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영적 계승의 통로 엡6:4, 시127:1~3 2018.05.06.녹취록 스크랩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 아이들이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다 키우신 분들은 그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로 인해 울고 웃기를 반복합니다.
어려운 것 중의 어려운 것이 자녀교육입니다.
부모들에게 자녀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한(恨)을 풀기 위한 도구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애물단지라고 하거나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자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얘기하나요?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선물인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1. 첫째, 본문에서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가 잘못했으면 잘못한 것에 대해 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징계를 할 때 부모는 감정적 절제를 해야 합니다.
감정적 절제를 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징계가 아닌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아동학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가정에서 가장 많이 다투고 분노하는 일은
자녀들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야단을 칠 때, 부모의 감정 처리가 중요합니다.
분노가 너무 앞서거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징계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아이에게 상처만 남게 됩니다.
특히 언어폭력 verbal abuse 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통한 상처는 신체적 상처보다 더 큽니다.
모멸감을 주는 말, 수치를 가지게 하는 말, 자존감을 떨어지게 하는 말,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그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왜 저걸 낳았는지 모르겠다.” “머리는 큰 데 든 게 없다.”
이렇게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가하면
아이의 영혼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의 싸움입니다.
자녀교육의 어려움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가르치고 인내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다른 것 때문에 힘든 게 아닙니다.
더 악화될 때면 기다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기대치가 높을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기다려주는 부모가 있을 때 자녀들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들이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맡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흔들리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현실이 불안해집니다.
▲보통은 자녀의 현재의 모습에 절망합니다.
그래서 멀리 보지 못하면, 그 가정은 금방 전쟁터가 됩니다.
부모들의 분노와, 자녀들의 분노가 만나면 전쟁터가 됩니다.
요즘은 부모만 화가 나는 게 아니고
아이들 안에도 분노가 꽉 차 있습니다. 건드리면 터질 지경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자녀보다 부모를 먼저 훈련시키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성장만이 아니고 부모의 성장을 원하십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자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위탁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부모가 모든 걸 다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감정을 자녀에게 있는 그대로 다 풀어버려도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성품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좋은 성품을 가진 부모 아래
아이가 자라는 것이 축복입니다.
아이들은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하지만
부모는 의연한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눅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도
나중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녀를 바라볼 때, 현재의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질 미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녀를 바라볼 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어려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2. 둘째, 우리는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징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징계를 강조하고 체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폭력을 행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절한 징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자녀를 하나나 둘만 키우니 과잉보호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는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징계가 없는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닌 방임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랑은 아이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징계를 해야 합니다.
징계 역시 사랑의 방법입니다.
오늘날 권위가 사라져버린 세상입니다.
옛날에는 아버지라고 하면 권위가 살아 있어서
기준을 세우고 그 앞에 복종을 하는 문화였는데
요즘은 그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입시를 맞은 자녀가 왕이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징계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의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해 15년이라는 생명의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 15년 가운데 낳은 아들이 악명 높은 므낫세입니다.
늦게 낳은 아들이니 애지중지 했을 것입니다.
기준이 없는 사랑은 방종을 낳습니다.
징계 없는 사랑은 잘못된 사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잉보호가 아니라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하려면
적절한 징계를 해야 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옳은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3. 셋째,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아이의 현재 상태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분노하는 때는 비교할 때입니다. 한국의 문화는 비교 문화입니다.
부모들의 지나친 기대감, 허영, 부모들끼리의 경쟁이 만연합니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 부모 자신의 포지션이 아닌 자식으로
부모들끼리 경쟁합니다.
아이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 중 하나는
“남들에게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기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개발되도록 도와줍니다.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주고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일등이 되라고, 유명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닌
“가장 너 다운 너”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를 만드신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고정된 틀,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떤 기준 안에 넣으려고
아이들을 강요하고 닦달을 하면, 아이들은 상처받고 분노합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가도록 아이의 결을 살려주는 일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게 성경적 교육 방식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주로 부모가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중요한 역할은 아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계속 들어줘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핵심 중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치에만 계신다면
우리와 소통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인간의 형체로 인간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아이와의 소통을 위해서, 성육신처럼
내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늘 그 아버지 위치에 있으면서, 아이를 끌어올리려고 하면
아이와 소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대화가 없어집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서로 공감할 것도 없고
교류가 없어져 어떤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대화가 안 되니 고민이 있어도
아이는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를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절입니다. 가정 안에 대화의 회복이 있으려면
부모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실패했을 때도 실패에 귀를 기울여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그 아이대로 공부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공부를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실패했을 때도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춘기 때 실패하고 좌절했던 경험은 굉장히 중요한 경험인데
그때 곁에 있는 부모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받아주고, 아빠 엄마는 너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해해 주고, 다가가고,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결들을 살려주려는 것,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만 주신 독특한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면 됩니다.
부모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자녀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
자녀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넷째, 마지막으로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소극적인 교훈이라면
좀 더 적극적인 교훈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의 초점은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부모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육신적인 부모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교육, 주일학교 교육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교육은 교회가 하는 게 아니고 가정에서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탁월성은 유명합니다.
역사 속에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이 유대 민족입니다.
유대 민족의 인구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해 1,500만 정도밖에 안 됩니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 300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유대인들은 약 100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벨상 전체 수상자의 3분의 1입니다.
세계적으로 범죄율도 낮고 우수한 인재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교육에 의해서입니다.
그 중심에는 신앙교육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나 공동체를 이루며 삽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면 그들은 가장 먼저 회당을 짓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안식일이 되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유대인 고유 모자인
키파(Kippa)를 쓰고, 차를 타지 않고 회당으로 걸어갑니다.
그들은 특별히 자녀의 신앙교육을 강조합니다.
유대인은 고난의 역사 가운데 유랑민족으로 흩어져 살았어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6장 4-9절을 쉐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부모의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책임이 신앙의 계승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의 방식을 핵심적으로 강조한 내용입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자녀에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 우리의 모든 책임을 다 넘긴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지식교육을 합니다.
학교에는 동성애를 가르치며 옹호하는 교사들도 있고, 진화론자들도 있고,
세속의 문화, 인본적인 문화, 하나님을 거부하는 문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속에 맡겨 버리고 입시에, 모든 경쟁에 다 몰아 놓았습니다.
신앙교육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교육과 입시교육에서 신앙교육은 뒷전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운 지식으로만
자녀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키우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로 다가옵니다.
어릴 때부터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4세부터 14세까지 부모의 영향 아래 있고 아직도 감수성이 예민하며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그리고 죄성으로 가득한 자아의 주장이
강력하게 일어나기 이전, 사춘기 이전에 하나님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이 철야나 특새 때 나오는데 중요한 영적 경험입니다.
어릴 때 영적 분위기 안에서 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곁길로 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신앙교육을 소홀히 하고 공부만 강조하고
입시 위주로만 돌아가게 하면 안 됩니다.
입시중심의 교육이 가지는 약점이 뭡니까?
자기 출세, 자기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자칫하면 이기적인 인물을 만들어 냅니다. 신앙이 빠진 학문은 어디로 갈까요?
경쟁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공동체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는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성경을 배운다면 최상입니다.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큐티를 가르쳐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먼저 무릎을 꿇는 방법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전해 듣고,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교사들이나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가 먼 훗날 “내가 부모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복음을 받았고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듣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말해줘야 합니다.
부모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기준을 알려줘야 합니다.
▲부모가 희미해지면 자녀는 더 희미해집니다.
자녀가 하루 학교에 가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데 교회를 몇 주 빠져도
담담하게 지낸다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신앙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부모의 역할 중 중요한 것은 말보다 삶으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 대로 자녀들이 따라옵니다.
부모의 역할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나님을 진짜 믿는지 믿지 않는지, 믿는 척하는지 잘 압니다.
보지 않는 것 같지만 다 보고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모의 위선입니다.
위선이라고 생각되면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실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자녀 교육의 문제는 부모의 신앙으로 귀결됩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으면 자녀는 돌아옵니다.
그러나 부모가 위선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갈 길이 멉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정직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부모의 부도덕한 삶, 부부 싸움, 폭력, 거짓말 등은 자녀의 삶을 파괴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음세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다음세대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사실 걱정할 대상은 우리, 1세대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가정에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의로움, 깨끗한 양심이 있습니다.
어른들보다는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양심, 도덕적인 삶에 대해
어른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합니다.
그러니 조그마한 위선도 아이들은 금세 알아차립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치명적입니다.
아이가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은 부모의 위선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우리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 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부모의 위선은 믿음의 대를 끊습니다. 부모가 이렇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해야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자녀들의 영혼구원입니다.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23:14)
징계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영혼구원이 목적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을 해도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이 최고의 유산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앙의 유산입니다.
자녀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신앙을 가졌다면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시며,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부모라도 부모는 한계를 느낍니다.
부모가 언제까지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모가 책임지지 못합니다.
책임은 오직 하나님만이 지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에게 위탁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자녀들이 자라가기에는 굉장히 험악한 시대입니다.
갈수록 문화적으로 악하고 유해한 환경이 많고 탈종교화 시대로
반(反)하나님적인 문화가 가득 차 있는 세상입니다.
이 한가운데서 자녀들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부모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자녀를 맡기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분들은 절대적 한계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보호는 자녀의 인생을 망칩니다.
날마다 자녀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할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 계승입니다.
내 믿음이 내 자녀에게 계승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 나의 자녀의 하나님이 될 것인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영적 계승에 늘 실패했습니다.
모세의 시대,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가니 금방 다른 세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납니다.
그 사사기 시대가 결국은 이스라엘 역사의 불운을 만들어 내고
나라를 잃어버리는, 고통스러운 수난의 세월을 보냅니다.
영적 대가 끊긴다는 것은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고
교회적으로도 영적 계승이 최고의 이슈입니다.
과연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계승 받고 있는가?
이것은 부모의 막중한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부모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 중의 하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섬겼던 하나님을 자녀가 함께 섬기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가정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국가적인 일이고, 전 인류적인 문제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관점에서 중요한 책임입니다.
▲내 자녀만이 아니라 다른 자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자녀들도 잘 되게 하는 것이 내 자녀를 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양육, 힘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보람되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자녀가 말씀 안에서 자라고 그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그대로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이 발휘되도록
각자의 가정뿐 아니라 공동체가 힘을 쓸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케 하는 일에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자녀는 결코 애물단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한(恨)을 풀어낼 도구도 아닙니다.
한 아이에게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가능성의 꽃을 피워낼 때
그 아이의 영혼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자녀들이 시편 127편의 말씀처럼
여러분들의 가정에 주신 여호와의 기업이고 그 태의 열매가 상급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들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성취되도록
날마다 기도하고 가르치고 인내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앙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자녀들의 앞선 세대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믿음생활 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