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말씀 사경회 (7/7 저녁)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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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에베소교회를 향한 중보기도 엡1:15~23 ☞ 에베소서 설교모음
본문은 엡1:15~23절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이게 15~23절까지 8구절로 나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한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엡1장은 모두 3문장입니다.
1~2절, 3~14절, 15~23절 이렇게 3문장이죠.
그러니까 (문장이 길어서) 이게 사실은 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본문의 바울의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최고봉'
본문은, 설교 제목처럼 사도바울의 에베소교회 향한 기도가 언급되어 있어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도가 굉장히 많이 나와있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복기도도 있고
-다니엘서의 다니엘의 기도,
-느헤미야서 기도 등 굉장히 다양한 여러 기도들이 성경에 나오는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주기도문 등 예수님의 기도를 빼고
성경에 언급된 기도들 가운데 최고봉을 고른다면,
본문의 사도바울의 기도입니다.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어떻게 다른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도,
기도의 최고봉을 골라라! 라고 말한다면.. 단연코 본문의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기도다!' 라고 말할 때에
그 기도의 정수, 기도의 최고봉으로 언제든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에베소 1장과 3장이 언급되는 사도바울의 기도에요. *3:14~21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기도를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본문의 바울의 기도를 보면, 우리가 두 가지를 배울 수가 있어요.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 즉 기도의 내용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즉 기도의 태도
이 두 가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보세요. 사도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연금되어 있는 상태고
(*유대인들이 고소하자,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해서,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
그러니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고가 사라지지 않도록 연금해서 지키는 상황.
추정컨데, 원고 측이 재판에 불참하여 결국 무죄 방면됨.
실제로 재판이 열렸다는 기록은 성경에도, 역사문헌에도 없음)
지금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생겨서 분열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어요.
뿐만 아니라 여전히 교회에 죄가 있어요.
그러니까 총체적인 어려움이 에베소 교회에 있습니다.
그 소식을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들었어요.
그 가운데서, 그 상황에서 지금 기도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이 도시의 교회를 잘 모르겠지만
가까운 A라는 교회,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어떤 A교회가 있다고 칩시다.
제가 지금 설교 하기 전에 '여러분 혹시 어제 A교회 소식 들으셨어요?
그 A교회가 지금 대판 싸움 났답니다. 신천지 이단도 들어왔답니다.
당회랑 지금 담임목사측이 싸운다고 해서, 지금 교회 깨어지기 일보직전이랍니다.
서로 막 비아냥거리고 지금 교회가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 설교 듣기 전에 A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 자, 우리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라고 제가 부탁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기도하시겠어요?
'하나님 빨리 분열이 그치게 하시고, 이단이 떠나가게 하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 상식이에요.
그런데 본문의 바울의 기도를 잘 살펴보세요.
지금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택 연금되어 있고,
분열, 거짓 가르침, 여전한 죄.. 이 세 가지 에베소 교회의 소식을
사도바울이 들었어요. 그리고 하는 기도는 네 가지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성도들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십시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십시오.
-믿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해주십시오. 이 네 가지예요.
여러분 그 네 가지 기도에, 어디에도 교회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1:15~23절에 언급되는 사도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만 본다면
에베소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아니 교회에 문제가 있는 거는 우리가 다 아는데,
지금 깨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그 첨예한 대립들, 갈등들이 있어요.
서로를 향한 비방과 판단과 정죄가 있어요. 깨어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거짓 가르침이 있어요. 여전히 죄가 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도에는
그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단 한 마디도 언급이 안 돼요. 왜일까요?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증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인이 아니에요.
여러분, '증상'이 해결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원인을 고쳐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몸에 무슨 병이 나서 몸에 열이 났어요.
그러면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같은 해열제 먹으면 치료되나요?
그것은 근본적인 원인 치료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에요.
사도 바울은 그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듣자, 문제(증상)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왜 이 문제가 생겼는지, 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뭔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기도의 최고봉'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우리 눈에는, 우리 귀에는,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들, 문제들만 보여요.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급급해요. '이거 빨리 해결해야 돼'
그래서 그 문제만, 그 증상만 없어지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여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면, 증상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또 나타나요.
그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야 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기도에서
문제 가운데 있을 때에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
기도의 내용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죠.
그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배우기 전에
우리가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이 부분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기도의 태도를 먼저 살펴보고 싶습니다.
◑1. 바울의 '감사 기도'
사도바울은 에베소 뿐만 아니라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로마 등
모든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마다,
항상 이 말로 시작합니다.
1:15~16절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뭔가요? "감사"입니다.
말이 됩니까? 지금 감사할 때에요?
아니요. 분노를 쏟아내야 되죠. 판단해야 되죠. 정죄해야 되죠.
근데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앎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기록한 13서신 가운데, 문제의 끝판왕, 문제가 제일 많았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어요. 고린도전서 전반부에 교회의 여러 문제가 나열되어 나오죠.
그런데 그런 고린도교회를 위해 편지를 보낼 때도
사도바올은 항상 "감사"로부터 시작해요. 왜일까요?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도바올은 그 감사의 비밀, 더 정확히 말하면 감사의 능력, 감사의 위력,
감사의 파워를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감사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감사'가 좋은 것은 우리가 다 알아요.
그런데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의 능력, 그 감사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도바울은 감사의 비밀을 알았어요. 감사의 능력을 알았어요.
그래서 언제나 입만 열면 '감사'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바울은 그 감사의 능력, 감사를 비밀을
어디서 발견했을까요?
당연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발견합니다.
사복음서에 언급된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자세히 읽다 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항상 사역하시기 전에, 항상 먼저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요11장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사입니다.
요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며칠이 지났어요. 다시 말해서 몸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패되기 시작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살아났어요.
여러분,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기도한 사람이 없어요. 누구도 상상한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한번도 본 적이나, 들은 적이 없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기가 막힌 겁니다. 지금 막 죽은 신선한 시신이 아니에요.
이미 죽은 지 며칠 되어서 부패된 그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살아났어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하시는 게 있어요.
요11: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여러분, 여기 표현을 보세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으로' 인해서 내가 감사합니다..가 아니에요.
아직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드리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의 패턴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무엇을 하시냐면, 감사를 먼저 하세요.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축사'하셨어요. *give thanks
즉 감사기도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보시면 어떤 패턴을 발견했냐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항상 <감사>를 하세요.
그러니까 기적이 감사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감사가 기적을 가져온다고요.
사도바울은 이걸 알았기 때문에 그 에베소 교회에,
그 외에도 문제 많았던 고린도교회에, 로마교회에, 데살로니가교회에
그 모든 교회에,
기적이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바울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지적이 아니에요. 판단이 아니에요.
그럼 뭔가요? 감사예요.
왜요? "감사"가 숨겨져 있던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이에요.
△근데 우린 왜 이렇게 감사를 못할까요?
우린 왜 이렇게 감사에 인색할까요?
연초가 되면 우리는 다 결심하죠.
'나는 올해에 감사 노트 써야지, 올해는 감사를 많이 할 거야'
그런데 일주일을 못 넘겨요. 왜일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제 여기서부터예요.
왜 우리는 감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왜 그렇게 감사를 못할까요?
구약부터 신약성경까지 감사라는 단어는 모두 196번 나옵니다.
구약에 132번, 신약에 64번 나옵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는 않아요.
그 중 구약 시편에 77번 나옵니다.
신약에 64번이 나오는데, 무려 48번이 바울서신에 나와요.
그러므로 구약에서 감사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다윗이고,
신약에서는 감사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뭔지 아세요? 감사는 환경의 열매가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11년 동안에 1차, 2차, 3차 세 번의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에
평안했나요? 아니요. 두들겨 맞았어요. 아홉 번이나.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강도의 위험과, 배가 세 번이나 파선당하고..
춥고, 배고프고, 거절당하고... 여러분 세상에 그런 기구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감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다윗은 약 15살 정도 때,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아요.
그 후 약 15년 동안 사울을 피해 도망다닙니다. 여러분 무려 15년이에요.
15살이면 중학생이에요. 여러분 중학생이 그때부터 15년 동안 도망다닙니다.
기구한 삶이죠.
그런데도 아이러니한 것은, 구약성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아브라함과 모세 등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감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다윗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사는 환경의 열매가 아니에요.
'나는 환경이 안 좋아서 그래'
'난 지금 내 상황이 어려워서 그래'
아니요. 환경이 나아진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환경과 감사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만일에 감사가 환경의 열매라면
감사를 가장 많이 해야만 했던 사람은,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이죠.
근데 그들의 감사와 찬양이 며칠을 못 가요. 그러니까 기억하세요.
감사와 환경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감사는 무엇의 열매일까요?
감사를 하기 위해, 그냥 다른 감사가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감사,
그 능력을 일으키는 감사를 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요?
여러분 이게 골로새서 말씀에 있습니다.
골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기에 밑줄 그어보세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감사가 넘치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뭔가요? 믿음입니다.
감사는 환경의 열매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예요.
'나는 왜 이렇게 감사가 좋은지 아는데, 감사에 능력이 있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감사는 못할까요?'
그건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환경 때문이 아니라요.
그러니까 기억하세요. 모든 사람 눈에 숨겨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 원하는
그 기적을 끄집어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이 바로 감사고,
그 감사는 환경의 열매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예요.
내 삶에 믿음이 없다면.. 죄송합니다만 감사 못합니다.
그냥 입버릇처럼 감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감사에는 절대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나 정확한 믿음에 근거한 감사는
깜짝 놀랄 만큼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세 단어죠?
히브리어 성경에는 한 단어입니다. '짤마웨트'
이 단어를 직역하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흙같은 어두움'이에요.
여러분 만약 이곳에 모든 창문을 가리고 불을 끈다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요.
저는 학생들과 이스라엘에 매년 가요.
거기서 항상 유대광야에 갑니다.
여러분 거기는 계곡이 20M, 30M 심지어 50M짜리가 있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모래가 굵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워요. 모래가 곱지 않아요.
그래서 쉽게 미끄러져요. 한 번 미끄러지면 20M, 50M 밑으로 떨어지면 죽습니다.
저는 항상 학생들이랑 밤에 가요.
구름이 가려져서 달과 별 빛이 없다면, 그 광야는 문자 그대로
'짤마웨트'입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발 아래 20M 계곡이 있어요.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미끄러져 떨어져요.
그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예요.
그런데 다윗이 말해요. '난 두렵지 않아!'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여기서 '상'은 테이블인데, 양으로 치면 목초지예요.
왜 하필이면 내 목숨을 노리는 늑대나 승냥이나 곰이나 맹수 앞에
목자가 양에게 그 밥상을 차려줘요? 먹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양이 맛있게 먹어요, 체하지도 않고.
어떻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어떻게하면 우리도, 이 시23편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잘 들어보세요. 시23편을 푸는 열쇠는 1절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게임 끝!
그러나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푸른 초장이에요. 쉴 만한 물가예요.
나를 해하려고 하는 맹수는 어디도 없어요... 그래도 불안합니다.
내 남편도 잘 돼요. 내 아내도 잘 돼요.
건강? 그렇게 문제 없어요. 내 통장에는 돈이 많아요.
내 자녀도 아무 문제 없어요... 근데 불안해요. 이게 뭐죠?
중요한 건 믿음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푸른 초장이랄지라도
쉴 만한 물가라 할지라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내 삶은 내가 꾸려나가야 돼!' 하면, 두렵습니다.
모든 게 염려로 내 앞에 다 깔려 있어요.
그러나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순간
지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어도, 맹수 앞에 있어도... 두렵지 않아요.
염려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뭔가요? 믿음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그 믿음에 근거한 감사는, 기억하세요, 언제나 기적을 가져옵니다.
▲교회에 그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솔직히 필요 없습니다. 한두 사람의 믿음이면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알아요. 누가 그 믿음을 가지시겠습니까?
그냥 입버릇처럼 하는 그런 감사가 아니에요.
내 기도가 잘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안 그러면 막 하나님앞에 떼 쓰고...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 근거한 감사,
그 감사는 언제나 기적을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의 분열과, 다툼과, 갈등과, 그 거짓 가르침과
그 수많은 죄로 덮여있어서 사방의 우겨쌈을 당했다 할지라도
사도바울은 가장 먼저 감사로 시작하는 것이에요.
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멋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게 기도예요.
◑2. 두번째, 여러분 문제는, 우리를 하여금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요.
어떤 질병에 걸렸거나, 관계가 깨졌거나, 어떤 어려움이 오면
그렇게 기도 안하던 사람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지만, 잘 들으세요.
절대 기도할 때, 우리의 시선이 문제에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상황은, 내 두 발은, 문제의 정중앙에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 가운데 기도한다 할지라도
눈을 들어 나의 시선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어야 됩니다.
근데 우린 왜 이렇게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더 다운되나요? 더 우울해지나요?
더 염려로 가득하나요?
기도할 땐 나의 모든 시선이 '문제'에 두기 때문에 그래요.
참 너무 아이러니하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는데,
나의 모든 시선은 그냥 문제에 있어요. 문제, 문제!
여러분, 기도를 아무리 40일, 100일, 1년 내내 한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시선과 관심이 문제에 있다면,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문제 가운데 있지만, 그때 눈을 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나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걸 알았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시선을 원하세요. 왠지 아세요?
아마 여러분은 성경에 이 말씀 있는지, 잘 모르실 거예요.
이 말씀은 기가 막힙니다.
시115:8절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우상과) 같으리로다'
여러분 이게 뭘 말하는지 아세요?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을 닮아가게 돼있습니다.
그거 보셨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 시어머니에게 굉장히 어려움을 당해요.
그래서 맨날 시모를 욕했어요. 나중에 자기가 그 시어머니 똑같이 행동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욕하면서 닮아가요. 늘 마음에 품어요.
그 때문에 용서가 중요한 것에요.
매일마다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을 욕하면서, 내가 내 마음에 담아요.
욕하면서 늘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을 닮아가요.
내 마음에 이미 담겨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표독스러운 표정... 내가 그걸 계속 닮아가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10년, 20년 지나면
내가 그렇게 닮아 있어요. 놀랍죠?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 나의 시선을 준 그 대상을,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닮아가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이 기도할 때, 우리의 시선을 원하실까요?
왜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실까요?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기억하세요. 문제는 나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로 이끌 수 있어요.
그러나 절대로 나의 모든 시선과 관심이, 문제에 있으면 안 됩니다.
문제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선하심, 그 신실하심, 그 능력, 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15~23절을 발견할 수 있는 기도의 태도입니다.
◑3. 본문에서 또 하나 살펴봐야 할 것은 뭐냐면 <기도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문제를 소식을 통해 들었어요.
교회 내 갈등, 분열, 다툼 그리고 거짓 가르침, 그리고 죄...
그런데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기도는 네 가지입니다.
▲1. 첫째는, '하나님 에베소교회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동안 하나님 몰랐나요?
에베소는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하는 동안에
무려 2년 3개월 동안 가장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체계적으로 전했던 곳이
바로 에베소예요. 사도바울이 개척한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체계적으로 전했던 곳이 에베소교회에요.
사도바울은 이미 에베소교회를 양육했어요.
그리고 에베소교회는, 교회사를 보면, 그 이후로도 계속 성경공부를 해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아마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그러겠죠.
'아니 사도바울은 우리를 무시하는 겁니까?
당신이 여기 없다고, 우리가 성경공부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의 에베소교회를 향한 첫 번째 기도는 뭐냐면
'하나님, 제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소서'
에베소교회는 사도바울이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모여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암송합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당시에 다른 사도들, 다른 순회교사들도 있었으니까요)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친구 중에 랍비가 있거든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아이가 태어나면, 4살부터 12살까지
모세오경 다섯 권을 암기시킵니다. 호세야 때도 그랬을 거예요.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암기시키는 성경이 레위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암성합니다.
정기적으로 성경을 외우고 공부하고 가르칩니다.
4살부터 12살까지 아예 체계적으로 공부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해요.
'너희는 나를 몰라, 도무지 너희는 나를 아는 지식이 없어!'
이게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그 다음 절에 나와요.
호4: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뭔 말인가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람들의 머리 지식에서 찾는 게 아니라, 삶에서 찾으세요.
'네가 날 알아? 그래 너 창세기 다 외우더라.
너 레위기 다 외우더라. 제사법 다 외우더라. 그러나 너는 나를 몰라!'
여러분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수학공식을 외우는 것이나, 세계사의 연도를 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에요.
지식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가르칠 자격이 주어지나요?
여러분, 성경말씀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봐 두려운거에요.
'지웅아, 너는 나를 참 몰라!'
저는 성경을 꽤 많이 읽었습니다. 신학하기 전에 1백독했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에요. 삶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에 이게 무너져 있어요.
성경 공부 많이 하시죠? 그게 중요한가요?
여러분, 수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보다 몇 백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죠.
여러분, 도대체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알죠.
누가 이웃을 사랑합니까, 누가 이웃을 존중합니까?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의 학력을 물어봅니다. 직업을 물어봅니다.
그것에 따라,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우러러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화하면서, 그 사람의 학벌과 직업 가지고
신분의 상하 계급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건 거만함이요, 교만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까?
어디에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에요.
'나는 교회 40년을 다녔어' 그런게 중요하지 않아요.
에베소 교회도 그랬을 거예요.
'어떻게 이방인 따위가 말씀을 가르쳐? 유대인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말씀을 배운 사람이야.
근데 어떻게 저 이방인, 저 개돼지같은 이방인 따위가 말씀을 가르칠 수 있어?
어떻게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어?'
그게 에베소교회의 분열의 원인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에베소 성도들이 주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현재 <더 바이블 미니스트리> 라는 단체를 책임 맡고 있어요.
이름처럼 저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 전 권을 가르치는 단체입니다.
저희 홈페이지 들어가시면 모토가 나옵니다. 첫 화면에 뜨는 거 이겁니다.
제가 만들었어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공부해도, 공부가 얼마나 위험하냐면,
사람을 판단하게 만듭니다. 날카로운 칼처럼!
'저 목사는 저 배경을 모르네.. 헬라가 틀렸어..'
얼마나 거만한지 몰라요. 그런 성경 공부는 멈추셔야 됩니다.
반드시 독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나로하여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섬기도록 해야 돼요.
그러지 않은 성경 공부는 멈추셔야 됩니다.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쉽지 않아요. 여러분 지식이라는 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한 면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 날카로운 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린스버러 제일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어요.
'너희들은 나를 알아, 너희는 참으로 나를 알아!'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수많은 성경 공부가 있고,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수많은 사역이 있지만
수많은 헌신이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너희는 나를 몰라' 하시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을 아세요? 부모님이 뭐 하시면 기뻐하시는지 아세요?
뭐 용돈 드리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죠.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싶은 것이에요. 인격적으로!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안다'는 지식은
머리에 있고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 삶에 있는 겁니다.
그거를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도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이에요.
'하나님, 제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분열이 그치게 해주세요.
이단을 쫓아내게 해주세요. 죄를 회개하게 해 주세요!' 그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다 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정말 서로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우리들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대부분 증상들이에요. 증상에 집중하면 안됩니다.
증상의 원인에 집중해야 돼요.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에요.
▲2. 두 번째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하는 기도는 이겁니다.
'하나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해 주세요' :18
'부르심의 소망'
이 소망은 주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부르셨을 때 가지셨던
어떤 소망이 있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설레임..
그러니까 우리를 빚으시고, 이 땅에 보내시고, 사명을 주시면서
어떤 기대가 있으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에베소교의 성도들이
하나님이 그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제발 좀 알게 해주십시오!'
△근데 여러분, 바울의 이 기도 제목은
여러분을 향한 제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기대가 뭐냐는 거예요.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구원은
구약에서 어떤 한 사건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그건 바로 출애굽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십자가의 구원과 연결되어 비교되면서 많이 설명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자마자
시내 산으로 데리고 오셔서,
거기서 마치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 개의 요구사항을 직접 적으세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 이거 지켜' 라고 말씀하세요. 십계명이죠.
그러니까 십계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정말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십계명은 반드시 아셔야 돼요.
제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출20:3
십계명은 성경에 딱 두 번 나와요. 출20장 과 신5장이죠.
이 '두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앞에 있는 '나 외에는'를 알아야 됩니다.
'나 외에는' 은, 히브리어로 '알 파나이'입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before my face' 입니다.
직역하면 '내 얼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가 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자마자
제일 먼저 요구하신 것은, '내 얼굴 앞에 아무도 두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해석하면 '이제 내 얼굴 앞에는 너만 있고,
너의 얼굴 앞에는 나만 있게 해라.
나의 얼굴과 너의 얼굴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두지 마!'가 제1계명이에요.
△근데 이걸 사람들이 오해하세요.
여러분 제가 건방지게요, 이 말 뜻을 이해해요.
제가 지금 52세 밖에 안 돼서 어리지만,
더 어린 시절에 저는 유럽에서 8년 반 정도 살았거든요.
영국에 있다가 대부분 스위스에서 보냈어요.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저희 어머니가 저를 병적으로 좋아해요.
말도 마세요. 정말 너무 너무 아들인 저를 좋아하세요.
근데 제가 유럽에서 모든 공부와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제주도로 갔어요. 근데 저희 부모님은 서울 외곽에 사시거든요.
근데 제가 비행기를 1년에 진짜 많이 타요. 150번 타요.
그러니까 정말 서울에 많이 왔다 갔다 하는데,
사역이 너무 많다 보니까 여유있게 간 적이 단 하루도 없어요.
저는 이제 주일날 이 집회가 끝나면, 월요일 아침 7시 비행기로 떠나야 돼요.
그러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수요일날 바로 또 집회가 있어요.
계속 그렇게 삶을 살다 보니까, 여유있게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제가 부모님에게는 전화를 자주 드려요.
근데 어머니께는 자주 찾아뵙지 못해요.
저희 어머니가 제 아내에게 항상 전화합니다.
'얘 에미야, 이번 주에 아범이 서울 언제 올라 와? 그리고 언제 내려가?'
그리고 전화를 딱 끊으세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저를 만나러, 김포공항에 시간을 맞춰 나오세요.
그래서 제가 김포공항에 가면 지금도 버릇이 두리번 두리번 거려요.
저희 어머니를 찾아요.
그러다가 저희 어머니 얼굴을 딱 발견한 순간 바로 '몸도 불편하신데 왜 나왔어요, 왜?'
왜냐면 몇 년 전에 저희 부모님이 서울 외곽에 사시는데
김포공항까지 올리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되는데요.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저희 어머니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어요.
여러분 여든 되니까 뼈가 잘 안 붙던데요. 몇 개월 걸리죠.
뼈가 그냥 딱 부러진 게 아니라 어그러져서, 진짜 고생하셨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날, 집회 취소한 다음에 병원에 가서, 저희 어머니랑 약속했어요.
'내가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나는 어머니가 김포공항에 나오시는 게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이제 버스 타지 마세요. 아들이 그거 하나 못 해드립니까?
이제부터 무조건 김포공항에 아들 보러 나오실 때는 택시 타세요.
택시 안 탈 거면 나오지 마요!'
그런데도 꼭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나오세요...
'아니 왜 나왔어요? 또 넘어지려면 어떻하려고요?'
그럼 공항에서 꼭 1분 얼굴 봅니다.
고관절 수술하셔서 허리도 구부정하고
지팡이 짚고 저를 보려고, 1시간 25분 걸려서 공항에 나오세요.
아들 얼굴 1분 보겠다고요.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다음에
제일 먼저 요구하신 것은
'야야, 이제 내 얼굴 앞에는 너만 있어라
그리고 네 얼굴 앞에는 나만 있게 해라
나의 얼굴과 너의 얼굴 사이에 어떤 것도 두지 마!'
여러분 이분이 하나님이세요.
근데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야야 돈 좀 있냐? 없어? 아 그래 알았어...'
우리는 하나님이면 마치 돈에 미친 신인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러지 않아요. 우리 하나님은 그러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원하세요.
우리가 그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지요.
'야야, 제발 내 얼굴 앞에 너만 있어라.
네 얼굴 앞에는 나만 있게 해!
우리 둘 사이에 어떤 것도 두지 마!'
여러분, 이분이 하나님이세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들 얼굴 한 번, 그것도 딱 1분 보겠다고,
왕복 3시간 버스로, 수술한 그 노인네가 공항에 나왔어요.
제가 '어머니, 왜 나오셨어요? 용돈 부족해요?
알았어요. 자, 이번 달에는 지난 달보다 10만원 더 넣었어요. 이제 돌아가세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 되먹지 못한 아들이죠.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주일날 그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언제 하나님이 돈을 그렇게 원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닌 것이에요. 진짜 나를 사랑하세요.
근데 그게 안 믿어질 뿐인 거예요.
'그럴 리가 없다. 나 같은 걸 사랑하실 리가 없다..'
△한 번만 양해하고 들어주세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오래동안 짝사랑 했어요.
말 한마디 못해 봤어요. 저희 교회 후배인데
물론 그 자매가 지금 제 아내는 아닌데, 아 진짜 좋아했어요.
그런데 말 한마디 못해 봤어요.
근데요. 그거 아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자매만 딱 나타나면
제 얼굴이 환하게 웃어지는 거예요.
'안 돼 안 돼! 들키면 안 돼!' 그래서 표정관리를 하려고 해도, 잘 안 돼요.
제어가 안 돼요.
여러분 주보에 대표기도에 자매 이름이 올라가잖아요.
어느 날은 교회에 갔는데
주보를 받아들었는데, 그 자매 이름이 대표기도에 있어요.
세상에 그렇게 존귀한 주보가 어디 있습니까? 주보를 소중히 다루었어요.
그 이름만 있어도 돼요. 그래도 귀해요.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고백했어요. 근데 그 사람이 받아들여 줬어요.
그러면 어떨 것 같으세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루 종일 같이 있어요.
하루 종일 학교도 같이 가고, 밥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마시고,
공부도 같이 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집에 갈 때 남자가 또 바래다 줘요.
그리고 헤어지고나면, 또 핸드폰 꺼내서 서로 문자하죠. 또 길게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단어가 뭔가요? 사랑입니다.
누가 사랑을 이성적이라고 말합니까?
사랑은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미친 거예요.
세상에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죽이십니까?
여러분, 이건요. 사람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겁니다.
우리 같은 게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를 죽이십니까?
이거는 찬양받을 내용이 아니라, 비난받을 내용이에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냥 우리 자신이에요.
지금 사도바울이 그걸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부르심의 소망, 그 기대, 그 설레임,
그게 뭔지 제발 좀 깨달아 알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이걸 모르면, 하나님께 내가 잘 보이고 싶어해요.
내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싶어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창세 전에,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만 하시면 돼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게 끝이에요.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게 가장 중요한 복음이에요.
하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오늘 지금 이곳에 계신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향해서도
동일한 설레임과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야야, 이제 내 얼굴 앞에 너만 있어!'
혹시 교제할 때, 그런 경험 있으세요?
막 연애 초기인데, 막 사랑이 막 불타오르려고 하는데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
'그럴까?'
근데 갑자기 후배가 나타나죠.
'어디 가세요. 선배! 혹시 영화 보러 가세요? 저도 같이 갑시다!'
그런 미운 사람이 가끔 있어요.
보세요. 중간에 누가 끼는 거 매우 싫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둘만 있고 싶어 한다고요. 이해 되셨어요?
그러니까 이런 느낌으로 제1계명을 해석해야 된다고요.
'나의 얼굴과 너의 얼굴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두지 마!'
바울의 기도 세번째, 네번째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