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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17 2020.11.15.녹취, 정리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독일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얻는 힘은 세 가지가 있다.
1) 첫째, 자기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서 보람을 느껴야 하고
즉 내가 이 일을 위해서는 '이대로 일하다가 죽어도 좋다' 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 내 생명을 담보할 수 있고
다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일을 만난 사람,
그런 일을 하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2) 두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이 있어서, 그를 위해서 열심히 열심히
내 정성을 쏟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는데 힘이 생기는 것이죠.
저는 그런 분을 만나보았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사모님입니다.
그 목사님이 미국 유학을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식물인간이 됐어요.
13년 동안 누워있었습니다.
뭐 세수를 씻겨도 모르고, 음식을 갖다 넣으면 넘기기는 하지만
그렇게 식물인간으로 13년을 살았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제가 그 사모님을 만나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그냥 '안녕하십니까?' 그랬어요.
했더니 그 사모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아직 안 죽었어요!' 그래요.
세상에.. 가슴이 섬짓하더라고요.
얼마나 힘들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때로부터 1년 후에 다시 그 사모님을 만났어요.
그때는 그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였어요.
이제는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사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더군요.
"곽목사님, 남편 목사님이 식물인간으로 살아계실 때는
'저 사람은 왜 살아가지고 날 괴롭히나?'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 건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딱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제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라고 하면서 제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저는 그 때 들은 말이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 없으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내가 사랑 받는데 대해서 신경을 쓰는.. 이런 마음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 줄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누구를 사랑하던 사랑해야 되는데,
거기에다가 사랑을 쏟으면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
이 사람이 살만한 사람이다... 라고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습니다.
3) 세 번째, 사람이 살아가는데 힘을 얻으려면,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지옥이죠. 소망이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소망은 거품이요.
하나님의 약속, 즉 소망이 있을 때, 나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삶,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소망이 흐려지면, 오늘 어떠한 형편에서도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거죠.
◑본론 / 감사하는 자가 되라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1.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감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본문입니다.
여기 보면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랬습니다.
'감사하라'가 아닙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 and be thankful
'감사하라' 가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하는 말이에요.
뉘앙스가 약간 다르지요.
어떤 특정한 경우에 '감사하는'게 아니고,
평소에, 언제나, 항상 '감사하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환경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존재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알고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절대로 환경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얻으면 감사하고, 잃으면 불만하고... 그게 아닙니다.
감사는.. 인격이요. 성품이요. 체질이요.
이거는 존재의 문제란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해가 빨리되는데, 원망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란..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어떤 환경에 갖다놔도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원망이 자기 체질이에요.
위에서 감사는 '존재의 문제'라고 했잖아요. 원망도 마찬가지인 거죠.
결국 사람은 '감사하는 존재, 감사하는 사람 (골3:15)'가 되지 못하면
'원망하는 사람'으로 살게 마련입니다.
이 사람은 어디 갖다놔도 원망,
어느 직장에 가도 원망,
어디 가서 얼마를 받고 일해도.. 어떤 직책을 맡겨도
액수와 지위에 상관 없이
항상 원망하는데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사람은 딱 두 가지입니다.
'감사 체질'이냐, '원망 불평 체질'이냐?
△여러분, 고전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구출되는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홍해를 건너며 영광되게 출애굽을 했지만
조그마한 일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고, 또 원망하고,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은 광야에서 거의 다 멸망 당하고, 죽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큰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습니까?
그런데 작고 사소한 일에 시험에 들고, 원망합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 물이 쓰다고 원망,
심지어는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부추를 못 먹는다고 원망했어요.
아마 부추를 못 먹어서 혹시 정력이 감퇴된다고 불평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주위에 원망 하는 사람 때문에 질려 본 적이 있지요?
원망하는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뭐 좋은 말로 달래지 못합니다.
왜냐면 원망은, 존재 문제요, 체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반대가 뭡니까? 감사 체질이지요.
존재가 감사체질이라서, 범사에 감사 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감사.. 삶의 환경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의 문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건 중생의 문제입니다. 이걸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2. 바울의 존재론적 감사
본문에서 서신을 쓰는 사도 바울은 '감사하는 존재'의 대표자 입니다.
그는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에 감사했는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
이 세 마디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조건이나 환경과 관계가 없다는 얘기죠.
그런 고로, 감사하는 자, 기도하는 자, 기뻐하는 자는 같이 가는 거죠.
감사하는 자는, 기도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1) 바울은 그 옛날 태어나기 이전의 날을 감사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자 이방인의 사도를 삼으시고.. 갈1:15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감사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원망하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것부터 불평해요.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나? 왜 저런 집에 태어나지 못했나?'
아니올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집에 태어난 것 자체부터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하필이면 이 아버지 이 어머니야?
왜 이런 사람들에게서 내가 태어났나?'
그러는 사람은, 이제 죽을 때까지 그 원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중표 목사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가정에서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둔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목회자로 강훈련 시키기 위해서,
자기 가정 환경을 어려서부터 어렵게 하셨는데,
그 분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훈련의 섭리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괜히 자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하게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존재'는, 자기의 불행한 삶도.. 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감사가 나오는 것이죠.
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이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2) 그런가 하면 롬7장에 유명한 얘기가 나오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과거>에 구제불능한 사람이었다. 이 불쌍한 사람!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이런 사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 하며 감사하는 거죠.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라는 걸 알 때
절대적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는 거거든요.
3) 그런가 하면 <현재>에 하는 일에 대해서도 사도바울은 감사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너희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를 바라노라' 빌1:12
개역개정에는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이라고 나오죠.
내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이런 고생, 저런 고생하는 것 같으나
'나의 당한 모든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고생하는 것.. 그것이 있어서 복음이 전해지고
내가 이 무지무지한 어려운 시련을 겪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복음이 확장되어 나가는 걸
여러분이 알기를 바란다...
내게 되어지는 일은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니
버릴 것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죠.
4) 그는 <미래>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망, 영원한 약속
여러분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복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 내게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보통은, 신자라 할지라도, 미래나 죽는 것에 대해서 암울해하고, 자신이 없는데
그와 반대로 바울은, 면류관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래가 아주 밝고,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될 사표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의 현재가 밝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운 사람이 어떻게 밝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현재에 고위층에 재벌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모래를 씹는 듯이 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면류관을 기대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래의 전망이 매우 밝은 것입니다. 그러니 삶이 감사할 수 밖에요.
이렇게 바울은, 자기 태어나기 이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상황을 놓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위1) ~ 4)
▲3. 바울은 기도할 때도 감사했습니다.
빌1:3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는 생각해 봅니다.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서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있었거든요.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지내는 중이지만
지금 재판을 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가택연금입니다. 주1)
그는 지금 출입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반대예요. '생각할 때마다 원망'이에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반대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인 거예요.
빌1:3절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기도하며 생각한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감사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감사하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빌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4절에 '간구할 때마다' .. 그러므로 3절에 '생각할 때'는
4절과 연결해서 보면 '기도하며 생각할 때'가 맞습니다.
5절에 빌립보 교인들이 아마 바울의 복음선교 사역에 동참을 했나 봅니다.
즉 로마에 가택연금 중인 바울을 돕기도 했고,
또 예루살렘 교회에 흉년이 들었을 때, 마게도냐(빌립보가 첫 성)교회가
구제 헌금에 동참했나 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 선교사역에 동역한
빌립보 교인들을 기도 중에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가 과연 어느 선교사의 기도 중에,
(바울의 기도에 기쁨과 감사가 되었던 빌립보 교인처럼)
그렇게 선교사역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감사하면서' 기도했는데,
어떤 신앙이 어린 신자들은, 기도가 하나님 원망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주먹질하면서 기도하더라고요.
'왜 안 주십니까?' 이건 뭐 하는 짓이에요?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감사!
원망과 불평과 무슨 끝없는 이기적 간구 기도의 제목.. 이런 기도는 옳지 않아요.
감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기도할 때도, 바울처럼 감사해야 됩니다.
늘 행복을 확인해야 됩니다.
감사를 생활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체질화 돼야 됩니다.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골3:15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하루나 이틀 전에,
혹은 잡히시기 몇 시간 전에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런 평안,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 거룩한 평안,
'그것이 너의 마음을 주관하게 하라' 골3:15
돈과, 욕심과, 명예와, 세상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관하게 하라'
*평안=평강=peace
▲소록도 성도님들의 범사의 감사
(소록도 20년 봉사 의사의 증언)
"저는 그분들을 날마다 뵈면서, 너무나 감사함을 느낍니다.
일단 저는 손가락 10개 있는 거,
또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저는 달려가서 보듬을 수 있는 자녀가 있다는 거,
그분들은 자녀들이 보고 싶어도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듬을 수도 없죠.
또 한센병 휴유증으로 눈도 안 보이시죠. 먹는 것도 힘들죠.
그러면서도 이분들은 매일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기뻐요"
이렇게 말들을 하면서 사세요.
'아니 이렇게 한 평생을 이렇게 살고 몸도 불편한데.. 뭐가 감사해요?'
그렇게 한번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하루 눈 뜨면 숨 쉴 수가 있고,
하루 새끼 밥 먹을 수 있는데
뭐가 불평이고, 뭐가 불만이겠냐고?' "
◑소록도 나환자를 진료하면서 <감사>를 드린 젊은 의사 오동찬
1994년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오동찬 선생은
1995년 국립소록도병원에 공중보건의를 자임했다.
당시 말기암 환자였던 오선생의 어머니는
누구나 꺼려하는 소록도에 지원한 아들을 극구 만류했다.
공중보건의 1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드리고야
겨우 허락을 받은 그는
의료진마저도 한센인 진료를 기피하는 현실을 보고
이곳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20년 이상 근무)
그가 소록도에 들어간 1995년 당시 손가락이 없어 양치를 못해 고름이 생기고
심지어 입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환자도 있었다.
그는 한센병 후유증으로 아랫입술이 처져 침이 흘러내리고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아랫입술재건 수술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400여명의 환자들의 입술 성형수술을 실시하는 등
20년 동안 1,600여명의 한센인들에게 참 인술을 펼치고 있다.
그렇게 바쁜 오선생의 시간을 뺏기가 어려워 많이 망설이다 연결된 그 분은
치료 중이어서 기자와 통화하는 1분도 정말 아쉬워 했다.
오동찬 선생에 따르면 나병균은 3개월만 약물치료하면 사멸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결핵균에 비해 100분의 1 정도로 약한데
그걸 모르는 우리들 때문에 어려운 ‘편견의 병’이 한센병이라고 알려준다.
“ 채널A의 ‘쾌도난마 등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유도
이런 편견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소록도는 오동찬 선생의 인생(人生) 그 자체다.
6년 동안 소록도 간호사로 근무하던 부인과 결혼하고
두 딸이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2014년
2005년부터 지난 9년 동안 가족 모두가
1년에 두세 번 여름휴가나 명절기간 해외의 한센인들을 찾아 돌봐오고 있다.
캄보디아, 몽골, 필리핀..오선생이 치료하면 부인은 소독,
큰딸은 통역하고 막내딸은 가글시키고 약을 준다.
그는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국립소록도병원 내에 진료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치과의사 임에도 불구하고 내과, 외과 등 모든 치료를 도맡아 진행하는 등
한센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왔다.
(아래는 그의 간증문, 스크랩)
소록도에 처음 갔는데 첫 환자가 들어오는 거예요.
첫 환자가 아랫입술이 처집니다.
침을 질질 흘리겠죠. 그리고 첫 번째 환자는 손이 없어요.
손이 없어서 손 잘린 부분으로 침을 닦으며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돼지를 키우다보니까 방에 쥐도 많지요. 바퀴벌레도 많지요, 또 파리들이 정말 많아요.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파리들하고 더불어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은 손이 있어서 하루에 두 번 이상 양치하시지요.
이분들은 손이 없으니까 양치질을 못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런 환자분들이 진료실에 들어 왔을 때, 저는 행복했습니다.
남들은 무섭지 않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 했습니다.
'아 드디어 제 일을 하게 해주시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제가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 약 1,500백 여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즉 장애가 심해서 1, 2급 정도의 장애가 심해서 혼자 생활할 수 없는 환자가
거의 70퍼센트 정도 되었습니다.
자, 손도 없으시죠, 눈도 까만색은 없고 하얀색만 있으시죠,
얼굴은 틀어져 있죠. 그러다 보니까 너무너무 환경도 불결하고,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여기 아랫입술이 쳐져서 침은 흘리시죠.
양치 안 하다 보니까 고름이 머리까지 타고 올라가지요.
이 아랫입술 처진 사람들 수술을 해줘야 하는데,
당시에 대부분 의사들이 한센인에 대한 수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제 나름대로 수술을 하다보니까
한센인 수술은 6~7시간 걸리거든요. 입술이 딱 붙어요.
과거에 1960년대에 벨기에 의사들이 아랫입술 처지신분들 근육을
머리 쪽으로 위로 올려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입이 안 벌어져요. 숟가락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으로 안하고 근육을 손 안대고 다른 방법으로 수술을 했더니
입술도 붙고 입도 잘 벌어지고... 이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고, 저는 째고 꿰매기만 하거든요.
그러나 치유는 하나님이 해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힘들게 사시다 보니까
그 때 제 월급이 23만원이나 됐거든요.
물론 우리 동기들에 비해서 20배정도 월급이 적지만
저는 그 월급이 참 많았습니다. 총각이기 때문에 돈 쓸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돈으로 환자들 틀니 해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제가 수술해 주고, 뭐 틀니 해주고 이러면
보통 그것을 무료로 해주면, 환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고맙습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 환자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고생하시네요!' 이러고 맙니다.
여러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좋겠습니까? No
제가 물어 보았어요. 왜 그런 말을 하시냐고 그랬더니
'오 선생도 1년 있다가 갈 건데, 정 주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 의사들이 1년 있다 가고, 1년 있다 가버리니까
정 주기 싫기 때문에 그냥 '고생하시네요'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리 듣기 싫어가지고
이제 진료하고 수술 끝나면, 제가 마을에 찾아 갑니다.
뭐 하냐면, 제가 손이 제일 멀쩡 하니까
파리가 많으면 매달아 놓는 '파리 끈끈이' 라는 게 있어요.
그걸 방에 달아 드립니다. 그 노란색 끈끈이가 나중에 가면 파리가 가득 붙어서
시커매져요. 그렇게 파리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분들은 저한테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가운을 입고 다녔습니다.
가운을 입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저를 피합니다.
그래서 가운을 벗고 다니니까 젊은 총각인줄알고
한번 짐을 옮겨 달라고 해서, 제가 짐을 옮겨 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총각 어디서 왔어?' 물어보셔서
'병원 의사입니다!' 하니까 깜짝 놀라요.
그래서 이제 그 할아버지가 '어이, 그럼 밥 좀 먹고 가!'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밥이 일반 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식탁이 조그마하거든요. 정말 지저분해요.
밥 푸고 밥통에 이틀만 넣어놔도 밥이 누렇게 되잖아요.
반찬은 뭐냐? 고추 딴 것에 된장,
그 다음에 물, 허연 김치
숟가락 뜨기 전에 파리들이 그 안에 버글 버글 합니다.
파리 쫓으면서 먹어야 되는.. 정말 지저분했었어요.
할아버지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설마 이놈이 먹겠어?'
그런데 소록도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80퍼센트가 기독교인 이예요. (식전) 기도할 때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나냐”
나오는 것이 더럽지, 들어간 것은 더럽지 않다.. 는 말씀이죠.
그 구절이 갑자기 생각이 난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밥을 기꺼이 먹었습니다.
인상 안 쓰고 그냥 먹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인상을 쓸 수는 없잖아요... *더 보시려면 소록도 한국인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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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참고로,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원하며, 로마로 호송되어간 바울이
행28장에 보면, 셋집을 얻어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그 시기에 옥중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신학자들은 봅니다.
그 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하면, 바울은 무죄로 석방됩니다.
그래서 (행29장 이후라서) 성경에 안 나오지만, 그는 4차전도여행을 다니던
중에.. 나중에 소아시아에서 다시 체포되어 2차투옥되어 순교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울이 무죄로 석방된 이유는, 학자들의 추정인데
아마 원고 측이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만약 바울을 고소한 원고 측이 재판에 출석해서, 심사하는 가운데
위증이나 무고(거짓 고소)가 발견된다면, 원고측도 오히려 법적 책임이있기에
그들은 로마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거니와, 스스로 불출석함으로써
소송을 포기한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