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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 농부들의 착각

LNCK 2023. 8. 2. 20:54

◈소작인 농부들의 착각              막12:1-12           2003.08.03.스크랩 

▲본문 내용 설명 
어떤 부자 주인이, 가난한 농부들을 불쌍히 여겨서 
포도원지기 소작을 맡겼는데, 

농부들이 소출 중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았을 뿐더러 
나아가 포도원에 보내진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흥분하게 됩니다. 
정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악한 농부들로 바뀌었을까요? 
이 얘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농부들은 세 가지를 착각했습니다. 

◑첫째, 이 농부들은 주인이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 주인이 있었다고 하면 
감히 그런 악한 생각과 행동을 저지를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주인의 눈치도 살피고, 예절도 철저하게 지키고, 
주인에게 바칠 세를 바치면서 온갖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가까이 없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주인이 모를 거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정도는 모르겠지 하면서 슬쩍슬쩍 부정도 하고, 
사기도 치고 바칠 것을 떼먹기도 하다 보니까 
마침내는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고 싶어진 것입니다. 

욕심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은 마침내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미친 개가 된 겁니다. 

그래서 눅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권면합니다. 

▲오늘을 사는 인간들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악을 저지릅니다. 

종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합니다.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리시고,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시는 하나님의 관용을 악용합니다. 

한없이 기다리시는 그 인내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오용 내지 악용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든가, 설사 계신다 해도 
저 하늘 멀리 계셔서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모를 거라고 착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제때 처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바로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포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살면서 저와 여러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 내 생각과 하는 일을 잘 모를거라고 
착각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너무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이 있지만 저들의 생활 속에는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뒤에 오는 모든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들 몫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에 우리가 한 일’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것을 낮에도 밤에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부피만큼 
그 분을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주인은 왜 포도원을 멀리 떠나 계실까요?
아예 포도원을 안 떠나고, 소작인들을 24시간 감독하고 계시면 되잖아요.

여러분, “안 계시는 듯.. 계시는 주님”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형제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런 저런 농담 끝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또는 양육을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어떤 성향의 인물이 좋겠는가.. 하는 내용을 함께 토론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이랬습니다.
-책임 맡은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된다.
-너무 잘생겨도 안 된다. 너무 완벽해서도 안 된다.
-너무 책임감이 강해도 안 된다.

-가끔씩 회의나 업무 차 자리를 비워야지, 너무 공동체에만 붙어있어도 안 된다.
-그 대신에 약간 부족한 구석이 있으면 좋다. 가끔씩 실수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출장도 자주하면 더 좋겠다.

요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여러 리더십 가운데 ‘없음의 리더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혹은 ‘부재(不在)’의 리더십!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하실 텐데,
리더가 모든 권한이나 결정권을 다 자신의 손에 넣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대표나 원장이 공동체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리더십입니다.
때로는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좀 알쏭달쏭한 리더십입니다.

이런 경우, 각자가 자기 역할을 100% 발휘해서,
오히려 공동체가 더 원활하게 잘 돌아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정이나 공동체의 중심에 ‘텅 빈 공간’이 있어야 합입니다.
대표나 원장이나 가장이 중심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가정이나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공동체 작은 일에 까지 일일이 개입하는 ‘과도한 현존現存’보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도록,
또 하나님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리더십입니다.

만약 제3의 지대, 여유로운 공간이 조금도 없게 될 때,
그 공동체의 삶은 팍팍하기만 할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가중되면서, 업무 능률도 함께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공동체가, 우리 신앙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고, 그 안에서의 삶이 힘겹기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 타이트하게, 밀착해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일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현대의 ‘행정의 달인’ 또는 CEO는
그런 식으로 ‘관리’를 잘 해야..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얼마 후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모두가 스트레스 받고 나가버리든지, 아니면 복지부동으로 일관할 것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주님이 나와 함께 늘 동행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주님이 오늘 우리 집에 심방 오셔서, 1주일 머물러 계신다고 하면
모두 스트레서 받아서, 몸져 누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도.. 포도원을 소작인 농부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주시는 것입니다.
‘안 계시듯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이들이 악한 농부가 된 이유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자유롭고 풍요롭게 산다 해도 이들은 여전히 소작농입니다. 
그들이 편히 눕고, 잠자고, 쉬고, 먹고사는 것은 
모두 주인의 포도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쓰다 보니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남의 것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어떤 걸까요? 
주어진 포도밭을 잘 가꾸고, 정당한 세를 적기에 바치고, 
주인의 환심과 인정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처음 가졌던 고마움과 감격은 식어지고 
생활이 점점 윤택해집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바칠 것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바치는 것이 아까와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의 명령대로 잘 해야하는 자기들의 임무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종들이 왔을 때 농부들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이게 도대체 누구의 포도원인데... 
땀흘리고 애를 써서 거두어들인 수확인데 이걸 내놓으라고? 한 톨도 줄 수 없어” 

그러면서 주먹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집어삼킬 욕심에 눈이 뒤집혀 버리게 된 겁니다. 

▲인간들도 하나님이 포도원으로 주신 이 땅, 하나님이 주신 생명, 건강, 
물질, 가정 등등의 모든 것에 스스로가 주인이 되기 쉽습니다. 

너무 오래 쓰다 보니까 주인은 잊어버리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래 동안 들어와서 잘 아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이 땅의 청지기(관리자)일 뿐이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도, 생명도, 가정도, 지식도, 권력도, 재능도... 
하여간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지만 
남의 것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냅니다. 

한 마디로 세상 모든 게 다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온갖 사기와 폭력과 부패와 부정의 온갖 죄악들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라디오 아침 방송에 “생활 법률 상담”이란 프로가 있었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명의를 빌려 쓰고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한때 1가구 2주택자에게 
정부에서 세금을 아주 무겁게 매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집 한 채를, 아직 집이 없는 아주 친한 친구한테로 
명의변경을 해 놓았습니다. 
세금 때문에 친구에게 자기 집을 잠깐 맡겨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의 변경을 받은 친구가 어느 날, 
그 집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받습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마치 명의변경을 받았는데도, 자기 임의로 행하는, 
그런 나쁜 사람처럼 착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오늘 나오는 악한 농부나 지금 예에서 나온 그런 사람들만이 착각할까요? 
그들만이 남의 것,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아는 착각을 할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한 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칠 때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도 
더 많이 바치고도 기뻐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반대로 생활은 점점 여유가 있게 될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모든 것이 단지 내 수고와 노력으로만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그러면서 나처럼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것들은 왜 그렇게 게으를까? 
하는 정죄의 눈길을 보내지는 않나요? 

이 세상에 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 보면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유형 무형의 모든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위임(무상 임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관리할 뿐입니다. 
내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집에 온 자녀들도 사실은 내 아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손님입니다. 
이십 몇년 동안 잘 기르고 모셨다가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요, 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도 내 것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악한 농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착각입니다. 
다시 한 번 청지기로서 우리들의 본분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세방을 정리하면서  (펀 글)
며칠 전에 전세방을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3년 반 동안 내 집처럼 편하게 살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떠날 때가 되자 그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얼마 전 소그룹에서 어떤 형제님의 나눔이 생각났습니다.

“전세를 얻어서 오래 살다 보면
그 집이 자기 집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주님이신데,
살다 보면 우리가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고전 6:19-20).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전세를 내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인 앞에 서야 하고
주인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결산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언제 전세방을 빼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내 삶에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지 맙시다.
주인이 집 빼라면, 아무 소리 없이 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전세를 빼서 이사 다니는 것도,
영성 훈련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자기 명의의 등기가 있으면, 그건 ‘자기 집’인가요?
맞는데.. 자기가 사는 날 동안만 자기 집입니다. 
죽을 때는.. 그거 다 자동 반납 처리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 전세집이나, 자기 집 소유나
하나님 앞에서 모두 ‘소작 농부’인 것입니다. 

근데 지금 ‘집’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이 그렇다는 것이죠. 
‘내 사역’으로 여기다가는, 큰코 다칩니다. 
본문의 소작인 농부처럼 됩니다. 

▲착한 죽음의 연습 
저희 수도회 오랜 전통 가운데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습니다.

월말이 다가오면, 자신의 생활공간과 주변을 깨끗이 한번 정리정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공동체 앞에 내어놓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잘 정돈된 모습으로 떠날 수 있도록
외적, 내적인 준비를 한 달에 한번 실시하는 것이지요.

최근 새 학기를 맞이한 저희 공동체에서도 
‘착한 죽음의 연습’을 실시했습니다.

각자 사용하던 방도 서로 바꾸었습니다.
원장인 저도,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침실을 바꾸었습니다.

한 방에 오래 지내다보면, 그 방이 마치 자기 소유인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방도 서로 자주 바꿉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실을 바꾸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형제들,
그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는 형제들을 저는 그냥 두지 못합니다.
저는 인정사정없이 혼냅니다.

“수도자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으냐?
달랑 가방 두 개만 양손에 들고 갈 수 있어야지”

그러면서 저는 보란 듯이 폼을 잡지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만
이불에 뚤뚤 말아서 어깨에 메고, 단 한 번에 침실을 비워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실감하며 삽니다.

하나님 나라가 약속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는지 생각해봅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 사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 집착 때문에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께서 자리할 여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매일 그 소유로 인해 부대낍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영혼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렵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천국 체험은 요원합니다.

◑셋째로 이들이 악한 농부가 된 이유는, 끝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계산 착오였습니다. 
주인의 무서운 심판과 징벌이 있을 것을 생각 못했습니다. 
눈 앞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내일, 주인의 심판이 있음을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대로, 살기 편한 대로 다 해버렸습니다. 
그토록 어질고 착한 주인의 아들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그들 앞에 있었는지를 잘 살펴보세요. 

▲오늘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내일을 볼 줄 모릅니다. 
마음대로 살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편리한 대로 살아갑니다.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가 하나님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히브리 9장 27절의 말씀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14절에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경고합니다. 

전도서 11:9절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고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최후 심판의 그 날! 
죄들이 소리치고 나올 때가 옵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자기 입으로 직고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받지 못한 모든 죄들이 벌거벗은 것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실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일 뿐입니다. 

사실 마음씨 착한 이 포도원 주인보다 더 사랑이 크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가난한 농부들보다도 더 비참하게, 죄와 죽음과 심판의 운명을 안고 죽어가던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씀과 교회를 통해서 이토록 풍요한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요,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이랍시고 살아가는 동안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악한 농부입니까? 아니면 선한 청지기입니까? 

▲한 의사의 아름다운 기도 (심판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저는
몇 번째였는지.. 그날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어수선한 응급실 소음 사이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제 맥박 소리를 들으며
병원 응급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막 들어온 아이 부모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바로 옆 침대에 계시던 할머니는
중년을 넘긴 자녀들의 낮고 비통한 울음 속에, 지금 막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의사와 간호사가 제 곁에서 무언가 서로 묻고, 
제 주사기에 약을 넣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침대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중환자를 두고 왜 의사가 빨리 와보지 않느냐?”면서
보호자가 고성을 지르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곁에 있던 의사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지금 이 환자가 더 위급해요.” 하는 게 아닙니까!

그때까지 멀쩡하던 저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두렵고 초조해졌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지요.
저는 준비가 안 된 정도가 아니라, 준비할 마음도 먹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죄는 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렸고, 제 잘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비로소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음을 느낀 날,
저는 몇 분 사이에 ‘나는 이제 어쩌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분주하던 응급실이 좀 조용해진 틈에 살짝 졸고 있자니,
의사 한 사람이 제 침대에 다가와서, 여전히 불규칙한 바이탈 사인을 지켜보고는
잠시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들릴락 말락 몇 마디 웅얼거리더니 사라졌습니다.
그의 손목에는, 감겨진 나무십자가 목걸이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얼마가 남았는지 모를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아니 그의 죽음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것은, 그가 다시 소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떠나고 , 나는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 누추한 지상 삶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람들의 기도가,
그들의 손길이 바로 하나님의 작디작은 표징이 아닌가... 하는
작은 깨달음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래도 그때뿐 좀 살 만해지면,
제가 또 다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저를 단단히 꾸짖으십니다.

‘꼭 버선목을 뒤집듯이 보여줘야 네 죄를, 네 영혼의 상태를 알겠느냐?’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