성도들은 제사장이고 선지자이고, 왕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미래 천년 왕국, 지상 왕국에서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왕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왕노릇을 하느냐?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왕은 통치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통치권에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참여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핍박하는 로마 제국을 망하게 하여 주소서”하면

하나님이 받아서 결국 로마 제국이 망하였습니다.

그 거대한 제국이 주후 47년 게르만 족에 의해 망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를 망하게 해달라니까 정말로 로마가 망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책을 보면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 황제 중에는

제대로 죽은 인간이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 비참하게 죽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의 관점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제 명에 죽지 못했다가 관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계속 기록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멸망하고, 악인들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의인들이 어려워도 나중에 보면 잘 되고 이런 것들은

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런 통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땅에서 왕노릇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 가운데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24장로들이 금대접에 담아서

하나님께 향으로 올려드립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역사의 통치권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그렇게 울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어린 양 예수가 하나님의 손에서 일곱 인봉한 책을 받아서

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울 사람이 아니라

그 피로 속죄함을 입고 어린 양에게 찬양과 기도로 영광을 돌려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에 찬양이 있고, 입술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천국에서 요한이 본 찬양과 기도가 우리 안에 항상 함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