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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

LNCK 2023. 8. 14. 11:02

◈요나의 표적           마12:39~42                  2020.12.06.

▣ 신유, 축귀, 기적

아주 오래전 얘기입니다. 1957년 그때 제가 신학교 졸업반이었습니다.

그때 서울에 있는 성도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어느 날 저를 불렀습니다.

유명한 황은균 목사님인데, 저를 불러서 말씀하기를

'지금 신학교 졸업반이라며?'

'그렇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해야지. 설교를 잘해야 목사가 목회를 바로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설교를 연습 해야 되지 않겠나?

내가 저녁예배 시간을 줄 테니까, 설교 원고를 써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제가 설교를 생전 처음 하게 됩니다.

문구를 써 가지고 갔더니, 이렇게 읽어가다가

'이 말이 여기에 필요한가?'

'글쎄올시다'

'그러면 지워버리지 뭐' 하고는 지어버리고...'

 

그렇게 지운 곳을 교정해서 다시 써오라고...

그런 식으로 세 번을 다시 써갔는데

'이만하면 됐어' 그리고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끝난 다음에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가서 30분 동안 제가 설교에 대해서 상담을 받게 됩니다.

담임목사님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설교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뭐야?'

제가 말하기를

'설교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자기를 이기는 겁니다.'

했더니 목사님이 크게 감동을 받으면서

'목회 10년을 하고도 깨닫기 어려운 건데

자네는 벌써 이것을 깨달았으니

참 앞으로 훌륭한 목사가 될 거라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경 읽어라'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내가 성경 많이 안 읽고

교인들에게 기도 많이 하라 하면서

나는 기도 많이 하지 않고

구제봉사하고 검소하게 살고, 경건하게 살라

내가 말하는 만큼 내가 행동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일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고 했더니

무릎을 치면서 헌복사님 이 그렇게 기뻐하셨어요.

참으로 귀한 통찰력을 가졌다고

마지막에 제게 귀한 일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벌써 그것을 깨달았으니, 자네는 훌륭하다'고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준이 돼서, 나를 따르라!

내가 성경 읽는 것처럼 읽어라!

내가 하는 것처럼 하라!' 이렇게 내가 기준이 되는 순간 율법교사가 되고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가 되는 거야.

그리스도는 제외 되고 자기를 따르라 하는 것이 되니까

그건 잘못된 거지...

또 그런 거 하면, 자기는 안 하면서 남 보고 하라 그래요.

나는 기도 안 하면서 기도하라!

나는 안 하면서 남에게 희생하라!

이렇게 가르치면 위선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율법주의자와 위선자,

이 긴장관계 속에서 목회하는 것이 목회자다!'

제가 일생 잊지 못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빙그레 웃으면서,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고민이 되거든, 그때마다 요나서를 읽어! 알았나?'

그다음에 돌아와서 요나서를 두 번 세 번 읽어보니까

왜 '요나서를 읽으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요나는 못된 사람이에요.

선지자 중에 아주 못된 선지자에요.

그러나 그 요나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그걸 말씀하는 거에요. '요나서를 읽어라!'

대단히 귀한, 일생에 제가 기억하고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요나가 좌충우돌 성질 내는 선지자였지만,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뜻인듯)

◑표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는 대단히 중요한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reading comprehension(읽고 이해하기)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책을 본다고 보는 겁니까? 깨달아야 되는 거지요.

책을 본다고 보는 겁니까? 집중력이 없잖아요.

reading comprehension, 읽었으면 읽는 데 대한 이해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읽어도, 들어도, 보아도, 만져도..

아니 어떤 데는 매를 맞아도 깨달음이 없어요.

리딩 컴프리핸션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사건을 읽어내는.. 메시지를 깨닫는 그것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다 무효가 됩니다.

가령 어떤 때 우리가 몸이 아프다고 합시다.

그래도 아픔은 있는데, 뜻은 몰라요.

원인도 몰라요, 결과도 몰라요.

느낌도 없어요, 깨달음도 없어요.

리링 컴프리핸션이 없어요.

사건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매사에 reading comprehension 이게 필요하단 말이에요. *주제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이적을 통하여, 표적을 통해서 말씀 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요한까지도 제자를 보내서 하는 말이

'오실 이가 당신이십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긴 얘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며, 문등병자가 깨끗해지며, 중풍병자가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5

이 사실을 가서 (스승 세례요한에게) 말해주어라.. (세례요한도 표적을 보고도 이해력이 부족했죠)

이게 뭘 말하는 겁니까?

이 사건 속에, 이 표적 속에 증거가 있고, 메시지가 있는 거예요.

그런 고로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날에도 표적은 차고 넘칩니다. 표적은 충만합니다.

그렇지만 표적을 읽는 능력 reading comprehension 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이해를 못합니까?

믿지 않기 때문에, 불신하기 때문에, 이해를 못합니다.

그 표적,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은혜도 없습니다.

'이해'가 중요한 겁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여러 표적들을 주시는데,

우리가 그걸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 60만 대군이 육지같이 건너갔습니다.

이런 엄청난 표적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이 표적 후에 자세히 성경을 보면, 불과 두 주일밖에 안 됐는데,

두 주일 후에 십광야를 지나가다가 물이 없다고.. 물이 좀 쓰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냐'고 원망합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겁니까?

도대체 홍해를 건너는 그 엄청난 표적을 왜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고로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 하게 됩니다.

그리고 큰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말씀으로도 가르치셨지만

사건 속에서도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 속에 나타난 역사를, 성경은 세 단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테라스, 두나미스, 세메이온.. 헬라 말입니다.

-테라스라는 말은 '기적' 혹은 '이적'입니다. 놀랍다는 거죠.

영어로 말하면 원더 wonder 입니다. 깜짝 놀라는 거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깜짝 놀라는 거죠. 이건 이성과 자기 경험 밖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두나미스는 '능력 power' 입니다. '다이내믹'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일이다.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수 있었어요. 이게 바로 두나미스입니다.

-세메이온은 '표적 signs' 입니다.

어떤 일을 앞서 가르쳐 보여준다.. 라는 뜻이죠. 거기에 담긴 뜻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주로 '기사'와 '능력'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표현했는데,

요한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대부분 '표적'으로 표기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기사와 표적'이란 말로 썼죠.

'어떤 사건 속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표적으로 충만합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 사랑함'에 대한 표적은, 증거는 '독생자를 주심' 입니다.

이걸 이해 comprehension 해야 되는 거죠. 이걸 읽어야 되는 거죠.

그 내적 의미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에 보면, 마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요3:16절의 표적을 부인하고,

이 엄청난 기적, 이 사건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건만

그 말씀을 다 부정해버리고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혀서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더 보일 것이 없느니라' :39

슬픈 얘기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나온 일이 있죠.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가장 큰 표적이라는 거죠. 요3:16절이 가장 큰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가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시관들은, 그 표적을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적용 / 표적을 볼 줄 알고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만, 표적도 이해해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그 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말씀과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오늘도 너를 사랑한다.

네 영원한 생명을 내가 보증한다.' 그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과거의 역사, 그 전부가 표적입니다.

요즘 2020 들어 많은 분들이 말합니다. 늘 한국의 정세와 정치 상황을 염려합니다.

'중국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지, 왜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그래서 저는 '역사를 똑바로 읽으라고, 역사에 나타난 표적을 이해해라고'

말합니다.

20세기 세계 역사를 보면, 좀 이상한 독재자들이 나타나서 정권을 잡고

사람들을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인물들이 있었죠.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그러나 그 뒤에, 그 배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고 계시잖아요.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역사를 똑바로 읽어야 됩니다.

(*안 그랬으면 세상이 벌써 망했겠죠. 그러나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바로 읽고 나면, 정치가들에 대해서 실망할 것 없습니다. *2020년 설교

정치란 원래가 그런 거예요.

걱정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은 악한 자를 심판하실 때

그보다 더 악한 자를 이용하십니다.

악한 자를 통해 심판하시지, 선한 자를 통해서 악한 자를 심판한 역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를 심판하실 때, 그보다 더 악한 자를 통해서 심판하시고

그다음에 선한 자를 세우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역사 속에, 역사의 컨텍스트, 역사의 맥락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즉 역사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그러가 하면 나의 경험(내 개인의 역사)도 표적입니다.

내가 겪었던 경험 하나하나가.. 이게 표적 아니겠습니까?

작은 일들로부터 해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차가 사고 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하나하나 되어지는 일 보세요.

다 표적입니다. 표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 한태범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별명이 '예수 동생'이에요. 그렇게 불릴 만큼 정말 예수님을 닮은 분이세요.

그 집에 가 보면, 그 안방 한 모퉁이에, 배낭이 하나 걸려 있어요.

먼지 묻은 배낭이 하나 오래전부터 걸려 있어요.

한태범 장로님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올 때

인민군이 따라오는데, 도망을 가는데, 인민군이 뒤에서 총을 쏘았어요.

그냥 총에 맞아서 팍 쓰러져 가지고 '아이고 나 이제 죽었다' 그랬는데

조금 있다 일어나 보니까 안 죽었더래요.

그 배낭에 총알이 3개가 박혔어요. 그래서 그 배낭 때문에 살았어요.

그래서 그 배낭을 안방에 딱 걸어놓고 있어요.

살다가 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배낭만 쳐다보면 은혜가 돼요.

여러분 이게 표적이에요. 표적이 그뿐이겠습니까?

하루하루 사는 게 전부 표적이죠. 우리의 생애 전체가 그렇습니다.

특별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니요,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표적을 통해서, 내게 들려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문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면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으리라

내가 문 앞에서 두드리노니 문을 열어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표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제

-물론 성경도 읽어야 되겠고, 그 외에도

-오늘의 역사를 읽고

-내가 당하는 경험 속에서

그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표적을 읽을 줄 아는 reading comprehension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음성이 들려올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 가운데서 평안의 은총, 평강, 샬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악한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밖에 더 보일 것이 없느니라'

기도하십시다.

표적을 듣고, 표적을 보고, 표적을 만지고, 표적 속에 살면서도

완악하고 미련하고 우둔해서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외면하고

또 다른 표적만 구하며 사는 저의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영적 지각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순간순간 주의 메시지를 듣고, 느끼고, 감격하면서

그 말씀에 응답하며 사는 복된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관련글 ◑내가 곧 길이요.. Max Lucado

 

아프리카 사파리, 깊은 정글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그 사람은 현지인 가이드와 함께 깊은 정글 속을 체험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벌초용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정글을 헤쳐 나가며 길을 만들었다.

키 큰 잡초들과 나뭇가지들이 가이드 앞에서 베어져 쓰러졌으며

 

그 관광객은 그를 뒤따라 정글을 헤쳐 나가던 중이었다.

 

날씨는 무지 덥고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거의 탈진해버린 관광객은 앞장 선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지금 도대체 우리가 어디쯤 있는 거요?

당신은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거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소?”

 

그러자 그 노련한 가이드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 정글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기나 하시오!)

 

▲우리는 오늘날 그 관광객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다.

“주님, 지금 저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습니까? 제 눈엔 길이 안 보이는데요...!”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 가이드처럼, 시원한 대답을 안 주시고

내가 곧 길이라며, 무조건 따라 오라고만 하신다.

 

물론 주님이 어렴풋한 힌트를 한두 가지는 주시기는 하신다.

그러나 확실한 표적은 안 주신다.

 

그래서 보통 우리들은,

지금 자기가 어느 길을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어리둥절 한다.

 

마치 그 관광객이 정글 속에서 동서남북을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우리가 꼭 그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당황하며 초조해 한다.

 

▲1. 주님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시진 않지만,

그 대답보다 더 큰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 골치 아픈 정글을 없애 버리시는가?

- 아니다. 풀과 잡초는 변함없이 여전히 무성하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주님은 거기 정글 속에 있는 무서운 맹수들을 없애주시는가?

-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위험은 언제나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예수님은 정글(환경)을 변화시켜주시지는 않지만,

주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강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절망해서 중간에 주저앉도록 하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인내해서 정글을 헤쳐 나가도록... 우리를 강화시키신다.

 

▲2. 크리스천의 소망 : 가이드의 약속

 

주님은 깊은 정글과 같은 곤경에 처한 우리에게

‘내가 끝까지, 네가 가는 길에 너와 함께 하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우리는 이 약속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정글을 헤쳐 나가는 인생길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동행의 약속이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하는 ‘소망’이다.

 

그렇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불사하시는 목자이시다.

이 얼마나 든든한 목자이신가!

 

크리스천은, 주님이 주시는 소망,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고는,

(물질, 지위, 권세, 인맥 등) 그 무엇으로도

결코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