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1:43~51 ☞▣전도 설교모음
*전도설교 입니다. 전도설교는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요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한복음 1장 후반부는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인 1:35~42절까지는 안드레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고
본문 1:43절부터 이제 빌립과 나다나엘을 차례로 만나시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가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셨는데
그를 만나자마자 '나를 따르라 팔로우 미' 이렇게 콜링을 하셨어요. :43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특별히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니다.
그런데 안드레와 요한의 경우에는, 아주 이른 나이에 세례요한을 따라다니면서
경건 운동을 했고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굉장히 이른 나이부터 경건한 삶에 헌신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 콜링을 받은 것이,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빌립은 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주님이 이렇게 한 번에 빌립을 콜링하셨고,
또 그 콜링에 빌립이 어떻게 단번에 따라나서게 되었을까..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빌립은 이어지는 말씀에도 나오는 것처럼, 그는 벳세다 출신의 어부였어요.
그런데 어부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굉장히 비상하고 계산도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빌립은 어떻게 단번에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그런 인생이 되었을까요?
그의 이름에 좀 추정할 만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헬라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의 이름이잖아요. 주1)
그래서 빌립은 헬라적인 배경을 가진 1.5세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장정만 5천 명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잖아요.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할 데도 없는 빈들에서, 너무나 황당해하고 있을 때
그때 빌립은, 머리가 빠른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요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네, 이 사람들 김밥 하나씩만 나눠주려고 해도, 족히 천만 원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 빌립은, 계산기가 굉장히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었어요. *몽상가가 아니고, 현실주의자
또 한 가지, 성경에 빌립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의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게 됐다.
너희들도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바로 나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으로서는 상당히 명시적인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그런데 빌립이 좀 답답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빌립이 요14:8절에 보면 이런 주장을 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여러분,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맥락,
유대인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의 눈으로 볼 자가 없어요.
보고 살아남을 자도 없고요.
그런데 빌립은 그 하나님 아버지를, 내 눈 앞에 지금 보여달라는 거예요.
'좀 속 시원하게 보여주시면 좋지 않겠나요?' *실증주의자, 증거가 있어야 믿는 사람
여러분, 이런 빌립의 주장을 보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주의자, 실중주의자는, 사실 예수 믿기가 쉽지 않은데,
빌립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는 거예요. 우리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주제
▲제가 17~18년 정도 <성경통독> 사역을 인도했어요.
그런데 성경통독을 하다 보면, 성경을 읽는 대로 그냥 믿어지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성경에 의문이 계속 생기고,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진도가 나가기 어려운 분들이 있어요.
빌립처럼 '내 눈으로 하나님을 반드시 내가 봐야 믿겠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죠.
계산이 상당히 빠르고, 실증을 해봐야 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그 기질과 성품을 누가 주셨는가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빌립과 같은 그런 질문, 또 몸부림에 대해서
다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가 통독사역을 하면서, 사실 강의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이다'
왜냐면 질문을 해야, 질문에 대한 답이 생기는 거잖아요.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얻겠지만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제가 성경통독 사역할 때, 매주 조장들을 통해서
'궁금하신 게 있으면 질문을 하시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역 초창기에는, 그런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조장님들이 나서서 '조 카톡방'에
'목사님이 바쁘시니까 우리 조는 질문하지 않겠다..'
아니, 질문을 하시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조장님들이 아예 질문을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을 보니까,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사람이란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 말씀을 하셨다고,
그런 성격의 사람이, 어떻게 그냥 예수님을 단번에 주저없이 따라갔는가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가요? (저는 그것이 과거에 궁금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빌립처럼 생각이 많은 분들이 있잖아요.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권면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그 많은 생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서, 여러분의 그 생각에 해답을 얻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자기 생각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해주신 분이세요.
▲그러면 빌립이, 자기 혼자 생각이 많고 혼란스러웠던 이유들이, 무엇이었을까요?
빌립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빌립은 해외 1.5세였는데, 어떻게 갈릴리로 이사 오게 되었고,
근데 이 갈릴리에서 외톨이로 지냈던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서도 '시몬과 안드레와 같은 동향 벳세다 출신이다' 라고 했죠. :44
그러면 야고보와 요한하고도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성경에 보면, 빌립이, 이들이 함께 다녔다는 얘기가 없어요.
아마 빌립이 헬라인1.5세라서 그랬을 거예요.
일본 오이타에 신중O 선교사님, 평소에도 알고 지내고,
또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인데, 그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1.5세 일본교포인 분이죠.
자기는 어릴 적에 일본에 살면서, 일본 애들한테 그렇게 학교에서 왕따를 많이 당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국에 와서 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한국에 오니까, 한국말이 좀 서투르고, 또 일본 학용품 갖고 다닌다고
또 애들이 자기를 왕따를 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한국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완전히 일본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중간에 애매한 상황인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셔서
부르심을 받게 되고, 일본에 선교사로 보냄을 받게 된 거예요.
여러분 빌립이라는 사람이, 문화적으로 색깔이 다른 거예요.
이스라엘 본토 출신의 사람들하고 색깔이 너무 다르고,
또 상당히 지적인 사람이고...
그러니까 어촌마을에서 어부로 살고는 있지만,
다른 어부들과 색깔이 다르니까, 외톨이로 지냈던 것 같아요.
△요즘 시대를 보면,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또 자녀들 가운데도,
일찍부터 이민이나 유학 생활을 해서,
그렇게 외국에서 한참을 지내다가 돌아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한국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외국 사람도 아닌...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세 가지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첫번째는 "나는 한국인이다" 이거는 너무나 분명하죠.
혈통상으로 나는 한국인이 맞죠.
-두 번째는 "나는 세계인이다"
지금같은 글로벌 시대에, 시대적으로 우리는 세계인입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살든, 여러분이 상하이에 살았든지, LA에 살았든지
우리는 모두 세계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세 번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게 아주 근본적인 자기 정체성이죠.
여러분, "나는 한국 사람이고, 나는 세계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자기 정체성이 명확하면, 어디에 가 있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담대함과 평안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즘 World Christian 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빌립은, 자기 마음속에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그가 해외에서 살다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갈릴리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에 조상으로부터의 유업이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하지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해외에서 살았던 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그 시대에 주시는 소망,
즉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런 빌립의 외로움과 갈망을 예수님이 정확하게 보셨던 것이고,
그를 콜링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정말 감사했던 것 중에 하나는
그분이 나를 생각의 미로에서 건져 주셨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몰라요.
저는 내향적이고, 우울기질이 많으니까, 늘 생각이 많았는데
늘 제가 생각의 미로에 갇혀 있는 거예요. 생각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들 뭐 하겠어요?
이게 머릿속에서 꼬이기만 하고, 답답하죠.
아무것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실천력도 없고, 생산성도 없는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 생각에 하나님이 질서를 부여해 주시고,
또 생각한 대로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씩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저와 비슷한 유형의 분들이 있으면
주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나서
여러분의 인생에 아름답게 꽃을 피고 열매를 맺기를 축복합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멘!
과거의 저와 같이 여러분 가운데, 자기 생각의 미로에 갇혀있는 분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유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감정의 늪에 빠져있는 분들,
예수님 안에서 자유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의지의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분들,
'내가 인생을 열심히 산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네?'
이런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분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유함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자꾸 인생의 어떤 어려움 가운데 빠져있다 보면,
세상적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아, 이것은 내 인생의 지적인 한계이구나!'
아니면 '이것은 내 감정의 상처 때문이구나'
'내 의지의 결핍 때문이구나!'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면에 보면, 사탄이 당신의 인격을 마비시키려고 공격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인격이 살아나고,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면.. 누가 피곤해져요?
사탄이 피곤해지거든요.
저는 여러분의 인격과,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럴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되고,
예수님을 만나면.. 내 생각에 질서가 생깁니다.
또 우리 마음 가운데 평안이 임하고, 의지의 거룩이 충만해집니다.
'예수님 나의 내면 가운데 찾아와 주셔서
나의 영혼, 나의 인격을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복음이에요.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어떻게 하셨다고요? '해방하셨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죄에 눌려있거나, 세상의 어둠에 눌려있거나,
절망과 우울에 눌려 있지 말고.. 복음 안에서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요1:44~45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예수님을 즉시 따르고 난 후에,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모세가 기록했고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바로 그분 메시야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다' 이렇게 전도했어요.
빌립이 예수님을 그렇게 소개하면서도,
자기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좀 놀라웠을 것 같아요.
왜냐면 빌립은, 자기 성격상 실증을 해야 되는 사람이잖아요.
지금 예수님을 만난 지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내가 이분을 완전히 검증을 한 것도 아니고,
이분에 대해서 팩트 체크를 다 해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는 예수님 바로 이분이시다!'라고
자기의 절친 나다나엘에게 소개를 하고 있단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요?
왜냐면 내가 예수님이라는 분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이에요.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의 최고의 지성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논리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포인트에 이르게 돼 있어요.
즉 믿음의 단계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변화되었어요.
자기 생각이 변하고, 관점이 변하고, 인생의 존재 의미가 변했어요.
수가성 여인도 변했고,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변화되었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네모도 변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변하지 않을 인생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빌립같은 실증주의자들을 만나면,
저는 사실 논리적으로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어요.
다만 그 분이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는
접촉점을 제시해드리는 거예요.
결국에는 그 사람이 주님을 1대1로 만나야 돼요.
그 '인격적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그가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오래도록 기다리셨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야 돼요.
내 영혼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나를 얼마나 해방시켜주기를 원하시는지..
그 예수님, 그 좋으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만나기 위해서, 그 당사자 자신도 간절히 기도해야 되고,
또 주위에서, 그 사람을 전도하기 원하는 사람들도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때 주님이, 강권적으로,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죠... 설명, 설득만으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동안 하지만
왜 나는 나만의 골방에서, 나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의 우울과 근심과 걱정을 나홀로 다 등에 지고, 어깨에 지고,
그렇게 살아가는가요?
예수님을 알기는 아는데..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거에요.
인생의 고민, 신앙의 고민은 나 혼자 하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님께 기도로 다가가서
예수님을 대면하여 일대일로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인생과 신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님의 12사도들 중에서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소개할 때, '바돌로매'가 등장하는데
'빌립과 바돌로매'가 짝으로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빌립이 전도했던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로 추정을 합니다.
나다나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단은 선물, 엘은 하나님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부터 경건한 집안에, 경건한 부모님 아래서 태어난
이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아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읽은 것처럼
빌립이 너무나 감동을 해서 예수님을 소개를 했는데
나다나엘의 반응이 상당히 삐딱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46
현대 이스라엘에서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지역에서 가장 핵심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의 나사렛은, 촌동네가 맞아요.
그 당시에는 그다지 왕래가 많지 않고, 고립되어 있는 시골 동네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그렇게 무시하는 말을 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하지만 성경적인 맥락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요21:2절에 보면, 나다나엘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를 하냐면
'갈릴리 가나 출신이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가나의 혼인잔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도 똑같은 갈릴리 촌동네 출신이에요.
상황이 다르지 않단 말이에요. 그럼 나다나엘이 왜 이런 발언을 했는가요?
상당히 자조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거의 빌립과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자기 홀로 갈릴리의 촌동네에서
하나님 앞에 경건의 노력과 경건의 고민을 했지만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에 아무 해답이 없는 거예요.
이 시대에 아무 해답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름 혼자 고민하고, 노력하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쳤지만
영적인 냉담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신앙 위인들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조지 휫필드입니다.
이분은 18세기 말에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대부흥을 일으켰던 사역자였어요.
그런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가 20대 초반 때 영국 국교도(성공회 신자)였을 때,
사순절이 되면, 딱딱한 빵 한 조각과 쓴 차를 마시고
그리고 추운 들판에 나가서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경건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예수 크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그 죄사함의 영적인 기쁨과 해방을, 당시에는 전혀 누리지 못했어요.
그저 종교적인 열심일 뿐이었죠.
그런데 그가 개인적으로 병이 들어서, 자기 고향에 와서 쉬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때 집에 있는 <에베소서 강해서>를 읽고 나서,
그 에베소서 1장 2장 3장에 복음에 대한 설명이 쫙 나오는데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있던 나를 건져내 주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 은혜이구나'
이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뭐라고 고백하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을 지옥의 밑바닥에서부터 건져내셔서
저 천상의 하나님 보좌까지 끌어올려주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할렐루야!
여러분, 종교적인 노력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자유함을 얻을 수 없어요.
우리가 복음의 엔진을 달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의 은혜의 창공을 비상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빌립과 같은 합리적인 실증주의 자도.. 예수님을 만나야만 변화되는 거예요.
나다나엘, 조지 휫필드와 같이 종교적인 열성가도..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나야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의 대답이 정답이었던 것이죠. '와서 보라, Come and see' :46
'일단 와 봐라! 그리고 와서 그분을 만나면,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빌립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실증주의자였던 자기도 예수님 단 하루 만나고서 변화됐거든요.
'그러니까 나다나엘, 너도 지금까지 종교적인 고민을 엄청나게 많이 했는데
너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이 메시아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여러분의 주변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와 보라!" 이 한마디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새벽 예배가 되었든, 수요여성예배가 되었든, 주일 예배가 되었든
"와 보라, 한번 가보자!"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이 사람도 만나면, 이 사람도 보아서 알게 될 거라는 것을
내 마음 가운데 확신하기 때문이에요.
◑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그러면 예수를 한번 만나볼까?'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러 오는데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셨어요. 그리고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그의 영혼을 보셨어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우리의 껍데기를 보는 거잖아요.
옷을 뭘 입고 있는지,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떻게 되는지,
그 사람의 집안 배경이 어떤지... 이런 것들을 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만나실 때, 영혼의 꾸밈이 없이
진실한 그 중심을 보아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나다나엘이 얼마나 속으로 기뻤 겠어요. '나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있구나..'
속으로 굉장히 기쁘면서도, 굉장히 죄송하고 부끄러웠을 것 같아요.
왜냐면 예수님은 내 안에 있는 좋은 부분을 봐주셨는데,
사실 나는 빌립하고 대화 할 때, 예수님은 겉으로 판단했잖아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올 수 있겠어?'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많이 받는 시대가 됐잖아요.
그런 시대에 살다 보니까, 내 영혼 안에 갈급함이 있어요.
인생에 대해서, 이 세상 삶에 대해서 갖고 있는 궁금증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 가운데 나다나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내가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분들이 있다면, 나다나엘의 심리를 갖고 있는 것이죠.
▲제가 어제 강화도의 중고등부 캠프에 가서, 딱 한 시간밖에 안 되긴 했지만
아이들이 질문하고 싶은 거 질문하고, 제가 답변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요즘 대학생들, 청년들, 청소년들을 보면서
두 가지 심리상태인 거예요.
한 가지는, 여러분 이 시대가 물질주의 시대가 되고 워낙 쾌락주의 시대가 되다보니까,
아주 어린 아이들 때부터 세상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끼기 시작해요.
여러분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게, 사실 우리 세대는 훨씬 좀 인생을 살다가 느꼈는데,
요즘 아이들은 굉장히 빨리 느낍니다. 인생이 허무한 거에요.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청소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울증에 빠지고, 불안증에 빠지고, 공황장애에 빠지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겪으면서
'하나님, 내 인생의 해답을 알고 싶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하게 돌아가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학생들 마음 한 켠에 있다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교회에서 무슨 선한 걸 기대할 수 있겠어?'
그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예요.
'과학주의 시대인데 창세기1장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창조를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내 영혼의 가장 근원적인 치유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은 계속 밀어내면서, 근데 한편으로는
'하나님 답을 알고 싶어요. 하나님 제 인생에 해답을 얻고 싶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젊은이들을 볼 때, 너무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너는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나다나엘이 부정하지 않았어요.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렇게 긍정을 했단 말이죠.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 중에 하나입니다.
당시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랍비들이 제자들을 앉혀놓고 성경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랬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라는 표현은
'그가 홀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그런 시간을 가졌다'는 뜻이죠.
'내가 너의 인생을 알고 있다. 이 허무한 세상, 죄 많은 세상,
해답이 없는 이 시대를 보며 안타까워하며..
하나님 앞에 못무림치던 그 시간을 내가 알고 있다' ..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런 시간을 가지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해답을 얻지 못하고, 냉담에 빠지게 됐잖아요.
그리고는 자조적이고 삐딱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나다나엘을 만나셔서
'너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다고요.
대신에 그의 좋은 점을 얘기해 주셨다는 거에요.
'네가 그렇게 세상 바라보면 안 된다.
너는 인생을 그렇게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의 선한 마음, 좋은 마음, 하나님께 대한 열심,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민했던 시간들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
이 얘기를 해주신 게 얼마나 감사해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그리고 그를 격려해주신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는 '내가 너를 만났으니, 너의 인생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모두가 신앙의 고민이 있고, 인생의 고민이 있지만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이 만남의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질 줄로 믿습니다.
◑1:49~51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주시자,
자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정말 Come and see 해서, 자기가 와서 그냥 그분을 만났는데
예수님을 알게 된 거예요. 보게 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것 가지고는 놀랄 것이 없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상한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세상에, 인생에 더 큰 일이 어디 있나요?
그게 가장 큰 일이잖아요. 가장 큰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면서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이
천상과 지상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이, 가장 놀라운 사건일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이 전해져서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하늘문이 열리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는 역사!
여러분 그러한 역사(더 큰 일)가, 앞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할 때
'사랑하는 주님, 내 인생이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60대가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 한가운데, 물질주의로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때로는 회의를 느끼고,
어려움을 느끼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처럼 알고 계십니다.
인생의 고민과 신앙의 고민에 빠져있는데
하나님 앞에 한 걸음으로 달려나와서
하나님 앞에 내 인생과 신앙의 고민을 쏟아놓지 못하고
홀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주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를 인격적으로 뜨겁게 만나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 성경에 기록된 글자로서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사람들, 갈망하는 사람들,
나를 찾고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시는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한 걸음 다려나와 주님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신앙이 될 수 있도록
이 여름에 주님 우리의 친밀하게 만나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여!'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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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빌립이라는 이름은 헬라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의 이름이잖아요.
또한 '말을 사랑하는'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알렉산더의 부친은 필리포스 2세인데,
이 '필립'이라는 이름이 '말을 사랑하는' 이라고 했잖아요.
실제 필립2세가 '헤타이로이' 라는 엘리트 기병대를 만든 사람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 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워낙 기마민족이고 기병대를 많이 사용했지만
유럽에서는 기병을 연락병 정도 수준으로 사용을 하던 때입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최초로 '돌격기병대'로 만든
그래서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든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필립 2세의 이런 중추적인 전쟁 수행을 하는 기병대를 통해서
알렉산더가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