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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의 역설

LNCK 2023. 7. 26. 18:32

◈낙오자의 역설       시118:1~29     2009.09.09.설교스크랩

*아래에 설명이 나오지만, 숲속에 있으면 숲 전체를 못 보지만
숲 밖에 나오면, 아이러니하게도 숲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한국교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분은,
(한국교회 안에 몸 담고 있는 분도 될 수 있지만) 

의외로 외국 목회자, 외국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사, 한국교회성장, 한국교회 수준, 한국교회의 미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죠. 
그분들은 숲 밖에 있으니까, 숲 전체가 자연스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분들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정직한 평가를 내려준 적이, 많지는 않지만 몇 차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 한국 성도도 일본교회나 중국교회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려면 
일본교회나 중국교회 사정을 20~30년 동안 모니터링 해와야 그게 가능하겠죠.

..........................

▲‘낙오자’라고 하는 것,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대오에서 쳐져서 뒤떨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10킬로, 그 이상 행군을 합니다. 

그럴 때 체력이 떨어지거나 뭐 상처가 있거나 해서 
그 대오에서부터 누락되어져서 쳐지는 사람들, 낙오자라고 해요. 

또 때때로 사이클 동호회가 달릴 때를 보는데, 
그들이 다 지나간 다음에 혼자서 낑낑대면서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낙오자이지요. 

우리는 어쨌든 사회, 이 세상이라고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치마폭에 안정적으로 싸여있기를 원합니다. 

어디든지 소속이 되어야 하고, 뒤떨어지지 않고, 
남이 속해있는 그곳에 나도 속하기를 원해요. 
낙오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의 63%는, 대학에 못 들어갈 경우에 
100%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고 믿고 살고 있다 그래요. 
그래서 대학을 열심히 들어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낙오자라고 하는 것의 위치를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숲 속에 있는 동안에는 부분을 볼 수밖에 없지만 
숲 바깥으로 나오면 전체를 봅니다. 
‘낙오자의 역설’입니다.  ←설교 제목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낙오자의 역설이 더 강력하게 
아니면 필수적인 요소로 요청이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오늘 시편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인용하셨잖아요. 

22절,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은, 건축을 하는데  
아주 면밀하게 설계도를 해서 벽돌과 벽돌이 다 맞닿아서 
하나하나의 벽돌이 다 이어져서 하나의 큰 빌딩이 이루어집니다. 집이 건축이 됩니다. 

그런데 건축하다가 쓸모가 없다고 버린 돌인데 
그 돌을 주워다가 누군가가 새로운 집을 짓는데 
그 집의 주춧돌로 놨다는 것이에요.  

주춧돌이라는 것은, 
그 돌이 놓여지기 전까지는 그 집의 건축이 시작되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위치가 어땠습니까?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버린 돌'이었습니다. 

그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율법사와 그리고 바리새인 등, 
그 유대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층 인사들의 사회와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버린바 되어 그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렇게 낙오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예수님입니다. 
낙오자의 원형이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인간으로 오셨던 그분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을 창조하시기 위한 기초석,
즉 첫 번째 돌로 놓으셨다는 겁니다. 

시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게 '낙오자의 역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기존에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지도자들의 조직 안으로 
끼어들어가지를 못하고, 그 조직으로부터 버려집니다. 
버려지는 낙오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누구하고도 타협을 하지 못하고, 누구하고도 교섭하지 못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낙오자처럼 혼자 있게 됩니다. 

이 혼자 있는 자리에서, 주님은, 세상 전체를 보시고 
세상 전체를 상대로 혼자 싸우시는 분의 입장에 서게 됐다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 조직의 치마폭에 싸여 산다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치마폭에 싸여 사는 것이에요. 

어떻하든지 바짓가랑이 붙잡고 살아가는 겁니다. 낙오되지 않으려고. 
그 사회의 조직으로부터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의 이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체계 안에서 
하나의 부품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는 예수님이 당시에 종교적인 개혁을 할 수 없으셨겠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면.. 말입니다.) 

그 사회로부터 하나의 부품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치마폭에 싸여서 사셨다면 
아마 예수님은.. 메시야적 사명을 감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들의 소원 아닙니까? 
우리는 이 사회에 잘 적응해서, 하나의 인정받는 부품처럼 되려고 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에도 ‘역설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낙오자의 역설’적 측면에서 볼 때는.. 그런 삶은 높이 평가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이 세상에서 그런 치마폭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어요. 
그래서 세상을 대상으로  
주님이 싸우신 다음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낙오자가 되는 것이 신앙적으로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6절과 7절에 이렇게 표현해요. 

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사람은 또 누구라서 감히 여호와가 내편이라 그래요? 

    에이브라함 링컨이 뭐라 그래요? 
    남북전쟁 때 참모들이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링컨 대통령이 한 말이  
    하나님이 우리 편일 것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 것인가를 걱정해라.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요. 
    맞지요. 자기가 누구라서 감히 하나님이 내편이기를 바랍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여러분? 

8~9절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이나 고관을 신뢰함보다 낫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바로 낙오자에요.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가들과 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버렸을 경우도 있고, 
내가 그 사람들을 끊어낸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10절, 11절, 12절에 반복돼요. 뭐가 반복됩니까? 

118:10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1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2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을 끊으리로다. 어떤 사람들을? 
주변 사람들, 열방 사람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지 않고 이 세상의 치마폭에 싸여서 
이 세상의 조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살고있는 그 사람들이 
이루는 그 조직, 
그 조직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과 교섭하고 하는 것을.. 자기 마음에서 다 끊어내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낙오자가 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이 세상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조직, 그 조직의 치마폭에 싸여서 
어떡하든지 보호를 받고 보장을 받고 
그 사회일원으로 내노란듯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치기준에 따라서 한번 보란 듯이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는 대신에 
그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겁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과 고관을 신뢰함보다 낫다..’ :9
자발적으로 낙오자가 되겠다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여호와는 내편이시다’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낙오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 한 
어쩌면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마음의 차원에서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세상의 조직과 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이 세상에 힘 있는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cut them off 해내는, 
       
즉 잘라내는 자발적인 낙오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 한 
하나님이 나를 장악하시고 ‘하나님이 내 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진정한 이 세상의 건축자요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춧돌로 삼아서 건축을 하실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이냐? 세상과 맞서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대학을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할 때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산다!’ 
그 생각을 갖고 사는 거예요. 

이 생각을 갖고 산다고.. 대학을 안 들어가라는 얘기도 아니고 
들어가야만 된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 뜻에 따라 하면 되요. 

회사에 취직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회사라는 큰 조직에 끼어들어가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왜 그 회사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회사의 일원이 됩니까? 

왜 회사를 믿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그 회사로 보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오라 하실 때 나오면 되는 거지요. 

왜 그 회사를 신뢰합니까? 
왜 그 회사에서 쫓겨나면 죽을 것 같은 인상을 쓰고 있습니까? 

이게 바로 아직 신앙인으로써 서야 될 그 낙오자의 자리, 
그 낙오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이라는 겁니다.  역설적이죠? 

▲여러분, 제가 그런 말씀드렸어요.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고 
이진법복음 선교회를 시작하려고 할 때, 
제가 이곳에 있는 어떤 기존의 선교기관도 연관이 되고 
또 제가 알고 있었던 여러 인맥들이 있지 않습니까? 

소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힘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전 자발적으로 그 사람들을 cut them off, 잘라 내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잘라내셨습니다.                 

이 세상, 이 사회의 어떤 조직에도 속해있지를 못합니다. 
제 자신이 낙오자가 된 것이에요. 

그러나 저는 이 낙오자 위치에서 봅니다. 
제가 속했던 통합측 교단뿐만 아니라 기독교계 전체를 봐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기독교계 전체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입장이 돼버렸어요. 

▲오늘 본문에 이런 말이 있어요. 5절에.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기서 ‘고통 중에’는 히브리어로 메체르 인데, ‘좁은 곳 strait’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좁은 곳에서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가 됩니다. 

낙오자가 되어, 좁은 곳에서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넓은 곳에 세우셔서, 전체를 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어땠습니까? 
세상의 낙오자에요. 

왕가의 자손으로 성장해서 결국은 어떠어떠한 사건과 경위를 통해서 
사막으로 쫓겨나서 낙오되어버립니다. 

이집트의 많은 왕자들 가운데 유독 낙오된 자가 되었습니다. 
처갓집애소 양을 치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그를 끄집어내십니다. 그리고 광활한 곳에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자입니까? 
그 메소포타미아지방, 그 지방에서 자리 잡고 살던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 고도의 문명이 발전하고 있었던 그곳에서 머물러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빠져나오게 합니다. 
좁은 곳에서 빠져나오게 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끌고 나오십니다. 
낙오되는 거예요. 사실은. 
메소포타미아의 발전된 문명과 짜여진 조직으로부터 버려진 돌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을 들어 쓰셔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족을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직도 이 사회에서 쫓겨날까봐 
벌벌 떨고 있고, 직장이 없으면 망할 줄 알고 벌벌 떨고 있고, 
낙오자가 될까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여러분, 적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땅위에서 이루시려는 계획과 뜻은.. 이 세상을 이기시는 거예요. 

어느 직장에 들여보내서 잘 멀고 잘살게 하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자기 가정과 자기 직장과 자기가 놓여진 처소에서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 
이 세상의 부품이 되도록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치마폭에 싸여있되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낙오되지 말고 고관대작이 되라... 이걸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고관대작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류직장에 취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낙오된 자로서 하나님께 장악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직장으로 파송되어서 
고관대작의 자리에 올라설 수도 있고 
이 사회의 조직원처럼 보이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마음은 그 조직을 믿고 그 조직의 부품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항상 우리의 마음은 낙오자의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겁니다. 
대오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이 세상의 톱니바퀴와 이 세상의 조직체계로부터 빠져나와야 되는 거예요. 

아무도 안 믿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한분, 보이지 않는 그분만 의지하고 그냥 나 홀로 가는 거예요. 나 홀로. 
동조하는 자가 없어도 좋습니다. 
하나님 한분 계시면 그냥 가는 겁니다. 

▲예수님도 낙오자였습니다. 
낙오자라는 게 뭐라고요? 

세상의 치마폭에 싸이지 않고 세상을 맞서는 겁니다. 전체 세상을. 
뭐 전체 세상을 어떻게 맞서냐고요? 

돈! 돈! 하는 세상에서 
돈 대신에 하나님 있으면 산다. 이게 세상을 맞서는 거 아닙니까? 

대학! 대학!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면 산다. 이거 주장하는 게 세상을 맞서는 거 아닙니까? 

직장이 꼭 있어야 된다. 하는 세상에서 
지금 이 상태, 직장이 없는 이 상태 이대로라도 하나님 함께 계시면 산다. 
이게 세상을 이기는 거예요. 
물론 직장이 당연히 있어야죠. 그러나 직장에 벌벌 떨며 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벌벌 떱니다. 대학에 못 들어갈까 봐 떨고, 떨어질까 봐 떨고. 
세상의 치마폭을 붙잡느라고 발버둥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여호와가 내편이다.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여호와가 내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완전히 낙오된 자리에 서있을 수 있는 사람, 
세상의 대오에서 빠져나와서 서있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십자가로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을 수 있는 사람,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완전한 낙오자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는 관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완전히 낙오자가 되세요. 
그 낙오자의 자리에서만 세상전체를 보고 세상과 맞서 이길 수 있는 
본연의 기독교인의 모습, 
세상의 치마폭에 싸이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기준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 이런 거 기독교 아니에요. 이런 거 기독교 아닙니다. 

올라간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낮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벌수도 있고 못 벌수도 있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내 마음이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는 낙오자의 입장에서 
세상과 맞서 싸우는 거지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체계위의 top자리를 향해 올라가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 이게 기독교가 아니라는 거예요.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그저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체계의 사닥다리를 따라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겠다고 
발버둥치며 살았던 저희들 
이제 십자가를 붙잡고 자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의 사슬로부터 낙오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장악될 수 있는 돌이 되게 하셔서 
나를 통해 주춧돌로 삼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의 빌딩을 지어나가시는 
놀라운 축복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