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에서 앞부분은 굉장히 비극적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굉장히 혹독합니다. 뼈아픈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30~33장에 보면, 희망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절망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서 33장은 예레미야서에서의 전환점이 시작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렘33:1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선지자가 갇혀 있다는 것에서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시대요,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유다를 포위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이 훼파되고,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당한 상황입니다.
유다 왕조는 기울어져버렸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마저 볼모로 잡혔습니다. 이것을 ‘총체적 난국’이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비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33:1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는 말씀은, 예레미야 평생에 두 번째로 말씀이 임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전에도 수십 번 말씀이 임했죠. 렘1~32장에만 봐도 10~20차례 이상 나오죠.
그럼 ‘두 번째로 임했다’는 뜻은, -지금 그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상황에서의 두 번째 이거나 -지금 그가 받고 있는 예언의 말씀, 즉 같은 주제의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시위대에 갇혀 있어 모든 것이 단절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갇혀 있다는 것이 죽어버렸습니다. 부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기록은 없고 갇혀 있다는 기록만 있으면, 답답하고 어두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갇혀 있는 가운데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만 임하면’ 그건 갇힌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갇힌 상황도 ..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하고 풍족한 곳에 살고 있어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말씀의 기갈이 있으면 그곳은 정말 기근이요, 기갈이요, 삶이 고달픈 곳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지자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선지자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위기 때에는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거나 말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말한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위기 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본문 33:1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역사적으로는 암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갇혀 있습니다. 상황은 답답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번 임한 것이 아니고, 두 번째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일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롭게 찾아오십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답답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위대가 지키고 있는 감옥을 뚫고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늘과 연결되어 교신(交信)하면 삽니다. 그러나 말씀이 끊어지면,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현실 상황, 환경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답답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가장 답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려고 말씀을 펴놨는데, 아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설교를 귀로만 들을 뿐,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상황, 진짜 감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듣지 못하는 상황이 갇혀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서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이 갇혀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은 화려한 제사장의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제사장직을 가지고 멋있는 옷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했습니다(삼상 3:1).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엘리의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일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감옥처럼 열악한 곳,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적합합니다.
지금의 상황과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깨닫는 말씀이 있다면, 영혼이 묶여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때가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든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일이 잘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어떤 말씀이 임했습니까?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본문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예레미야가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일반적인 기도와는 다릅니다. 절대적 한계상황에 빠져있음을 부르짖습니다.
시편에도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86:7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절망이 너무 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 기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는 의미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전에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기도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갖게 하시고, 때로는 고난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마음을 불어넣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가 선행(先行)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마다 먼저 기도를 일으키셨습니다. 1907년 평양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1903년 원산에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20세기말 아주사거리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락방에서 소수(少數)의 사람들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실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 안에 기도의 마음을 불어넣으셔서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게 하십니다. 기도가 앞서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섭고 절망적인 상태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가 중단된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마저 기도하지 않고, 기도를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 33:3)”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부르짖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좌절과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실은 답답합니다. 갇혀있는 듯 합니다. 어려움이 반복되고 상황이 악화되면,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라고 자기암시를 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안 된다고 자기 스스로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절망이 깊어지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기도할 용기조차 없는 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기도하면 뭐해?” 이것은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어려움이 겹치고 힘든 세월이 오래 계속 이어지면, 신자도 “기도하면 뭐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의 힘마저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완전히 바벨론에 포위된 상태입니다.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포위 2년 있다가 마침내 함락됨)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없다고 주저앉아있지 말고,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닫힌 것을 끝이라 생각하지 말고, 힘들다고 푸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얻을 때까지 구하고, 찾을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기도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기도하면 삽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익숙해져있지 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나라가 빼앗기기 직전이고 선지자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갇혀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지금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액션(action)이 시작되고 있다는 싸인(sign)입니다.
억지로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아도,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힘들고 어려워 지치고 상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기도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도 기도의 자리로 나오세요.
“기도하고 싶어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에 불이 떨어져야 기도합니다. 발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과 열심과 의지가 강했습니다. 악착같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축복도 자신의 힘으로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궁지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야곱은 빌고 엎드리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의 머리를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궁지로 몰아가셔서 야곱을 엎드리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배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본문 33: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냥 부르짖다가 힘이 빠져버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전에 그런 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혼인 잔칫집에 있던 사람들은 이전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포도주를 거기서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의 예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일,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반전을 일으키십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은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렸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일을 행하십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득세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게 심판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바벨론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묘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묘막측한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에 대해 경탄(敬歎)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경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놀라운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기대감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시큰둥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식으면, 신앙생활이 시큰둥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영적으로 권태감을 느낍니다. 영적으로 권태감을 느끼면, 타성에 젖습니다.
무엇이든 오랫동안 하다 보면, 그것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면 신선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됩니다.
서울에는 초고층빌딩도 많고 차도 많습니다. 이로 인한 미세먼지도 심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답답하게 살다가 부산에 와서 바다를 보면 환호를 지릅니다.
그런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바다를 늘 대했기 때문에 바다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다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늘 예배드리고 부지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기도에 대한 갈망 없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기도에 참여할 뿐입니다. 기도하는 것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늘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본문 33: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확실한 응답을 보장하셨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하시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크고 은밀한 일’은 무엇일까요? 33:6절 이후에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포로 귀환입니다. 포로로 붙잡혔던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셔야 바벨론의 포로 되었던 자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3:7절에 보면,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 망가진 예루살렘과 유다를 어정쩡하게 복구시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회복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33:9절에 보면,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예전에는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을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풍성한 것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구원은 굉장히 광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죄 용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은 크고 비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대충 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밀한 계획 속에 기막힌 프로그램을 동원하셔서 일을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크고 은밀하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흥분됩니다.
▲엡3: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이것은 바울의 체험이 담긴 고백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만 주시는 분도 아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턴을 넘어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십니다.
본문 33:2절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요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까? 유다가 다 망가져서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토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뿌리째 뽑혀 소망이 전혀 없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소개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뿌리째 뽑혔어도 다시 만들고 재건하고 회복시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이미 결론이 나있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기도의 결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능히 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2:27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새로운 창조사역입니다. 완벽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확실합니다.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보다 하나님의 알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도록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의 알파가 없으면 안 됩니다.
될 것 같았는데,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이루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열심이 우리의 신앙에서 방해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무너지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주의는 일종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백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유능해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답답하게 여기십니다.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다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최고의 전문가요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백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알파가 있어야 비로소 내 일이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마무리하시고 끝내시고 일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성경은 기도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기도’를 빼면, 이상한 책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 ‘기도’가 없으면, 성경이 아닙니다.
모든 비밀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동시에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상황에 빠져있지 마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 때문에 마음까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