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풀어질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24:25~32 2010.12.03.설교녹취
*어느 부교역자 설교말씀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만나서 동행하시는 장면이다.
※설교자는, '엠마오 도상에서 생긴 일'의 본문이 설교되어질 떄,
본문의 주된 (한) 관점을 놓치고,
부차적 관점에서 종종 설교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래 설교를 하고 있다.
아래 논지가, 본문의 주된 (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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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자의 심상(마음 상태)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슬픔이다.
눅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그래서 수많은 설교에서, 본문을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시는 주님'으로 주로 해석해서 설교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에서.. 슬픔 말고도 제자들의 다른 심상을 볼 수 있다.
이 제자들의 마음에는 치열함이 있었다...
본문 15절에 <문의하다>란 단어가 등장한다.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 syzēteō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이 이야기의 내용은 불과 3일전에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그리스도의 잡히심, 수난 당하신,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것에 대해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문의했다.
개역성경에는 그냥 <문의하다>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한 질문과 대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이 나눈 것은 그냥 일반 대화가 아니었다.
'문의하다'의 헬라어는 수제테오syzēteō 인데,
이 단어는 그냥 평범한 대화를 뜻하지 않고,
매우 열정적으로 벌이고 있는 논쟁, 씨름하고 있는 이슈 등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다.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보면,
눅22:23, ‘그들이 서로 묻되 syzēteō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서로가 '누구일까?'하며 심각하게 물었다.
행6: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syzēteō ’
스데반의 가르침을 듣고, 관심 있는 외지인들이,
스데반과 심각하게 토론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 매우 신중한 분위기로 논쟁하며,
이성적으로 치열하고 고민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진지했느냐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곁에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거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논쟁 가운데, 심각한 논리적 대화 가운데 이들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스포츠도, 회의도, 심지어는 전쟁까지도
감정이 들어가면 격해진다.
그런데 이들은 이들의 슬픔을, 이성적인 대화, 논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격렬한 논쟁의 분위기를 깨고 예수님이 끼어들어오셨다.
이들은 멈춰 서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그 질문을 듣기 시작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들에게 두 번의 질문을 하셨다.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지금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이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번째 질문은,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벌어진 일이 무엇이냐?’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예수님의 3가지의 의도와 목적이 깔려있었다.
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뜨거운 논쟁에 빠져있는 너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제자들이 지난 며칠간 겪었던 일, 슬픔의 원인이 된 십자가 사건,
지금 너희가 가고 있는 길, 하고 있는 뜨거운 논쟁을 잠시 멈추고,
다시 한 번 차근히 생각할 기회를, 쉬는 시간을 가지라는,
예수님의 이들을 향한 따뜻한 배려였다.
②치료의 과정이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도 문답법을 종종 사용하셨는데,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문답법을 통해서, 제자들이 받은 슬픔과 대면하도록 만드신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주님 앞에 드러내도록 하신다.
여러분, 슬픔의 특징은 털어놓기만 해도, 절반정도는 해결된다고 한다.
그래서 심리치료법 중에, 가상의 연극을 하면서,
환자들이 자신의 내면속에 숨겨져 있던,
상처를 끄집어내고, 표현하도록 만든다. 그것 자체가 치료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방법을 사용하신다.
아무리 심각한 토론, 치열한 이성적 작용으로도 자신들이 가졌던
이 슬픔의 원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허무함의 뿌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두 제자의 이 상처를,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 드러내도록 만들고 계신다.
두 번의 질문을 통해서 이 일을 하고 계신다.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 있어도, 환자가 상처의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지 않으면,
약효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없다. 붕대 위에 아무리 약을 부어봤자,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찾아와 상처위에 덥힌 이 붕대를 제거해 버리신다.
이들의 상처를 스스로 보게 만들고, 주님 앞에 드러내도록 만드셨다.
이미 절반 정도의 치료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③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신 이유는, 정리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충분한 정보를 나눈 것인지,
가장 중요한 구약의 말씀,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던 구약의 토라의 말씀이
너희 토론 속에서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시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너희들 대화와 토론가운데 배제되어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점검할 기회를, 제자들이 가졌다는 것이다.
두 제자는 메시야께서 오시면 누리는 축복,
영광에 대한 말씀만 기억했는지 모른다.
사실 부활의 영광 이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구약의 말씀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들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이.. 이성적으로 수긍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기대도 따라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서, 또 이들에게 꾸지람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구약의 모세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받을 고난을 충분히 말씀하지 않았느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사실 십자가 사건 바로 이전에도,
예수님은 설교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당하실 고난,
부활의 영광 이전에 당하셔야할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충분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다만 제자들의 선입견이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깨닫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제자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상처와 무지가 예수님 앞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님은 이렇게 평가하신다.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은 평소에 이렇게 강경하게 말씀하신 적이 거의 없다.
이렇게 꾸짖으신 적을.. 제자들에게.. 성경에 찾아보기 힘들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었을까?
▲그런데 꾸짖으시는 이 꾸중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온유함을 볼 수 있다.
너희가 놓치고 있는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라.. 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이들에게 내리신 처방은,
모세로 시작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그 핵심을 전해주신 것이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지금까지 토론을 통해서, 이성적인 작용을 통해서,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
그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주님이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주기 시작하셨을 때!
올바로 부활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올바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해석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덮어두었던 모세의 말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자,
드디어 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다.
부활의 신비가 , 그 축복이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이, 고난당하셔야만 하는 그 이유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제자들의 식어진 가슴은 다시 뜨겁게 불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정리하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아니다.
주관적인 경험도 아니다.
치열한 열정적 토론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지 않는다.
주님과의 만남 만이 우리 가슴에 다시금 불을 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만이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게 한다.
그래서 평소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통해서,
내가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나는 엠마오 도상의 체험을 해야 한다.
부활의 영광, 고난의 신비를..
말씀(특별히 구약도 십자가와 부활을 근본으로 해석해야..)을 통해서,
내게 잘 풀어져야 할 것이다.
그때 눈이 밝아지고, 힘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내 속에서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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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으로 연주하십시오 렘15:16 09-09-27설교일부스크랩
성경을 읽는 것, 설교 하는 것은..
음악연주자가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곡조를 연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과
첼리스트 한나 장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올해 가을과 겨울에 연주회를 갖고자 한국에 온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에 연주할 곡목 중 하나가 브람스의 곡입니다.
▲사라 장은 8살 때부터 미국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브람스 협주곡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세가 될 때까지 한 번도 브람스의 곡을 연주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테크닉만 좋다거나 곡조만 잘 안다고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고 사라 장의 음악적 대부였던
쿠르트 마주어가 사라 장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사라 장은 18살 때부터 브람스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고 싶다고
계속 스승에게 졸라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애스트로는 ‘너는 아직 어리다’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브람스를 연주해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그 때 마주어는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배웠던 브람스를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주어는 사라 장의 브람스를 아주 처참하리만큼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면서
끝까지 전체적으로 뜯어 고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라 장은 지금도 브람스를 연주할 때마다, 그것은 도전의 대상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브람스가 가진 드라마틱함 그리고 그 열정이 때로는 저를 힘들게 해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아무렇게나 분출하면 곧장 엉망이 되고 말거든요.
그 엄청난 감정과 에너지를 연주하는 내내 지적으로 컨트롤해야 하죠.”
그러면서 그녀는 브람스 곡에 담겨져 있는 감성적 충일함과
그것을 연주하려는 지적인 것이 같이 만나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장한나도.. 브람스의 곡에는 지치지 않은 음악적 액기스가 담겨져 있다는
고백을 똑같이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브람스는 베토벤을 아주 존경했던 인물로서
고전음악을 새롭게 완성해나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첫 번째 교향곡을 쓰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의 곡이 너무나 위대했기에 어떤 면에서 그에게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결국 1860년대에 제 1악장을 썼다가 1876년에 가서야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합니다.
장한나는 바로 이런 브람스의 곡을 연주하면서 그 속의 깊이를 경험합니다.
그녀는 스승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의 만남이
자신의 삶을 바꾸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1살의 첼리스트 장한나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연주할 때
그녀는 단순히 악보만 보고 연주하는 것이 연주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승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스승을 통해서 작곡가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작곡가 한 명이 작곡한 곡조를 연주하려고 해도
연주가는 작곡가의 전 생애 속에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곡조만 그대로 따라간다고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곡가의 마음과 그 속에 담겨있는 전체를 습득할 때
멋진 거장의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작곡가가 그린 악보와도 같습니다. 작곡가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말씀은 문자에 불과하지만 그 문자 속에는 생명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 문자를 연주하기(글로 쓰기) 위하여.. 시편 기자와, 모세와, 엘리야와
바울과, 요한은.. 그들의 삶 전체를 그 속에 쏟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은총의 역사를 함께 나누려는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우리가 대충 읽으면서 지나쳐버려도 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악을 연주하는 멋진 연주가가 되려고 한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합니다.
▲먼저 말씀을 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연주자는.. 곡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빼어난 연주가 가능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빼어난 연주가 가능합니다.
말씀 속에 내가 들어가고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혀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말씀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과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내가 네게 가르치는 성경 두루마리를 입으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겔3: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15:16)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10:10)
여기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종이를 씹어 먹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가 살아보고, 자기 몸으로 체득해 내었다는 것입니다.
또는 앞으로 그렇게 직접 자기가 먼저 체험하겠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성찬도 내 살과 피를 먹으라.. 고 하셨지요.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을, 자기 몸에 체득화, 육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여
이 말씀을 먹고, 배로 소화시키고, 혈관을 통해서 온몸에 흘러
살과 뼈가 되도록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내 입에 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내 속에 들어오면 때로는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몸살을 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
내 영혼을 붙잡게 되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혜, 치유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 땅 위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 영혼의 음악/생명의 음악을 연주하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를 미련함에서 탈출시키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음식이 소화되는 과정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듣고 가슴으로 끌어내리며
말씀을 몸 곳곳에 흘려보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나를 소생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음악을
이 땅위에서 연주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곡조대로 장단을 맞추어,
하나님과 함께 기뻐 춤추며 뛰놀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가을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신앙이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말씀을 펴서 내 것으로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음악과 곡조를 가지고 이 땅위에서 멋지게 연주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축복의 연주를 듣게 하십시오.
그 때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이 땅위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단락 김지철 목사님 설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