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계로 복지 살기 준비 민15:1~41 2007.08.13.설교스크랩 <안식> 관련글 모음 자, 오늘 본문 민15장은 앞에서 읽은 14장과 뒤에 16장 말씀 사이에 끼어있는 것은 당연하데 그 내용이 14장과 16장 사이에서 시간적으로 38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장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정탐 보고를 하는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10명 모두 다 그 땅을 악평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가나안 7족속을 점령하고, 그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이지마는 점령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악평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평가,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하고 그리고 출애굽의 사건 자체를 회의(의심)하고 차라리 돌아가자 라고 하는 그러한 불신앙을 표현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되는 그 자리에서 진군의 방향을 돌리셔서 광야에서 40년 그러니까 이미 2년이 지났으니까 38년의 세월을 지내게 하시면서
그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그 당시 20세 이상인 모든 장정들이 모든 성인들이 다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 38년을 지내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광야생활 38년의 생활이 민15장에 다 함축되어 들어가고 민16장부터는 38년 광야생활의 마지막 부분이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38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그 세월동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250만명 가량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정말 물 한모금 안 나오고 풀 한 포기 돋지 않는 이 광야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었겠고,
또 남자만 쳐서 60만 명이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광야에서 쓰러져 죽는.. (어차피 20세 이상만 계수했으니까) 그러니까 남자로만 해도 60만 건의 장례 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죠?
여자와 그 외에 병들어 죽거나 이런저런 것 다 치면 얼마나 많은 장례 건이 있었겠습니까?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 15장에 다 모아서 의미만 추려서 이야기하고 38년의 기간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그런 장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38년 광야생활의 함축된 의미로 선정되어서 쓰여진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광야생활이 뭡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준비시키는 기간입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통하여 복지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로서 삶을 익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인데 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3단계로 설명이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가나안 복지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했습니다. 그러면 복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의 패턴을 갖고 있느냐?
3가지로 오늘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 첫 번째가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15:1~31 2. 두 번째가, ‘안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5:32~36 3. 세 번째가 ‘율법을 잊지 말고 지킬 것’을 말합니다. 15:37~41
◑1. 첫 번째 단계는 제사의 단계
제사의 단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제사, 죽이는 거예요. 번제라든지 화목제라든지 속죄제 속건제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제사입니다. 이게 복지 살기에 첫 번째 단계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된 삶을 살려면.. 즉 정말 내 마음에 기쁨이 끊어지지 않고, 감사가 끊어지지 않는 삶을 살려면 세상으로 뻗어가는 나의 관심을 차단시켜야 됩니다.
이렇게 차단시킬 때 비로소 어떤 마음 상태가 됩니까? 마음의 기운이 위로 향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안식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2. 안식의 단계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이기도 합니다마는 안식의 단계의 의미는, 우리 생활 속에서 늘 안식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이 뭡니까?
이게 바로 기도(祈禱)에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이때 그 사람들을 다 쫓아내십니다.
최절정의 성공의 시간에 그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는, 산 위로 혼자 들어가십니다. 제자들까지 먼저 배 태워서 보내시고 바다 건너 쪽으로 가라고 보내시고 혼자 산 위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이게 안식이에요.
모든 관심을 다 끊어버려요. 제자들에 관한 관심도 다 끊어버려요. 마음에서 보내버리는 겁니다. 마음에서 보내버리고 다 보내버리고 그 성공의 순간도 다 마음에서 보내버리고 하나님께로 몰입하는 시간... 이게 바로 안식의 단계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첫 번째 제사와 두 번째 안식의 단계가 붙어서 이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사의 단계라는 거 삶에 대해서 관심을 끊는 거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이 삶에서 관심을 끊는 제사적 의미가 바로 예배에요. 예배나 말씀을 듣기 위한 어떤 집회시간. 이게 선약의 단계라고 그랬어요.
가끔 보면 어제 정해진 예배시간 주일예배 시간 같은 것도 다른 약속들이 있으면 예배를 못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좀 뒤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이에요.
주일 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영원한 선약이 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여기서 복지의 삶을 살고 싶으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복지의 삶을 살고 싶으면 예배시간과 적어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뭔가 말씀 앞에 나오는 시간,
그래서 내가 그 시간만큼은 세상 일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어내는 그러한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예배를 영원한 선약으로 만들어야 돼요.
그러므로 주일 날 예배시간은 영원한 선약이기 때문에 어떠한 약속과 어떠한 사건도 이 선약을 취소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생각이 있어야 복지의 삶이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지의 삶의 3단계 패턴이 있는데 그 첫 번째 제사, 제사라는 게 끊는 거예요. 예배시간이 뭐냐? 이 예배당이라는 게 무덤이 되어야 돼요. 어떤 무덤? 세상에 대한 무덤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배가 갖는 또 하나의 기능은 바로 안식의 기능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끊는 기능이 있는가 하면 이제는 그 세상에 대한 관심이 끊어진 차단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몰입하는 기능이 또 있는 것이에요.
영광을 올린다, 찬송하고 이 모든 과정이 다 그러한 두 가지 단계가 반복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여러분 금방 끊어져요? 그렇게 금방 끊어지지 않아요. 찬양을 10분 20분 하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점차로 빠져나가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드디어 말씀을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께 몰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앞에 찬양을 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거, 또 말씀을 듣기 전에 예배시간에 그렇게 많은 순서들이 있지요? 사도신경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성가대 찬양이 있고... 뭐 이런 많은 시간들이 있는 게 뭡니까?
이 예배실의 공간 안에 들어와서 세상에 관한 관심을 끊어내는 다시 말해서 출애굽하는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께 몰입할 수 없으니까요.
광야가 뭡니까? 아무 것도 없어. 관심거리를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이 관심이 모두 차단된 상태가 광야에요.
광야에서 뭐하겠어요? 소풍가겠어요? 뭐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못해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이 됩니다. 자, 그러고 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게 뭡니까?
◑3. 율법을 지키게 되는 단계.
하나님이 좋아져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게 되면 율법은 그냥 이루어집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차원으로 율법을 대하면, 율법을 못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들일 수 있으면 그러면 율법은 저절로 지켜진다는 거예요.
영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면 저절로 율법이 지켜지는 단계. 정해진 율법뿐만 아니라 이제 인생의 매 단계 단계마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그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제 구체적으로 나만의 삶이 있지 않습니까? 나만의 삶에서 구체적인 사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냐 하면 39절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옷을 술을 달아라.’
눈에 보이는 술을 달아서 그걸 볼 때마다 ‘아, 내가 지금 내 마음의 소원대로 가는 게 아니라, 방종하게 하는 마음의 소원대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어야 된다. 눈에 보는 대로 반응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이 세 번째 단계가 어떤 단계냐 하면, 하나님 마음으로 가득한 겁니다.
그런데 옷 술을 보면서 옷 술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지금 하나님이 내 앞에 보이고 있느냐? 아니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을 내가 보는 대로 직접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좋다 나쁘다 싫다, 마음이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따라서 내가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위에서 내려오셔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지금 표현되려고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뜻이 내 소원이 되고 있느냐? 눈으로 보는 정욕이 내 소원이 되고 있느냐? 이걸 엄밀히 가려야 된다는 겁니다.
어떡하든지 마귀는 나를 위해서 제일 좋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 줄 알아요. 내가 복되게 살고 내가 기쁨으로 살고 내가 감사하면서 사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어떡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서 표현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떡하든지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게 만들고 귀에 들리는 것에 흔들리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1단계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어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2단계는 그 다음에 그 관심들을 다 모아요. 자식에 대한 관심, 남편에 대한 관심, 아내에 대한 관심, 사업에 대한 관심을 일단 모아요.
이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세상의 일이 내 마음에 관심을 끌고 가고 마음이 방종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거든요?
주님의 십자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자, 남편 문제도 주님의 십자가로 관심을 차단하고, 자녀 문제 차단하고, 아내 문제 차단, 사업 문제 차단, 건강 문제까지도. 내가 지금 아파도 아픈 순간에 아픈 몸에 대한 것을 십자가로 한번 씨름을 해봐요.
처음엔 잘 안 돼요. 당장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만 생각한다고 당장 마음에 관심이 끊어지는 게 아니지요.
기도를 해야 돼요. 기도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10분이고 20분이고 30분이고 계속 십자가를 통해서 그 마음을 끌고 가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내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2천년 전에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라는 단계를 통해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한 곳에 모아집니다. ‘아버지, 사랑하고 싶어요. 내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라는 마음을 갖게 되면 드디어 하나님과 만납니다.
이게 뭡니까? 안식의 단계입니다. 온통 마음을 하나님께 다 집중하는 거 이게 안식의 단계의 참 의미에요.
안식일 날 무슨 일을 하지 말아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지 마는 이유는, 하나님께 몰입하기 위해서.
3단계는, 그래서 십자가로 모든 관심을 차단할 때, 마음이 이제 하나님께 집중되지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만나집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실감이 생깁니다.
이제 아버지가 내 안에 가득히 들어왔어요. 그리고 눈을 번쩍 뜹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관심을 끊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쳤던 그 문제를 아버지와 함께 바라볼 때 그 문제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표현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능력이 나타나고 자식의 문제 남편의 문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의 능력이 나타나면서 하늘나라가 실현되어가고 복지가 이루어지면서 기쁨과 감사의 삶이 이어집니다.
▲근데 이렇게 살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에 사로잡혀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에 또 사로잡혀서 찔찔 맵니다.
이러면 또 다시 이 3단계의 첫 단계 제사 단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또 씨름하는 단계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3단계를 순환하고 반복하는 동안에 우리의 복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복지가 계속해서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몸을 입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우리 외부 이 세상을 관계하고 있는 동안 세상에 마음이 끌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에요.
끌려가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끌림을 당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질질 끌려가는 것이 잘못 아닙니까? 끌려고 하는 순간이 될 때마다 ‘야, 내가 마음을 또 빼앗기려고 하고 있구나. 이 문제 저 문제로...’
그러면 다시 제사의 단계로 들어가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몰입하고, 하나님을 가득히 마음에 모신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또 그 문제들을 향해 나가게 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