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과 그의 후예 창4:1~5:23 ☞ 창세기 설교모음
◑도입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타락하였습니다. *창3장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런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그 복음 안에 있는 자와 *셋의 계열, 창5장
-그렇지 않은 자가 나뉘게 되었죠. *가인 계열, 창4장
가인 계열은, 죄로 말미암아 그 죄의 상태의 특징을 나타내 보여주는데,
-믿음이 없는 예배자
-사랑이 없는 살인자
-회개가 없는 유랑자
-하나님이 없는 건축자 ☞창4장 가인과 그의 후예
이 땅에 하나님 없는 나라를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하나님 없는 건축자'가 바로, 가인과 가인의 후예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그 죄 가운데 빠졌던 인류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이 드러나는,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아벨과 그 후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아벨과 그 후예들의 특징
▲1. 첫 번째, 그들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인과 가인의 후예는 믿음이 없었어요.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을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셨으니,
믿음이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자 여기도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벨의 제물'이 먼저가 아니라, '아벨'이라는 존재가 먼저입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 하셨죠.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은 이유는,
가인의 재물보다 먼저 앞선, 가인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4:5
아벨에게는, 구원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은혜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벨과 그 후예의 첫번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을,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것으로 강조했는데, *칼빈주의
그렇다고 우리 인간의 믿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도 당연히 필요하죠.
그러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그 은혜'에 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고, 제물을 안 바친 게 아니죠.
이렇게 보면, 그도 외적인 믿음은 가진 것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그가 믿음이 없었던 것은, 성경에 그가 믿음이 있다고 기록하지 않죠.
왜냐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성도의 믿음, 또한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칼빈주의
▲2. 아벨과 아벨 계열의 두 번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고,
그러나 자기의 동생인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고 난 이후에 안색이 변했습니다. :5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죄를 다스려라'고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쳐죽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8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라고 말했다는 거죠.
그래서 인류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죠.
아벨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벨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죠.
그러면 왜 아벨은 죽어야 했던 것입니까?
아벨이 가인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벨이 가인에게 무엇인가에 해를 끼친 것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당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 후손의 특징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믿음이 살아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 가인에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벨과 아벨의 후예 안에는, 믿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자꾸 고난을 당하지요?
왜 우리가 환난을 겪어야 되지요?
왜 누구는 순교의 자리까지 가야 되지요?
고난과 환난은 아벨의 후예에게 있는, 일반적이고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23:35 (가인의 후예에게 하신 말씀인데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무슨 말이냐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아벨로부터 모든 이어지는 아벨의 후예의 피가
계속해서 흘려졌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피는, 가인의 후예에 의해서 흘려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내가 아벨의 후예다. 구원 안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성도님들 모두는, 이 현실을 마음에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벨(참 성도)이 가인을 죽이지 않아요.
아벨이 가인에게 '저 악한 자'라고 하면서, 가인을 공격하거나 고난을 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아벨이
가인에게 고난을 받고 있고,
이것은 그때 아벨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아벨의 후예의 삶의 특징은,
믿음뿐만 아니라 두 번째 뭐가 있다고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벨의 후예인가?'라는 것을 점검하는 것은
축복으로 점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세상 속에서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사실은 점검하는 것입니다. ☞힘겹게 사는 사람들
▲3. 아벨과 아벨 계열의 세 번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갈망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난 설교 ☞창4장 가인과 그의 후예 와 대비, 대칭적으로 논지가 전개됩니다.
아벨에게 있는 것이, 가인에게는 없고,
가인에게 있는 것이, 아벨에게는 없는 거죠.
4:1~2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누군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부모의 마음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어 있죠.
자녀의 이름에는, 부모의 마음이 반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내쫓으시면서
그러나 짐승의 피를 흘린 가죽옷을 입혀주시면서 그에게 복음을 허락하셨고
아담과 하와는 그걸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하와도 아담도, 아마 '여자의 후손'이라는 그 말이 그 마음에 꽂혀서
그들이 자식을 낳았을 때 가인에게 뭔가 소망을 걸었던 것 같아요.
가인이 뱀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인줄 기대했던 거죠. 3:15
그래서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득남하였다'
그래서 가인의 이름은 '획득, 얻음, possession' 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얼마나 기뻐했는지가 보여지죠.
그런데 두 번째 등장하는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요? '아벨'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허무, 덧없음, vanity' 이란 뜻입니다.
가인에게 그렇게 소망을 걸었는데, 가인을 보니까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너무 한탄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휴, 아무 소용없다'
이런 마음이 지금 반영이 되었는지, 그의 아우의 이름을 '아벨, 덧없음' 이렇게 지었어요.
자,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또 아들을 하나 주셨어요. 그리고 셋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요.
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은 compensation(보상)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고 난 이후에, 아벨 대신에 셋의 계열을 만들어가고 계시죠.
근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로 지어요.
그러면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셋의 마음이 반영되었겠죠?
셋은 복음 안에 있는 자예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가는 자예요.
그러면 셋이 무엇을 깨달았기에,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아담'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 이런 뜻이에요.
에노스는 그냥 '사람, 인류'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단어는 '아나시'에서 왔어요.
'아나시'는 사람은 사람인데, '구제불능의 사람,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
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셋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내가 복음반에 있고, 여전히 하나님 안에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지만,
우리 존재 자체는 여전히 구제불능이고,
우리 존재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그의 이름 그의 자식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어요.
그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무슨 말입니까? 4:26
'우리는 구제불능이니까, 우리는 치료 불능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갈망을 가지게 된 것이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지만, 회개가 필요한 존재다..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죠. 지금 아벨의 후손, 셋의 후손의 특징을 살펴보는 중입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보았던 가인의 후예들의 이름을 보면,
야발, 유발, 두발가인 .. 이렇게 '발'자 돌림의 형제들은
다 그 이름 안에 어떤 뜻이 들어갔냐면 '풍성함'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어요.
'풍요함, 풍성함, 강성함' 이런 뜻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가인의 후예들은 살아가면서 계속 깨닫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힘쓰고 애쓰면 풍성해질 수 있다'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가인의 후손들은, 회개도 전혀 없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도 전혀 없어요.
영적인 갈급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가인의 후예들인 것이죠.
그런데 이 아벨의 후예들은 뭘 느끼는 거예요?
'아, 하루하루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오늘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난 복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주님이 없으면, 그분이 가죽옷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그분 앞에 설 수도 없으며, 그분이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나는 오늘도 가인의 후예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달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을 향해 갈급함을 가지고 있는 거죠. 4:26
그들이 바로 아벨과 아벨의 후예인 것입니다.
▲4. 아벨과 아벨의 후손의 특징 네 번쨰는 <사명이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명'입니다.
2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입니다.
3 자녀를 낳고, 거룩한 후손을 남기는 사명입니다.
1) 아벨의 후손의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명>
창5:1~2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의 계보다' .. 그런데 셋의 계보가 나와요. *가인의 계보는 4장에
그런데 그 아담이 지어질 때, 1절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진 존재다'고 했죠.
죄로 말미암아서 그 형상이 많이 깨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복음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
지금도 아담의 타락으로 완전히 깨어져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복음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그 아담은 셋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자기의 형상을
지금 물려주고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드러내는 존재적 사명을
여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고 계신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이유,
우리는 완전하지도 않고, 우리의 몸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여전히 아벨의 후예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사명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그런 존재로
우리를 여전히 삼아주시는 것이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계절과 밤과 낮,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인격적인 그분, 그리고 사랑이신 그분,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어 여전히 그분을 담고 있는
우리 아벨의 후손으로 통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후예'를 통해서는.. 죄와 세상이 보여지고 있다면,
'아벨의 후손'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그 형상을 보여주는 사명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것 말고, 또 하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5:21~23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므두셀라를 주시는 그 당시에,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이
무트, 죽는다.
셀라, 보낸다.
그래서 합치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이죠.
유1:14~1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에녹은 선지자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예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예요.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산,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심판하신다' 라는 심판의 메시지이고,
그러나 또 이 메시지는, 동일하게 복음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돌이키고 방주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 라는 것을 말해주는 자가
바로 에녹이었고, 그 자손 므두셀라, 라멕, 노아에 이르기까지
에녹의 후손들 모두가 다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벨과 아벨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 즉 심판과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3) 아벨과 그 후손에게는 사명 한 가지가 더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영적 후손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명이에요.
여러분 지금 창5장 전체에 반복되어 나오는 메시지는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입니다.
물론 창5장이 '셋의 후손'의 족보라서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이 당연하죠.
그렇지만 좀 허무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이거 잘못 읽으면 진짜 허무해요.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5:1
라고 운을 뗀 후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5:4~5
이어지는 셋, 에노스, 마할랄렐, 야렛 '낳고 살고 죽었더라'가 뒤이어 반복됩니다.
좀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허무한 느낌을 본문이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는
그저 900년을 살든, 1000년을 살든,
그저 '자식 낳고 살고 죽었더라' 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걸 믿음의 눈으로 다시 한번 보십시오.
아담은 130세에 뭐를 낳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기의 모양과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5:3
그리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다' 말해요. :6
그리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다'고 말해요. :9
그러니까 지금 살고 죽는 사이에 뭐가 있냐면 '누구를 낳았다'라는 말이 있어요.
누구를 낳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지금 계속해서 씨를 남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벨의 후손의 또 하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제자를 남기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명을 담고 있는 제자를 남기고,
그 제자들도 또 예수님의 제자를 남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은, 자기를 닮은 아들도 낳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있는, 복음을 담고 있는 아들,
그 이름을, 창5장에서, 하나 하나 지금 얘기하면서
그는 그저 인류를 퍼뜨리는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가진 누군가를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다.. 라는 것이
본문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죠.
아담은 쫓겨났어요. 죄 가운데 죽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사명이 있다..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살고 죽었더라'가 적용되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본문 창5장에는, 지금 900년이 넘는 시간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더 큰 은혜를 받았어요.
길어봐야 90년~100년 삽니다.
여러분, 주님 없이,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 나라 기다리면서
복음안에서 고난가운데, 믿음 지키면서, 회개하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없으면 안 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자' 하면서
900년 버티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90년 버티는 게 진짜 은혜에요.
근데 그 9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무엇이냐면
이들은 900년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 아들들을 남기지만
우리는 90년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 복음을 너무나 많이 허락받은 이 시대 속에서
수많은 영적인 자녀들을 낳을 수 있으며, 영적인 생명들을 흘려보낼 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단 말입니다. 이게 사명이라는 거예요.
사람을 남기는 사명인 것입니다.
가인과 가인의 후예는.. 명예를 남기고, 건축물을 남기고, 이 땅의 문명을 남긴다면,
아벨과 아벨의 후예는,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다,
거룩한 씨를 남기고 있다.. 라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인과 가인의 후예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그들의 특징을 설명했다면,
아벨과 아벨의 후예들에게는.. '있는 것'으로 그들의 틀징을 설명을 해보았죠.
결론적으로 아벨과 아벨의 후예는 그래서 무엇을 깨닫고 아는 자입니까?
-죄가 세상 가운데 있다 라는 것을 절감하며 사는 자예요.
사실 가인과 가인의 후예는.. 그저 세상의 풍성함과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저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아벨과 아벨의 후예는.. 하나님이 저주하신,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이 땅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지를 절감하고,
죄는 세상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옆에도 죄가 있고, 뒤에도 죄가 있고, 우리 삶 전체에 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면서, 죄가 이렇게 세상을 더럽혔고, 어지럽혔다는 것을..
죄가 이렇게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것을..
절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회개가 필요하고, 갈급함이 필요하다는
존재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안에도 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거예요.
회개가 없는 가인의 후예와는 다릅니다.
죄가 세상에도 가득할 뿐만 아니라, 내 속에도 가득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아벨과 아벨의 후예예요. 4:26
그러나 또 한 가지, 은혜가 내 속에 여전히 있다는 것도 깨달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저 절망 속에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서 부릅니다.
내가 완전하진 않지만, 그러나 내 속에 하나님께서 은혜가 주셨다..
라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래서 이 절망적인 세상 속에, 이 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소망의 메시지도 전하고, 그 소망의 생명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벨의 후예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7장에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죠. 아벨의 후예의 고백입니다.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왜요? '세상에 있는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나는.. 아주 곤고한 사람이다..
주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또 롬7:25절은 완전히 반어적으로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요.?
내 속에 그래도 복음 안에 있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
그들이 바로 복음안에 있는 사람들, 즉 아벨의 후손의 특징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 안에 있습니까?
가인의 후손 안에 있습니까, 아벨의 후손안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