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도하라 요4:3~15 2023.07.02.설교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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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났는데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고
또 그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니까, 종교지도자들이 견제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략상 후퇴를 하시는 장면이에요.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로 가는 여정 가운데,
그 중간지역인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5~6절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여기서 '6시'는, 오늘날의 낮 12시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예수님이 완전히 녹초가 되셔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게 됐는데, 그 마을의 이름은 '수가' 입니다.
근데 '우물 곁에 앉으셨다'라는 것은, 마을 어귀에 있는 쉼터에 앉으신 개념입니다.
왜냐면 당시 우물들은 대부분 마을 입구 쪽에 있었거든요.
오늘날로 치자면, 고속도로 달리다가, 어떤 도시 입구에 있는 휴게소에
들어가시게 된 거죠.
7~8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마을에 들어갔고, 예수님만 혼자 계신데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생활이 좀 복잡한 여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시간에 외출을 한 거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굉장히 무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중근동 지역은 우물을 공용으로 사용하기에
사람들이 햇빛이 좀 적은 이른 아침과 저녁, 하루 두 차례 우물에 나와서
물을 길어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더운 한낮에,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일부러
정오 시간에 우물가에 나온 거죠.
그런데 우물가에 나와 보니까,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을 거십니다. '내게 물을 좀 주시오'
남의 동네에 왔으니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중근동에서는 낯선 사람이 타인의 우물을 마시면
죽일 수도 있어요. 이걸 생명처럼 여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남의 우물에서 함부로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에게 요청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 굉장히 나이스하게 얘기하신 것 같은데, 여자가 짜증을 냅니다.
'당신은 유대인, 나는 사마리아인인데,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냐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않았고, 겸상하지도 않았고
마주 대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통치를 받았는데
앗수르가 혼혈 정책을 써서 피를 더럽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신앙적인 순수성도 더럽혀진 지역이었죠. *여로보암 이후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을 향해서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무시를 했다는 거죠.
그런데 자신들의 동네에 정통 유대인이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니까 짜증이 났던 거죠.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이 상황 파악, 분위기 파악을 못하시고, 반전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반대 상황을 이야기 하신 거예요.
'내가 너한테 구하는 게 아니라, 너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너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고,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여인이 감동을 받았나요? 아니요. 더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거의 공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11~12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자가 이야기합니다. '아니 선생님, 당신은 물동이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도대체 무슨 수로 생수를 길으겠다는 얘기인가요?
우리 조상 야곱이 주신 우물입니다.'
자기 조상 얘기를 왜 했을까요?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는 얘기죠.
'당신이 야곱보다 큰 사람입니까?'
어디서 큰 소리를 치는 거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당신네 유대인들은 평소에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데
우리도 나름 신앙적인 헤리티지가 있고, 신앙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전히 전혀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시고
계속 진지하게 이야기 하십니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여전히 진지하실 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이 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 않느냐?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물이, 네 속에서부터
영생하도록(영원에 이르도록) 솟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의미인지 아니까 아멘하고 감동을 받지만
저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들어봐도
이게 마치 약장수 같은 소리인 거예요.
왜냐면 그 당시에는 이런 개념 자체를 가진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어요.
여러분, 온 동네에 우물물이라고는 딱 하나 있는 겁니다.
무슨 집에 정수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돗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속에서 넘쳐나는 생수'라는 게 도대체 무슨 개념인가?'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던 거예요.
자, 예수님도 이상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상한 이야기에 대한 여인의 반응도 이상합니다.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선생님, 그런 물을 제게 주십시오!'
아니 이 여인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런 물이 있다고 믿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물이 있다고 믿은 것 이전에,
그런 물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 있었죠.
내 인생이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이렇게 맨날 조심스럽게, 아무도 통행하지 않는 시간에 나오는 것이
늘 괴로운 거예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다시는 집 밖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물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흘러넘치면
'그냥 집 안에 머물러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을 안 만나도 되지 않느냐?'
여러분, 이 여인의 인생이 너무나 영적으로 목이 마른 인생이었던 거죠.
'정말 간절하게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마음의 소원함이 있었던 것이죠.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굉장히 많은 남자들을 만났는데
그 남자들이 다 자기 인생을 실망시켰던 거잖아요.
(*그 다섯 남자들이 다 여자를 버렸다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여자가 버린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 인생도 행복해질 수 있겠지'
그런 믿음을 가졌던 겁니다.
'제게도 그 물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와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다.
다섯 남자와 살았지만 지금 여섯 번째 그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16~18
이 여자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희망고문 같은 거였어요.
자신을 그 남자가 불행하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늘 또 남자를 찾는 거예요.
'이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저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그런데 그 누군가가 옆에 있어도 여전히 외롭고, 괴롭고
여전히 자기 인생의 결핍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우리의 영혼을 채워줄 수가 있습니까?
인생을 30년, 40년 살아보면 사람이 정직하게 알게 되잖아요.
쾌락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돈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성공이나 명예가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사람도 한계가 있어요.
심지어 여러분의 가족도, 여러분이 너무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그 사람도
여러분의 내면의 그 영혼의 밑바닥을..
정말 우리 영혼의 고갈되어 있는 그 빈공간을 채우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목마름은 여전한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있는 한, (세속적) 소망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그 소망을 붙잡았다가 다시 절망으로 떨어지고..
다시 소망을 붙잡고 올라갔다가 절망으로 떨어지는..
그 소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계속 타는 거죠.
여인의 인생이 바로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놀라면서 태도가 바뀝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 굉장히 까칠했잖아요.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어떻게 내 인생을 다 아느냐는 거죠.
그러더니 여인은 그 놀라운 예배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20
여러분 완전히 도덕적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인생을 살고 있는 여인이었잖아요.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자기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배에 대한 목마름, 예배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 여인도 알고 있었던 거죠.
'세상의 것이 내 인생의 해답이 될 수 없다.
결국엔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만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내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은 예배에 있고,
그 예배의 회복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무너져 있잖아요.
'감히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예배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장소가 본질이 아니다. 어떤 방법이 본질이 아니다.
진정성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본질이다.'
요4: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정말 영적인 예배, 성령에 임재하신 가운데
진리의 주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 그 예배를 하나님 받으십니다.
자 그러면 이 여인이 갖고 있는,
아무 얘기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그 예배에 대한 갈망!
예수님이 대답을 해주시면, 여인이 긍정적으로 응답을 했어야 되는데
25절 말씀에 보면, 여자의 얼굴이 상당히 어두워졌던 것 같아요.
무슨 얘기를 하냐면 '언젠가 메시아가 오시면 이 모든 걸 알려주시겠죠' :25
여인은 왜 갑자기 이런 초탈한 분위기의 이야기를 했는가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인생의 너무나 밑바닥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이 언제 그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게 자기에겐 너무나 요원한(먼)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메시아가 오시면 (그런 예배가) 가능한 날이 오겠죠'
그렇게 체념을 하면서 한숨을 뱉으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25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 :26
여인이 너무나 충격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8~30절에 보면, 여인은 마을로 뛰어들어갑니다.
여러분 마을 사람들을 안 만나려고, 일부러 그 낮 시간에 나왔던 거잖아요.
그런데 여인은 마을로 뛰어들어가서, 사람들 집 문을 두드리면서
낮 12시에 사람들은 돌아다니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다 불러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만난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 예수님은 나의 과거를 다 말해 주신 분입니다.'
아니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서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있는데도, 그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 여인은 이미 치유를 받은 거예요. 자유를 얻은 겁니다.
여러분이 어린 시절에 상처받았던 그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거..
그거 공개적으로 얘기하려면 너무너무 힘들어요.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고, 땀이 나고...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 있을 겁니다. 그건 아직 다 치유가 안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자신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과거를
사람들에게 자기 입술로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거에요.
완전한 자유와 치유와 해방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적용
저는 제 인생의 이야기를 나눌 때,
중학교 시절이 '제 인생의 중세 암흑기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굉장히 빨리 밑바닥을 쳤고, 빨리 주님을 만났는데
어두운 우울과 자살충동의 그 나의 골방에,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셔서 건져주신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내향적이고, 말을 안 하고..
제가 삼형제 중에 셋째 였는데,
저희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어요. '너는 장남 같은 막내다'
그리고 유치원생 때도, 형들은 이제 학교에 가고 나면
저는 아파트 계단에 앉아서, 오전 내내 앉아서,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이렇게 고물장수 지나가는 소리,
"세탁소 세탁~" 하면서 세탁소 아저씨가 지나가는 소리,
그렇게 계속 세상을 보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어린 나이에 하루 종일 계단에 앉아서
도대체 뭔 생각을 그렇게 했는지...
마치 노인정에 앉아있는 노인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거든요.
제가 제 인생의 내면의 어두움과, 절망과, 자살 충동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중3 경에 거듭났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교회에서 전도집회를 하는데
간증을 하라고 해서 간증을 자세히 했어요.
그때 부모님이 그 자리에 오셨다가 들으시고
'너가 그런 인생을 살았냐? 나는 몰랐다'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이 여인이 갇혀있던 어두운 골방의 주님이 찾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여러분이 홀로 골방에서 흘리는 그 눈물을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있나요? 가족도 다 알 수 없어요.
여러분의 형제도 다 알 수 없어요. 때로는 배우자도 다 알 수 없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그 어둠의 골방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가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됐어요.
제 인생의 BC와 AD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중학생 시절입니다. *중3정도 때
그 이전에는 교회를 다니기는 다녔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늘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내면의 깊은 어둠과 우울 가운데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 내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그렇게 건져 주시고 나니까, 딱 첫 번째 변화된 게 뭐였냐면
이 예수님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가 이번 달에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예수님'
개인 간증문들을 여러분이 쓰시도록 가이드라인을 보내드릴 텐데
순예배는 잠시 방학이지만, 순 카톡방에서 서로 나눠보시면 좋겠다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개인전도는, 자기 간증이 최고 무기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내가 만난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근데 증인이 되는 삶은, 어떤 방법론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전략을 세워서 되는 게 아니라고요.
▲오늘 본문의 이 여인처럼, 내가 주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돼 있어요.
'내가 만난 주님을 보십시오. 이분이 주님이 아닙니까?
이분이 정말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라고 증거하게 됩니다.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캐나다 벤쿠버에서 사역할 때, 이성O 집사님이 새벽 예배를 매일 나오셨거든요.
매일 같이 새벽 예배를 나오면서 하나님과 굉장히 친밀해지셨어요. *연예인
또 주변에 한국 기러기 엄마들이 많이 계셔서
그 엄마들을 참 이렇게 전도를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대접하고
또 혼자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많잖아요.
다른 엄마들이 어디 외출할 일 있으면,
아이들을 그냥 자기 집에 맡기라고 해서, 그 아이들을 돌봐주고...
일부러 8인승 벤 큰 거를 마련해서, 사람들을 라이드 해 주고, 도와주는 거에요.
내가 만난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렇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시더라고요. *전도하려고
그리고는 그들 중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니까 고민이 많잖아요.
자녀 문제, 남편 문제, 재정적인 문제, 여러 가지 고민들이 있을 때
그냥 주님 앞에, 그분들을 데리고 나오는 거예요.
앉혀놓고 무슨 교리 공부를 시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거예요.
근데 대부분 그 사람들을 주일예배에도 데리고 나왔지만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데리고 나오셨어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초신자를 새벽예배에 데리고 나오면 너무 충격을 받지 않을까?'
물론 충격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분들이 캐나다에서 자녀를 혼자 키우면서
어린 자녀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남편은 지금 한국에 있고 *직장
엄마 혼자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기가 약해지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울 수가 없는 거예요. 어딘가 통곡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토로할 곳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분들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여러분 인생에 하나님께서 참 위로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가 만난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 여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치유되고, 자유함을 얻게 되고 회복되었어요.
할렐루야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한 가지는
아직도 예수님이 물을 한 모금도 못 드셨다는 거예요. maybe
이게 무슨 얘기냐면, 여인이 예수님과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자기는 자유함을 얻었는데
물동이를 집어던지고 마을로 들어갔어요.
깨끗하게 좀 물을 한 그릇 떠서 예수님께 드리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놀래서 물동이를 집어던지고 갔어요.
마을을 다녀와서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이 '선생님, 이제 뭘 좀 드셔야죠'
그랬더니 32절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아들 예수를 왜 보내셨어요?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라고 보내신 거잖아요.
'내가 방금 그 한 영혼(여인)을 건졌기 때문에
나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나는 마시지 않아도 속이 너무 시원하다'
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너무 충격적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상당히 더우셨을 거거든요.
예수님은 사마리아 성까지 오전 내내 걸어가셔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우물가에 앉아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던 거잖아요.
근데 여인의 목마름은 해결해 주셨는데
정작 본인의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시고 앉아 계신 거예요.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녹초가 돼 있는 예수님!
그런데도 한 영혼을 건져냈다는 그 기쁨 때문에, 마냥 기뻐하시며 충만하신 거예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진정성입니다.
▲자 그런데 제가 이 본문을 계속해서 필름을 돌려보듯이 다시 보니까
몇 가지 중요한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부 유대에서 북부 갈릴리로 가려면
중간지대가 사마리아니까, 사마리아 땅을 불가피하게 통과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성지순례를 해보시면 이건 금방 알 수 있어요.
왜냐면 중앙산악지대는 길이 워낙에 험하고,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오늘날에도 심지어 강도들이 출몰합니다.
중부산악지대에서는 지나가는 차를 세워놓고 돈을 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단강 저지대로 우회해서
갈릴리로 갑니다. (통영에서 서울 갈 때, 부산 울산 포항 거쳐서 가는 식이죠)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서
여리고는 해발고도 마이너스 200 미터이죠.
일단 동쪽인 여리고로 내려가서, 거기서부터 그 요단강 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물을 구하기도 쉽고, 과일, 음식 구하기도
훨씬 수월했어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니까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라는 이 구절은 :4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거에요.
'나는 오늘 이 여인을 반드시 만나야겠다' 라는 뜻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 그 여인을 어두운 골방에서 건져내야겠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그 마을에 도착하신 시간입니다. 낮12시쯤이었잖아요.
근데 이것도 사실 성서지리를 공부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짧게 잡아도 120KM, 길게 보면 170KM예요.
여러분 군인들이 하루 행군할 때 20KM 행군합니다.
정말 강행군을 시킬 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킬 때 하루 40KM 갑니다.
그런데 일반인이, 차도 없던 그 시대에
빨리 가도 지금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까지 3일길이라고요. *하루40킬로
근데 지도상으로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수가까지가 갈릴리까지 1/3 지점 정도란 말이에요.
구글에 검색하면 31마일, 즉 50킬로 거리입니다.
그럼 아무리 아무리 빨리 가도, 예루살렘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면
저녁 5시, 6시나 돼야 도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낮12시에 도착을 했어요. 이게 말이 되냐고요.
예수님은 그러면 공간 이동하셨나요? 순간 이동 그런 방식을 쓰신 게 아니잖아요.
50킬로 거리라면.. 보통 걸음으로 걸어서 12~15시간 걸립니다.
그럼 예수님은, 낮12시가 되면 그녀가 문을 열고 물 뜨러 나오잖아요.
그녀가 나오기 전에 거기에 도착해 계셨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전날 밤 12시나, 아니면 밤9시에 출발하신 겁니다.
물론 날씨가 더운 나라는, 보통 밤에 다니기는 합니다만
어쨌거나 밤새워 사마리아까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물론 꼭 예루살렘에서 하룻사이에 걸어오셨다는 증거는 없습니다만)
한 여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것도 멸시 받는 한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밤새워 걸어가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궁시렁 거리면서 불평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하신 것은,
정말 매우 목마르셨을 것 같아요. 또 낮에는 덥잖아요.
아마 오전 내내 땀을 뻘뻘 흘리시며, 11시 55분까지,
그 시간을 맟추시려고 예수님은 애를 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예수님이 신경을 쓰신 것은,
그 여인과 예수님이 독대해서 만나셨어요.
여인이 우물가에서 이렇게 딱 봤는데
만약에 장정이 열댓 명이 있어봐요... 그러면 얼른 도망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열두 명의 제자를
다 마을에 들여보내셨던 것입니다.
진짜 음식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딱 두 명만 보내도 되는 것이었거든요.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심부름은 두 명을 보내셨어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마음 편하게,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거죠.
예수님이 한 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 모든 상황들을 준비하신 겁니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녹초가 돼서 앉아서 그 여인을 맞이하신 겁니다. 할렐루야!
한 영혼을 건지시기 위한 예수님의 진정성이죠.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는지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경험한 것이잖아요.
▲여러분 전도를 한다는 것은, 어떤 방법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는 사랑이고 눈물입니다.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예수님 뜨겁게 만나고 나서, 전도를 열심히 했다고 했잖아요.
불교신자에게도, 가톨릭 다니는 친구에게도..
'신이 어디 있어? 내 눈에 보여주면 내가 믿지' 이런 친구들에게도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설득도 해보고, 설명도 해보고,
논쟁도 하고... 그런데 계속해서 대화를 하다보니까
저도 전도를 하는 방법이나 지식이 굉장히 계속 쌓여가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논리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거죠.
그러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면, 그 사람이 믿느냐?
안 믿더라고요.
설득을 당해서 기분 나빠서, 더 안 믿더라고요.
그래서 전도를, 기신자보다 초신자가 잘하는 이유가 있어요.
기신자는 내가 성경 알고, 교리 좀 안다고, 사람에게 가르치려 드는 거잖아요.
근데 초신자는, 자기가 그런 걸 설명할 능력이 없어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만난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내가 만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거를 이야기하는 거죠.
여러분 건강한 성도는 전도를 해서 또 다른 성도를 낳고
건강한 교회는 개척을 해서 또 다른 교회를 낳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큼 기쁘고 감격적인 일이 없습니다.
저는 변증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무신론자들을 만나는 게 참 기대가 되고 늘 좋았는데요.
한 10여 년 전에는 청년들 층의 무신론자들을 많이 만났고
또 한 5년 전부터는 중고등학생들 층의 무신론자들을 만나고
또 작년에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짜리 무신론자 만났다고 했잖아요.
근데 단 한 사람, 딱 한 사람만 빼고
제가 설명했을 때 무신론을 다 그 자리에서 내려놨거든요.
근데 그 한 사람은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는 받아들였는데
기분이 나빠서 끝까지 아니라고 부인하더라고요.
근데 그 분도 나중에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서 돌아오게 됐어요. 할렐루야!
그가 무신론을 그 자리에서 내려놓으면서
'정말 하나님 계시다면 그 하나님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고백을 들을 때, 제 마음가운데 밀려오는 감동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내가 50년, 100년 돈을 벌고 세상에서 명예를 구하고 사는 것보다
나는 이 한 순간에, 이 한 영혼을 건져낸 것으로
내 인생의 모든 가치 있는 일을 정말 다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지난 주말에 한 부모님이 다급하게 연락이 와서 고3 수험생을 만났어요.
고3 수험생이 주중에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저도 일정이 많긴 했지만, 저보다 더 바쁜 아이잖아요.
그래서 만났어요.
근데 만나보니까 영재고를 다니는 정말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어요.
근데 이 친구가 갑자기 우울증을 호소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어요.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 똑똑한 아이답게
인생과 신앙에 대한 굵직한 질문을 네 가지를 하더라고요.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기독교에서 믿는 그 하나님이 맞습니까?
-세 번째, 저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친구들하고 늘 경쟁하고 갈등하며 경쟁에서 비교 우위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이런 삶의 노력을 해야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질문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한테
'이 질문들은 한두 시간씩 얘기를 해야 되는 굉장히 큰 질문들이다...'
그런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한 8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가 180도 바뀌었어요.
하나님을 알아가고 싶고, 그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싶고,
'내가 인생을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아이가 인생이 확 바뀌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한 생명을 건져냈을 때의 그 감격, 한 생명을 살려냈을 때의 감격,
여러분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고...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격이에요.
여러분이 인생에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지 않았나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어두운 골방에 갇혀있는 나를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만나주시고,
그 어둠의 골방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나를 살려주신 그 은혜
여러분 그 은혜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다시 뜨겁게 만난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을 전하는 건, 그 예수님의 증인되는 삶을 사는 건
그것이 성도가, 이 교회가 나아가야 될 가장 중요한 방향이고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 이유, 교회의 사명은 부흥이 아니라 한 영혼입니다.
결국에 부흥이라는 것이 규모를 넓히고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굉장히 잘못된 거예요.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진정성이, 내게도 있는가요?
내가 오늘 한 생명을 바쳐서 또 한 생명을 살려내는
그런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고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요?
그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진정성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내가 인생에 너무나 많이 지쳐서
내 가족에게도 다 이야기할 수 없고, 내 친한 친구들에게도 다 이야기할 수 없고
홀로 내 영혼이 안에서 함몰되어 가는 것을, 무너져 가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어떻게 버틸 수가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수가성 여인처럼 인생에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나 주셔서 빛으로 인도해 주시고
세상 앞에 자유할 수 있도록 해방될 수 있도록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찬양하며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회복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서
그 기쁨과 은혜가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뜨거운 예배의 자리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고
그 예배의 은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의 은혜가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될 지여다. 주여 한번 해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원제목 :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