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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LNCK 2023. 8. 17. 21:16

https://blog.naver.com/karamos/80116958418

 

◈포기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창22:1-19         2007.05.20.

                                                   ☞ <집착, 의존> 관련글

오늘 함께 읽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들을 보면,

의문이 많고 이해하기가 힘들수록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누구도 그 의미를 다 밝혀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이 이야기는 진리의 보고(treasury of truth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얼마나 아꼈을까요?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위로 딸 셋을 두고

마흔이 넘어서 막내아들을 얻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들이 한 참 재롱을 부릴 즈음 되어, 그 목사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얼마나 귀여웠을지, 이제 조금 짐작이 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낯선 땅에 이민자로 살고 있습니다.

유목민의 사회였던 당시 가나안 땅에서 가장 큰 재산은 ‘땅’이 아니라

‘자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의 삶을 시작한 지 25년 만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을 대하는 아브라함 부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민 생활 25년 만에 얻은 그 아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산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겁니다.

 

여러분, "번제물로 바쳐라"(2절)는 명령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아십니까?

번제로 제물을 바치는 방법은, 먼저 그 짐승의 목을 따서 피를 다 쏟아내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모두 끌어내고, 사지를 잘라서 묶어 제단 위에 올려놓고,

밤이 새도록 불을 피워 한 줌의 재로 남기까지 태워 바치는 것입니다.

 

짐승이라 하더라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이 모든 일을 담담히 행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하라니요!

그것도 백세가 되어 얻은 외아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처음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이 충격적인 명령을 아무 의문 없이 믿었을 리는 없어 보입니다.

 

22: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말은

밤새도록 한 잠도 자지 못했다는 뜻일 겁니다.

 

여러분도 번민과 한숨 속에서 잠을 새워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항상, 동이 트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번민과 한숨을 떨쳐 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40년 가까운 이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겪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때로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분의 명령이 때로 얼마나 충격적이고 파격적인지,

아브라함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해도 너무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해할 수 없어도, 굳게 믿고 순종하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분임을 믿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에 순종하란 말입니까?

 

▲이런 고민과 번민과 의문 때문에 아브라함은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날이 밝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직도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지만, 일단 길을 가면서 더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학자들은 오늘의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서 9년 동안 공부하신 분의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50킬로 라고 합니다.

 

하루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그곳에까지 이르는데 사흘이 걸렸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진행을 늦춰가며,

그 명령에 순종할 이유를, 혹은 거부할 이유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을 헤매다가 결국 하나님의 지시하신 산에 당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그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도리가 없어서, 여전히 답은 없지만 믿음으로 순종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선택했고,

그러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숫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리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이로써 이삭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산의 경사면 이쪽과 반대쪽은 서로 보이지 않습니다.

관악산을 예로 들면, 서울대 쪽에서 올라가면, 과천 쪽 사면은 안 보이죠.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을 마음이 무겁게 올라갈 때,

하나님은 모리아 산 정산 반대편 사면에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걸 미리 보고 알았더라면, 그렇게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물론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걸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험의 목적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1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고’ 그러셨다?

이거 좀 이상하다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중심까지 환히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할 줄 모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이런 장난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어느 편으로 보아도 납득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시험’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차적인 목적은 그 사람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그 사람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해 봅니다.

 

하지만 시험이 가지는 좀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시험은 그 사람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고,

한 단계 도약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오늘날에는 시험이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과정으로 전락했지만,

진정한 시험이란 시험을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게 하고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충격적인 명령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그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신을 제대로 보도록 돕고, 한 단계 도약하도록 자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2절의 말씀 즉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험을 통해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갖게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시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무엇이 문제였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도전을 주시기 위해 이 명령을 주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단서는 2절에 있습니다.

 

우리 번역은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의 의미를 반영해 제대로 번역한다면,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 너의 사랑하는 자, 이삭"이라고 해야 합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만, 사실 이 표현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 주석가 라시(Rashi)는 이 대목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로 재구성하여 이렇게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 "저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님: "너의 외아들을 말하는 거다."

아브라함: "둘 다, 자기 어미에게는 외아들입니다."

 

하나님: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말하는 거다."

아브라함: "저는 둘 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정 그렇다면 이름을 말하마. 이삭을 데리고 가라."

(위 22:2절이 그런 뜻입니다)

 

이 대화는 할 수 있는 대로 이삭을 끼고 돌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아브라함의 문제를 암시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어 얻은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삭을 사랑한다 했지만, 실은 그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민 생활 25년 만에 얻은 외아들입니다.

나이 백세가 되어 얻은 기적 같은 아들입니다.

 

바다의 모래같이, 밤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을 얻어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이삭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삭을 잘 키워야 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그만큼 끔찍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모든 희망이 그에게 걸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했겠습니까?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했겠습니까?

넘어지면 다칠세라, 얼마나 귀하게 키웠겠습니까?

 

▲그런데 이러는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이삭에게로 옮겨져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는데, 이삭을 얻은 후,

아브라함은 점차 이삭에게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삭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만 자신의 인생사에서 물러가셔도 될 것 같았습니다.

 

뭐, 꼭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의 마음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던 아브라함에게 이제 이삭은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뿔싸!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브라함에게 불신앙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이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였고, 하나님이 믿음직하시다는 증거였습니다.

이삭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겠습니까?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마음을 관리하지 못하여

그 축복의 선물이 화의 근원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삭을 사랑해야 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균형을 잃고, 이삭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이삭을 돌보아야 했는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믿음을 통해 얻은 이삭은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불신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인데,

그는 이삭만 얻으면 다 얻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이 명령은

불신앙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되돌리시려는

하나님의 충격 요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 칼을 들이대라고 명령하셨지만,

실은 이삭에게 칼을 대라는 뜻이 아니라,

이삭에게 연결되어 있던 희망의 끈, 믿음의 끈, 집착의 끈을 끊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칼이 이삭의 목에 닿기 직전,

천사를 통해 그의 손을 잡아챈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에게 향해 있던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칼을 대야 할 대상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울어진 마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혹시, "아, 하나님은 욕심도 많으시지!

그래,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준 마음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것까지도 시기하셔서 이렇게 모질게 행하시나?“

라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삭에게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두고 질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없는 대상을 의지하고,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 때문에 근심하시는 겁니다.

 

참된 믿음의 대상, 참된 의지의 대상, 참된 희망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위험에 빠집니다. 불신앙에 빠집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근심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재앙의 근원으로 바꾸어 놓는지요!

사랑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에 집착하고 그 사랑에 전부를 거는 바람에,

그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화를 입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열심히 노력하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쌓아 놓은 재산을 보며 "이만하면 나는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를 얻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그 자녀를 믿음과 희망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화를 입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보면, 복과 화의 경계선은, 바로 우리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있으면 복이고, 자녀가 없으면 화라고 보통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으면, 자녀가 없는 것도 복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자녀가 있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많아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면, 그 돈은 오히려 재앙이 됩니다.

 

가난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돕는다면,

그 가난이 복이 됩니다.

 

지칠 줄 모르는 건강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죄를 짓는다면,

그 건강이 화의 근원입니다.

 

질병을 앓고 있으나, 그 질병이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도록 돕는다면,

그 질병은 복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 든든히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만이 참된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복을 화의 근원으로 바꿔놓고 있는

우리 각자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민자들입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장 큰 희망은 자녀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 때문에 이 미국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그 어떤 고생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녀들은 우리에게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자녀들을 위해서만큼은 최선의 것을 제공해 주려고 합니다.

이를 악물고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주려고 합니다.

 

그 마음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가 조심해야 할 지점입니다.

혹시나 자녀들이 우리의 우상이 된 것은 아닌지요?

혹시나 자녀들이 우리의 희망이 된 것은 아닌지요?

혹시나 자녀들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전부가 아닌지요?

 

혹시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단지 자녀들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나 하나님 없어도, 내 자녀들만 잘 커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사랑하는지요,

아니면 자녀를 믿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지요?

 

△어떤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녀의 교육을 위해 전심전력 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하는데, 최고의 선생을 찾아서 최고의 교육(레슨)을 시켰습니다.

그의 목표는 한국 최고의 대학교에 그 아이를 진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돈독한 기독교 신자인 그 여인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끼지 않고 돈을 썼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당연히 최고의 학교 미대에 진학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최고 학교에는 떨어지고,

그 대신 정상급에 있는 다른 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 학교만 해도, 보통 사람 같으면 자랑스럽게 생각할만한데,

그 여인은 그 이후로 지금껏 몇 개월 동안 사람도 만나지 않고

분노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진실로 그 자녀를 사랑했습니까?

자녀의 최고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그 여인의 선택은

과연 진정한 자녀 사랑이었습니까?

 

진실로 자녀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실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아이가 느낄 죄책감과 부담감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최고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표는 그 아이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엄마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그가 기도한 대상인 하나님은 또 어떤 분입니까?

그의 믿음은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었습니까?

아니면 자녀의 성공을 위해, 아니 자신의 욕심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그분의 사랑에 희망을 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그대로 자녀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포기할 때 사랑은 시작됩니다.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자녀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할 때,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녀에게 붙들려 있는 모든 집착에

칼을 들이 대라는 요청 앞에 우리를 마주 세웁니다.

 

자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의 근거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에게 칼을 들이대라고 요청합니다. 집착을 포기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럴 때, 그 대상이 바로 보이며,

그럴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왜 포기할 때 참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입니까?

집착은 보통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된 ‘어떤 것’에 매여서 생깁니다.

 

아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아이의 성적에, 아이의 키에, 아이의 외모에 집착합니다.

그런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한, 그 아이 자신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성적 때문에 혹은 외모 때문에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또한 집착은 심리적으로 볼 때, 집착하는 사람의 병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정말 내 아이에게 그것이 필요해서 성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있는 공허감 때문에 집착합니다.

 

일류대학교가 아이에게 필요해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열등감을 만회하고 싶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집착에 매어 있는 한, 아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독립된 인격체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도구로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착을 포기해야만 상대방이 제대로 보입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더 없이 아름답고 고귀한 영혼입니다.

 

내 소유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사랑할 여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중심을 아시고 그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다만 그 아이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꿈이 그 아이에게 실현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하며, 하나님도 행복해집니다.

반대로, 아이를 내 소유로 여기고 집착할 때, 아이도 불행해지며,

부모도 불행해지고, 하나님은 더 더욱 불행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부모의 역할을 기대하십니다. 참 부모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를 맡아서 양육하여 그분의 자녀로 길러 되돌려 주어야 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기울어지는 바람에

이 책임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귀중한 일,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충격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마음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런 극약 처방이 필요 없도록, 늘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마음의 중심을 잡아,

하나님의 복을 복으로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이런 복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책에 나오는 글로 대신합니다.

지금 당장 자녀 양육 문제와 상관이 없는 분들은

‘아이’ 대신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다른 무엇을 생각하시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을 거쳐 태어났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육체의 집을 줄 수는 있어도, 영혼의 집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고, 당신은 그 집을 결코,

꿈속에서라도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이들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 좋지만,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삶이란 뒷걸음쳐 가는 법이 없으며,

어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