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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추상화를 걷어내라

LNCK 2023. 8. 16. 20:30

 신앙의 추상화를 걷어내라 - YouTube

◈신앙의 추상화를 걷어내라    욥42:1~6    2018.05.18.설교문 스크랩

※욥의 예를 들면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주제의 설교문
                                                    ☞▣ 고난의 신학 , 영광의 신학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영적 세계입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관련되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물질세계를 넘어선 세계에 눈을 뜹니다. 3차원을 벗어납니다.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욥기 1장에 보면, 마귀가 등장합니다. 마귀가 우리의 눈에 보입니까? 
욥은 마귀를 모릅니다.

욥기에 보면, 마귀와 하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마귀와 하나님의 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이야기한 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큼 
욥에게 고난을 줬습니다. 욥은 갑자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욥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아는 척 했습니다. 이치를 따졌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치를 밝히려 했지만,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사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원어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공부하면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욥42:3

욥은 친구들의 무지와 자신의 무지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깨닫지도 못했지만, 마치 이치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알고 말하는 것보다, 모르고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신앙세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20~30년 믿으면, 굉장히 고급스러운 단어를 사용해서 말합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재단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42:5

신앙의 전환점이 일어납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다는 것은 
이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열심히 배웁니다. 교회가 학교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미나를 많이 합니다.

열심히 배우는 것은 정보를 쌓는 것입니다. 물론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지식의 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배우는 것이, 교회 밖에서는 통용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지식에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경험하지 못한 
채 말씀이 이론으로, 개념으로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아직 자기에게 개념으로만 머물 뿐, 
내면화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안에 체화(육화)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지식과 정보로만 머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우리가 매일 먹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제적인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예수님 안에 내재화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매일 밥을 먹는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경험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밥은 먹어도 죽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밥과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밥 먹는 것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밥 먹는 것이 실제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밥 먹는 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실제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진리를 계속해서 경험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을 가졌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로 배부르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사랑’ 등의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사용합니다.
*마치 추상적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호랑이를 그림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림을 보며 호랑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앞에서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으면 간담이 녹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호랑이를 그림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요동이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알 뿐입니다.

오늘날을 ‘지식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지식을 쌓는 데 몰두합니다. 
지식을 자랑합니다. 지식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거대한 지식시장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쌓기 위해 돈을 쏟아 붓습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지식이 없으면 고생합니다. 
좀 더 알면 고생하지 않을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우리의 일상에는 도움이 되지만, 
인생의 거대한 문제를 만났을 때에는 지식은 쓸데없습니다.

전문적 지식을 엄청나게 쌓았다 해도, 정신적 수련을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했다 해도, 
염려가 찾아와 불면증에 시달리면,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잠을 잘 잘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염려로 인한 불면증은 이길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지식이 쌓였다고 그것이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욥42:5절에,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귀로 듣기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습니다. 
20~30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귀로 듣기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수준에 머물다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불완전했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이어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했습니다. 
귀로 듣기만 했던 것을 눈으로 본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욥은 긴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알던 것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동안 그는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을 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제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시119: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게 된 게 아닙니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전에는 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교리적으로 이해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교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리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사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이 말씀 때문에 초대 교회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인육(人肉)을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삶 속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이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과 성찬은 신약 시대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찬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에는 잘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떡과 잔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안에 내재화되어야 합니다.

▲시34: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맛본다’는 것은 맛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는 맛을 알 수 없습니다. 
미각(味覺)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주여 제 영적 미각을 회복시키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감(五感)을 통해 느끼고 경험합니다. 
우리는 혀로 맛을 느낍니다. 음식을 먹고 끝나지 않습니다. 맛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혀에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있으면 표현합니다. 
온몸이 반응합니다. 그리고 먹은 것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작동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단지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으며 맛을 느낍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것을 또 다시 찾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에 비유했습니다. 
여호와의 성품이 우리의 구미(口味)를 당기고, 느끼게 하고 
반응하게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미건조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과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과일을 통해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과일의 맛도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과일마다 
그 속에 다양한 맛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과일이 맛이 없다면, 그것을 먹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은 과일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라고 표현했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시편의 언어는 거칩니다. 굉장히 거칠고 솔직합니다. 
시 22: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절규입니다.

시편의 언어가 거칠고 솔직한 이유는 
시편 기자들이 편안한 가운데서 시편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숨 막히는 고난을 겪는 가운데 시편을 썼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지른 절규를 기록한 것이 시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신앙이 언제 깊어집니까? 머리에 맴돌던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할 때입니다. 
경험을 통해 말씀이 검증될 때 신앙이 깊어집니다.  

언제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을 경험할 때입니다.

현대인들은 지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어 안다고 해도, 그것에 생명을 걸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생명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삶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것이 참 지식이 됩니다. 
삶을 두렵게 하는 지식, 생명을 걸 수 없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르고 큰 소리 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몰랐을 때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하여 도망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큰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했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겸손해집니다. 안다고 떠들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알 때에는 자신이 아는 것을 떠벌립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시행착오를 통해 뼈아픈 경험을 한 후, 
이제야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언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42:5

고난은 이론이 아닙니다. 테이블에 앉아 고난에 대해 얘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고난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고난에 대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해도, 고난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 고통에 대한 책이 많습니다. 저도 고난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삶으로 겪는 것입니다. 
고난은 온몸과 영혼으로 겪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독특한 방법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긴 여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경험한 고난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욥이 처음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난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욥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힘들었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고통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지식적으로 접근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욥이 형통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세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때로는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꽃길만 걷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론이 아닌 실체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고난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움이 오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한 것이 아닙니다.

신뢰는 경험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실제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를 보면,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뢰는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경험해야 합니다.

신앙은 자신이 신뢰한 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의 신앙이 상승합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위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경험한다면, 
십자가를 온전히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다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머리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머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가슴에 파고 들어와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서든, 십자가 메시지를 통해서든, 묵상을 통해서든. 
고난을 통해서든..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선하심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실제적으로 경험한다면, 
우리의 삶에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면, 
하늘의 사건이 구체화될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위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단지 교리에 이론으로만 알고,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신학자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연구하며 지식적으로는 많이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2천 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나의 시공간 안에서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이것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을 
우리의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장을 흔들어놓을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생애 속에서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생애를 흔들어놓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욥기 전체를 보면,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질문이 오고갔습니다. 친구들이 변론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고통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욥은 욥기 42장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양육과정을 모두 이수한다 해도 4~5년이면 다 끝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난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욥은 대가를 지불할 만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고난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지만, 
고난을 통해 욥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인생은 축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고 고백했습니다.

▲욥기에 보면, 처음에는 답답합니다. 
하나님이 빠진 가운데 욥과 친구들이 논쟁했습니다. 
그들은 이론싸움을 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추측과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욥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내버려두시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심한 듯 나타나시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탄식합니다. 절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늦게 등장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찾아오십니다. 고통의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욥이 온갖 고통을 다 겪은 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쉽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레슨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교실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삶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쉽게 배운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 배우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요, 뼈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은 삶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면(對面)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이 
끊어진 후, 야곱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일평생 다리를 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다윗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시상(詩想)이 떠올라 멋진 단어를 조합하여 쓴 시가 아닙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좋은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큰 고난을 겪은 사람은 시편 23편을 읽을 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 23편 1~2절은 와 닿지 않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보면, 
강하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친구들이 다 떠나고, 자녀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몸은 병든 사면초가의 상태에서는 시편 23편 1~2절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시23:4절이 와 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함께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다윗은 수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하루아침에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뼈 속까지 밀고 들어오는 아픔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시23:6절에 보면,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는 자신이 평생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잘 압니다. 그는 동굴과 사막으로 다니며 
숱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서서히 배웠습니다.

가족이 암으로 고통당할 때, 사업의 실패로 인해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은 평소 설교 시간에 듣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난은 삶을 명료하게 합니다. 삶의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합니다. 
가지를 다 제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한 고난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겪는 고난의 실재보다 더 실재적으로 느껴집니다.

▲기도가 무엇인가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기도가 무엇인지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하는데, 평소에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의례적으로, 형식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기도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을 때에는 입에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심장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절규합니다.

▲언제 진실해집니까? 고난의 때에 진실해집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지 않습니다. 많은 것으로 포장합니다. 
그럴 듯하게 자신을 꾸밉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거짓된 자아로 위장된 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하나님과의 교감이 없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집니다.

매일 기도의 자리에 나오다 보면,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기도하는 것을 종교활동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기도에 대해 알고 있을 뿐입니다. 가슴으로 기도하지 않고, 입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 속에 있을 때에는 기도가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 있을 때, 참된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욥기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굉장히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이론으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것도 아닙니다. 
짧은 시간에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개념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욥은 앞으로 자신이 겪을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일일이 답해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앞부분에서 욥은 자신이 고난을 당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시는 듯하여 욥은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제 11111
이제 욥은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일일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욥기 42:2절에 보면,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욥을 단련하셨습니다. 
욥은 고난이라는 레슨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주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별 일이 다 일어나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것 같아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난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시험해도, 우리는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고난에 빠져있지 마세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고난보다 더 실제적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에 어떤 고난이 있다 해도, 고난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희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간다면, 무적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의 어떤 공격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레슨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갈 때, 
어떤 고난과 시험이 와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