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atsy.tistory.com/7172874 김성수 목사 창세기 24강
◈여자의 믿음과 죽음의 신학 창4:25~5:5 ☞ 창세기
※창세기 본문의 하와의 해산을, 바울서신의 여자의 해산과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하와를 타락했으나(창3장), 믿음의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4장).
‘여인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되는군요. 딤전2:15
상당히 깊이 있는 신학적인 해석인데, 맞는 해석입니다. 고수들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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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인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자기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는 이들을
말과 행동으로 살해하며 떵떵거리면서 살아갈 때에
아벨(nothingness)의 모습으로, 에노스(사람, 티끌)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그들에게 맞아 죽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주는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진정한 예배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에노스라는 이름은
사람을 가리키는 ‘이쉬’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뿐만아니라 ‘에노스’라는 단어는 ‘아나쉬’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가 된 단어인데
그 ’아나쉬’라는 단어가 구약 여러 군데에 등장합니다. 몇 군데만 찾아 드리겠습니다.
(렘15: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여기서 ‘중하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아나쉬’입니다.
(미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여기서 ‘고칠 수 없는’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나쉬’입니다.
(렘17: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여기서는 ‘아나쉬’가 ‘재앙의’ 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사17: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로 두르고 아침에 너의 씨로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여기서는 ‘근심’ 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품고 있는 단어가 하나님의 자녀 ‘에노스’입니다. *아나쉬
보통 아비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이런 이름은 잘 안 고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부활한 성도의 표본으로 이 땅을 살았던 셋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습니까?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의 ‘이름‘이라는 것은 항상 예언적 기능을 갖고있다고 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라인 ‘셋’의 후손들, 즉 에노스 들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맞아 죽어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개하느라 근심과 슬픔과 재앙과 질병 속에서
고통을 밥처럼 씹으며 눈물을 물처럼 마시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삶은 단순히 고통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 안에서 행복과 만족과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고통’이라는
이 역설의 아름다움을 아십니까?
오늘은 4장 마지막 부분과 5장에 등장하는 여인의 후손의 라인의 족보를 보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여자들, 다른 말로 교회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무엇을 힘으로 삼아 살게 되는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셋의 후손
창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하고 하나님의 저주가 이 땅에 떨어집니다.
창4장에서는 그 저주받은 땅에 사는 저주받은 인간들이
이 땅을 어떻게 살게 되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저주받은 이 땅의 가인들은 이제 스스로의 자원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거나
자기보다 우월하여 상대적인 초라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시기와 질투와 분노로 죽여 버리는, 오직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더라는 것이 4장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라인인 아벨과 셋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나타납니다.
그게 5장입니다.
그 4장과 5장의 이해의 연결고리가 바로 오늘 본문인 4:25~26절인 것입니다.
(창4:25‐26)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구절이 어떻게 4장과 5장의 이해의 연결고리가 되는지 잘 들어보세요.
성경을 잘 보시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에덴동산 안에서는
주로 선악과 사건에 집중이 되어 있지만
에덴동산 밖에서는 거의 동침 기사에 국한이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출 에덴 이후에 한 일이 뭡니까? 동침하여 애를 낳은 일 밖에 없지요.
그 이외의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성경이 함구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벌어지는 일이 기록이 된 4장의 처음과 끝이
아담과 하와의 동침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창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에덴에서 쫓겨나자마자 아담과 하와가 한 일이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일입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창세기의 기자는 의도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동침 기사를
죄인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4장의 서두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등장(5장)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모두 다 죽어야 하는 인류의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과
아담과 하와의 동침 기사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와의 믿음이
여인의 후손들, 즉 교회를 탄생케 했음을 이 동침 기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여자이지요? 여자는 교회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동침 기사가 ‘여자의 믿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부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 (창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아담이 모든 육 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보시다시피 여기서는 아담이 모든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동침 기사에서는 여자가 이름을 짓습니다.
‘하와가 동침하여 아이들을 낳고 가인이라는 이름과 셋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왜 성경이 출 에덴 이후에 탄생하는 자들의 이름을
여자가 지었다는 것을 일부러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여자가 창3:15절의 하나님의 원시 복음을 이해하고 믿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신부인 ‘여자’로 표기가 되기 때문에
성경이 타락(3장) 이후에, 여자가 어떻게 믿음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여인의 후손’이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름을 하와가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던 최초의 인물로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최초의 인물, 다른 말로 믿음의 조상은
엄밀히 말하면 하와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창세기 기사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속성을 대변하던 것이었고
예언적 성격이 짙었다고 했습니다.
▲가인을 낳은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마치 하와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내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없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I have got a man the Lord''내가 여호와 그 분을 얻었다’
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낳았다‘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여호와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다’라는 의미인 것이죠.
이 말은 하와는 그냥 동침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아담과 동침을 한 것이라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동침 기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기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 속에 낳았던 가인이라는 아들이
그들이 기다리던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하와는 실망했습니다.
그녀의 실망은 아벨이라는 둘째 아들의 이름에서 역력히 나타나지요?
아벨은 ‘공허, 헛됨, nothingness' 이란 뜻이죠.
그런데 하와는 그러한 공허를 이겨내고 또 아담과 동침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침 기사 다음에 바로 그리스도의 조상인 셋의 족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 동침 기사를 여자의 믿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침을 해서 낳은 셋째 아들의 이름을 또 하와가 짓습니다.
다시 25절을 보세요.
(창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한글 개역성경에는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원어는 ‘그 아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내가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입니다. 주1)
그런데 여자가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 짓고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4:25
그게 셋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셋 : 보상, compensation
여기서 ‘씨’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는 ‘제라’입니다.
그 ‘씨’ ‘제라‘라는 단어가 3:15절의 여자의 후손이라는 어구의 ’후손‘과 정확하게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셋을 낳고 ‘제발 이 아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이 맞았으면’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씨를 주셨다’라고 한 것입니다. :25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여자의 믿음이
창5장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족보를 등장케 했다는 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동침기사인 것입니다. *이 때까지 논술한 내용의 주제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와가 다른 씨, 즉 메시아의 도래를 소망하며 셋을 낳은 때가 언제입니까?
두 아들을 잃었을 때입니다.
하나는 형한테 맞아 죽었고
하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부모를 떠나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와가 다른 씨를 기다리며 셋을 낳았을 때는
여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가장 큰 고통을 받던 때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낳은 두 아들이 자기 품에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와는 자신으로 말미암은 죄가 만들어내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 가인이 세운 에녹성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온통 살인과 기고만장한 인간들의 자랑과 복수의 선언들뿐입니다.
하와는 세상이 더욱더 악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부도덕이 일어나는 무서운 악의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그 모든 책임이 하와 자신에게 있다는 지탄을 자주 받았을 것이고
스스로도 많이 자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러한 질책과 자책 속에도,
절대 거기에 반응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와는, 그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하와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것을 하와의 동침 기사로,
그리고 그 여자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그들이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많은 가시와 엉겅퀴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대가로 이 땅과 인간들에게 주신 저주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수많은 가시와 엉겅퀴들은
전부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증상들인 것입니다.
가난, 질병, 전쟁, 다툼, 시기, 질투 등등 그러한 모든 것들은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하와가 바로 그 죽음의 증상들을 몸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죽음의 증상들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정확한 인식을 하고
거기에 대해 전혀 원망이나 한탄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인 다른 씨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4:25~5장)
그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여자’인 성도(교회)의 삶인 것입니다.
하와의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망의 증상들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신 구세주에 대한 약속(여인의 후손)에,
자신의 모든 소망을 두고 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과 고난들은
전부 우리 인간들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더러운 오물 같은 역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내가 겪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우리에게 가하는 어떤 상대방이나 그 사건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하와처럼 바로 나 때문에 이러한 더러운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고백과 함께
열심히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영원히 이러한 죽음의 증상들을 품고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될 뻔 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소망을 우리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죽음의 증상들을 가지고 두들겨 팰 때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도는 하와처럼 그러한 모든 증상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이라는 믿음의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여자, 성도(교회)인 것입니다.
하와가 세상의 질책을 그대로 받아내고, 오직 소망만 붙들고 다른 씨를 기다렸던 것은
바로 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러한 살인과 전쟁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인간들에게 왔다는 올바른 자기 파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올바른 믿음이라고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인 우리 성도들도 바로 그러한 자각 속에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참아주고, 인내해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참 여자, 교회는 ‘바로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이라는 하와의 고백을 하며
구세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가 제일 나쁜 놈이고 내가 제일 나쁜 여자인데 누구를 탓합니까? *죄인 중의 괴수
그게 바로 동침의 기사, 해산의 기사가 담고 있는 믿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계속해서 영생만을 기다리는 삶을 ‘고통스러운 해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딤전2:14‐15)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 말은 ‘여자야, 교회야, 다른 사람 탓하지 말아라.
바로 네 탓으로 세상이 사망의 증상들로 가득 찬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야, 남 탓하지 말고 네가 그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만을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삶을 살면
다른 말로 ‘해산을 하는 삶을 살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하와의 해산과 여기 바울 서신의 여자의 해산이 연결이 되십니까?
성경은 여자의 해산을 ‘믿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로지 다른 씨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믿음의 삶을 살던 하와의 때에, 그 여자의 후손을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그냥 그 때 얼른 보내셔서 일찍 해결을 보았더라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여자의 후손’의 도래를 유보 시키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구원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발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어떤 역사를 증거로 보이시면서
‘자 이래도 안 믿을래?’ 라고 하셨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도 믿는 척하고 그 무리 속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신기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을 주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라는 것을 성도들에게 주셔서
그들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하나님께로 올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여자가 이 세상에 오게 될 모든 여자들, 즉 교회의 대표로
그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을 실체로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다른 씨를 기다리는 믿음의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보여 지는 것이 없는 속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내 인생 속에 내가 원하는 증거나 기적 같은 보여짐이 없을 때,
여러분은 믿음을 발휘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이상하게 비즈니스가 안 풀리세요?
‘하나님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이 것 하나 안도와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래도 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
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할거야’ 이리로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자의 믿음입니다. 그게 하와의 동침이며, 하와의 해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를 본인 스스로에게 증명시켜 주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짜 믿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다시 올 때에 내가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을까‘라고 회의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18:8)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정말 믿는 자가 맞는지, 믿음의 진위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렇게 그 믿음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시련인 것입니다.
가짜 믿음은 시련 앞에서 와르르 무너집니다.
가짜들은 시련 앞에서 소망이고 뭐고 다 내던져 버립니다.
그냥 그 현실을 잊기 위해 술이나 퍼 마시고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믿음을 더욱 다지고 굳게 합니다.
시련이 오면 올수록 그들의 믿음은 더욱 공고히 다져집니다.
하와가 다른 씨를 믿음으로 기다리던 때부터
진짜 ‘여자의 후손’을 잉태한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 천년동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성경에 기록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시련의 역사입니다.
죄로 말미암게 된 죽음의 증상들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시련을 가져오게 되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간음, 전쟁, 음모, 모함, 동성애 등등 많은 시련들이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외치며 살아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다림의 시간, 즉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
다른 말로 믿음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제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와가 메시아의 초림을 믿음으로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똑같은 믿음으로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며
믿음을 굳건하게 다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공고히 다져지고 굳어질수록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 자신을 자꾸 비우게 되고 포기하게 되고
하늘의 몸과 하늘의 삶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도의 옛 사람이 이 땅에서 죽는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시면 하나님의 라인인 셋의 후손들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들의 소개 뒤에 후렴구처럼 붙어 있는 것이 ‘죽었더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을 ‘죽음의 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4장의 가인의 족보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족보입니다. *셋의 후손의 족보.
그런데 왜 그 족보에다가 ‘죽었다’라는 후렴구를 그렇게 많이 붙여 놓았을까요?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죽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의미를 갖는 족보를 히브리어로 ‘톨레도트 Toledot’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족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모두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메시지를 담아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족보에 그들이 ‘죽었다’라고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날 때에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으로 보여 지더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5:1‐5)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 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잘 보시면 위 족보의 처음이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 아담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셋을 낳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벨로 이어져야 하는 족보이지만, 아벨은 중간에 죽었기 때문에
셋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족보에서 가인은 빠집니다.
쉬운 말로 족보에서 파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셋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일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지 않았으면
이 족보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족보는 하나님께서 이어주셔서,
다른 말로 성령에 의해 이어지는 족보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노력이 거기에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족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끝이 이렇게 끝납니다.
(눅3:37‐38)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족장들이 모두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 맨 위의 조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맨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밑으로 우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요.
누가복음의 족보와 오늘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종합하여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여인의 후손’의 라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이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원수를 위해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5장에 계속 ‘죽었더라’가 반복
왜? 우리 성도의 처음 조상이신 하나님이
바로 원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그 하나님의 형상이 심어져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원수를 살리기 위해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이 ‘죽었더라, 죽었더라‘로
그들의 생이 요약되는 반면에, 가인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창4:24)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나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십 칠 배로 받을 것이라 외칩니다. 이 말은 뭐예요?
‘난 절대 죽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극명한 대조이지요?
이렇게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한 부류는 원수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죽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소년을 죽일지언정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어’라고 외치며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해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받은 자들의 역사 속에서의
죽음의 삶을 직접 보여주고 가신 분이 계십니다.
(고후4: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그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골1: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위의 구절들은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 이시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 이 땅을 어떻게 살다 가셨지요?
(빌2:6‐8)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바로 이 삶이 창세기 5장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들의 죽음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을
본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대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우리 주님처럼 원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을 본받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삶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용서의 삶, 인내의 삶, 온유의 삶,
사랑의 삶과 같은 죽어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원수를 위해서도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지요? 그 것은 우리 성도의 죽음의 삶, 비워짐의 삶으로
죄와 죄인들의 정체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죽어짐의 삶으로 인해 세상의 포악함을
하나님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심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셋과 셋의 후손들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죽은 아벨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가인과 한 땅에 삽니다.
자기가 죽인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자기 옆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때려죽인 그 모습 그대로 자기 앞에서 자꾸 죽는 삶, 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인은 사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아벨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죽인 작은 예수로 세상 사람들의 옆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벨이 죽은 것처럼 이 세상의 가인들 앞에서 죽어주는 것입니다.
‘잘 봐, 네가 날 이렇게 죽였지?’하고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 사람들에게 악몽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들에게 ‘사망의 향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죽음의 삶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도록
여러분은 이 땅을 그렇게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 인간들만 없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저 인간들 때문에 자꾸 나의 악함이 드러나서 미치겠다.’는 고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셋의 후손들이 전부 ‘죽었더라’로 그들의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을 때려죽인 가인의 옆집에 사시는 분들입니다. 억울하고 분하시지요?
그들한테 또 맞아 죽어야 하니 억울하고 분하시지요?
그래도 그 삶을 잘 살아내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살다 가셨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죽어짐의 삶, 보이는 것이 없는 삶,
믿음의 삶을 우리의 구원의 방법으로 채택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져야 새 것으로 부활하지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것을 대충 고쳐서 쓰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죄인들을 대충 고쳐서 만드시지 않습니다.
다 불살라 버리고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반드시 이 땅에서 역 창조의 삶, 부서지는 삶, 죽어 가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의 삶을 죽어야 하는 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씨는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죽지만
사실 그 죽음은 아름다운 꽃과 실과로 태어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듯이
성도가 이 땅에서 육신을 죽이는 삶은 아름다운 새 생명으로 가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42절을 보세요.
(고전15:42‐44)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우리는 썩을 몸을 죽여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된 이 육신의 삶을 죽여 영광스러운 삶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새 삶이 시작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법칙입니다. 그 법칙에 예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죽음의 삶, 비움의 삶, 용서의 삶, 사랑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그 삶이 진정한 생명을 얻는 삶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버릴 줄 아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목숨을 얻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을 사는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을 사는 자들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그 삶의 표본이셨지요.
(요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거 보세요. 성경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이 역사 속에서 죽어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죽음의 삶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이제 이 말씀이 확실히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죽는 삶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죽음의 삶을 포함한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밝혀준다 (펀 글)
20여 년 전, 저(성직자)의 딸과도 같은 소영이가 죽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같은 12살의 나이였습니다. (막5:21-43)
소영이는 정말로 예뻤고 죽음이 뭔지도 모른 채 죽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이렇게 죽을 것을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말입니다.
저의 따지는 말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대꾸하실 리 없으시지만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다.”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그의 존재는 시작되었고
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계속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소영이가 일찍 죽었다고..
‘죽을 것을 왜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따졌는데
‘그렇다면 늙어서 죽으면.. 괜찮다?’는 말인가요?
우리에게는 이런 세속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나이 먹어 죽으면 살만큼 살았고
그래서 그런 죽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에 70년 또는 80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80년 살았으면 이 세상 태어난 목적 다 이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영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것입니다.
12년을 살건 80년을 살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존재의 장엄한 시작이고
시간으로는 영원의 세계에
공간으로는 무한의 세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죽음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이것을 잘 보여주십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하자
주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막5:39
그러므로 설사 이 세상에서 죽었을지라도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삶의 형태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우리를 떠나서 하나님 관계 안으로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저는 그날 밤 소영의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소영이를 위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고
소영이가 먼저 간 그 하나님 관계 안으로 따라 가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초월해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의 신비’를 사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의 삶입니다.
어두워지니 조명이 두드러지듯
죽음은 삶을 Highlight, 두드러지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소녀가 살아있을 때 가지 않고
죽은 다음에야 소녀에게 가신 것은.. 어쩌면 이런 연출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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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창4:25 ‘그 아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내가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야레드 (낳다), 3인칭 여성 단수 동사. 새번역 공동번역은 ‘그의 아내가’, 영어성경은 She b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