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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사는 사람들

LNCK 2023. 8. 29. 17:29

 

https://blog.naver.com/karamos/80119580756

 

◈힘겹게 사는 사람들      요15:18~16:4       2007.04.29.

 

오늘은 모처럼 제가 나온 고등학교 자랑을 좀 하려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라,

고등학교 얘기만 나오면 약간의 열등감을 느낍니다.

 

따져 보니까, 제가 다닌 학교가 일곱 개인데, 고등학교 때가 가장 헤매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의 저 자신에 대해서는 자랑할 게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부한 그 학교는 참 좋은 학교였습니다.

‘좋은 학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당시 그 지방의 명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보다는 인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려는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제물포고등학교

 

이 학교를 설립하신 분이 해방 후 한국 교육계에서 널리 존경 받던 길영희 선생님이신데,

그분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의 교훈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뿐만 아니라, 모자에 다는 학교 상징 배지에는 3개의 소금 결정 사이에 등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빛과 소금’은 산상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학교는 나중에 공립학교가 되었지만, 그 교훈과 배지는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무감독 시험’입니다.

시험 시간이 되면 선생님께서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나가고,

학생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답안을 작성합니다.

다 작성한 사람은 교탁에 답안지를 엎어두고 나갑니다.

 

이렇게 3년을 훈련 받으며 자라면, 적지 않은 학생들의 마음에

양심을 귀중히 여기는 태도가 형성됩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이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졸업생들 다수가 사회에 나가 양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씁니다.

 

▲이번 한인연합감리교회 전국 연합회 모임에 참여했다가,

이 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함께 모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까마득한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제물포 고등학교가 시작될 초창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에 의하면, 길영희 선생과 다른 설립 멤버들이 모여, 교훈을 정하고

무감독 시험 원칙을 정하고는, "우리가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분들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이 사회에 나가 힘겹게 살게 될 겁니다." *설교제목

 

하지만 이 사회가 바로 가기 위해서는, 힘겹더라도 양심과 원칙과 정의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 동문들 중에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겹게 사는 검사, 힘겹게 사는 의사, 힘겹게 사는 목사, 힘겹게 사는 학자,

힘겹게 사는 교사, 힘겹게 사는 회사원이 많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명석한 두뇌를 소유하고도 사회에 나가서는

그다지 화려하게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존경스러운 친구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선 영역에서 화려하게 드러나기를 꾀하기보다는,

조용히 양심을 지켜 가면서 자신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민망해 보이는 동문들도 없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생각할수록 자랑스러운 친구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공지상주의자들이 볼 때는 ‘힘겹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그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게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 믿는다는 것,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게 접목되어, 그분으로부터 양분과 수분을 흡수해 들이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열매가 언제나 우리 삶에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15:1~17

그런데 그 희망찬 약속을 주신 다음,

18절에서 갑자기 톤을 바꾸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게 웬 반전입니까?

예수님에게 접목되어 그분으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섭취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생각하면서,

늘 좋은 일만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 거룩한 열매가 가득하면 가득할수록,

우리는 세상 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 이게 무슨 함정이란 말입니까? 당신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

그토록 감미롭고 희망적인 (포도나무와 가지의 열매) 약속을 해 주시더니,

갑자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까 조심하라니요!“

 

예수님께 접목될 때, 우리에게 열리는 열매는 예수님이 맺으셨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맺으셨던 사랑의 열매, 희생의 열매, 정의의 열매, 진리의 열매, 거룩의 열매입니다.

 

이런 열매들이 우리에게서 맺혀지면, 이 세상은 그것을 반길 경우도 있지만,

거부하고 배척하고 미워할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사람 자신이 혹은 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을 향해 고발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불편합니다. 불쾌합니다. 눈엣가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세상은, 열매 맺는 예수의 제자들을 어떻게든 소외시키고 고립시키고

박멸시키기 위해 음모를 짭니다.

 

‘세상’이라고 말하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은 ‘세상’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그분의 손길을 못 본척하려는 욕구가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이고,

분별하지 못하고 그 욕구에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세상 속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어머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들었습니다.

제 어머님께서는, 제게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 제가 부푼 마음으로 말씀드릴 때면,

언제나, "그래, 잘 했다. 그런데 교만해지지 말아라. 그럴수록 낮아져라"고 일침을 주곤 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마음 한 편에서 울렁이는 반감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아니, 이럴 때는 그냥 칭찬해 주는 것으로 끝나시지, 꼭 그렇게 초를 치셔야 하나?“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어머님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려는 유혹이 제 마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때 짜증을 내며, "어머니, 좀 그만 하세요. 제가 뭐 어린애인가요?"하고 말하면,

저는 교만해지고 싶은 욕심에 저 자신을 넘겨주게 됩니다. 다

시 말하면, 세상에 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대꾸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서 거부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예, 어머니, 알았어요"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 잠시 눈 감고 머물러 있어 보면,

어머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을 담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이제는 노쇠하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천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로서는 큰 기둥을 잃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감사하게도, 요즈음은 그 역할을 아내와 아이들이 담당해 줍니다.

얼마나 자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제가 그 음성을 거부하고 싶은 감정의 움직임을 보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이 단련되어, 속지 않습니다.

아, 저는 행복할 사람입니다. 천사 세 사람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천사’가 뭡니까? 천사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사람 messenger’입니다.

 

‘날개 없는 천사’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마음의 귀를 열고 만나면,

누구에게서나 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누구에게든 천사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날개 없는 천사들의 천국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 닫혀 있어서, 다른 사람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외면하고, 내 마음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해하려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래서 나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은 뿔 없는 악마의 공동체가 되고,

이 세상은 뿔 없는 악마들의 지옥이 됩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의 경계선은 바로 우리 내면에 있고,

그 경계선을 넘기란 이렇게도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날개 없는 천사들보다는, 뿔 없는 악마들 더 많고, 더 강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접목되어 거룩한 열매를 맺어내는 날개 없는 천사들은

뿔 없는 악마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거부당하고, 박해 당하고,

때로는 죽임까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뿔 없는 악마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리라고 기대한다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중에 필경 배신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독교를 변질시킨 신앙에 빠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변질된 기독교를 ‘기복교’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양분과 수분을 받아들여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맺는 열매가 진실로 거룩한 사랑의 열매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16:1, 4)

 

여기서 말하는 ‘그러한 일’은 죄악에 빠진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던질

미움과 배척과 박해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길에 서서 걸어 가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말해 두니,

마음에 꼭 새겨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언제나 손해와 박해와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겁을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손해를 당해야 할 때가 있고, 박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있고,

고난을 참아야 할 때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아니, 말이 다르지 않는가? 열매를 풍성히 맺고 살아가는 삶에

이런 차원도 있었단 말이야?"하고 놀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라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힘겨움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불편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손해가, 그분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

그분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이, 그분 때문에 당하는 억울함이,

그리고 그분 때문에 당하는 박해가 과연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답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거룩한 열매가 얼마나 맺히고 있는지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답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 못 믿어서 당하는 괴로움과 억울함과 아픔을

여기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교회 일에 지나치게 빠져서 가정 일을 게을리 함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예수 때문에 당하는 박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왜 예수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이지요.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과 갈등이 일어나면,

그것을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 이라고 미화시킵니다.

그게 어떻게 예수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의 성미 때문이지요.

미화시킨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힘겹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적어도 네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를 믿게 되면, 이 세상이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물든 인간 세상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깊어갈수록, 이 세상에 대해 점점 불편해집니다.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그대로 따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그 불편을 참고 살아야 하니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2의 마릴린 몬로 라고 불렸던 애나 니콜 스미스의 죽음 이후,

도대체 그 사람이 뭐라고, 방송사마다 며칠 동안이나

그 이야기를 톱뉴스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도무지 불편해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Virginia Tech 대학의 사고로 총기 문제가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대통령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한 유명한 정치인이 나와서,

학교 내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도록 허용했더라면

누군가 조승희를 중도에 사살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이렇게 큰 희생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 세상은.. 참 불편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TV 앞에 모여 있을 저녁 뉴스 시간에

발기부전 치료제 선전이 방송되는 이 세상.. 정말 불편합니다.

 

아주 작은 손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법원에 고소하여

한 밑천 얻어내는 것을 잘하는 일로 선전하는 이 세상,

그리고 그것을 ‘정의 justice’라고 부르는 이 세상.. 정말 불편합니다.

 

그냥 그러려니, 세상은 다 그렇거니 포기하고 살면 마음 편할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불편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살기가 힘겹습니다.

 

2) 둘째,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자주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삶이 힘겨워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졸업 시험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부정행위를 해서라도 졸업하겠는가, 한 해를 유급하더라도 양심을 지켜야 하겠는가를 두고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할 때,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거래해야 하느냐,

아니면 잠시 양심을 속이고 부정한 이득을 취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차를 살 때, 마음에 두었던 차를 무턱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따져서 가장 합리적인 구매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힘겹습니다.

(어떤 분은, 교우들 라이드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승합을 구매하는 분도 있죠)

 

언제부터 예수 믿는 것에 이런 고민까지 포함시켰느냐고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아셨다면, 잘 못 배우신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가면서 행하는 모든 선택을

신앙적으로 점검하면서 결정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때로 힘겹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일을, 우리는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 없이 믿으면, 기복교인이 됩니다.

 

3) 셋째, 예수 믿는 것이 힘겨운 삶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박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결하고 거룩한 사람을 언제나 찬양하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찬양과 존경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

비판과 배척으로 바뀝니다.

 

누군가 정직하게 세금 보고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존경심을 가지다가,

막상 자기 남편이 그럴려고 하면, 요령 없는 사람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좋은 자리 다 마다하고

몽골에서 봉사하고 있는 이용규 박사의 <내려놓음> 이라는 책이

몇 달째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분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하겠다고 나서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시 "너 미쳤냐?"라고 말하며 막아설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가 돈을 밝히지 않는 것을 다 바랍니다만, 성도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면,

교인들은 등을 돌립니다. "그게 좋으면 당신이나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화를 냅니다.

 

바른 소리 하는 목사를 좋아하지만,

정작 그 바른 소리가 자신에게 미칠 때는 태도가 돌변합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반기는 것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정도까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메마른 가슴에 감동을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북한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이 많아질라 치면 서서히 그들을 솎아낼 음모를 꾸밉니다.

먼저, 그들을 유혹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대충 눈 감고 살자고 구슬립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끼이지 않는 법이다"라는 말로 은근히 위협합니다.

그러면서 부정한 이익을 보장해 줍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은밀한 제거 작전이 시작됩니다.

 

4) 넷째, 예수를 믿는 것이 때로 힘겨운 일이 되는 이유는,

믿는 사람들이 때로 명백한 불의를 만나 그것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또 때로는 그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개인적인 안정과 이익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신의 믿음대로,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명백한 불의가 있을 때,

그 불의의 정체를 밝히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칼과 총으로 불의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최근에 겪은 Virginia Tech의 총기난사 사건의 비극은 (범인이 한국계)

이 네 번째의 책임을 우리가 게을리 해 왔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자각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총기 문제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쳤어야 했습니다.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제도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쳤어야 했습니다.

갈수록 강도가 강해지는 폭력 문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쳤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그 소리가 광야에 홀로 외치는 소리같이 느껴졌다 해도, 그랬어야 했습니다.

 

요단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결혼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쳤을 때,

그 외침이 헤롯의 궁궐을 기초부터 흔들어 놓았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 진실하게 그분을 믿어,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만사형통하여 모든 것을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삶이기보다는,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불편한 이 세상 속에서 바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그리고 불의에 대해 소리를 높이고, 진리의 능력으로 맞서는,

말 그대로 ‘힘겹게 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요15:18-16:4

당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그런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불편해 하고, 작은 선택에 대해서도 고민하면서

바로 살기 위해 힘쓰고,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생기는 배척과 미움과 박해를 감수하며,

불의를 향해 진리의 힘으로 맞서기를 무릅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사정이 이런데도 예수를 계속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제가 나온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신 분들의 고민을 참 귀하게 여깁니다.

 

그분들은, 양심을 깨우는 교육을 하게 될 경우, 이 학교를 나가는 졸업생들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예상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 동일한 질문을 해 보십시다.

예수를 제대로 믿을 경우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게 될 것이 뻔하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거친 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동의하는 바는,

이 세상이 아직도 이렇게 지탱되고 있는 것은 소수의 ‘힘겹게 사는 사람들’ 때문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좀 더 사람 살만한 곳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과연 내가 그 대열에 들어설 것이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리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험한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마7:13-14). 그래서 그리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감추어진 비밀이 있습니다.

직접 그 길을 걷지 않는 한 경험할 수 없는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특별히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힘겨움을 당할 때

혹은 힘겹게 사는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더 가까이, 더 밀접하게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5;2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 곧 예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힘겹게 보이는 삶이 당사자들에게는 더 없이 보람되고

기쁘고 즐거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좁고 험한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 없이 흥청망청,

넓고 편한 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는 말

믿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참되어야만 그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믿는다는 허울은 있는데,

이 세상이 너무 편하고, 마음에서 끌리는 대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눈 질끈 감고 기꺼이 이 세상의 공범자로서 살아간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이 세상이 참 불편하게 느껴지고, 선택할 때마다 고민이 되며,

때때로 내가 선택한 일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오해와 배척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힘겹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 마음에 신령한 기쁨이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인 능력이 없으면, 공연히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의 역설적 신비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넓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기"를 꿈꾸는 것은 기복교인들이 바라는 헛된 꿈입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괴로워하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희망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밤낮 기뻐해야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을 택하고는 어영부영, 우왕좌왕,

너무나 심심해서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시비나 거는,

그런 무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 도대체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길,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길을 택하고 그 길 위에서 바르게 걷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도 줄어들 것입니다.

 

이번 Virginia Tech의 총기난사 사건은, 좁고 험한 이 길에 사람이 너무 적으니,

하나님의 부름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빨리 이 길로 들어서라는

나팔 소리(clarion call)처럼 들립니다.

 

여러분, 이 부름에 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역설적 신비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

저희를 불러 세우신 십자가의 길,

좁고 험한 그 길에 서서 걸어가겠습니다.

 

주님의 성령을 저희 마음에 채우셔서

힘겨워 보이는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가게 하소서.

 

그렇게 하여 저희 자신도 구원받고

다른 이들도 구원으로 인도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