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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소서

LNCK 2023. 8. 19. 18:31

230621 거룩한빛광성교회 수요설교 유관지 목사 - YouTube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소서         단9:17 

                                                             ☞<북한, 통일>관련글

◑금년 2023년은 정전협정 70년 되는 해 *1953

이번 주간은 통일선교주간입니다.

이번 주간을 통일선교주간 으로 정한 것은

다음 주일이 625가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죠.

올해 2023.06.25.는 주일입니다.

625가 일어난 날 1950년 6월 25일도 주일 이었습니다.

북한이 왜 주일에 쳐들어왔을까요?

주일, 일요일에는 경계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그거를 노렸겠죠.

사실 그때 굉장히 느슨했습니다.

장병들 농번기 휴가 많이 보내고, 외출, 휴가..

그리고 또 6월 24일 저녁에 삼각지에서 (지금 대통령실이 있는 그 자리입니다)

육군장교 구락부 낙성식을 한다고, 군 지휘관들, 정부 고위 인사들이 모여서

밤늦게까지 파티 하고, 시내에 나가서 2차 하고, 새벽 2시에 끝냈대요.

근데 새벽 4시에 북한이 쳐들어왔거든요.

그게 이유가 전부일까요?

일반 역사에서는 그게 전부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저는 생각하기를 (주일에 침공한 것이) '어떤 영적인 의미는 없을까?'

근데 하필 그날 골라서 쳐들어온 거, 어떤 영적인 의미는 없을까요?

제가 늘 가지고 있는 질문인데, 제가 부족해서 명확하게 답을 못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한번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나태해서?)

'역사'라는 건, 또 (과거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 역사의 과제거든요.

▲여기 주보에 "통일선교주간"이라고 이렇게 크게 쓴 것을 보고서 *장로교 통합

제가 다시 떠올리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올해 2023년은, 통일선교에 있어서 특별한 해입니다.

그거 아셔야 돼요.

제 설교에서 다른 건 다 잊어버리더라도

올해 2023년은 '통일선교에 있어서 특별한 해다' 그거는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일이 70 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 한 가지는 정전협정 으로부터 칠십 년 입니다.

정전협정은 1953.07.27일에 조인이 됐습니다.

우리나라 분단은, 세 개가 겹친 분단입니다.

-1985.08.15일에 해방되면서 삼팔선이 그어졌죠. 그건 <영토분단>이에요.

처음엔 그거 해결하려고, 미소공동위원회도 하고, 신탁통치 얘기도 나오고,

유엔을 통해서 해결하자... 그런 얘기도 나오고 하다가, 잘 안 되었고

-1948년에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죠. 이건 <체제분단>이에요.

-그 중에 정말 무서운 분단은 '정전협정' 이었어요.

전쟁이 일어났어요. 수백만이 죽고 다쳤어요. 전쟁 고아들도 많이 생겼어요.

전쟁 미망인들도 많이 생겼어요. 남북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953년에 정전협정을 맺었는데, 이것은 <정서적 분단>이라고 그래요.

정서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진 말이 하나 있어요.

'대한민국은 헌법 위에 국민 정서법이 있는 나라다'

정서라는 게 그렇게 무섭습니다.

지금 중국대사가 상당히 우리들에게 좀 이렇게 화가 나는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어느 고참 기자가 쓴 글을 보니까

십년 전에 지금 중국대사가, 그때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이었는데,

그가 중국에 와 있는 기자들을 초청해서, 무슨 자리를 마련했는데요,

그때 그 싱 대사가 했던 말이 '한국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국민 감정법이다'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렇게 국민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서상의 분단'은 정말 무서운 분단이에요.

그래서 저는, *유관지 목사

1953년의 정전협정을 두고서 "본격적인 분단" 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진짜 분단이 된 거죠.

탈북민 목사님 중에, 강철호 목사는

감리교에서 탈북민으로서 제일 먼저 목사가 된 분인데

그분이 역사를 공부한 분인데,

그분은 정전협정을 두고서 "진(짜) 분단"이라고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올해 2023년은, 그때로부터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생각해야 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렘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70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 말씀이그대로 이루어져 가지고, 포로생활 70 년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1차는 스룹바벨 인솔, 2차는 에스라 인솔, 3차는 느헤미야 인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뀌었어요. 포로시대에서 귀환시대로 바뀌었죠.

이스라엘의 역사를 못한 열 기간으로 나누지요.

-족장시대 - 애굽 이주 시대 - 출애굽과 광야시대 - 사사시대 - 통일왕국 시대

- 분열왕국시대 - 포로기 - 귀환시대 - 신구약 중간기 - 신약시대

포로 시대에서 귀환시대로의 전환이, 7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2023년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정전협정 70년 되는 해이니까요)

여러분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 -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 지금을 이루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시대입니까? 지금은 '분단 시대' 입니다.

혹시 지금 뭐 남한이 굉장히 발전하고, 경제대국이고, 군사 강국.. 그러니까

뭐 '국가융성기'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남한 만의 얘기고요,

남북한을 다 합하면 '분단 시대' 에요.

'하나님, 우리 역사가 이 분단 70년에,

'분단시대 에서 통일시대로 바뀌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여러분, 특별히 통일선교주간에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전 70 년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거에요.

국가에서도 지금 이 '정전 70년' 행사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23년은, 북녘교회 황폐화로부터 70 년이 되는 해

여러분이 잘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그럽니다.

올해 2023년은, 북녘교회 황폐화로부터 70 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녘교회는 분단직후부터 박해를 많이 받았어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 그 해 8월 26일에 쏘련군이 진입합니다.

그때부터 분단이 시작된 거죠.

쏘련을 등에 업은 공산정권이 북쪽을 통치하면서부터

석 달 만에 첫번째 순교자가 발생합니다.

평북 '용천'이라고 아주 교회가 굉장히 강한 곳에

용암포 제일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홍석환 장로님이 교회를 지키려다가

타살 당했어요. 맞아 죽은 일이 거기서 발생했습니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북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월남해서 목회하시다가 은퇴한 목사님이 계신데 *아마 김명혁 목사

그분의 말씀이 북한정권이, 주일에 학교 나오게 했대요.

예수 믿는 학생들이 교회 못 가게 하려고, 학교 나오고 했대요.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어제 학교 안 오고 교회간 놈들은 앞으로 나와'

그래서 나가서 뺨을 맞았대요.

그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월남하기 전) '삼 년 동안 뺨 맞지 않은 월요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박해 받았어요.

경기북부 김화 생창리 라는 곳에, 지금은 거기가 다 논이 되어 있는데

'김화읍 교회' 라고, 과거에 한 5백명 출석하던 교회가 있었어요.

그 밑에 이제 돌 자리 유적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교회를 복원해서 옛날 모습 그대로 짓든지, 아니면 비석을 하나 세우든지,

그것도 아니면 길에다 '여기는 김화읍교회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하나

세우든지... 했으면 좋겠어요.

그 교회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낸, 금년에 아흔살 된 감리교회 원로 목사님이

한 분 계세요. 지난 월요일에 그분 모시고, 여럿이 가서 그 자리를 답사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증언하기를 '625직후에는, 김화가 38선 이북지역 이었어요.

즉 공산치하였습니다. 그때 겪은 일을 얘기하는데, 그렇게 어려움이 컸나봐요.

매번 그냥 뭐 비판한다고 (교회) 앞에 자기를 세워놓고

(그 목사님이름이 박이섭 목사님인데)

'저 박이석 동무는 숙청대상이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박해하고 적대시하니, 박이섭 목사님은 월남을 하셨지요.

그러면서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김화읍교회는 한동안 유지됐습니다.

예배도 드렸어요. 또 조직도 있었습니다.

장로교회는 그때 '이북오도 연합노회'라고 있었습니다.

장로교 노회를 감리교회에서는 '연회'라고 그러는데

'서부 연회'라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도 있었습니다. 장로교는 평양신학교가 있었고

감리교회는 성화신학교가 있었고

신학생이 양쪽이 다 6백명 정도씩 이렇게 되었고

(1948년 분단 이후 625전까지, 혹은 53년 정전협정 전까지)

교회는 그래도 형태도 있었고, 유지도 됐어요. 박해를 받았지만요..

◑북한의 기독교 역사 구분

1) 저는 그래서 1945~1953년까지를 <전통교회 존속기>라고

북한 교회의 역사를 그렇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고, 예배드리고, 성례 행하고, 전도하고, 교육하고,

친교가 있고.. 이렇게 전통적 의미의 교회가, 박해 아래서도 존속을 했습니다.

2) 그런데 1953년부터는 달라졌습니다. <전통교회 부재기>가 시작되었죠.

북한에서 지상에서의 북녘교회가 사라졌어요.

그 이유는, 우선 기독교인들이 많이 피난, 월남을 했습니다.

48년 분단 직후부터 이렇게 월남이 시작됐지만,

625때 특히 집단으로 월남을 했죠.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 교회 지도자들 거의 대부분 월남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녁 교회에 지도층이 공백 상태가 됐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공산당의 박해가 굉장히 (정전협정 이후) 무서워졌습니다.

북한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성분'이라는 말입니다.

'너 성분이 나쁘다' 그러면 꼼짝 못해요.

요즘 오는 탈북민들한테 얘기를 들어보면

'토대'라는 말을 많이 쓰더라고요. *'성분, 계층'을 뜻하는 말

'너는 아주 적성 계층이야' 그러면 출세, 승진, 결혼도 다 막히는 거죠.

그렇게 성분조사를 하고, 주민 등록, 재등록 시키고,

기독교인들은 다 산간오지로 보내고...

그 결과 북한의 지상에서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그 박해가 1953년 정전협정 이후에

'적극적 박해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금년이 마침 70년째 입니다)

지금까지 그 상태가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저는 그때를 "전통교회 부재기"라고 부릅니다.

이런 전통적인 의미의 교회가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전통 교회 부재기'가, 1953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북한교회 연구를 제일 먼저 시작한 분은, 한국 학자가 아니에요.

일본학자 에요. 사와 마사히코라고, 한자로는 택정원 이라고 쓰는데

원래 법학을 공부하신 분인데, 목사님이 되셨고

한국에 유학도 오셨는데,

이분이 쓴 '북한 교회'에 관한 책에는

1953년부터는 북한교회 해체기,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부재기 라고 불렀어요.

이렇게 모여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런 모습으로서의 기독교가

이제 없어졌다고..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안에 종교학과 교수를 오래 지내신 윤이흠 박사님이 계세요.

그분도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신데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1953년부터를 '기독교 해체기'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국가교회 출현기> 1972년~

이제 1972년에 와서, 조금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한도 '너무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평양신학교를 먼저 문을 열고, 성경과 찬송가 발행하고

뭐 기독교 관계 국제회의에 북한 대표를 내보내고,

그 다음에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문을 열고 조금 이렇게 달라지기 시작했죠.

해서 저는 그때를 <국가 교회 출현기>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4) <지하교회 활성기> 1998~

그 다음에 1998년, 탈북민들이 많아지면서 부터는 <지하교회 활성화기>

탈북민들을 통해서 지하교회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거든요.

이렇게 구분을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도 전통교회 부재기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교회가 지금 북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교회는 지금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예언자가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단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BC 538)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렘29:10절을 다니엘이 읽었어요.

예레미야의 예언을 보니,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는구나'

이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어요?

9: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이때 다니엘은, 70년만에 포로기가 끝날 것을 내다보고,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 회개하며 중보기도합니다. :3

9:4절부터 아주 처절한 회개가 나와요. 아주 구체적인 그런 회개를 했어요.

9: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우리가 이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지금 드려야 됩니다.

통일선교주간에, 특별히 열심히 이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다니엘서에 나온 '주의 황폐한 성소'는 북녘의 교회들이에요.

◑한국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북녘교회

여러분 북녘은 어떤 곳입니까?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1885년 4월 5일, 마침 그날이 부활절 이었어요.

그 날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들어온 것, 그게 한국 교회 역사의 시작아닙니까. 주1)

그래서 북한에서 한국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사실을, 반대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런데 조선 땅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해를 엄밀하게 말하면

그 전에도 기독교와 관계된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게 거의 다 북녘에서 일어났어요.

-최초의 순교는 1866년 9월에, 북한 대동강에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가 있었죠.

언더우드가 들어오기 약 20년 전이었죠.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열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례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평북 의주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요녕성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나라 교회역사의 자랑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번역돼서 나왔습니다.

1882년 최초로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심양(선양)에서 나왔죠.

로스 선교사가 주도했기 때문에 '로스 역'이라고 부르죠.

그때 서상륜, 백홍준 등 의주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그런 일을 했죠.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교회가 세워진 건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는, 보통 소래교회로 꼽습니다.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진 소래교회. *송촌교회 라고도 부릅니다.

그것도 북한땅이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촌리에 세워졌습니다.

*서상륜과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한국 교회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 북녘이에요.

또 북녘 땅은 어떤 곳입니까?

-교회가 대단히 왕성하던 곳입니다.

한국교회사에는 하나의 공식이 된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교회가 제일 흥왕하던 곳은 서북이었다'

'서북'이란 말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합한 말입니다.

줄여서 황평도 라고도 그러는데, 보통 '서북'이라고 그래요.

이건 아주 공식적인 말이에요. 좀 부작용도 있었어요. *서북청년단 등

-여러분 또 알아야 될 게 있어요. 한국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개 북쪽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1907년 평양대부흥도

평양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전에 1903년에, 부흥운동이 먼저 일어난 게 '원산 부흥'이 있었죠.

하디 선교사가 중심이 돼서 일어났기 때문에 '하디 영적 대각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년 2023년에, 감리교단에서는

하디가 감리교 선교사였기 때문에

'하디 영적 대각성 원산부흥 120년' 기념행사를 크게 하고 있습니다.

-'백만명구령운동'은, 1907년 평양대부흥이 좀 식어갈 무렵

'안 되겠다. 다시 부흥을 일으켜야 되겠다..'

그것도 개성, 선천 등 북녘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다 북녘에서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장로교는, 서울이 중심이 아니라, 평양이 중심이었어요.

장로교 신학기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평양에 있었어요.

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장로교의 원로 목사님들은

다 평양신학교 출신들이었어요.

이제 교회들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장로교는 기본 조직이 노회입니다.

처음 만들기 되었기 때문에 독노회라고 불렀죠. 독립노회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장로교의 최초 노회는 1907년 평양에서 만들어졌어요.

그 다음에 노회들이 많아지니까,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어요.

총회도 최초로 2012년 평양에서 조직했습니다. 최초 총회장은 언더우드 선교사.

그래서 장로교는, 서울이 중심이 아니라, 평양이 중심이었어요.

서울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심이었고

평양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중심이었는데,

조금 마찰이 일어나기도 이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북녘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에요. 한국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에요.

역사의 중심지에요. 대단히 흥왕하던 곳이에요.

교회 숫자도 거기가 많았어요.

한국교회사에 굉장히 중요한 일들이 거기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북녘이 지금 황폐해졌어요. 복음의 진공상태가 되었어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북녘)에 비추시옵소서' 단9:17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보니까 '우리가 북한 선교에 힘써야 되겠는데

통일선교에 힘써야 되겠는데

통일이 되어야지 황폐한 성소를 다시 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당연한 질문이죠.

통일이 언제 될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1) 회의적 통일관

'통일이 과연 될까?' 하는 사람들이죠.

2) 부정적 통일관

'통일은 안 될거야' 거기까지는 어쩌면 좋아요.

그런데 '통일이 안 되었으면 좋겠어' 라는 사람들도 일부 있습니다.

3) 요즘 살살 퍼져나가고 있는 새로운 통일관이 하나였어요.

'뭐 하나가 돼야 통일이냐, 그냥 뭐 둘이 따로따로 지내면서

싸움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면, 그것도 통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요즘 이런 생각이 특별히 지식인 세계에서 퍼져나가고 있더라고요.

(이건 조심해야 되는 통일관입니다)

4) 초월적 통일관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통일관을 가져야 됩니까?

초월적 통일관을 가져야 합니다.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주실 것이다'

지금 자세히 설명할 수 없으니 인터넷에 한번 '초월적 통일관'이라고 입력을

해보세요. 그럼 기사도 하나 나오고, 칼럼도 나옵니다.

2022년 10월에, 부산에서 통일선교관련 집회가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강연을 했는데

국민일보 종교부장이 강사의 한 사람으로, 또 취재차 나왔다가

'초월적 통일관' 얘기를 듣고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은 모양이예요.

그래서 국민일보에 크게 났던 적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은 초월적 통일관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통일을 주시면, 바로 직접 선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이런 집회도 훌륭한 선교입니다. 그런데 간접선교죠.

그러나 직접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됩니다.

△군대에는 '비상대기조' 라고 있습니다.

적이 쳐들어오거나 위험한 상태가 발생하면

바로 즉시 출동할 수 있는 그런 부대가 있습니다.

저는 공군 사병으로 군대 생활을 했는데

공군 비행장마다 활주로 끝에는 오분대기 비행기 두 대가

무장을 완전히 갖추고서 활주로 끝에 대기해 있습니다.

뭐 적기가 들어온다거나 무슨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비상대기하고 있던 조종사가 뛰어 올라가서

5분 안에 출격할 수 있는 그런 비행기가 두 대씩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한 지가 60년 됐는데 지금도 그럴거에요.

기독교인들은 통일의 5분대기조가 되어야 됩니다.

저는 초월적 통일관을 굳게 믿고 있어요.

제가 통일선교, 이 분야 일을 한지 오래 됐습니다. 여러가지 일을 겪었어요.

그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초월적 통일관' 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여러 해 하다가, 선교방송국에 PD로 들어갔습니다. *CBS

근데 북녘을 향해서 이렇게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도

'이 방송을 북녘에서 들을까? 안 들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이 나질 않아요. 그때는 그랬어요.

1970 년대에 남북관계가 얼마나 엄했습니까.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오분 성경>이 있었어요.

북녘에는 성경이 없었으니까, 이 방송을 들으면서 받아적을 수 있게

성경을 천천히 하루에 5분씩 읽어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아나운서들이 그거 맡기 아주 싫어했어요.

말을 이렇게 아주 정상 속도로 해야 자연스럽는데

더듬더듬 읽어야 되고, 읽어준 것도 또 읽고.. 그러니 어색하잖아요.

그래서 서로 그거 안 맡겠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방송하고 있었는데, 제가 날짜를 기억합니다.

1979년 4월 23일.

1978년 말부터, 중국의 등소평이 '이렇게 폐쇄정책을 쓰면 안 되겠다' 해서

개혁 개방을 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바깥으로 편지를 좀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성도들의 편지가 오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지난 10년 동안에는 53통인가 왔는데,

1979년 한 해에만 1만5천 몇 통이 왔어요.

중국 사람들이 한자로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1979년 4월 23일에 중국 심양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심양에 살고 어느 장로님 이에요. 우리말로 쓴 편지가 처음 왔습니다.

한자 중국 간체가 많이 섞인 한글 편지였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심양시 서탑과 몇 번지'에서 온 편지였어요.

"우리들은 지난 30 년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중국이 공산화된 게 1949년이고, 그 편지 받은게 1979년이니 30년 된 거죠)

이제 등소평 주석이 개선책에 의해서 뭐 이제 조금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지난 30 년 동안 귀 방송을 들으면서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조금 모이기 시작하는데

심양에도 모이는 곳이 몇 군데가 되는데

성경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찬송가는 수사로 대람하옵고 (손으로 써서 돌려가며 봅니다)

성경이 없으니 문제올시다.

하오니 무슨 방법으로든지 성경을 보내주오"

이런 편지를 받을 줄 몰랐어요.

여러분 지금은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요.

그때는 '중국'이라고 그러면, 방송국은 뭐 그때 정보기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중국은 '중공'이라 불렀고, 북한은 '북괴'라고 불러야 했어요.

그때 이런 편지 받을 줄 몰랐어요.

막 손이 떨리고 눈물이 저절로 나오고 그랬습니다.

제가 생각했죠. '이렇구나, 이게 신앙이로구나' *없어지지 않았구나..

그러면서 그런 편지가 계속해서 오더라고요.

▲그러다가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또 제가 천안함 사건 전에는, NGO 활동으로 북한을 여러 번 갔습니다.

북한의 평안남도 숙천군이라는 곳에 농장을 하나 맡아가지고

거기에 이렇게 생산량이 많이 나오도록.. 그런 일을 위해서 많이 갔는데,

북한에 갔다가 625 전에, 교회였던 곳, 터만 남아 있었어요.

제 발로 그곳을 발견한 일도 있었습니다. 약전교회 였어요.

제가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그런 일을 많이 겪으면서

나는 '초월적 신앙관, 초월적 통일관'이

제 통일론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2023년은 특별한 해입니다. 이제 반밖에 안 남았어요.

뭐 진하게 통일선교운동을 해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이 교회는 모범적으로 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교회에 강사로 와서 실수를 많이 했어요.

제가 평소에 '어디 가면 말 좀 많이 하지 말게 해 주옵소서' 늘 다짐합니다.

제가 원로 목사이고, 그것도 고참인데

그래서 스스로 품위를 유지해야 되는데

입을 열면 실수가 나오기 쉽기 때문에

늘 어딜 가든지 말조심을 하고, 말을 많이 안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와서는,

오자마자 그냥 뭐 영접나오신 분부터

또 탈북민 목사님도 만나고

이렇게 통일선교를 열심히 하는 분들을 만나니까.. 말을 참 많이 하게 됐어요.

제가 흥분해가지고 그랬나 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선교를 주제로 부흥회도 하고

-통일선교학교도 운영하고

-특별히 DMZ 방문기도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DMZ(비무장지대)는 정전협정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양쪽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킬로미터씩 후퇴해서

4키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형성함으로써

우발적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충돌을 예방한다... 그 목적으로 만들었죠.

이게 4킬로가 벌어져 있어야 되는데

북쪽에서 먼저 이만큼 내려왔어요.

그러니 남쪽도 그만큼 올라갔어요.

그래가지고 지금은 DMZ 면적이 43%가 줄어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가깝게는 7백미터가 안 되는 곳도 몇 군데 있고 그래요.

분단의 현장이거든요.

우리나라에 전망대가 15군데가 있어요.

서쪽 끝 강화도에 화개산 전망대 부터,

동쪽 끝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열다섯 곳이

북녘 땅을 열심히 보면서, 가까이에서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하반기에 통일선교에 더욱 힘쓰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올해가 통일선교의 특별한 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북한)에 비추시옵소서' 단9:17

다니엘처럼 이렇게 기도하면서

통일선교에 더욱 힘쓰는 귀한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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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런데도 1885년의 언더우드 입국을, 한국 선교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언더우드 이후, 선교사들이 나라의 허락을 얻고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임.

그 전에는 간헐적, 비정기적으로 들어왔음. 나라에서도 허락하지 않았음.

1884.07.03.고종의 기독교 선교 윤혀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