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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중심 이동하라

LNCK 2023. 8. 23. 17:54

◈십자가로 중심 이동하라     갈2:20, 고후5:17         2018.03.30.스크랩

                                                        ☞<자아> 관련글 모음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아(ἐγώ)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핵심적인 것입니다.

자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자아를 그대로 두면, 사고뭉치가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자아는 죄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죄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것은

자아 중심적(ego centric)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주관하는 대로 움직이면, 우리의 자아는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변화는 자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우리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우리의 중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신앙의 변화는 외적 활동의 변화가 아닙니다.

10년, 20년 교회 다녔다 해도, 자아가 변화되지 않으면,

신앙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심의 변화가 일어나야 신앙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 중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50년 교회 다녔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1년 교회 다녔어도, 마음 중심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놀라운 것입니다.

마음 중심의 변화는 곧 자아의 변화입니다. 자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로마서 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특징은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광고는 “네가 좋은 것을 하라, 너를 만족시키라.

너는 좋은 것을 선택할 자격이 있다. 이것을 놓치면 불행해질 것이다.”

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므로 광고의 힘은 엄청납니다.

 

광고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광고의 메시지는 ‘네가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네가 만족할 만한 것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 문화는 자아를 충족시키는 문화입니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만족하게 하는 문화입니다.

 

나를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나 중심적 삶을 가리켜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우상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에도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을 찾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뒤적입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끌어당깁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읽으려 합니다.

성경의 본래 의미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이렇게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부족합니다.

 

묵상할 때에도 자기에게 좋고, 자기에게 위안이 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만 찾는다면, 위험합니다.

 

자아만족을 위해 성경을 도구화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에 줄을 그은 것을 모으면, ‘내가복음’이 됩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도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설교를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다가 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든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만 찾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중심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중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 자유주의가 생겼습니까?

인간의 지성(知性)이 주인이 되어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지성이 신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생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면 자유주의가 되어버립니다.

자신에게 편한 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단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을 빼버리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이 되려면, 자기중심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삶의 문제에서 빠져나와

초월적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우리는 삶의 문제에 파묻혀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심 이동이 중요합니다.

중심 이동은 자아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문 갈2: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나는 누구입니까? 죄인 된 나입니다.

그러므로 중심 이동을 하려면,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자기중심성이 강조된 것이 죄입니다.

죄의 속성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고집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대립합니다.

하나님과 갈등관계에 놓입니다. 그래서 사고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그래서 사고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 완전히 굴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압축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려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들의 사명이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뜻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중심 이동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가 따로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이후, 바울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바뀌고, 그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추구하던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중심이 이동했습니다.

 

▲본문 갈2:20절의 말씀은 바울의 자전적(自傳的) 고백입니다.

갈2:20절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첫 단추와 같습니다.

갈2:20절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갈2:20절의 말씀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고후5:17절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후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살아가려면,

갈2:20절의 말씀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나도 동일하게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갈2: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므로 내 안에 새로운 중심이 생겼습니다.

중심이 재설정되었습니다.

 

이전의 중심은 끝나고, 새로운 중심이 생겼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새로운 중심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나’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고후5:17절로 이어집니다.

 

고후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개조된 것이 아닙니다. 변형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의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갈2:20절에서 말하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이전의 삶은 더 이상 없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나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으셨을 때, 나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닙니다. 우리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내 자아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내 자아는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중심에서 내 삶을 주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죽은 자아가 다시 살아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자아가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주인 되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도록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도록 예수님께 내 삶을 맡기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경험하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때 우리는 멋지게 살 수 있고, 멋진 결과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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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을 살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있습니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아를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위험한 것은 자아가 죽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아는 언제든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자신을 과시하려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40일을 금식하신 후 주리신 예수님을 사탄이 시험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떡을 돌이 되게 하라는 것, 능력을 과시하라는 것은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행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합니다. 자아가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역과 직분이 맡겨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인정받으려 하고 높아지려 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유혹이 죽어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만 드러납니다.

 

내 삶이 끝난 후, 내가 있던 자리에 그리스도만 남아있어야 합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했지만,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만 남아있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사역하다 보니 이것을 늘 염려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기도제목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고,

자기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합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발악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밟으려고 하면, 같이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군가가 밟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9).

이것이 죽은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칠 때, 같이 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잘 죽는 것입니다. 왜 삽니까? 잘 죽기 위해 삽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곳에 생명의 역사(役事)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어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죽어야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닙니다.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때까지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기려고, 살려고 몸부림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벌합니다.

 

사랑이 말라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애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개인주의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족 사이에도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반인륜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 중에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몰두합니다. 자기 세계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봅니다.

 

지나치게 자기에게 집착하여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확장되어 사람들은, 자기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만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하면, 성공의 후유증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적인 삶은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실한 채 자기업적에만 파묻혀 살아간다면,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자아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 상처 받으며 삽니까? 상처 받는 이유는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상처 받지 않습니다.

 

봉사하는데도 자아가 살아있으면, 봉사하다가 상처 받습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처 받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기 때문에 상처 받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 방식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상처 받습니다. 어떻게 자기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분노합니까?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갈2:20절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는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는 평안합니다.

 

묵묵히 봉사합니다. 날카롭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자아가 죽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면, 상대방만 죽는 것이 아니고 자신도 죽습니다.

상대방을 죽이면 자신이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삶이 불행해집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랑방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지 않은 자아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아가 왕국인 곳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의 독소는 매우 강합니다.

 

남을 사랑하려고 하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아는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면, 다른 사람을 세워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자아가 죽으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막힌 것이 뚫릴 것입니다.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자아중심적인 이기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섬길 수 있습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은 십자가입니다.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울증은 자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보세요.

우울증이 사라질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애(自己愛)에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참된 사랑을 원한다면, 이기심으로 가득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삶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구한다고 해서 행복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 갈2:20절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을 때, 우리의 삶에 물꼬가 터질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왜 힘듭니까?

자신의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려고 결혼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결혼해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하려고 결혼하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줘야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내가 행복하게 해주면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려고 하고, 거짓된 자아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욕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갈5: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정욕과 탐심은 날마다 밀고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정욕과 탐심을 처리해야 합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교회를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은 자아만족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폭력을 행사하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요즘 미투운동(me too movement)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봅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이 사회에 만연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관계들 속에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이용합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자아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에 드는 교회, 마음에 드는 목회자,

마음에 드는 사랑방을 찾지 마세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있다 해도,

그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를 만족시키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교회, 내 자아를 불편하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존심과 이기심이 무너져야 합니다.

내 생각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나와 함께 사시면,

멋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욕망과 탐심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정욕은 죽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사역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이 강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해야 합니다. 그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가 죽을 수 있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능력의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꺼이 죽으세요. 즐거이 죽으세요.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고민하지 마세요. 내가 죽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나의 자리에 임하십니다.

 

자아의 존재가 커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죽고 나면 자존심 상할 일이 없습니다. 예민해지지 않습니다. 짜증날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에 예민해집니다.

사람들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혈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죽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죽을 때, 옛 삶의 중심이 사라지고, 새로운 중심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때 강력하고 멋진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십니다. 이기심이 죽어야 합니다.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정욕이 죽어야 합니다. 자존심이 죽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자아 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실 수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는 원리를 깨달으면 그것이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멋지게 살려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잘 사는 법은 잘 죽는 것입니다. 잘 살려면, 잘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연습해보세요. “나의 옛 사람은 죽었다.”라고 선포하세요.

 

이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새로운 자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