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8]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다 -- YouTube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다 창41:8~16
◑도입
'요셉의 축복' 두 번째 시간입니다. (창17강, 18강)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요셉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데
요셉의 인생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내용은
"성숙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가문'의 시작점이었다면,
요셉은 이제 4대째 이르게 되죠. 그러면서 그 믿음이 점점점 성숙해지고
원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요셉 대에 이르면,
'성숙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성숙한 믿음의 내용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나의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 성숙한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나를 애굽에 보낸 분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은,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바로 앞에 서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내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God is in control!'
이것이 성숙한 요셉의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성공뿐만 아니라 고난까지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주관하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고난가운데 있다고 낙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고
내 인생이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다.'
내가 고난가운데 있던, 아니면 내 인생이 성공했던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성숙한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물론 이 믿음까지 갈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전부 다 스킵하고
바로 요셉의 믿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계속 믿음을 만들어갔던 스토리들이 있지요.
그리고 그 결과로, 요셉이 나오게 되는데
이 앞에 것을 전부 다 스킵하고, 바로 요셉으로 가게 되면
조금 이상한 '기계적인 예정론'에 들어가게 돼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 하셨어요.
그런데 그 예정 안에, 믿음의 능력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이런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계적인 예정론'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요셉의 믿음은, 그런 게 아니고
그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유업들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믿음의 완성으로...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그 하나님 에 대한 신뢰,
그것에서부터 나오는 믿음이지요.
그래서 요셉은 그 믿음으로 인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특징이었습니다.
◑본론/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특징을
몇 가지 더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5가지 특징을 지난주에 살펴봤는데요. *창17강
오늘은 이어서 6번째~9번째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6. 성숙한 믿음의 여섯 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거예요.
자기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거예요.
40:7~8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의 지금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려서, 하루아침에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 만으로도, 정신병적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굉장한 트라우마 겠지요.
아버지의 집에서 잘 살고 있던 십대 소년이,
어느 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팔려서,
갑자기 하루아침에 애굽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굉장한 트라우마 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보디발의 아내, 미칠 노릇이지요.
이방 나라에 노예로 팔려 왔는데, 그나마 자기를 정말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던 주인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그 주인 아주머니가 얼마나 천사같았겠어요?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천사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과거에 나라의 실력자들이, 꼭 노부인을 조강지처로 함께 살지 않았고,
아마 꽤 젊은 부인을 새로 데리고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보디발은 늙었어도, 그의 부인까지 꼭 늙었으리라 볼 필요는 없죠)
그 주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어느 날 돌변해 가지고서
자기를 유혹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가지고, 자기를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자기를 감옥에 들어가도록 했어요.
여러분, 이거는 요셉에게 쓰나미 같이 굉장한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가장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천사같은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게 되면.. 대부분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처음 나타나는 증상이 대인기피증 입니다.
사람들에게 배신 당해서 충격을 크게 받고 나면,
대인기피증이 제일 먼저 나타나요. 그래서 사람을 안 만나려고 해요.
두번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조절장애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막 벽을 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전부 다 죽여버릴거야'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요셉의 모습을 보면.. 달라요.
일반적인 범주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분노 장애가 나타나지도 않고, '죽여버릴 거야'라는 소리도 않고,
대인 기피증이 나타나지도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거기 있는 술맡은 관원장, 떡맡은 관원장에게 다가갑니다.
이것만 해도 이상하지요.
다가가서는, 요셉이 되게 친화력이 좋았던 거 같아요.
그를 보면서 '오늘 당신의 얼굴에 있는 근심은 어찌됨 이니이까?'
이게 여러분, 여러분이 그 상황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굉장히 특별한 행동입니다.
지금 요셉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 얼굴에 비치는 근심을
자기가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에요.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내가 지금 인생이 끝나고, 막장에 도달했는데...
아직 20대인데.. 정말 파릇파릇한 20대 청년이, 자기 인생이 끝장난 겁니다.
노예로 팔려온 것도 부족해서, 평생 나갈 수 없는...
어쩌면 죽어서나 나가게 될지 모르는 이 감옥에 들어와서... 소망이 끝장 난 거죠.
지금 요셉은 그렇게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장난 상황인데
다른 사람의 근심이, 자기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게 마치 어떤 거와 비슷하냐면,
A가 병원에 갔더니 자기가 암이래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는데,
병원 문을 나오면서, 옆에 사람이 감기 때문에 콜록콜록 합니다.
그걸 보고서 '어디 아프세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아요!'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런데 요셉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요셉의 믿음의 결과 라는 거죠.
요셉 안에, 보통 사람에게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믿음이 있었던 거죠.
그 믿음의 내용은 뭐냐면 'God is in control'
하나님이 지금 이 상황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거에요.
이 믿음이 있으니까, 나의 문제에 대해서는 평강이 있는 거예요.
나를 이곳에 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로 오해받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어쨌거나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내 문제는 노 프라블럼, 문제없다는 거에요.
내 문제는 완전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거예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붙잡고 계시고
나의 인생을 끌고 가고 계신다는 거예요.
이 요셉의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안에 놀라운 반응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거죠.
그 반응은 뭐냐면 '나의 문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거죠.
'나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에요.
사람은 여러분, 자기의 문제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파도 파도 또 나와요.
이 문제 해결하면, 또 그 다음 문제 생기고...
이게 여러분, 사람이 자기문제에 함몰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딱 두 부류가 있어요.
-자기 문제에 함몰되는 사람과
-그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는 사람.. 딱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 문제 속에 계속 더 깊이 파묻히는 사람과,
-어느 순간 자기문제를 딱 그냥 접고
그 문제로부터 빠져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기 시작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셉의 상황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인생을 쭉 한번 이렇게 (고무줄처럼) 길게 늘여서 놓고 보면
만약 요셉이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왜 노예로 팔려왔을까?'
'내가 노예신분에서 어떻게 풀려날 수 있을까?'
그러다가 감옥에 갔어요. 그러면
'나를 감옥에 넣은 자는 누굴까? 보디발과 그의 아내 외에도 조력자가 누구지?'
'놈들에게 어떻게 복수하지?'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이거 여러분, 아무리 오래도록
그 문제에 함몰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 방법이 있었겠어요? 없었잖아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요셉이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는 거에요.
우리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는,
저와 여러분이 나의 문제에 아무리 깊게 빠져들고,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도... 그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있겠냐고요?
없다는 거예요.
이 해결책은 누구에게 있냐면, 하나님께 있는 거예요.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여기서부터 자유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믿음?
God is in control.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나를 이곳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상황과 관계없이
나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오는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있는 근심 빛들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은,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자기 문제 때문에 고민했다는 기록은, 한 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이웃 사람들의 근심의 얼굴 빛은 뭔가?'
'저 영혼도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데...'
다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지,
자기문제에 함몰되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가 열심히 믿는 거 같은데, 돌파가 일어나지 않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여러분, 그렇게 해서 자기 문제가 해결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내 문제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셔!' 이 믿음을 가지고
내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 얼굴에 있는 근심을 보기 시작할 때 (요셉이 관원장을 돌봤듯이)
내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요셉의 믿음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면 그래야만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해결하지 않으시면..
저와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믿음!'
요셉이 감옥에서 유유자적했던 삶을 살았던 게, 바로 그 믿음의 비밀 때문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당신의 얼굴 빛에 있는 근심은 무엇입니까?'하며, 돌볼 수 있었다는 거죠.
△그렇게 했을 때, 어떻게 됩니까?
바로의 관원장 둘이, 자기 꿈 얘기를 합니다.
'꿈이 뒤숭숭한데 이걸 해석할 자가 없도다' :8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8
요셉은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근심에 대한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세상에는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없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닥치든지 간에,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없어요.
하지만 요셉 같은 참 하나님의 사람은, 해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모든 근심과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아이덴티티를 잊지 마십시오.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해답을 찾아서 여기저기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은 사람들이 돼 버리고 말아요.
저와 여러분은, 해답을 찾아서 여기저기 방황해야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예요? 해답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 아이덴티티를 놓치지 마세요!
이걸 정말 믿는다면,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왜요?
내가 해답을 갖고 있는데...
그러면 내 주변 사람들의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면 내가 해답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해답을 내가 알고 있는데, 안 움직이겠어요? 안 도와주겠어요?
심지어 사람들은, 정말 싸고 좋은 물건 파는 가게 하나만 알아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합니까?
'어디 마트에서 이런 물건을 파격 세일한대...' 이렇게 막 소문내고 다닙니다.
좋은 거 있으면, 주위에 막 알려 주고 싶은게, 인간의 본성이죠.
요셉이 자기의 어마어마한 근심거리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얼굴에 있는 근심을 봤던 이유는
자기는 해답, 해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거예요.
그들의 근심을 풀어주고 싶었던 거죠!
오늘날 여러분,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웃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줄 아십니까?
내 문제가 커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생 문제의 해답이다!'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해답이라고 하는 확신이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요셉의 믿음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때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God is in control !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컨트롤 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고, 크리스천의 본질입니다. 할렐루야!
△자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술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가게 되는데,
나가서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지요. 그때로부터 한 '2년' 지났는데, 41:1
하루는 바로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근심을 해결할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그렇죠. 세상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그랬을 때, 이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만있어 봐, 2년 전에 내가 꿈을 꾸고 근심 가운데 있을 때,
이 근심을 해결해 줬던 사람이 있었지...'
그래서 요셉을 천거하고, 그 결과 요셉이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셉이 애굽 총리였다는 사실만 기억하는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왜, 또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됐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요셉이 왜 애굽의 총리가 됐습니까?
간단합니다. 그는 인생 문제에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보니까, '어 이 사람 안에는 솔루션이 있네?'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그 꿈을 따라서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될 지에 대해서
해답을 알고 있는 거에요.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죠.
그것이 여러분, 요셉이 총리가 됐던 이유였습니다.
왜 요셉이 총리가 됐습니까?
요셉은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총리가 됐습니까?
자기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
그걸 통해서 요셉은 총리가 된 거예요.
여러분, 요셉이 감옥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 가지고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여기는 뭐 이제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냥 감옥에서 평생 썩다가 죽을 거야..' 계속 그러고 있었다면,
요셉의 인생은, 자기 탄식과 푸념 그대로 그렇게 끝났을 거예요.
그런데 요셉이, 비상한 믿음을 가지고서,
감옥에 있는,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요셉의 인생을,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만약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비관하고, 원망, 낙심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여러분, 불평, 비관, 원망, 낙심은.. 사실은 우리가 너무 쉽게 하는 거잖아요.
만약 요셉이 불평, 원망, 낙심했다면
그랬다면 요셉은 그냥 감옥에서 평생 썩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의 비참한 상황을 비관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에,
그 자리를 믿음으로 박차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
즉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요셉의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바뀌어서, 오히려 복의 기회가 됐다는 거에요.
제가 계속 반복적으로 얘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는
대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복 받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결국 복이 들어오지 않아요.
사람은 참 미련해요.
내 안에 있는 문제들, 지금 나를 지금 힘들게 하는 것들..
그것만 해결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계속 거기에 매달리는데
그렇게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부어져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이 들어오는 통로들을 계속 세워가야 됩니다.
통로가 다 무너져 있다면, 어떻게 복이 들어오겠어요? 그 통로는.. 바로 사람이죠!
결국 어떤 사람이 복을 받게 되냐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요셉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말이에요,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보면서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다..' 라는 판단을 하게 돼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지금 이 상황은 위기야.. 지금 이 상황은 재수가 없는 상황이야.. 큰일 났다..'
이렇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내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셉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판단 define 할 때,
무엇에 의해서 판단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뭐냐면,
상황을 무엇에 의해서 판단하냐면,
그 상황을 이루고 있는 여러 조건들을 가지고 판단 define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옥이란 현실 상황'을 가지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내가 재수 없네, 내가 큰 일났네, 내가 낭패 났네'
'내가 왕의 친위대장, 정말 권력자한테 제대로 찍혔네'
이 외적 조건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면,
굉장히 절망적 상황이고, 소망이 없는 상황이에요.
많은 경우, 우리가 이렇게 외적 환경을 보고서, 상황을 판단, 규정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냐면,
보이는 조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판단, 규정했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믿음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눈에 보이는 여러 조건들로, 그 상황을 규정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그 상황을 규정하십니까?
이게 여러분, 믿음의 차이 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상황들을 가지고, 그냥 외적 조건들을 가지고,
자기 상황을 규정해요.
'이 상황은 경제적인 위기야, 큰일 났어!'
사실은 여러분이 그것을 인정해 버리는 순간
그게 정말 그렇게 돼 버리는 거에요.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가 믿음으로 상황을 규정하는 거예요.
요셉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현실 조건들을 가지고, 상황을 규정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믿음을 가지고, 현실 상황을 규정했어요.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무리 저주스럽게 보여도
'아니야, 내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면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거야.
지금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축복의 통로가 될 거야!'
요셉은 그렇게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믿음에 따라,
자기 현실 상황을 규정 했을 때, 결국 2년 뒤에 어떻게 됐어요?
자기 믿음대로 되어버린 거죠!
이것이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의 반응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내가 오늘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들로, 여러분의 상황을 규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상황이 힘들어 보인다고.. '아~ 힘든 상황이야'하고 불평하지 말라는 거에요.
경제적인 위기가 왔다고 해서 '아~ 재수 없어'
이렇게 상황을 규정하지 말라는 거에요.
여러분의 말로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그 말대로.. 현실이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주변에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일지라도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 상황을 규정해 버려야 돼요.
여러분의 믿음으로 그 상황을 뒤덮어버려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지도,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정말로 여러분의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생각과 말에는 위력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 버리면, 그게 정말로 현실이 되어버린다는 거에요...
요셉이 비관적으로 일관해서 살다가,
설령 술맡은 관정장이 요셉을 기억해서, 바로에게 추천했다고 할지라도
요셉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꿈을 풀어낼 수 있었겠어요?
늘 불평하고, 한탄하고, 술만 마시고, 매일 폐인처럼 살고 있었다면,
만약에 바로 앞에 섰더라도.. 그는 바로의 꿈을 해석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럼 여러분, 믿음으로, 여러분 주변 상황들을 계속 규정하십시오.
현실 상황에 의해서 휘둘리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에게 '너는 실패자야.. 너는 끝났어.. 너는 뭐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하지 못하게 하세요.
여러분의 믿음의 눈으로 현실 상황들을 정의, 규정,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아무리 큰 일이 생겼다고 해도
일단 말부터 뱉으세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러면 감사한 상황으로 변해 가는 거고,
'제게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그러면
그 상황으로 고착되어 가는 거예요...
결국 우리의 믿음으로 상황은 규정되어 가는 겁니다.
▲7. 이렇게 믿음으로 상황을 define 했으면,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그 믿음대로 상황이 변화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믿음으로 상황을 규정하고 나면, 반드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영적인 원리인데, 그것은 그 상황이 정말로 실제가 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관원장이 새까맣게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거예요.
여러분 요셉이 어땠을까요? 아마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겁니다.
술관원장은, 자기 꿈의 해석대로 복직 됐는데,
요셉의 신상에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현실 상황을 규정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그 기간은, 우리 믿음의 진실성이 입증되는 기간이에요.
요셉에게는 2년이었죠.
그 기간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이 입증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가 믿음으로 규정했던 것들이, 진짜로 실체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 기간은,
우리가 믿음으로 정의한 현실 상황들이
-앞으로 실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불발탄으로 끝날 것인지가 결정되는 기간이 됩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이제껏 20년 이상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믿습니다' 했는데도
안 되는 거 투성이더라고요...' 이런 분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거죠.
정욕으로 바란다거나, 인내심이 부족하면.. 안 되는 거죠.
영적인 원리는 뭐냐면, 내 현실을 믿음으로 규정하면,
바로 마술처럼 짠하고.. 순간적으로 현실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믿음이 진짜인 사람은, 그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아요.
절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죠. 믿음의 사람이니까요. 또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니까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에
그 믿음이 진실하지 않았던 사람은, 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으로 말하자면, 한 1년 지나고 나서,
'그 관원장이 나를 잊어버렸구나.. 나는 이제 아무 소망이 없어!
그러니 그냥 술이나 퍼마시고 살자!' 그러면 불발탄이 되는 거죠!
그와는 반대로 '이 상황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이 상황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쓰실 거야!'
그렇게 여러분이 믿음으로 규정하셨다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까지..
언제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을 지키시며 인내하는 거예요.
△이 기간이 여러분, 생각보다 길지 않아요.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제가,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들을 쭉 돌아보면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지 않으세요.
만약에 오래 기다렸다고 느낀다면.. 중간에 몇 번 엉똥한 짓을 한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다시 리셋!'
자기가 그걸 몇 번 겪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기간이 길어지지.. 하나님은 그렇게 길게 기다리게 안 하세요.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이 딱 확인되면,
확인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날이 오는 거예요. 41:1절처럼 바로가 꿈꾸고, 요셉이 해석해 주는 날이 오는 거예요.
2년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바로가 꿈을 꿨습니다. 꿈은 요셉의 전공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랬잖아요.
결국 요셉은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항상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하시는데,
일하실 때는 급하고 빠르게 일하세요. 이 영적인 원리들을 아셔야 돼요...
▲8. 신실한,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덟 번째 특징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성경구절들을 찾아서 읽어 봅시다.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요셉을 보디발의 집에서, 또한 감옥에서, 바로의 궁에서 형통케 하셨다는 말씀인데,
그 외 39:5, 39:21, 39:23, 41:37~40절은 각자 찾아보세요.
요셉 인생에 중요한 특징이 했는데, 요셉이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뭐라 그러시냐면
'너는 복을 받을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대신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창12:2~3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한 사람으로 인함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는 거예요.
한 사람! 복을 가져온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복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한 집안이 전체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도,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한 공동체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도, 제대로된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나아가 한 나라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도,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이것이 여러분, 영적인 원리입니다.
세상은 뭐라 그러냐면, 많은 사람이 있어야 된다.. 민중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근데 아니에요. 여러분, 성경은 전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나 보세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지요!
정말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었던 사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켰던 사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상황을 define 하지 않고
믿음으로 상황을 규정했던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며, 2년이던지 3년이던지 인내하는 사람,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많은 사람과 많은 군중이 어떻게 움직였고, 시대가 어떻게 변했고..
이런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는 거예요.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판을 바꿀 수 있는 한 사람, 요즘 말로 게임 체인저!
믿음으로 판을 바꿀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세상을 바꾸실수 있으시고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판을 뒤집어 엎으실 수 있으세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믿음은, 그 한 사람만 복을 누리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주변의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되는..
주변 사람들만 복을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근동의 판이 바뀌어 버렸어요.
애굽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 흉년을 대비하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고대 근동의 모든 그 나라들 사이에
구도 자체가 완전히 바뀌지요.
애굽이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지요.
왜냐면 먹을 게 거기 애굽에만 있으니까요.
다른 나라가 다 그 밑에 들어오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대근동 국가의 판이 결정됐다는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굽도 망하고 끝났을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가정이 복을 누리는데, 믿음의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정말이에요.
교회가 복을 누리려면, 믿음의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우리나라의 판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판을 바꾸실 수 있어요.
여러분께 요셉의 믿음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마지막 아홉 번째 요셉의 믿음의 특징은
<성숙한 믿음이 있으면 악도 선으로 바꿔 버린다>는 거예요.
50:19~2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형들은, 좋은 의도로 요셉을 판 게 아니었어요.
요셉을 총리 만들려고 애굽에 판 게 아니었죠. 악한 동기로 한 거죠.
그런데 요셉의 믿음이 있었을 때
그 악까지도, 악의까지도, 결과적으로 선으로 바꿔 버렸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성숙한 믿음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사람들의 악함, 잔인함, 죄악..
그런데 이게 오히려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구원역사로 바뀌어 버렸잖아요.
이게 여러분,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악의, 악당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의 공의, 정의 라는 이름으로
악에 대해 자기가 정죄하려고 해요. 자기가 악을 심판 하려고 해요.
많은 경우 그때 실수하는 게 뭔지 아세요?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악을 심판하고, 악을 정지하다 보면,
우리 안에 분노와 미움이 올라와요.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모든 악과, 모든 잔인함을 그냥 믿음으로 삼키셨어요.
그랬을 때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까?
그 악의가, 결과적으로 오히려 선으로 바뀌어 버린 거에요.
죄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린 것이
오히려 기이하게도, 세상 구원을 이루는 신비한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만 그러셨던 것이 아니고, 요셉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의 인생 가운데 형들의 악함과 불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요?
요셉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위있는 자리로 올리시고,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판을 바꾸셨어요...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서는 악이 선으로 바뀌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반대로 선도 악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해와 원망과 질투와 저주는, 선도 악으로 바꿔버립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원망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 선도 악으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나 모든 악을.. 정말 오해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고,
저주 할 수도 있는 그런 악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묵묵히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때
그 악도 선으로 바꿔 버린다는 거예요.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 요셉의 믿음이
다시 한번 충만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