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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와 물위를 걷는 자들

LNCK 2023. 8. 31. 15:48

26 노아의 방주와 물위를 걷는 자들   *김성수 목사 창세기26강 핵심만 축약

 

◈노아의 방주와 물위를 걷는 자들   창6:1~10, 막6:45‐52, 눅12:50, 계21:1     ☞창세기

※‘노아의 방주’ 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연결이 하이라이트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결국 계21장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탁월합니다. 현실에사도 이 일이 일어나야하는 거죠.

 

◑도입 : ‘홍수 설화’ 딜레마의 해결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창세기6장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넘어왔습니다. 
이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도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노아의 홍수 기사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대 사회에는 신화나 설화 그리고 서사시 등에 
노아의 홍수와 아주 흡사한 홍수 이야기가 300여 편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 할 수 있는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와 
수메르 인들의 작품인 아트라하시스 서사시(The Epic of Atrahasis)입니다. 

이러한 고대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들을 잘 읽어보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사건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들을 보면 
1) 신이 인류를 홍수로 멸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 신이 ‘우트나 피쉬팀’ 같은 그 홍수 기사의 주인공들에게 미리 그 홍수 사실을 알려 줍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도 노아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 주시지요? 
3) 신이 주인공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홍수 기사에서도 
4) 주인공은 구원받지만 다른 모든 생물은 홍수로 인해 멸절 당합니다. 
5) 그리고 홍수가 끝난 뒤 새를 내보내서 방주 밖의 상황을 알아봅니다. 
6) 주인공이 홍수가 끝난 후 방주 밖으로 나와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7) 그 제사를 신이 받습니다. 
8) 그 제사를 받은 신이 주인공을 축복해 줍니다.

어떠세요? 창세기 6장에서 8장까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지 않으세요?

중요한 것은 이 고대 바벨론의 홍수 기사들이나 서사시들이 
성경보다 먼저 쓰여 졌다는 사실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여러분은 금방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럼 성경이 그 고대의 설화들이나 서사시들을 베낀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 안 드십니까? 

성경보다 먼저 기록이 된 고대 설화에 노아의 홍수 기사와 
거의 흡사한 내용이 있다면, 성경이 그 설화를 베낀 것 아닌가요?

제가 대학 때 종교 다원주의나 동양 철학, 불경 등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책들을 수십 권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불경에는 석가모니가 물위를 걷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가 그것을 따라 하다가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복음서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런데 석가모니는 예수님보다 600년 앞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석가모니를 흉내 낸 것입니까?

그러니 가뜩이나 의심이 많은 제가, 대학 때 얼마나 많은 회의에 빠졌겠습니까?
그 때 잠시나마 저는, 지금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경이 그냥 많은 고대의 설화를 짜깁기 해 놓은 좋은 교훈 책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이야기를 다 믿지 말고, 그 속에서 성경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만 잘 받아서 
도덕적 윤리적 올바른 삶을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포함한 모세 오경이 기록된 시기는 대략 BC 1,500년경입니다. 
모세가 그 때 사람이니까요. 

반면에 고대 바벨론의 홍수 설화들이 기록된 시기는 그보다 100년에서 많게는 
300년 전인 BC1600‐1800년경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이 고대 바벨론 신화보다 더 나중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진짜 홍수가 일어난 시기는 그보다 수천 년 전입니다.
(*인류 역사를 6천년을 보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때, BC 3천년 경 노아홍수 발생.
그러니 적어도 1천년 이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게 된 이후 저는 오히려 
그러한 고대 바벨론의 홍수 기사들을 읽으면서 
노아의 홍수는 진짜 일어났던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노아의 홍수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이미 성경과 거의 흡사한 홍수 이야기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고 
기록으로 남아있었다면, 그 홍수 사건은 틀림없이 역사 속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홍수 사건이 
노아의 후손인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것이 설화로 서사시로 기록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BC 1,500년경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 하에 확실하게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세요. 흔들리지 마십시오.

◑본론 / 노아의 홍수 사건에 등장하는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이 홍수사건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구절을 일일이 찾아보면서 
어떻게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동일한 주제로 
선지서와 시가서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아의 홍수 기사로 신구약을 하나로 뚫어 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면 성경의 전체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하나의 드라마로 각색을 해서 생각해 보자고요.

여러분의 머릿속에 텅 비어있는 무대를 떠 올려 보세요. 
이제 그 무대에 등장인물을 집어 넣으세요. 거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 
그리고 역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짐승들입니다. 

이제 무대 세트를 세워야지요?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의 무대배경은 어떻습니까? 
홍수로 창일한 바다와, 커다란 나무 방주입니다. 

아주 간단한 무대장치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에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그 등장인물들과 무대장치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살펴봄으로써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주제를 찾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무대 장치인 <홍수>가 무엇을 상징하는 지부터 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물, 홍수, 바다 하면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죄, 죽음, 저주, 심판 등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사57: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시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미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물, 바다, 홍수는 죄악 된 세상과, 그 죄악 된 세상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혹은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물, 홍수에 빠지면 
모두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아래,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온 땅에 창일한 홍수는 
바로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물위로 방주가 떠 있고, 
그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그 방주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제 두 번째 무대 장치인 <방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사실 배가 아닙니다. 
영화에 보면 노아의 방주가 커다란 배 모양으로 나오지만 
사실 노아의 방주는 길이 135m X 폭 22 m X 높이 13m 직육면체 상자입니다. 

구약에는 그 ‘테바 - 방주’라는 단어가. 또 다른 곳에 한군데 더 나옵니다.
바로 아기 모세를 담았던 갈대 상자(테바)입니다.  출2:2~3
 
그 모세가 탔던 갈대 상자가 바로 ‘테바, 방주’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역청을 칠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역시 모세의 방주도 역청을 칠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노아처럼 ‘테바’ ‘방주’를 타고 죽음의 물에서 건져진 자입니다. 

모세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처럼 히브리 사내아이들과 다 함께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애굽에서 모두 죽어야 하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의 운명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죄인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세라는 아이가 방주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가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 중에서 
어떤 선택된 소수의 무리를 ‘방주’(테바)가 품어 안고 그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제 선택받은 자들을 품에 안아서 그들의 생명을 건져낸 방주가,
색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홍해 사건입니다.

홍해 바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한 모든 죄인들이 빠져 죽어야 하는 저주와 심판의 바다입니다. 
그래서 그 홍해 바다에 세상의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두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그 바다를 마른땅처럼 걸어서 건넌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가리켜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노아의 홍수 사건과 
-모세의 구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품어 저주의 물로부터 구원해 낸 것이 ‘테바-방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홍해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품에 안고 그들을 구원해 낸 것이 방주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모세의 품에 안겨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와 모세는 어떤 한 가지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성경은 그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18:15)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렇게 홍해 바다에서 이스라엘을 품에 안고 그들을 구출해낸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연결 (구약과 신약의 연결*하이라이트

성경은 친절하게 모세가 홍해 바다에서 행한 그 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날 것인지를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통해 한 번 더 그림으로 설명해 줍니다.

복음서를 보면 죄인들이 모두 빠져 죽어야 하는 저주의 물에 빠지지 않고, 
마치 방주처럼 그 물위를 걸어 풍랑에 빠져 죽어야 할 제자들을 
건져내시는 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6:45‐52)    

잘 보세요. 어떻게 노아의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모세가 어떻게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지를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메시지로 담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좇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을까요?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다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상징이죠)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이게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입니다.
(예수님을 ‘방주’라고 했습니다. 홍수와 풍랑에서 구해주시는 방주, 구원자)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바다에 빠져 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를 
친절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부연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합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그것이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물에서 (방주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와 홍수, 
즉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요6:18‐21)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19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니,
21 그들은 기뻐서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얼른 그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풍랑이 잔잔해지고, 자신들이 탄 배가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절에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바로 출애굽기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주님은 지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물을 밟으시고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그림으로 그려드리면 이러합니다. 
홍수로 다 죽어 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영접했더니’ 
그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 사건에 무대 장치로 등장하는 ‘방주-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사건과 예수님의 세례

(눅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세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밥티조’입니다. 
‘밥티조’는 ‘물에 푹 잠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 때 물에 푹 넣었다가 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세례(밥티조)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물, 홍수 속으로 푹 빠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홍수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저주의 물을 맞고 죽는 방주의 모습입니다. 

방주는 저주의 물에 맞아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물 위를 걸어, 가려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요나서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 하시지요?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요나가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을 판입니다. 
그 때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 속으로 던지자 바다가 이내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를 상징하는 요나가 물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속에 빠짐으로 선원들이 살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속에 빠져 다른 이들을 구해낸 요나가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밤을 죽어 있다가 살아나지요? 
뭡니까?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홍수 속에 빠져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저주의 홍수 속에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는 물 위에 둥둥 떠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홍수와 풍랑을 피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반복하고 반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여야 합니다. 

설교는 세상에서 심리학이나 경영학 같은 것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홍수와 풍랑을 피해 
우리가 가려던 땅에 도착하는 방법인 복음만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이 자리에 계신 예수를 믿으시는 많은 분들이 조금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풍랑이 잔잔해진다고 하고, 홍수도 피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삶에 일어나는 이 풍랑은 무엇인가?’ 네, 좋은 질문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서 그 풍랑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거기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풍랑 속에서 
잔잔하게 물위를 걸으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는 여전히 풍랑이 일고 있지만 
나는 믿음으로 잔잔한 바다 위를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은 몰아치는 홍수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기에,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까짓 거’ 하면서,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풍랑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이 모든 풍랑들이 가시적으로도 다 사라지고 
우리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만 있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세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제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가 없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 여러분의 실존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의 풍랑을 잘 이겨내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생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만을 채우려 혈안이 된 자들은 
베드로처럼 풍랑 속으로,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들이 빠지게 될 바다는 여느 바다가 아닙니다. 
그곳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과 유황으로 타는 저주의 바다, 심판의 바다입니다.

(계21:8)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서 기독교 TV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에 출연을 하고 왔습니다.
사회를 보시던 오미희씨와 임동진 목사님께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목사님의 비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비전이 없습니다. 목사가 자기 비전을 갖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게 욕심이 되어 올바른 목회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우리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계획과 비전을 
이 순간 바다에 다 쏟아 넣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인 ‘하나님의 자녀로의 성숙’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이게 노아의 홍수가 담고 있는 주제입니다.

▲마치는 말
노아는 비도 오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그 때에 방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만일 눈에 보이는 세상 부귀영화와 체면과 자랑을 챙기는 자였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롱을 참으며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 방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할 것입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지금 살아있다면 너를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느냐?’ 
‘왜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지 않니?’ 
‘왜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네 병을 고쳐 주지 않아?’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난 눈에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감사해, 
노아가 120년 동안 맑고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홍수를 대비했듯이 
나도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세상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벧후3:10‐13)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제는 물이 아니라 불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불바다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처럼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인생동안 다른 짓 안하고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 저주의 불바다 위로 끌어올려 방주처럼 물위를 걷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 구원의 방주는 물위에 뜨게 되지요?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홍수 속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그 불바다 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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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시간에, 구원의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풍랑 속을 지날 때, 예수님(방주)에 올라타야 되는데..
종종 그 때는, 고난과 고뇌와 환난의 시간에.. 그런 은혜가 임합니다.
 
복음이.. 정말 나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아닌 누구에게는 구원이 발생하는 복음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소리일 뿐이지요.

저에게도 20대 중반까지는 복음이 전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지상주의적이었던 제 20대 초반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책이 저를 사로잡았고,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D. H 로렌스 같은 소설가들이
그때그때 새로운 물줄기를 싱싱하게 저에게 대 주었습니다.

사상, 종교 면에서도
저는 (성경보다) 세속의 철학자들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노자 류의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복음이 정녕 ‘구원의 복음’이 되게 된 것은
고뇌의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절망의 3년을 거치면서입니다.

제가 추구하던 것들이 제 욕심만큼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을 꿈꾸던 제가 군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에게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군 생활 3년을 절망 상태에서 보내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하고도 한 동안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복음은 저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하늘의 별이 빛을 내듯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에 대한 희망도 모두 사라졌을 때..
그 어두운 심연에서 하나님의 빛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때요
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워 기진맥진해 있을 새벽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새벽녘,
예수님은 꼭 이때 나타나십니다.

왜 더 일찍 나타나시지 않고, 이렇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을 때,
이때가 갈망의 때요, 영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개입을 체험하고도 3년여가 흘렀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 복음은 이때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많이 듣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복음이 구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나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혹시 겪고 있을지도 모를
그 절망의, 캄캄한 암흑의 시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명의 주님을 만날 시간, 야곱의 얍복강의 체험이 곧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불행과 그 해결 
고대인들 불행은 (잘못된) 운명론, 숙명론으로부터 왔다. 

죽음, 지진, 재난, 질병 등 모든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생각을 못했다. 운명으로 여겼으므로... 

중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죄와 벌의 문제로 생각했다. 
흑사병이 돌고, 흉년, 홍수가 닥쳐도... 죄 때문에 형벌 받는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그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인의 불행은 ‘생의 무의미’에서부터 비롯된다. 
배가 고파서 불행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서 감사도 없고, 감격도 없다.  

끊임없는 욕심과 교만으로 인해, 
감사한 처지에서 전혀 감사드리지 못하고 산다.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데, 감사치 않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이다. 

삭개오의 행복 
세리 중에서도 세리장 정도의 지위이면, 로마군인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세속적으로 보면 실세요, 권력자요, 부자요,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 고민이 있었다. 종교적이고, 윤리적 고민이 있었다. 
그는 '죄인'이라는 자신의 불명예를 벗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를 만나기 원했다. 

그는 부자로서, 더 부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세자로서, 더 권세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행복을 얻었고,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삶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물질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출세해서도 아니요, 소원성취 때문도 아니었다. 
주님을 자기에게 모시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서, 
삶의 의미를 되찾은 사람이 되었다. 

인생무상을 깨달으면... 불교인이 되고, 
사람의 도리를 깨달으면... 유교인이 된다. 
삭개오처럼 은혜를 깨달아야...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고, 비로소 기독교인이 된다. 

무의미의 홍수에 휩쓸려가는 대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에 올라타고서, 
비로소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